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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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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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0-10~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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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폭풍군단의 눈물…굶주린 특수부대의 실상[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이 이달 1일 인민군 제11군단 지휘부를 시찰했습니다. 언제 가나 궁금했는데, 드디어 갔습니다. 북한이 8월 러시아 파병 사실을 공개하고, 전사자들을 내세운 선전전을 시작했을 때부터 김정은의 11군단 방문은 예고돼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파병에서 워낙 많이 죽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으니 직접 방문해 격려해야 했을 겁니다.이번에 러시아에 파병된 부대는 11군단 산하의 4개 저격병여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격병여단 4개를 통째로 보낸 것은 아닙니다. 11군단에서 군수공장 지역, 농촌, 탄광 등 전장에서 죽어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지역 출신의 군인들을 선발했고, 일반 부대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모집했습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모은 병사들을 저격병여단 편제에 포함한 뒤 특수작전훈련기지라는 곳에서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시켜 파병했습니다. 물론 파병 부대의 주축은 11군단 저격병여단 병사들과 군관들이었습니다.● 일당백에 세뇌된 북한군북한의 러시아 파병 규모는 4개 여단 편제의 총 1만2000명 정도입니다. 국정원은 올해 9월 “우방(우크라이나)과 종합 검토한 결과, 현재 사망자는 200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전사자·부상자 비율은 1:3입니다. 즉 1명이 사망할 때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이를 북한군에 대입하면 2000명이 전사했을 때 6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북한 특수작전군은 12월 14일부터 1월 14일까지 딱 한 달 동안 전투에 투입됐는데, 1만2000명 중 80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자가 3분의 2가 발생하면 이는 전멸된 부대로 간주합니다.파병된 북한 군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현대전의 ‘현’ 자도 들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전멸 수준의 피해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외부에선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해 최신 전쟁 기술을 배워갔다고 분석하는데, 그것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군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입니다. 그 충격들은 살아서 돌아간 군인들을 통해 북한군에 전염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물론 특수부대 군인들이 10년 동안 열심히 훈련했으니, 어느 정도의 전투력은 발휘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상대한 우크라이나군은 평균 나이가 45세 정도이고, 민간에서 수시로 모집해 온 사람들이라 전투 기술도 별로 높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컸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17세~27세 사이의 북한군 병사들은 훨씬 잘 뛰어다녔을 것이고, 훨씬 용감했을 것이며, 총도 잘 쐈을 겁니다. 두 병력이 백병전을 벌이면 북한군이 유리했을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드론이었습니다. 북한에선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드론이란 것에 발각돼,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뛰어 다니다가 무리로 죽어 나갔으니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반세기 넘도록 북한군 정신교육의 핵심은 ‘일당백’입니다. 한 명이 백 명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도 “우리 군은 천하무적의 일당백 강군”이라고 세뇌시켰습니다. 외부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는 군인들은 그 말에 세뇌될 수밖에 없습니다.“조선인민군은 천하무적의 강군이다.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리에게 덤벼!” 이렇게 말입니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폭풍군단그중에서도 자신들이 북한군에서도 가장 최정예임을 아는 특수부대 군인들은 더욱 자신감이 충만했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전 파병 이전까지만 해도 11군단 군인들은 자신들이 전장에 투입되면 겁쟁이 미군이나 남조선 괴뢰군 최소 10명은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겁니다.그런데 막상 전장에 나가니 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자폭 드론들이 날아다니며 공격해 왔습니다. 밤에 몰래 습격한다고 뛰어다녔는데, 하늘에서 적외선 열감지기로 손바닥처럼 다 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벌판에서 노출되면 10년 동안 익힌 전투 기술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드론에 당하는 북한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많이 공개됐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병사들은 이렇게 말하겠죠.“우리가 10년 벽돌까기를 연습했는데, 실제 전투에선 그런 게 전혀 쓸모가 없더라. 드론에 발각되지 않고 이동하는 연습이 제일 필요하더라. 무기와 탄약에 방탄복과 철모까지 메고 뛰어다니는데, 우리 체격으론 감당이 안 되더라. 역시 비계 먹고 사는 러시아 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힘이 좋은 걸 보니 잘 먹고 체격 좋은 게 제일 중요하더라.”현대전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공포가 제일 먼저 전염될 부대는 당연히 11군단일 수밖에 없습니다.1년 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 시체로 돌아오고, 불구가 돼 전역하게 됐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1군단은 저격병여단 3개와 경보병여단 4개, 항공육전병여단 3개, 도합 10개의 여단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중 핵심부대는 저격병여단입니다. 경보병부대보단 저격부대가 훨씬 훈련 강도가 높고, 공중 침투에 특화됐다는 항공육전여단은 연료가 없어 낙하 훈련을 해보지 못한 병사들이 태반입니다. 한 개 여단 편제가 3000명 정도이니, 10개 여단이 소속된 11군단 전체 병력은 지휘부나 후방 보장 병력까지 다 해봐야 기껏 4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대들에서 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충격이 크겠죠.그러니 김정은은 러시아에 파병됐다가 전사했던 군인들에게 최고의 보상을 선언해야 하고, 또 직접 부대를 찾아가 살아남은 병력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자주 방문해 계속 사기를 높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풍강도’로 불리는 폭풍군단이번 방문에서도 김정은은 11군단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인민군대의 영웅성의 상징’ ‘우리 군대의 고귀한 명성과 불멸할 명함을 주추로 받쳐 주고 있는 믿음직한 전위전투대오’ ‘전군을 이 부대처럼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강군으로, 영웅군대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 당의 의지이고 염원’ 등의 수사학이 동원됐습니다.그런데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김정은의 다시 해외에 파병한다면, 북한군에서 그나마 전투에 동원할 만한 병력은 11군단밖에 없습니다. 북한군에서 실질적으로 전투 병력이라고 믿고 쓸 만한 지상군 병력은 5만 명도 되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머지는 머리 숫자나 채우는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물론 적을 너무 경시하면 안 되겠죠. 