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사회에선 6~7년 전부터 유튜브 바람이 불었다. 수백 개의 탈북민 유튜브 채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이후 많은 이가 중도 포기했고 살아남더라도 조회수 하락에 고전 중이다.
허나 화마가 막 지나간 폐허에도 꽃 한 송이쯤 피어나는 법이다. 탈북민 유튜브 중에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 홀로 우뚝 선 유튜버가 있으니 그 채널 이름은 ‘유미카’다.
유미카는 12월 초 현재 구독자 72만7000명을 보유하며 누적 조회수는 6억4700만 회에 이른다. 잘 되는 집엔 뭔가 이유가 있는 법이다.
유미카를 운영하는 이유미 씨에겐 사람들의 말을 편안하게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함께 공감해 주고, 울어 주고, 웃어 주며 시청자들도 함께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영상에서 환하게 웃는 그가 누구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그가 하반신 마비를 이겨 내고 열 번의 북송과 열한 번의 탈북을 체험한, 누구보다 독한 여성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 말을 잘 들어 주는 그는 보위부 고문에 아버지를 잃고 한국에 와서도 홍일점 중고차 딜러로 살아오며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난 아기가 40대에 생각지도 못한 유튜브 스타가 되기까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 운명은 그를 모질게도 괴롭혔다. 유미카는 주저앉지 않고 고난을 넘고 또 넘은 그에게 주는 운명의 보상은 아닐까.
중고차 딜러 이유미 씨. 중고차를 팔기 위해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탈북 스토리를 전하는 가장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로 거듭났다. 2017년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기 전의 이유미 씨가 중고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양강도 혁명사적관 강사
이 씨는 1977년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제대군인으로 양강도 혜산농림대학 임업과 학생이었고 모친은 소아병원 약사였다. 이 씨 집안은 토호(土豪)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혜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교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7남 2녀 중 둘째인 부친은 대학 졸업 후 고위 간부가 됐다. 부친의 다른 형제들도 다 ‘장(長)’ 자 직함을 가진 간부가 됐다. 혜산에 모여 사는 모친의 혈육들도 혜산에서 알아주는 간부들이었다.
이 씨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순탄했다. 반짝이던 순간도 있었다. 7세에 전국어린이노래축전에 나가 1등을 했다. 부모는 딸이 성악에 소질이 있는 줄 알고 기대했지만, 이 씨가 진학한 중학교에 성악을 가르칠 선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성악 대신 바이올린으로 갈아타 5년을 연주했지만 독주회 한 번 못 해 보고 그만두었다. 음악 영재인 줄 알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부는 늘 반에서 꼴찌를 다투었다.
이 씨 집은 압록강 바로 앞에 있었다. 여름과 겨울이면 압록강에서 중국 아이들과 많이 놀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탈북하는 사람이 없어, 순찰대가 오전 오후에 한 번씩만 돌아볼 정도로 국경 경비는 허술했다.
이 씨는 18세인 1994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그의 부친은 양강도 혁명전적지관리총국 처장으로 있었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은 김 씨 일가 우상화 작업을 위한 핵심 시설물인 동상을 비롯해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한다. 이른바 성지 보존과 관리를 책임진 노동당의 매우 중요한 부서다.
북한의 대표적인 혁명 사적은 양강도에 압도적으로 많이 몰려 있다. 혁명의 성지라는 백두산, 조작해 만든 김정일의 ‘고향집’, 보천보 같은 빨치산 전적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 씨 부친은 양강도의 각종 사적관, 답사숙영소를 비롯해 많은 산하 조직을 책임졌다.
북한은 김 씨 일가 우상화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엔 식량도 넉넉히 주고 각종 물자도 수시로 공급했다. 이 씨 집도 먹는 걱정은 없었다.
북한에서 우상화 시설 강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중에서 인물과 체격, 목소리, 출신성분을 보고 골라 뽑는다. 그런데 양강도에선 여성 강사가 늘 모자랐다.
