대법 “엄마와 한몸… 태아 건강 손상은 업무상 재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제주의료원 사건’ 간호사 4명, 보호장구 없이 약품파쇄 업무
심장질환 아기 출산하자 산재소송
1심 승소, 2심선 “모자별개” 패소
대법 “임신-출산과정 보호받아야”

임신한 여성이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일하다 태아 건강에 손상이 생겼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모체(母體)와 태아는 ‘한 몸’이기 때문에 태아에게 생긴 건강 손상도 임신한 여성(근로자)에게 발생한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29일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A 씨 등 4명의 간호사가 “요양급여 신청 반려 처분을 취소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제주의료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4명은 모두 2009년에 임신했고 이듬해 출산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을 갖고 태어났다. 이 중 3명의 간호사는 임신 중 유산증후가 있었다. 소송을 낸 4명을 포함해 제주의료원 간호사 중 15명이 2009년에 임신했는데 이 중 6명만 정상아를 출산했다. 5명은 유산했다.

2011년 서울대 산학협력단 역학조사 결과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음식물을 삼키기 힘든 중증의 고령 환자를 위해 하루에 400∼600정의 알약을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알약엔 임신부와 태아에게 치명적인 약품 54종이 포함돼 있었다.

간호사들은 작업 중 마스크, 장갑 등 보호장구를 지급받지 못했다. A 씨 등은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임신 초기 유해 요소에 노출돼 태아의 심장에 손상이 생겼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청구했는데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1심은 간호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1심 법원은 “선천성 심장질환은 임신 초기 태아의 건강손상이 원인이고 태아의 건강 손상과 (간호사들의)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를 넉넉하게 인정할 수 있다”며 “모체와 태아는 단일체이므로 태아의 건강 손상은 임신한 근로자에게 생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했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법원은 “출산아의 선천성 질병은 출산아의 질병일 뿐 간호사들의 질병이 아니다”라며 “출산아와는 별도의 인격체인 간호사들을 출산아의 선천성 질병과 관련된 산재보험급여의 수급권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는 ‘근로자 본인’의 부상이나 질병 장해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산아는 이 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1심과 같이 판단했다. 대법원은 “임신한 여성 근로자의 업무가 원인이 돼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은 여성 근로자의 노동능력에 미치는 영향 정도와 관계없이 업무상 재해에 포함된다”며 “모체와 태아는 본성상 단일체로 여겨지고 여성 근로자는 모체에서 분리된 출산아의 선천성 질병 등에 관해 요양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또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여성의 근로는 특별히 보호받도록 한 헌법과 산재보험제도의 취지를 종합하면 여성 근로자와 태아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 유해 요소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주의료원 사건#태아 건강손상#업무상 재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