누구나 군복을 입혀놓으면 뛰어다니며 총은 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귀순해 온 많은 탈북 군인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게 군대가 맞냐”는 어이없는 웃음이 계속 나옵니다.1년에 총을 3발밖에 쏴보지 않는 군인, 훈련 대신 농사와 건설로 시간을 보내는 군인, 먹지 못해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하는 부대…. 최전방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이 나름 최선의 공급을 보장하는 부대들입니다.그런 최전방 군인들의 상황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로도 한국군 행군 완전군장 무게 약 38~42kg을 메고 1㎞를 갈 수 있는 군인이 20%는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40kg 배낭을 메고 서 있거나, 겨우 백 걸음도 못 갈 군인이 절반이 넘는다는 것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저는 수십 명의 사람과 함께 북한군 최신 정보를 듣는 강연을 종종 주최합니다. 두 달 전에도 1년 전까지 북한군이 있었던 군인을 초빙해 들었는데, 참석했던 사람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북한에 대한 지식이 꽤 있는 참가자들임에도 “설마 그 정도일까” 생각했었는데 다 듣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구나”고 말합니다.이 글을 읽는 구독자들도 “에이, 설마 군대인데, 그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귀순 병사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수록 “저게 군대라고”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속옷도 없이 누더기 군복을 입고 살며,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한군 실상을 들을 때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수표교 거지들이 북한군보단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북한군 최정예라는 11군단, 즉 폭풍군단을 북한 사람들은 ‘폭풍강도’라고 부릅니다. 이 부대군인들이 배가 고파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많은데, 그나마 날쌔서 잡기 어렵습니다. 민간인도 영양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니 비교 우위인 것입니다. 즉 북한군에서 훔치는 것을 제일 잘하는 부대가 11군단인 것입니다.● 키 143㎝면 군에 가는 청년들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선 11군단, 또는 그의 전신인 특수 8군단이 거의 무적의 전사로 종종 등장합니다. 분명 북한의 특수부대가 뛰어났던 시기는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특수부대는 그나마 특수부대다웠습니다. 특수부대에 입대하면 지옥의 훈련을 끊임없이 이겨내야 했고, 정신·육체적으로 뛰어났습니다.물론 그래봐야 인간들이긴 합니다. 1968년의 김신조 부대, 울진-삼척 침투 무장 공비 부대는 북한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부대 요원들이었지만, 이들도 경무장으로 후방에서 포위에 들면 일당백은커녕 한국군과의 사상(死傷) 비율에서 1대1도 버거워했습니다.북한 특수부대가 급속히 전투력을 잃어간 것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훈련합니까. 11군단에서도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영양실조 걸리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북한 전체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다 보니 병력 자원의 질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지금 북한은 17세 이상 학교 졸업생 중 키 143㎝ 이상, 몸무게 45㎏ 이상이면 군에 입대시킵니다. 북한군이 전반적으로 ‘난쟁이’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일반 부대에선 165㎝ 정도만 돼도 키가 큰 병사 축에 들어갑니다.이 중에서 아무리 골라서 특수부대에 보내도 전체적인 왜소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키만 작아진 것이 아니라 영양상태도 여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병사들에게 특수훈련을 시킬 순 없는 일입니다.코로나 시기 북한은 국경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1군단 병력을 압록강 경비에 파견했습니다. 이 때문에 11군단 군인들도 많이 찍혀 지금도 인터넷에서 영상들이 돌고 있습니다. 11군단 별거 없었습니다. 삐쩍 마른 청년들이 돌아다녔고, 격술훈련을 하는 모습이 찍힌 영상들도 있는데, 힘이 없어 발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50㎏도 안 되는 삐쩍 마른 청년들이 주먹을 내질러봐야 얼마나 힘이 실리겠습니까.물론 김정은이 방문하면 앞에서 벽돌 여러 장을 격파하고, 배에 돌을 올려놓고 부수는 군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키와 체격을 보고 1호 행사용으로 선발된 뒤, 특별히 잘 먹여서 운영되는 중대급 정도의 일부 군인들입니다. 김정은이 왔는데 내세울 군인은 있어야죠.러시아에 파병된 북한 특수작전군의 초기 영상을 보면 특수부대라고 뽑았는데도 키도 작고, 삐쩍 말랐습니다.그런데 올해 8월부터 10월 사이 북한에 돌아온 파병 군인들을 내세운 행사를 보면 모두 살들이 많이 찐 모습입니다. 러시아에 간 북한 군인들은 돼지비계가 잘 공급돼 이를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현지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취재해 왔던 한 언론인은 “북한군들이 3개월쯤 지나니 피둥피둥 살이 찌더라”고 말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파병 군인들은 지금 매우 영양상태가 좋아진 채로 귀국한 것입니다.● 괴이한 특수 훈련북한 특수부대의 한계에 대해 신체 능력만 놓고 이야기했는데, 이들의 전쟁 수행 능력도 실은 매우 뒤떨어져 있습니다.김정은은 외부에 과시하기 위해 특수부대 훈련을 자주 벌여놓고 사진을 공개하는데, 이런 훈련 장면을 분석해 보면, 이들 부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명색이 특수부대인데, 떼를 지어 돌격하고, 이해되지 않는 앞뒤 공중제비를 하고 있습니다. 엄폐물이 있는데, 굳이 높이 날아올라 공중에서 총을 쏘고, 총을 쏘는 군인 앞으로 점프해 총을 쏘기도 합니다. 김정은이 보기엔 멋있겠지만,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왜 이런 동작을 훈련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우리도 이런 멋있는 특수 장비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누가 봐도 과시용으로 공개하는 특수부대 훈련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자세히 보면 기가 막힙니다. 가령 방탄복 같은 것을 입었지만, 방탄판이 없는 것이 보이고, 야시경 같은 것이 붙은 방탄모를 쓰고 나왔지만, 한 번도 써본 일이 없는지 턱끈 조절을 할 줄 몰라 머리에서 막 흘러내립니다. 총구로 향하게 이상하게 붙인 조준경으로 총을 쏘는 연출을 하는 사진도 있습니다.11군단의 편제도 현대전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병력의 70%가 경보병여단과 항공육전병여단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경보병은 무장을 가볍게 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을 다소 희생한 대신 기동성을 높인 보병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총 한 정과 배낭 하나를 메고 수백㎞를 걸어 이동하는 부대입니다. 이런 부대는 반세기 전까진 효용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차량이나 헬기로 병력을 침투시키는 현대전의 시대에 정찰 자산이 내려다보는 지상에서 수천 명이 총만 메고 뛰어 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항공육전병여단도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규모 병력의 공중 침투는 제공권을 장악해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고물 전투기만 갖고 있는 북한은 제공권을 장악할 힘을 오래 전에 잃었습니다. 침투 수송기도 1940년대 생산된, 시속 200㎞도 안 되는 고물 AN-2기들뿐입니다. 이 복엽 수송기가 뜰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떴다고 한들 작은 무인기 격추를 논하는 현대전에선 날아다니는 ‘관’에 불과합니다. AN-2기 침투가 이젠 막혔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작년에 북한은 두 대밖에 없는 고려항공 수송기에 군용 도색을 급히 입혀 낙하 훈련하는 모습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훈련인지라 비행 속도가 너무 빨라 낙하산이 비행기에 걸리고, 낙하산끼리 엉키는 사진도 그대로 나옵니다.11군단의 ‘특수성’에 대해선 말하려면 끝이 없지만,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과시하기 위해 연출한 훈련들은 북한에선 먹힐지 몰라도 외부 전문가들에겐 웃음만 줄 뿐입니다.● 11군단엔 왜 돼지비계를 안주나.