백두산 답사 행군이 필수 교육 코스인지라 평양을 포함해 북한 전역에서 양강도로 몰려왔다. 군복 비슷한 멋진 옷을 빼입은 미모의 젊은 여성 강사에게 반하는 평양 총각이 많았다. 강사들도 평양으로 시집가는 것이 목표였다.
강사들이 수시로 결혼해 빠져나가니 강사 충원은 늘 골칫거리였는데,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된 1994년경엔 특히 심각했다. 양강도는 그해에 급히 1년제 혁명사적지 강사 양성학교를 만들었다. 이 씨는 키가 기준 미달이었지만 부친 덕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혜산의 도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부친이 갑자기 체포돼 끌려가지만 않았다면 평양 남자와 눈이 맞아 평양 시민이 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양강도로 답사 행군을 온 남성들이 구호나무 앞에서 여성 강사 설명을 듣고 있다. 동아일보 DB
● 구호나무 28대 불타버려
1997년 가을 백두산 혁명전적지에서 초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건조실에서 작업하던 구호나무 28대가 불타버린 것이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밤에 건조실에 침입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낸 뒤 달아났다. 당시엔 중국에서 만들어진 탈북자 반체제 조직들이 북한에 침투해 동상 폭파, 혁명사적지 방화 등을 시도하던 때였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구호나무는 김일성 휘하의 항일빨치산이 김 씨 일가를 칭송하는 글을 적었다는 나무를 의미한다. 상식적으로 봐도 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빨치산이 붓과 먹을 준비해 굳이 압록강을 건너와 나무껍질을 벗기고 글을 적고 갈 리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구호나무가 북한 곳곳에 수천 그루다. 매년 새로 발견된다는 구호나무는 사실 이 씨 부친 산하 비밀 조직이 시약을 뿌려 가며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호나무는 손상을 막으려고 8~11m 높이의 두꺼운 특수 유리통으로 씌웠고, 밤에는 두꺼운 휘장으로 전체를 감싼다. 유리통은 2만 달러를 주고 외국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유리 내부엔 순도 99% 아르곤을 채우고, 내부 온도 섭씨 20도를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 시설을 갖춘 중앙통제소에서 관리한다.
나무 주변엔 피뢰침과 수십 개의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구호나무 지역 반경 4km에 폭 약 100m로 나무를 완전히 벌채한 방화선도 쳐 놓았다. 북한이 구호나무를 유지하느라 들이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쏟아도 습기에서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매년 비밀리에 나무를 뽑아와 건조실에서 시약 처리를 다시 하면서 글씨를 보존한다. 이렇게 건조하던 중 방화가 발생한 것이다.
구호나무 관리를 책임진 이 씨 부친은 연대책임이 지워져 보위부에 구속됐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여러 사람을 처벌하면서 대대적으로 범인을 색출하면 구호나무가 불탔다는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치적 범죄는 최대한 은폐하는 것이 김 씨 일가 권위 보존에 더 유리했다.
당국은 부친을 40일 만에 석방했다. 대신 산하 직장 노동자로 강등시켰다. 방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입도 철저하게 막았다. 불탔다는 구호나무 28그루는 새로 만들어 조용히 다시 심었다. 부친이 노동자로 강등되면서, 이 씨도 도 혁명사적관 강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1998년 함남 무재봉 화재를 그린 북한 선전화. 해병 17명이 구호나무를 부둥켜 안고 타 죽었다.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간 군인도 여럿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DB
● 김정일 말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구호나무 방화 사건은 조용히 무마되는 듯싶었지만, 김정일이 새로운 재앙을 일으켰다. 이듬해 함경남도 무재봉이란 곳에서 산불이 발생했는데, 인근에 주둔하던 해군 소속 군인들이 무재봉 구호나무를 지키겠다고 올라가 17명이 타 죽었다.
이 군인들 시신은 구호나무를 몸으로 둘러싼 채 발견됐다. 북한은 이들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선군 시대 모범으로 크게 홍보했다.