북한의 11군단이 이렇게 낙후한 부대가 된 이유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난해서입니다.나라가 부유해야 군인들을 잘 먹이고, 좋은 장비를 쓰게 하고, 마음껏 훈련하게 할 수 있습니다.세계 최고의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미국은, 특수부대원 한 명 육성에 수십억 원이 듭니다. 2025년 기준으로 네이비실 전투원 1명을 양성하는데 평균 27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개인 장비와 지원 장비까지 계산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소요됩니다. 27억 원은 200만 달러입니다. 200만 달러면 옥수수 5000톤 정도 살 수 있습니다. 미국 네이비실 전투원 두 명 육성 비용이면 4만 명의 북한 11군단 전체가 1년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살 수 있습니다. 배부르면 다시 고강도 육체 훈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고 있죠.네이비실 2명 육성 비용=>11군단 유지비용.이것만큼 적나라하게 북한 푹풍군단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비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김정은이 11군단의 사기를 북돋으려면 우선 이들에게 밥과 돼지비계 정도는 보장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김정은은 10월 새로 건조한 최현함을 방문했을 때는 승조원이 100여 명뿐이라 그랬는지 평양에서 남포까지 돼지고기볶음, 양념닭튀김 등이 포함된 뷔페식 음식을 차에 싣고 가 한 끼 잘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11군단 지휘부 방문 때엔 인원이 많아서인지 음식을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해군엔 ‘한턱내면서’, 해외에 파병돼 숱한 희생자를 낸 11군단엔 쏘지 않으니, 은근히 고기를 기대했을 현지 군인들은 실망이 클 겁니다. 아무리 말로 ‘인민군의 상징 부대’라고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에겐 제일 배부르게 공급되는 부대가 제일 상징적인 부대입니다. 허기져 걸어 다닐 힘이 없는 부대는 그냥 ‘폭풍거지’일 뿐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17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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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금강산 현대주유소 철거 작전

    지난해 봄, 금강산 온정리에 투입된 북한군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고난도 미션에 직면했다. 미션명은 ‘현대오일뱅크 금강산 주유소 철거’. 북한은 주유소를 철거해 본 경험이 없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도 지하에 연료 탱크를 묻는 형태의 주유소가 전국에 200개 정도 생겨났다. 가뜩이나 모자란 주유소인데 짓자마자 철거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금강산 주유소는 부실한 자재와 저급한 기술로 지은 것이 아니라, 현대가 1998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세운 것이다. 북한에 건설되는 첫 한국 주유소라는 상징성 때문에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아는 유일한 철거 방법은 폭파시킨 뒤 건물 잔해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북한은 쌓아 올리는 건 많이 해도 파내는 건 거의 하지 않았다. 뭐든 부족하니 기존 건물은 그대로 놔 두고 빈 땅에 새로 건설하는 데만 익숙하다. 그나마 평양처럼 부지가 부족한 곳에선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철거해 온 건물은 대개 1950년대에 ‘평양 속도’라고 포장하며 날림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라 기둥 서너 군데를 폭파하면 풀썩풀썩 무너진다. 그런 북한이 금강산에서 맞닥뜨린 것은 차원이 다른 철근 콘크리트 구조다. 그것도 그냥 무너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내부 탱크를 뜯어내는 작업이었다. 어쨌든 김정은의 명령이 하달됐으니 군인들은 유일하게 아는 발파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어찌나 단단한지 폭약 넣을 구멍 뚫기도 쉽지 않았고, 폭파해도 뜯겨 나오는 양이 보잘것없었다. 껍질을 벗기듯 뜯어내고 또 뜯어내는 작업은 반년 넘게 진행됐다. 온정리 사람들은 지난해 여름 발파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한국은 웬만한 철거업체에 몇천만 원만 주면 일주일 안에 주유소 하나를 금방 뜯어내겠지만 북한은 경험도, 장비도 없다. 더욱이 그들이 금강산에서 뜯어내야 할 것은 주유소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 10월 23일 금강산을 방문한 김정은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고 현대적인 봉사 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은 한국이 지은 관광시설들을 ‘건설장 가설 건물을 방불케 하는 집들’ ‘피해 지역 가설막이나 격리병동’ 등에 비유하며 폄훼했다. 김정은 특유의 허세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 설계 역량도 튼튼하고, 강력한 건설 역량이 있으며 당의 구상과 결심이라면 그 어떤 난관과 시련도 뚫고 무조건 실현하는 우리 군대와 노동계급이 있기에 금강산에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를 꾸리는 사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는커녕 가설막이나격리 병동 같다던 건물 몇 동조차 아직까지도 완전히 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이라면 영세 업체라도 쉽게 끝낼 일을 ‘최고존엄’ 김정은의 지시에도 6년째 끝내지 못하고 쩔쩔맨다. 그동안 건물 하나하나 해체될 때마다 동원된 많은 군인과 금강산 주민들 입을 통해 북한에는 차원이 다른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들이 생겨났다. 건물을 보기만 했던 것과 해체하면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한국 건설에 대한 신화는 비단 금강산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2020년 6월 13일, 김여정은 한국을 향해 “머지않아 쓸모없는 (개성공단)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나흘 뒤 북한은 진짜로 이 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다. 폭약을 얼마나 썼던지 70m 떨어진 15층짜리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 유리창이 다 박살 났다. 하지만 정작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겠다던 건물은 높이 솟구쳤던 폭파 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꿋꿋이 서 있었다. 전 세계가 보라고 진행된 ‘폭파 쇼’에 동원됐던 북한 최고 공병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도대체 이 건물은 어떻게 지었기에 이 정도 위력의 폭발을 견딘단 말인가. 형체도 없이 무너뜨리라는 지시를 집행하지 못한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락사무소 건물이 수작업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4년 뒤인 지난해 3월이다. 종합지원센터는 지금도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다. 금강산 주유소와 개성공단 연락사무소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었으되 죽지 않았으니, 북한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죽어서 더 빛나는 전설의 이름’이 됐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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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에서 온 평범한 이웃’ 송지아 씨가 얻은 삶의 교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0년 가까이 가족을 벌어 먹였지만 결말은 허망했다. 2007년 12월 어느 날 송지아 씨는 함북 무산읍에 있는 자신의 집에 조용히 들어섰다. 장사 밑천을 모두 잃은 직후였다. 북한에서 장사가 망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 첫째 이유를 꼽는다면 밑천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청진으로 가지고 가던 휘발유 100리터를 당국 단속에 걸려 빼앗겼다. 옥수수 300kg을 바꿀 수 있는 양이었다. 풀죽을 해 먹으면 가족이 반년 이상 먹고살 식량이었다.장사가 불법인 북한에선 안전부나 보위부 단속반이 눈을 부릅뜨고 사냥거리를 찾는다. 그들은 빼앗아야 먹고살 수 있는 하이에나 떼다. 송 씨도 먹잇감이 됐다. 당국이 공급해 주지도 않는 휘발유이지만 개인이 유통하는 순간 밀거래범이 된다.