그런데 김정일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군인들은 타 죽으면서도 구호나무를 지키는데, 작년 양강도에선 구호나무들이 탔는데 죽은 놈은커녕 머리카락 하나 탄 놈도 없다”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김정일이 화를 냈으니 누군가는 희생양이 돼야 하는 법. 양강도 보위부에선 이 씨 부친과 건조실 시공 책임자 그리고 경비원을 다시 체포했다.
퇴근해 집으로 오던 이 씨는 끌려가는 부친을 길에서 만났다. 어디 가냐고 묻자 부친은 어두운 표정으로 “보위부에서 알아볼 것이 있어 간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끌려간 부친은 한 달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정일 ‘말씀’ 때문에 보위부에 끌려간 사람은 가족이 아무리 팔방으로 뛰어다녀도 석방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이 씨 집에 보위부 구류장 계호원이 찾아왔다. 집엔 어머니와 이 씨만 있었다. 두 살 위 오빠와 남동생은 군에 입대해 있었다.
계호원은 술과 담배를 뇌물로 요구하면서 감방에 있는 부친이 딸을 좀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계호원을 따라 보위부 감옥에 갔다. 새벽 시간, 정전으로 새까만 어둠 속에서 계호원이 그를 데리고 감옥으로 내려갔다. 다른 죄수들이 알아챌까 봐 계호원은 그에게 맨발로 조용히 따라오라고 요구했다.
문을 세 개나 통과해 감방 통로에 들어서니 부친은 끝 방에 수감돼 있었다. 준비해 간 달걀과 찰떡을 아버지 손에 쥐여 준 이 씨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몸으로 울어야 했다.
아버지가 딸을 부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집 장롱 아래 내가 쓴 글들이 있으니 그걸 갖고 평양에 가서 구명운동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너만 믿겠다”고 속삭였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문장이 빼곡한 A4 용지 몇 장이 나왔다. 작년에 체포됐을 때 부친은 이럴 경우를 대비한 듯 건조실 도면과 각종 설명을 써 놓았다. 시설 관리를 잘하지 못해 화재가 났다고 몰아가는 보위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외부인의 방화임을 입증하는 내용이었다.
2007년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서 찍은 이유미 씨 증명사진. 한국 생활 첫발을 뗀 때다.
● 낮에는 강사, 밤에는 밀수꾼
부친이 남긴 글과 집 재산을 처분해 만든 돈을 들고 그는 평양으로 향했다. 당시 이 씨 집은 남들보다 잘 살았는데, 부친이 재산을 많이 남겨서가 아니라 이 씨가 밀수해서 많은 돈을 번 덕분이었다.
부친의 직책 덕분에 고난의 행군 기간에 먹고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부친은 돈을 모으진 않았다. 부친은 1년의 절반은 산하 기관에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이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친 몰래 밀수 일에 뛰어들었다. 혁명사적관 강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공장 기계, 전기구리선을 비롯한 전국의 물자들이 중국에 밀수출되기 위해 혜산으로 밀려왔다. 혜산 사람들은 “저렇게 아까운 것들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는 3년 안에 망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압록강 바로 앞에 있는 이 씨 집은 밀수 통로로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이 씨는 어렸을 때부터 건너편 중국 아이들과 놀았기 때문에 장백에 아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국경경비대 숫자가 크게 늘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군인 두 명씩이 압록강변 국경 200m 구간을 지켰는데,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압록강 너비는 불과 수십 m. 이쪽에서 밀수꾼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경비대원들이 뛰어가면, 다른 밀수꾼들이 저쪽에서 강을 넘어 냅다 달아났다. 당시 혜산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군인들은 밀수꾼을 잡으려 하루 종일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라기보단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운 나쁘게 잡힌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찔러 주었다. 나중에는 야간 근무를 서야 할 시간에 강을 건너 장백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군인들도 생겨났다. 건너편에서 밀수하는 중국인들에게 매수된 것이다.
이 씨 집엔 밀수꾼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주변 집들도 마찬가지라 압록강 앞 그의 동네는 ‘밀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이 씨는 밀수를 도와주면서 번 돈으로 재산을 불렸다. 전기도 없지만 일제 컬러TV도 사고 선풍기도 사 놓았다.
이렇게 번 돈을 부친 구명을 위해 써야 할 때였다. 이 씨 삼촌이 과거 같은 부대에서 복무한 자신의 동기가 상좌인데 평양에서 군부대 보위부장을 한다며 소개해 주었다.
2023년 남북하나재단 주최 한 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이유미 씨가 손 하트를 그리고 있다.
●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
그 보위부장의 커다란 집에 머물던 이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위부장은 아내가 일을 나간 시간이면 부하 보위원들을 불러 방에 들어가 몰래 비디오를 봤다. 어느 날 이 씨는 보위원들이 여자가 스트립쇼를 하는 미국 비디오를 보면서 야한 장면은 몇 번이고 다시 돌려서 보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또 다른 날에는 한 방에 들어갔다가 이 씨 또래의 젊은 여성이 벌거벗고 누워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다음 날 아침에 군복을 입고 나갔다. 보위부장은 산하 부대 여성 군인을 노리개로 삼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이 밖에 나가선 “장군님을 결사옹위하고, 썩어빠진 반동사상을 뿌리 뽑자”고 외치면서 사람들을 잡아 고문할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평양에 머무르며 부친 구명을 위해 중앙당이나 보위부를 비롯해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21세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군 보위사령부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이때쯤 이 씨는 방법을 바꾸어 “아버지를 살려 달라”가 아니라 “간첩을 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보위사령부는 보위부를 제치고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위부가 방화를 저지른 간첩을 잡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조작해 몰아간다는 것은 보위사령부가 보위부를 공격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
이 씨가 평양에서 돌아오고 얼마 뒤 보위사령부가 혜산 보위부 검열을 나왔다. 1999년 7월 부친은 드디어 감옥에서 나왔다. 무죄가 아닌 병보석이었다.
상태를 보니 간이 좋지 않아 복수가 차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즉시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부친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였다.
혁명전적지관리총국 고위 간부였던 부친은 감옥에서 반동 중의 반동으로 변해 있었다. 부친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듯 딸에게 김 씨 일가의 조작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다.
부친을 통해 이 씨는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켰다는 것, 구호나무는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 등을 알았다. 부친은 김 씨 일가를 “저 새끼들”이라고 불렀다.
“저 새끼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별장이 전국에 많은데, 그곳에도 처녀들을 관리원으로 박아 두고 있다” “왜 아름다운 백두산을 파괴하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박아 넣느냐” 등등 아버지의 입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이 씨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버지 병간호만 할 수는 없었다. 장사를 나가야 했다.
“이 땅엔 미래가 없다. 내가 걸을 수만 있다면 가족을 데리고 남조선으로 가고 싶다.” 이 씨가 들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2016년 중고차 판매왕 워크샵에 참가한 이유미 씨가 남한강을 배경으로 셀피를 찍고 있다.
● 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홀로 오지 않고 겹쳐서 온다. 1999년은 이 씨에게 그런 해였다.
부친이 풀려나기 전인 1999년 2월 이 씨 가족은 시내에서 추방됐다. 새벽,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더니 남자들이 들어와 세간살이를 차에 무작정 실었다. 도착한 곳은 삼수의 깊은 산골. 삼수갑산의 그 삼수다. 마을 간부가 나오더니 “집도 없는 데 왜 자꾸 사람들을 보내냐”고 남자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때는 혜산에서 자고 나면 수십 명씩 잡혀 추방될 때였다. 그들을 싣고 온 차는 창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곳에 짐을 내리고 사라졌다. 삼수의 2월 추위 속에 그곳에서 생존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이 씨는 그날 중으로 혜산에 돌아왔다. 빼앗긴 집은 고위급 장교가 차지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일제 컬러TV를 주고 혜산 변두리의 무너져 가는 집을 구했다. 지붕 곳곳에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이긴 했지만 삼수의 ‘창고’보단 나았다. 혜산엔 친척이 많아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부친의 형제자매는 8명이나 됐지만, 부친이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사색이 됐다. 그들은 북한 간부다웠다. 보위부 조사 내용을 들었는지 “구호나무가 불에 탈 동안 형님은 뭘 했냐”며 “집에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떠들었다.