집에 들어간 송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벗어 벽에 걸고 집에 있는 제일 낡은 옷을 꺼내 입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먼 길 떠날 결심을 하고 나니 괜찮은 옷이라도 두 여동생에게 남겨 두고 싶었다. 유서 쓰는 마음으로 짧은 이별 편지를 적어 걸어 둔 옷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죽지는 않겠지만, 이제 나가면 돌아오진 않을 겁니다.’그 말은 현실이 됐다. 그는 죽지도 않았지만 돌아가지도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 고향을 떠나던 그날, 두 볼을 찌르던 북방 찬바람을 여전히 기억한다.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를 더 깊은 수렁에 밀어 넣는 땅을 27세 처녀는 그렇게 떠났다.“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죠. 중국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북송된 적도 없으니까요. 한국에 와서도 거저 주어진 행운은 없었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고 있으니까요.”그의 인생엔 많은 탈북민이 겪은 드라마틱한 역경과 고난은 없었다. 대신 ‘북에서 온 이웃’으로 조용히 이 사회에 스며들어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모니카집’ 맏딸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5할을 결정하고,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운명의 3할을 좌우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게 맞는다면 송 씨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의 8할이 이미 꼬여 버렸다. 지구상에서 손꼽히게 가난한 땅에서 태어났고, 그 땅에서도 더 가난한 지역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최악의 기아 참사를 겪어야 했다.1981년 송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함북 무산광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주변에 친척도 없었다. 자강도 강계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부친은 군복무 10년을 마치자 ‘무리 제대’로 아무 연고도 없는 무산광산에 강제로 발령을 받았다. 무리 제대는 제대한 군인 수백~수천 명을 인력이 부족한 곳에 강제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무산과 강계는 남극과 북극만큼 떨어져 있었다. 기차로 가면 잘 다닐 때도 사나흘씩 가야 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엔 최소 열흘이 걸렸다. 송 씨 모친도 강원도의 한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부친을 만나 결혼한 뒤 무산으로 왔다.송 씨가 태어난 집은 무산에서 ‘천 세대’라고 불리는 ‘하모니카집’ 집단촌이었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 노천 광산인 무산광산을 확장하면서 수많은 제대 군인을 이곳에 보냈다. 이들이 살 집을 짓기 위해 공동묘지를 밀고 건물 1000세대를 급히 지었다. 한 식구씩 사는 단칸방 4칸이 한 지붕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악기 하모니카를 닮았다고 해서 하모니카집이라고 불렸다. 인천 부평구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제 징용 흔적인 ‘미쓰비시 줄사택’과 비슷하지만, 이조차도 무산 하모니카집보다는 크다.옆집 코 고는 소리, 방귀 소리까지 다 들리는 환경에서도 혈기 왕성한 제대 군인 가족 1000세대가 살다 보니 아이들이 쑥쑥 태어났다. 송 씨가 인민학교에 다닐 때 한 학년에 45명 규모 11개 반이 있었다. 송 씨 부모도 자식을 네 명 낳았다.넓지 않은 하모니카 주택 단지에 수천 명이 살다 보니 흡사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대부분 다 알았다. 좁은 공터는 연령대 비슷한 아이들로 꽉 찼다. 아침저녁이면 1000개 굴뚝이 내뿜는 연기 때문에 코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겪은 고난의 행군1994년부터 하모니카 단지에 고난의 행군 바람이 휘몰아쳤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광산 노동자들이 무리로 죽어 나갔다.차라리 서로를 몰랐다면 나았을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관도 없이 땅에 묻혔다. 송 씨도 옆집을 포함해 함께 놀던 친구들의 죽음을 수시로 목격하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집에서 뼈만 남은 시체로 나오겠구나’ 하는 공포를 느꼈다.온 가족이 굶어 죽은 집에 가면 벽에 김 씨 일가 초상화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궁이 가마솥까지 뽑아 팔면서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다. 집에서 팔 수 없는 것은 초상화밖에 없었다.다행히 송 씨 부모는 굶어 죽은 사람들보단 생활력이 조금 나았다. 부친은 광산에 나가지 않고 산에 올라가 화전을 일구었다. 모친은 중국 상품을 들고 강원도 친정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맏딸 송 씨는 10대 초반부터 부친을 따라 화전에서 농사를 지었고 가을엔 산에 움막을 치고 농작물을 지켰다.송 씨는 지금도 캠핑이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다. 움막에서 겁에 질려 밤을 새우던 어릴 때 공포가 떠오른다. 또 비빔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 비빔밥만 보면 어려서 먹던 풀죽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저건 먹는 풀, 저건 못 먹는 풀”하며 저도 모르게 구분하는 자신이 싫다.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전교생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송 씨는 그래도 학교에 나가는 학생이었다. 방과 후엔 동생들을 데리고 풀을 뜯으러 다녔다. 먹을 수 있는 풀도 먼 데 있는 산에 가야 뜯을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기간은 그의 사춘기와 겹친다. 한창 키가 크고 발육이 될 나이에 먹지 못하니 학생들 평균 키가 10cm 이상 작아졌다.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송 씨는 3년제 대학인 청진2사범대학에 추천받았다. 이곳을 졸업하면 인민학교나 유치원 교사로 임명된다. 북한에서는 중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에 간다. 웬만해선 대학 추천을 받기도 쉽지 않다. 송 씨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이 태반인 데다 나온 학생들도 공부를 잘하지 않았다. 또 대학 추천을 받은 학생들도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하다 보니 그에게 추천권이 온 것이다.그의 집이라고 딸을 대학에 보낼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는 맏딸만큼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도청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입학시험을 치니 얼마 뒤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한 학기를 버틴 대학 생활어떻게든 3년은 버텨 교사가 되리라던 의지는 입학 한 학기 만에 깨졌다. 대학 기숙사에서 밥을 주지 않아 먹을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최소 비용으로 한 달을 먹으려면 ‘속도전가루’ 15kg을 사야 했다. 속도전가루는 옥수수에 높은 압력과 열을 가해 가루로 만든 것으로 물을 부어 비비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속도전가루조차 충분히 살 돈이 없던 송 씨는 점심시간에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가 많았다. 이겨 내야 할 것이 허기뿐이라면 견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에서 내라는 각종 비용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교수 식량조차 학생들이 돈을 걷어 보조해 줘야 했다.송 씨는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료와 속도전가루 장사였다. 무산광산에서도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생산용으로 조금씩 나오는 연료를 빼돌려 청진에 와서 팔면 돈이 남았다.그 돈으로 속도전가루를 구입해 장마당에서 팔면 어느 정도 이문이 남았다. 17세 여대생이 장마당에 앉아 속도전가루를 파는 게 너무 부끄러웠지만, 굶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버텼다.하지만 이 삶도 오래가진 않았다. 청진에서 두만강 옆 무산까지 열차가 정상적으로 다니면 2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전기가 제대로 오지 않으면 기차에서 며칠을 보내야 할지 기약조차 없었다.장사하러 오가는 사람과 짐으로 열차는 미어터졌다. 객실을 콩나물시루처럼 꽉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열차 지붕에 앉아 가는 사람도 많았다. 먹지 못한 채 지붕에 며칠씩 있다 보면 착시현상도 일어난다. 기차가 달릴 때 부주의하게 허리를 세웠다가 고압선에 닿아 감전돼 죽는 사람도, 터널에 들어갈 때 미처 엎드리지 못해 터널 입구 벽에 부딪쳐 죽는 사람도 많았다.