“아버지가 정치범이 되면 삼촌들도 무사하진 못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 씨는 그들과 연을 끊었다. 썩 나중의 일이지만 삼촌들은 다 비참한 노년을 맞았다.
그나마 외가는 이 씨를 도와주었지만 계속 얻어먹고 살 순 없었다. 이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담배를 싣고 함흥으로 가던 화물차가 한 고개에서 전복됐다. 이 씨는 화물차 적재함에 깔려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 만에 구조돼 인근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약이 없었다. 혜산에서 외삼촌이 달려와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침대만 빌려줄 뿐이었다. 그나마 며칠 뒤엔 약이 없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집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동안 유일한 위안은 한국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있는 변두리엔 전기 공급이 잘 돼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에 중국에서 투자한 탄광이 전기를 중국에서 직접 끌어왔던 것이다.
처음엔 라디오 내용을 반신반의했지만 믿지 않을 방법도 없었다. 출연자들이 말하는 북한 실상은 그가 아는 현실 그대로였다. 날씨 예보도 잘 맞았다. 특히 탈북민 출연자들이 하는 말은 억양도 비슷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라디오를 들으며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꼭 한국으로 가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리라.’ 그러려면 일어서야 했다. 별짓을 다 해 봤다. 옆집 할머니가 개똥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해서 개똥마저 구워 먹어 봤다.
23세라는 젊음의 힘이었는지 조금씩 하반신이 움직였다. 누워 있다가 처음 앉았을 때는 3초도 채 버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6개월 만에 이불장을 잡고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겨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1년이 걸렸다.
2021년 설악산 울산바위에 오른 이유미 씨. 하반신 마비를 이겨낸 그는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운동마니아로 변신했다.
● 산삼을 메고 압록강을 넘다
2001년 2월 하반신 마비를 극복한 이 씨는 압록강을 넘었다. 그때도 걷기는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밀수를 다시 시작했다. 아이템은 산삼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함북 경성에서 왔다는 ‘경성삼’이 제일 비쌌다. 첫 거래가 성공해 큰돈을 만졌다. 그런데 두 번째 거래를 하려고 하니 중국 연변 화룡에 있다는 대방(밀수업자)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산삼을 집에 두고 있다간 다 썩을 판이었다.
그는 직접 강을 건너기로 했다. 예전에 밀수를 많이 했기 때문에 압록강 넘는 방법도 잘 알았고 장백에는 아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에 얼음 위로 건너간 그를 맞은 대방이 산삼을 보더니 “이런 삼은 장백에서 소화할 수 없고 연길에 가야 한다”고 했다.
산삼을 들고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가 의심스러웠는지 말을 걸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택시 옆자리에서 자는 척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느낌이 이상해 눈을 뜨니 변방대(국경경비대) 건물 앞이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산삼을 다 빼앗기고 수감됐다. 중국은 수감자들에게도 빵과 고기를 주었다. 충격이었다.
그날 중으로 혜산으로 북송됐다. 보위부에서 조사를 기다리다 함께 북송된 다른 탈북 여성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몇 년씩 중국에서 살다 왔다는 그들은 “중국에선 돼지도 고기를 먹는다” 같은 믿기 어려운 얘기를 했다.
이 씨는 북송된 당일 석방됐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연길 병원에 치료받으려 건너갔다”고 둘러댔는데, 성치 않은 그를 본 보위부가 믿어 주었다. 또 보위부에 있는 친척 오빠가 힘을 써 주었다.