송 씨도 달리는 열차 지붕에서 떨어졌다. 열차가 흔들렸는지, 급제동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열차 높이와 선로를 받치는 자갈 더미 높이까지 감안하면 4~5m 높이에서, 그것도 달리는데 떨어졌으니 못해도 최소 불구가 돼야 맞겠지만, 정신을 차리니 천만다행으로 물이 고여 있는 진흙탕에 떨어져 큰 부상을 면했다.하지만 이 일로 혼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장사하며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한 학기 만에 학업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학기 지나고 나니 지방 출신 학생 태반이 그만두었다. 자퇴 절차 같은 것은 없었다. 대학에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대학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객화차원으로 새출발대학은 접었지만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배운 것도 있었다. 철도 신분증이 있으면 안전원들에게 단속되지도 않았고 물건을 빼앗길 우려도 없었다. 철도기관 입사가 목표가 됐다. 열차를 자주 이용하며 알게 된 몇몇 철도원들 도움으로 이듬해 18세에 무산 객화차대에 입사했다.객화차대는 종점인 무산에 들어온 열차를 청소하고 점검하는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낡고 더러운 열차를 청소하는 일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대신 보상이 있었다.북한 열차엔 객화차원 전용 칸이 있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르니 늘 타고 있는 정비원이 머무는 칸이다. 이곳은 열차 안전원들이 거의 단속하지 않았다. 객화차대도 배급을 주지 않는 처지라 직원들이 이 칸을 활용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객화차원 칸엔 40kg짜리 짐을 10개 정도 실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무산과 다른 지역을 다니며 물건을 날랐다. 식량을 싼 곳에서 사서 무산에 가져다 팔고, 무산에서는 중국 물품을 사서 남쪽 지역에 싣고 가 팔았다.어느새 그가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됐다. 가장이 되니 나이가 차도 결혼할 생각을 못했다. 그가 시집을 가면 가족을 먹여 살릴 사람이 없었다. 객화차대에서 2007년까지 일하는 동안 탈북을 원하는 사람 10여 명을 몰래 데리고 무산에 온 적도 있었다.남쪽 지역 사람들은 탈북하고 싶어도 두만강 지역에 연고가 없어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국경 지역으로 가려면 빨간 줄이 그어진 특별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 지역 연고가 없으면 받기 어려웠다. 무산에 도착한다고 해도 국경을 넘는 선을 찾아야 하는데, 거의 매일 진행되는 민가 숙박 검열을 피하기가 어렵다. 운 좋게 피한다고 해도 경비대가 촘촘하게 잠복한 두만강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그렇지만 송 씨의 객화차원 칸에 타면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검열을 피할 수가 있었다. 무산에 도착해서도 월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송 씨는 데려온 사람들을 객화차대 숙소에 머물게 해 숙박 검열을 피했다. 송 씨가 도와서 중국으로 간 사람들 중에 북송된 이도 있었을 테지만 다행히 누구도 송 씨 이름은 불지 않았는지, 그는 조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2007년 12월 휘발유를 단속에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송 씨는 지금도 북에서 열차를 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단속반 중엔 돈이 필요해 눈이 돌아간 사람이 꼭 있다. 객화차원 칸은 눈감아 주면서 일정한 뇌물을 받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가끔 장사 물품을 통째로 빼앗는 악질적인 단속반원이 나타난다. 객화차원은 을이라 항의할 수가 없다. 단속반원에겐 열차를 더 타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감옥에 보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장사 밑천을 빼앗긴 송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그 돈을 만들 능력도 없었다. 절망 속에서 그가 택한 길은 탈북이었다.● 국경경비대원의 조언낡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동창생 집으로 향했다. 그 동창은 중국에 건너가 결혼까지 해서 살다가 북송돼 국경경비대와 중국에 아는 선이 있었다. 다시 탈북할 기회만 보고 있던 그 동창은 송 씨에게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탈북할 돈이 없었는데 송 씨를 팔면 자신은 공짜로 묻어 갈 수 있다고 타산한 것이다.둘은 무산을 벗어나 두만강 상류 쪽으로 수십 리 올라갔다. 곳곳에 단속 초소가 있었지만 현지인이라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동창이 아는 국경경비대원이 야간 경비를 설 때 두만강에 나갔다. 상류인 데다 국경경비대만 아는 지점에서 건너니 물이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경비대원은 떠나는 송 씨에게 “중국 가면 나이를 25세 미만이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유리하죠”라고 조언해 주었다. 강을 건너니 경비대원과 미리 약속한 중국인들이 나와 있었다. 중국인들이 송 씨와 동창생이 쥐고 온 줄에 비닐로 꽁꽁 싸맨 돈을 묶자 강 건너편 경비대원이 줄을 당겨 가져갔다.둘은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와 깜깜한 집에 갇혔다. 동창은 중국 남편과 연락이 닿아 이틀 정도 있다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조선족 남성이 찾아와 송 씨를 차에 태웠다. 그가 송 씨를 산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이 남자가 아내와 함께 사는 아파트였다.경비대원 조언대로 25세라고 했다. 도착해 보니 20세~25세 미만 탈북 여성 넷이 있었다. 큰 방에 조선족 부부가 살고, 송 씨는 창문을 가린 다른 방에서 이 여성들과 함께 지냈다. 조선족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바탕 떠들었다.“나는 너희를 한족에게 시집보내지도 않을 거고 먹을 것도 충분히 주고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도 줄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남성은 밤에 이들을 차에 태우고 식당 서빙을 시켰다. 중국어를 모르니 방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다. 부부는 낮에 외출할 때면 아파트 현관문에 자물쇠를 채웠다.송 씨는 이 조선족이 왜 젊은 탈북여성을 사 모았는지 모른다. 단순히 식당 종업원 일만 시키려 했을 것 같진 않다. 송 씨는 온 지 한 달도 안 돼 탈출했다.● 몽골 사막을 넘어 한국으로다른 여성들과 얼굴을 익혀 친하게 됐을 때 20세인 막내가 말했다.“서빙하다가 한국 사람을 만났어요. 쪽지에 ‘저는 탈북한 사람인데 도와주세요’라고 적어 몰래 주었는데 그가 교회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었어요. 식당에 온 교회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아파트 문을 따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국에 보내 준다고 했는데, 언니들 생각은 어때요?”서빙할 때는 보통 조선족이 지키고 서서 손님들과 이야기를 못하도록 감시하는데 막내가 틈을 노려 구조 요청을 한 것이다.5명 중 3명이 찬성했다. 송 씨를 포함한 두 명은 망설였다. 비록 미래를 알 수 없어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쪽지를 써 놓고 오긴 했지만, 가능하면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그러자 다른 셋이 그들을 설득했다. 북송된 경험이 있던 한 여성은 북에 돌아가면 어떤 비인간적인 처우가 기다리는지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송 씨도 마음이 흔들렸다.며칠 뒤 조선족 부부가 외출했을 때 교회 사람 몇 명이 정말로 문을 열어 주었다. 다섯 명은 이들이 갖고 온 차를 타고 떠났다.송 씨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달려 어느 아파트에 들어가니 다른 탈북자 몇 명이 더 있었다. 내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몇 명씩 팀을 이루어 내몽골에 건너가면 다음 팀이 떠나는 식이었다.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순서가 빨리 오지 않았다. 2009년은 한국에 온 탈북민 수가 정점을 찍은 해였다. 그해에만 2913명이 입국했다. 한 팀이 떠나면 송 씨 일행은 다시 은신처를 옮기며 조금씩 내몽골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거의 여름이 다 돼서야 송 씨 순서가 왔다. 탈북 여성 5명에 더해 여인과 아이, 노인 부부까지 9명이 안내를 받으며 내몽골 국경을 넘어 몽골 땅에 발을 디뎠다. 철조망을 몇 개 지나니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다. 