이 씨는 다른 탈북자에 비해 석방되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혜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집 딸이고, 친척들도 다 고위 간부였다. 보위부도 부친을 고문해 죽게 했다는 부채의식이 있었다. 강을 건넌 지 2시간 만에 잡힌 데다 몸이 성치 않은 처녀를 감옥에 넣었다가 죽으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있었을 터다. 물론 뇌물도 적잖게 썼다.
이 씨가 곧바로 풀려나는 것을 본 다른 북송 처녀가 급히 속삭였다.
“언니, 나는 중국에서 5년 살아서 중국어가 유창해요. 언니가 나를 빼 주면 베이징에 데려가서 식당에 취직시켜 줄게요.”
중국어를 몰라 잡혔다는 사실이 원통했던 그에겐 엄청난 유혹이었다. 풀려난 그는 친척들 힘을 동원해 함흥에서 왔다는 그녀를 보위부에서 뽑아 냈다. 그녀는 중국 길림성 통화현에서 한족 남편과 살았다는 여성을 데리고 왔다.
5월 어느 날 이 씨는 이들을 데리고 자신이 잘 아는 지점에서 압록강을 넘었다. 장백의 아는 집까지 데려갔다. 이 여인은 한족 남편에게 전화했다. 유창한 중국어로 통화하는 그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여인은 남편이 마중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 이젠 성공인가.” 마음이 놓였다.
새벽에 여인은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강을 넘을 때만 이용하고는 귀찮은 이 씨와 처녀를 떼어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장백 안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중국에서 5년 살았다는 처녀가 중국어를 하니 택시기사의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첫 번째 변방 초소에서 체포됐다. 또 북송됐다.
또 잡혀온 그를 보고 어이없어 하는 보위부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담배 몇 보루를 뇌물로 주고 어렵지 않게 나왔다.
보위부가 그를 몰랐다면 아마 감옥에 보냈겠지만, 당시엔 북송된 사람들로 보위부 감방이 넘칠 때였다. 혜산 사람이 다 아는 고위 간부의 딸로 살다가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불구까지 된 24세 처녀에 대한 연민도 있었을 것이다.
2013년 중고차 딜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유미 씨.
● 열 번의 북송, 열한 번의 탈북
북한은 청년들에게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음)의 혁명정신을 가져라’라고 세뇌하고 있다. 중국에 가자마자 두 차례나 북송된 이 씨 마음속엔 ‘백절불굴의 탈북 정신’이 자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국어를 모르고 무작정 갈 수는 없는 법. 두 번째 석방될 땐 한족과 결혼해 중국어가 유창한 양강도 후창 사는 여인과 친해져 함께 탈북하기로 약속했다.
세 번째 탈북에서도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몇 시간 만에 잡혔다. 장백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잡혔다. 그리고 또 탈북…. 네 번째도 비슷했다.
혜산 보위부에 네 차례나 잡혀 오니 나중엔 “멍청하게 또 잡혔느냐. 치료 좀 받으려는데 중국놈들 참 지독하다”고 동정하는 보위원마저 생길 정도였다. 물론 그가 잡힐 때마다 외가 친척들이 적극 나서서 뇌물을 써서 처벌받지 않고 석방됐다.
다섯 번째 탈북에서 드디어 장백을 벗어나 연길까지 도착했다. 연길에서 개장을 파는 식당에서 일했다. 개고기를 매일 먹으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뒤 체포됐다. 문제는 연길에서 체포되면 혜산 보위부가 아닌 함북 온성 보위부로 북송된다는 점이다. 이곳 보위부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엄마가 뇌물을 들고 달려왔다.
감옥에서 몸을 추스르고 나와 다시 탈북했다. 이후에는 장백을 벗어나 어디에 자리를 잡을까 싶으면 체포됐다. 북송되는 지역도 온성, 회령, 무산 등 다양했다. 수차례 탈북했다 북송이 되면 가중처벌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전산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운이 따랐다. 혜산에서 추방돼 간 삼수에서 그는 주민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혜산에도 삼수에도 없었다. 삼수 안전부에 전화해 호송하러 오라고 하면 삼수에선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 시절 북한은 온라인 전산망이 없었다. 처벌을 담당할 거주지역이 없으니 공중에 뜬 신분이 된다. 북송된 탈북민을 받은 국경 보위부 난처해진다. 언제까지 국경 감옥에 두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마다 모친이 달려와 뇌물을 주니 마지못해 석방해 주었다. 추방된 덕을 그나마 본 셈이다.