몽골 국경경비대에 체포되면 된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야 경비대가 나타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일행은 무더운 사막을 이틀 반이나 헤맸다. 한참을 걷다 떠난 곳으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다들 지쳐 더 이상 힘이 없게 되자 어디로 갈지를 두고 내분이 생겼다. 결국 서로 갈라졌다. 송 씨와 함께 도망친 여성 4명은 이쪽으로,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 부부는 저쪽으로 갔다.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고비를 몇 번 넘긴 뒤 국경경비대와 조우했다. 경비대 숙소에서 며칠 있다가 다시 울란바토르로 이송됐다. 다른 방향으로 떠난 4명의 운명을 걱정했는데, 그들도 이미 울란바토르에 와 있었다.열악한 울란바토르 수용소 생활은 6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탈북민 수감자들은 냄새 나는 쌀로 밥을 스스로 지어 먹어야 했다. 싹이 다 난 감자와 양배추가 부식으로 들어왔는데 된장도 없어 맹물에 소금만 쳐서 국을 끓여 먹었다. 물이 귀해 세수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칫솔도 주지 않아 양치질도 못 했다. 주몽골 한국대사관은 이들 처우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는 듯싶었다.한국에 가는 순서가 어떻게 짜였는지 알 순 없지만, 송 씨는 함께 온 4명보다 두 달 늦게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여서 심한 멀미에 시달려 토하느라 언제 인천공항에 착륙했는지도 몰랐다.● 고난의 정착남들 다 받는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에 가니 앞서 온 동료들은 이미 사회로 나간 뒤였다. 두 달 먼저 온 차이는 컸다. 송 씨는 하나원을 나가면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그의 기수 128명에겐 서울 임대주택이 4채만 나왔다. 그 두 달 전엔 이거소다 많이 나왔다고 들었다. 서울을 포기하고 울산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울산이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다. 일자리가 많은 곳이 어딘지 물으니 울산에 공단이 있어 취업 확률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울산을 노린 탈북민도 많았는지 추첨에서 떨어졌다. 어디를 다시 신청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담당 선생이 자신이 알아서 넣겠다고 했다.그에게 광명시가 배당이 됐다. 바로 임대주택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6개월 동안 한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2009년 2월 하나원을 졸업한 송 씨는 서울 신림동 교회에서 마련한 숙소로 옮겼다. 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다른 탈북민 5명과 함께 원룸에서 반년을 살았다.하나원을 나와서 한 첫 번째 일은 세무학원 등록이었다. 자격증이 있어야 취업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세무회계 자격증을 따고 취업도 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한 퀵서비스 회사에서 세무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가 뽑혔다. 다른 한국 여성도 지원했지만 왜 그가 뽑혔는지 1년쯤 지나 알았다. 당시엔 탈북민을 고용하면 월급의 절반까지 50만 원 한도 내에서 3년 동안 지원하는 고용보험제도가 있었다. 그의 첫 1년간 월급은 1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50만 원만 주고 그를 쓸 수 있었다.회사는 직원이 100명 넘었고 사무실 직원도 20명쯤 됐다. 그곳에서 3년을 일했다. 아니, 버텼다. 회사 특성상 전화받을 일이 많았는데 말투가 이상하다며 온갖 불만이 쏟아졌고, 장난전화도 수시로 걸려 왔다. 먼저 전화하면 보이스피싱이냐며 끊는 사람도 많았다. 말투를 고쳐야겠다고 언어 교정 학원까지 다녔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집으로 받은 광명시 하안동 영구임대주택에서 회사까지 출근 시간도 거의 2시간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입국할 때 54kg이던 몸무게가 1년 뒤 44kg로 줄어 영양실조 직전이 됐다. 진짜 고난의 행군인 듯했다.그럼에도 버틴 이유는 정착지원금 때문이었다. 당시 탈북민은 한 직장에서 3년을 일해야 정착지원금 1800만 원가량을 전액 받을 수 있었다. 도중에 좋은 직장을 알게 돼 이직하면 정착금은 사라졌다. 한국을 전혀 모르는 탈북민이 당장 굶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취업한 곳에서 3년 동안 강제로 일하게 만드는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정착금을 많이 주면 브로커들이 뜯어 간다는 이유였는데 탈북민 원성이 커지자 이후엔 3번 정도 회사를 옮겨도 받을 수 있게 바뀌었다.● 처음 만든 봉사단체3년 동안 열심히 일해 정착지원금을 다 받자마자 그는 광명시청 임기제 공무원으로 이직했다. 한국 사회를 점점 알게 되면서 더 좋은 직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정착지원금이란 족쇄 때문에 옮겨갈 수 없었다.2012년 10월 그가 시청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 꾸준히 공부해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자격증을 7개나 따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청에서 사회복지 업무를 맡았다.시청에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동네 탈북민 다섯 명과 함께 탈북민 집을 청소해 주는 봉사단체를 전국 최초로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이 계기였다. 지금은 탈북민 정착 지원을 돕는 하나센터가 전국에 있어 해당 지역에 오는 탈북민 집을 미리 청소하는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당시엔 그런 것이 없었다.하나원을 나온 지 6개월 만에 21㎡(약 7평) 임대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새 삶에 대한 기쁨보다 절망감을 더 크게 느꼈다. 벽지는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온 집안에 담배 냄새가 심하게 배어 있었다. 화장실도 들어가기 끔찍할 정도로 더러웠다. 관리사무소에 벽지라도 새로 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규정상 5년이 돼야 해 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소를 도와줄 수 있냐고 했더니 입주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전입신고를 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야 알고서 전입신고를 하려고 나섰는데 동네 지리를 모르니 코앞에 있는 동사무소(주민센터)를 찾지 못해 몇 시간을 헤매다 다른 동사무소로 찾아가기도 했다.송 씨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탈북민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은 최소한 집에 신발은 벗고 들어가서 짐을 풀고 첫 밤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 동네에 사는 탈북민들에게 그런 뜻을 전하니 흔쾌히 그러자고 나섰다. 이후 광명에 오는 탈북민들은 깨끗이 청소된 집에 들어가 첫날을 보낼 수 있었다.● 평범한 이웃의 조언광명시청에 입사한 직후 결혼을 해 가정도 꾸렸다. 한 살 위인 남편은 한국에 와서 처음 만난 남자였다. 성수동 회사에 다닐 때 탈북민 조사 용역 업무를 하러 온 남편을 처음 만났다. 한국 사회를 거의 모르는 송 씨가 조언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다 정이 들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연애만 하면 결혼하는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결혼하자는 자신의 말에 남편이 머리를 끄덕여 줘서 망정이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2017년엔 딸도 태어났다. 욕심 같아선 아이를 더 많이 키우고 싶었지만 하늘이 한 명만 허락했다.딸이 태어난 이듬해 경기도 시흥에 있는 10년 공공임대주택 청약에 당첨돼 새집에 이사할 수 있었다. 비록 크지 않고 외진 곳이지만 내 집이 생겨 만족감이 크다. 하지만 이사를 가야 했기에 광명시청에선 더 이상 일하기 어려웠다. 관내 거주자를 우선 고용한다는 암묵적인 규정 때문에 2022년 10월, 근무 10년을 채우고 퇴사해야 했다.1년도 안 돼 한국교통안전공단 상담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임기제 공무원과 달리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면접도 4차례나 보는 등 입사 기준이 까다로웠지만 갖고 있던 자격증 7개가 높은 점수를 받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도 그는 여러 봉사단체에 가입해 휴일에도 봉사활동에 나선다. 커피 봉사를 하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뒤 목감복지관 등에서 노인을 위한 커피 부스도 운영한다. 한국 사회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맞벌이 가족으로 정착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많이 배웁니다. 북에서는 가정교육이란 말도, 부모 교육이란 말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이가 유치원과 학교에 다니면서 인성 교육을 비롯해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것을 보며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도 저런 교육을 일찍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하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나니 한국은 잘 될 수밖에 없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앞으로 무엇을 공부할지도 정했다. “사회복지 담당 업무를 10년 동안 하면서 탈북민 가정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탈북 여성 혼자 애를 키우며 일을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치돼 분리불안장애를 앓는 자녀가 많습니다. 북에서 선생님이 될 뻔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아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자격증을 따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한국에서 16년을 산 그에게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탈북민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하자 손사래를 쳤다.“크게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것을 이룬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도 꼭 한마디 해 줘야 한다면,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의 바닥까지 갔을지라도 포기하지 말라고요.그 순간이 지나 나중에 돌아보면 다 나의 뼈와 살이 되는 과정, 면역을 키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얻은 삶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와도 이 고난 뒤엔 어떤 보상이 기다릴까 기대하면서 살아갈 겁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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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도 핵잠수함을 건조한다는데… 이번엔 어떤 괴물이?[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갑자기 남북 사이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 경쟁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나는 한국이 현재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전날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위한 핵연료 공급 결단을 요청한 데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지도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로 확정됐습니다.한국이 빠른 시일 내에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해 운영한다면, 핵추진 잠수함을 가진 7번째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핵추진 잠수함을 가진 나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 더해 인도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핵보유국인 6개 국가는 핵추진 잠수함이 핵무기 발사 플랫폼 역할도 수행합니다. 한국만 원자로에서 잠수함 추진력만 얻는 유일한 국가가 될 예정입니다.하지만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 핵추진 잠수함 보유국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호주가 203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최소 3척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죠.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도입이 2030년대 중반이 된다면 호주가 7번째 국가가 됩니다.여기에 다른 변수가 또 있습니다. 북한이 올해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3월 6일 북한은 김정은이 5000t급 이상으로 추정되는 잠수함 건조 현장을 방문하는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만약 북한이 5~6년 내로 핵추진 잠수함을 만든다면, 호주보다 앞선 세계 7번째 핵추진 잠수함 보유국이 되는 셈이다.여기에 더해 북한은 이미 전술핵공격잠수함을 만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추진력은 디젤 엔진에서 얻지만, 잠수함에 핵미사일을 탑재해 발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3년 9월 북한이 진수식을 가진 전술핵공격잠수함 ‘김군옥영웅함’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김정은이 2021년 1월 8차 노동당 당대회에서 “새로운 핵잠수함 설계 연구가 끝나 최종 심사 단계에 있다”고 밝힌 지 불과 2년 반 만에 만든 것입니다.북한이 핵추진 잠수함까지 완성한다면, 이는 당연히 핵무기까지 탑재한 핵추진 잠수함이 될 것입니다. 이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도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북한이 핵추진 잠수함 운용에 성공하면, 한국은 현재 보유한 디젤 잠수함으로 이를 막기 어려워집니다. 핵추진잠수함은 디젤 연료로 움직이는 재래식 잠수함보다 속도가 2배 이상 빠르기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이런 점 때문에 김정은도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의 계획대로 핵추진 잠수함이 실제로 건조되면, 이는 핵무기에 못지않은 또 다른 엄청난 위협입니다.하지만 조선업 최강국인 한국도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데 10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 상황에서, 과연 북한이 몇 년 안에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성공할 수 있을지엔 많은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핵 잠수함2022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로미오급을 포함한 70여 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고 적시돼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70여 척의 잠수함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은 잠수함 숫자에 있어서 세계 최강국 반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척의 잠수함을 보유한 한국 해군에 비하면 숫자로선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하지만 질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북한이 보유한 최대 크기의 로미오급 잠수함은 1700톤급인데 1950년대 구소련이 연안 방어를 위해 도입한 것입니다.북한은 1971년에 중국이 운영하던 로미오급 잠수함을 중고로 처음 들여왔고, 이후 돈이 될 때마다 몇 척씩 추가로 수입했습니다. 나중에는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조립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약 20척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잠수함의 핵심 전력 로미오급은 잠수가 가능할지조차 모를 ‘환갑이 넘은’ 고물들입니다.2년 전에 진수식을 가진 김군옥영웅함도 낡은 로미오급 잠수함을 두 동강 내서 가운데에 무려 10개의 미사일 수직 발사관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가뜩이나 고물 잠수함에 엄청 무거운 미사일 수직 발사대를 끼워 넣는 식으로 만들다 보니 무게 중심이 맞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김군옥영웅함은 진수한지 2년이 넘었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여기에 북한은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유도탄(SLBM)을 발사하는 사진도 공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미 ‘북극성’이란 이름이 붙은 SLBM을 개발했다고 선언했고, 열병식에도 빠지지 않고 들고 나와 자랑하고는 있습니다. 또 바다에서 발사하는 사진까지도 공개했지만, 실은 이것이 물속에 설치한 바지선에서 발사한 것일 뿐입니다.