자꾸 북송되면서 이 씨는 보위부 취조를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할지 ‘프로’의 경지에 올랐다. 누구는 북송 한 번에 죽기도 하지만 이 씨는 열 번이나 살아남았다.
북송될 때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구구절절 쓰기엔 너무 길어 생략할 수밖에 없다.
일곱 번째 탈북 때는 천진에 자리를 잡았는데 체포되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이때 중국어를 어느 정도 배웠다. 2004년부터는 한국으로 가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북한 노동단련대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탈북하기도 했는데, 그 친구는 혼자 한국행 길에 올랐다가 붙잡혀 북한에 끌려가서 죽었다. 열 번째 북송 때엔 연길에 있다는 탈북 브로커를 만나려고 천진에서 일부러 북중 국경 부근에 왔다가 체포됐다.
이때는 석방될 때까지 반년 넘게 걸렸다. 2004년 10월 온성으로 넘어와 함북도 집결소에서 고생했고, 혜산으로 넘어와서 6개월 노동단련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혜산 도시건설사업소 지배인이던 외삼촌이 분주소(파출소) 건물을 지어 주기로 하고 그를 풀려나게 했다. 각종 건설을 담당하는 도시건설사업소는 힘이 있는 부처였다. 이렇게 이 씨는 2001년 2월부터 2005년 5월의 마지막 탈북까지 열 번의 북송을 겪었다.
2022년 설악산에 오른 이유미 씨. 그의 사진첩은 정상에 오른 사진들로 가득하다.
● “유미야, 내가 도와줄게.”
열 번이나 북송된 이 씨 사연은 마을에 소문이 다 났다. 하도 자꾸 잡혀 오니 마을의 한 여인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 씨도 아는, 이 여인의 남편은 먼저 탈북해 한국에 정착해 있었다. 여인을 통해 한국 남편에게 전화하니, 반가워하며 심양까지 오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열한 번째 탈북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심양까지 가면 성공이라고 믿었다. 심양에 가서 한국으로 가려는 일행과 합세했다. 그런데 이 일행은 동남아나 몽골을 경유해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에 있는 외국인학교나 재외 공관에 진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2005년 10월 이 씨 일행 5명은 천진국제학교에 진입해 한국행을 요구했다. 이 같은 집단 진입이 많을 때였다. 천진국제학교는 이들을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넘겼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이들의 한국행에 대해 사사건건 딴지를 놓는 바람에 영사관 지하실에서 13개월이나 머물렀다.
감옥 같은 지하실 생활을 1년 넘게 하니 미칠 것 같았지만 그는 이겨 냈다. 그나마 영사관에선 한국 TV 프로그램을 마음껏 보고 불고기와 빵, 라면 같은 먹을 것도 잘 먹었다. 열 번이나 수감 생활을 극복한 이 씨에게 이 정도는 고생 축에도 들지 않았다.
새해를 코앞에 둔 2006년 12월 30일 이 씨는 마침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합동 심문 중에 네 차례 북송까지 말했더니 담당 조사관이 ‘또? 이 얘기는 언제 끝나려나’ 싶은 눈빛이었다.
열 번째 북송까지 다 말하면 심문 시간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씨는 입을 닫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도 많이 북송돼 감옥이나 집결소 생활을 하면서 만난 ‘감옥 동기들’을 심문 과정에서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증해 주어 더 오래 있지 않고 하나원에 갈 수 있었다.
중고차 매매업에 막 뛰어든 2012년의 이유미 씨.
● 1년 만에 탈북시킨 가족
2007년 4월 드디어 한국 사회에 나왔다. 30세 때였다. 서울 노원구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혼자 살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어야 북에 있는 가족도 데리고 올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급했다.
아르바이트와 자격증 학원에 다니는 시간이 이어졌다. 미용, 바리스타, 빵, 메이크업, 컴퓨터 등 그는 많은 자격증에 도전했다. 하지만 컴퓨터 자격증 하나만 땄다. 실기는 자신 있었지만 이론과 영어가 그를 괴롭혔다. 한국은 요리 용어도 영어를 써서 교재를 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당과 치킨집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제일 오래 한 일이 찜질방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밤엔 손님도 별로 없는 데다 사우나에서 먹고 자니 5만 원씩 받는 일당도 쓸 일이 별로 없어 통장에 쌓였다.
이렇게 번 돈으로 2008년 어머니와 남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자강도 국경경비대에서 10년을 복무하고 집에 돌아온 남동생은 탈북했다는 사실을 알고 “집안에 배신자가 나왔다”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함경도나 양강도에서 국경경비대 복무를 했다면 탈북민이나 밀수꾼들을 많이 만나 생각이 좀 바뀌었겠지만, 자강도는 탈북도 밀수도 없는 곳이라 군에서 세뇌된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런 동생이 탈북하게 된 계기는 이 씨와 모친의 통화가 적발돼 보위부에 끌려간 일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내통했을 것”이라며 몽둥이를 드니 동생도 “누나가 남조선에 있는 한 여기서 살면 미래가 없다”며 북한에서 계속 사는 것을 포기했다. 보위부에 잡혀가 매를 맞고서야 정신이 든 경우였다.
두 살 위 오빠는 끝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그의 세뇌는 더 단단했다. 설득하려 했지만 오빠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튜브 채널을 시작한 초기에 다른 탈북민과 함께 촬영하고 있는 이유미 씨(오른쪽).
● 유미카에 남기는 기록
2012년 봄, 이 씨는 인천 최대 규모 엠파크 중고차 단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인이 공감 능력과 설득력이 뛰어난 그를 눈여겨보고 중고차를 팔면 잘하겠다고 권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중고차 딜러는 거의 없을 때였다. 엠파크에서 그는 홍일점이었다.
중고차를 팔면서 별의별 일을 많이 겪었다. 중고차를 잘 팔려면 신차 영업소를 장악해야 했다. 새 차를 사는 사람들에게 “중고차로 팔 때 연락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영업소에는 남성 딜러만 있어서 그가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낙담했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하세요.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라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를 보며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느냐”며 말을 걸었다.
하루는 차를 사던 여성 고객이 그를 측은하다는 듯 보며 “왜 여성이 이런 벼랑끝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벼랑 끝에 가 보셨어요? 저는 수없이 가 봤거든요.”
식당 아르바이트보다는 중고차 파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올해까지 13년 동안 판매왕도 해 보고 여러 상도 받았다.
2019년 유튜브 채널 유미카를 시작한 계기도 중고차를 더 팔기 위해서였다. 2~3년 뒤 구독자가 엄청나게 늘면서 주업이 바뀌었다. 72만 구독자, 조회수 6억 회 이상의 유튜버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고차도 계속 팔긴 하지만 아무래도 파워 유튜버 비중이 더 커졌다.
그동안 유미카에 나온 탈북자는 200명이 넘는다. 그들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사명감도 점점 생겨났다.
“저도 당사자이긴 하지만 다른 탈북민들이 겪었던 참혹한 인권 유린 사례를 계속 듣다 보니 이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남겨 놓는 영상을 먼 훗날 통일이 되서 북한에 있는 가족이 볼 수 있을 겁니다.
살아서 통일을 보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이 땅에 왔으며,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북에 남겨둔 가족을 어떻게 그리며 살았는지 그 기록은 남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영상을 만들 겁니다.”
그의 말에 같은 탈북민인 기자도 설득됐다. “그러네요. 그럼 저도 유미카에 기록을 남깁시다.” 역시 설득의 여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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