김정은은 외국 무기의 외형만을 복제하는데 성공해도 신형 무기를 만들었다고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성격을 감안할 때 김군옥영웅함에서 SLBM 발사가 성공했다면 몇 달을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동네방네 선전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김군옥영웅함이 공개된 뒤, 이 잠수함이 잠항 후 계속 기포가 발생하거나 밑으로 가라앉고, 수면에서 함체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 수리 중이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북한을 위성을 통해 감시하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올해 7월 위성사진을 통해 김군옥영웅함이 진수 이후에도 거의 가동되지 않고 부두에 머물렀다고 분석했습니다.김군옥영웅함에 앞서 북한은 2015년 1월에도 SLBM 수중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고 사진까지 공개하면서, 이 잠수함을 ‘8·24 영웅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잠수함도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이후 행적이 묘연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핵추진 잠수함잠수함을 두 동강 내 가운데 미사일 수직 발사관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핵추진 잠수함 건조에 비하면 매우 간단한 작업입니다. 이 작업도 제대로 못한 북한이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니 과연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핵추진 잠수함은 어마어마한 몸값과 유지비 때문에 웬만한 국가는 공짜로 줘도 운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핵 추진 잠수함의 건조비는 10억 달러를 훌쩍 넘습니다.세계에서 제일 비싼 핵추진 잠수함은 미국이 갖고 있습니다. 미국의 수중배수량 9000톤급 씨울프급 잠수함은 1척당 건조비가 30억 달러 넘습니다. 수중 배수량이 7900톤급인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은 초기엔 1척당 건조비가 24억 달러 정도였지만, 이후 스텔스 기능 등 각종 첨단 기술이 적용되면서 지금은 40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런 핵추진 잠수함을 미국은 약 70척 정도 운용합니다. 미국은 제일 좋은 것은 다 갖다 쓰며 최고 성능을 지향하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도 싼 것은 아닙니다.러시아 주력 야센급 핵잠수함은 수중 배수량 1만3800톤급인데, 1척당 건조비가 12억5000만 달러입니다. 미국의 반값에 못 미치긴 하지만, 그래도 10억 달러가 넘습니다. 인도가 6000톤급 핵잠수함 3척을 건조하는데 든 돈이 29억 달러로, 1척당 10억 달러가 들었습니다.한국도 노무현 정부 시절 4000t급 핵추진 잠수함 3척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비밀리에 진행했는데, 1척당 건조비를 1조2000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해도 10억 달러쯤 되는데, 20년 전 물가임을 감안했을 때 지금은 훨씬 더 든다는 의미입니다.결론적으로 말하면, 핵추진 잠수함 하나 가지려면 최소 10억 달러씩 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핵추진 잠수함은 한 척으로는 제 기능을 못 합니다. 실제 용도에 맞게 쓰려면 기본 3척을 만들어 운용해야 합니다. 한 척이 바다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면, 한 척은 대기해야 하고, 나머지 한 척은 정비를 받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무기 운용의 원리는 세계 모든 군대에 적용이 됩니다.전자시계도 만들지 못하는 북한이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숱한 부품과 자재를 자체로 조달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싸게 잡아 1척당 5억 달러의 자재가 들어간다고 해도, 이는 북한이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북한은 대외 무역의 90%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적자 규모는 2022년 12억7000만 달러, 2023년 21억4000만 달러입니다. 무역을 해도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쌓이는 상황인 것입니다. 북한 해커들이 아무리 가상화폐를 많이 훔쳐 상납한다 한들, 무역에서 진 빚도 갚기 어려운 형편입니다.여기에 더해 잠수함은 돈만 있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선 건조에서 최고 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잠수함입니다. 수상함과는 달리 협소하고 한정된 공간에 수많은 관과 전선, 무장 체계 등이 복잡하게 설치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장비 하나만 바뀌어도 관련 체계 설계를 연쇄적으로 변경해야 합니다.또한 수중 작전 환경에서 승조원 안전 등을 고려한 압력선체 건조 기술도 뛰어나야 합니다. 핵추진 잠수함은 여기에 더해 작은 공간에서 원자로까지 운영해야 하니 건조하기가 훨씬 까다롭습니다. 북한이 1700톤급 잠수함을 조립한 경험도 있고, 이에 기초해 1996년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타고 왔던 300톤급 상어급 잠수정은 만들어본 일이 있지만, 수천 톤급 잠수함은 또 다른 영역의 도전입니다.북한이 잠수함에 설치해 운용할 수 있는 소형 원자로를 만들 능력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소형 원자로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깜깜한 암흑 속에 사는 북한 도시들에 전기를 공급하는 원자력 발전소 정도는 이미 만들어야 했지 않을까요.핵추진 잠수함은 또 건조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유지비 때문에 웬만한 국가는 ‘줘도 못 먹는’ 처지에 빠집니다. 미국은 항공모함 유지비가 1년에 1억5000만~2억 달러 정도 드는데, 핵잠수함은 2억7000만 달러에서 3억 달러 사이 유지비가 듭니다. 즉 핵추진 잠수함은 항공모함보다 돈을 두 배 더 잡아먹는 하마라는 뜻입니다. 이걸 북한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북한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니 김정은이 만든다는 핵추진 잠수함이 너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들고 나올까요. 김군옥영웅함처럼 거하게 자랑 한 번 하고 사라질 고물을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탕진하는 것은 아닐까요.● 잠수함 부대의 악몽잠수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북한 잠수함 관련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 몇 개를 추가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북한 해군은 동해와 서해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서해를 지원하기 위해 동해 함대들이 한반도 남쪽을 에돌아 갈 수도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잠수함 전대도 서해와 동해에서 각각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해의 잠수함 전대는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4전대)와 함남 리원군 차호노동자구(5전대)에 몰려 있습니다. 서해는 황해남도 과일군 월사리에 잠수함이 주력인 10전대와 11전대가 있습니다. 물론 부대 명칭들은 최근에 바뀌었을 수가 있지만, 주력 기지들은 여전히 같습니다.서해 잠수함 기지들이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면, 동해 기지들은 잠항하자마자 깊은 수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대신 상대도 미리 깊은 입구에 비밀리에 잠항해 있다가 공격하기도 유리합니다.북한군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군인들은 두 부류인데, 비행기 조종사와 잠수함 승조원들입니다. 식량, 육류, 기름, 당과류 등 공급 기준이 북한군에서 제일 높습니다. 그래 봐야 한국 사람들이 볼 때는 기초생활수급자의 밥상보다 못합니다.북한 해군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대형 참사 3개 중 2개가 잠수함 부대에서 발생했습니다. 2013년 10월 중순 동해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375t급 구잠함과 200t급으로 추정되는 경비정이 며칠 시차를 두고 침몰해 70여 명의 해병들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김정은은 이들의 묘소를 직접 찾아 자기의 이름을 상주로 비석에 새길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수상함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입니다.잠수함 관련 대표적인 사고는 1985년 2월 20일 함남 신포 앞바다에서 기지로 귀환하던 1700톤급 로미오급 잠수함이 부상하던 도중 수천 톤급 대형 상선과 부딪쳐 침몰한 일입니다. 50여 명의 승조원이 함께 수장됐습니다. 북한은 소련 태평양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인양에 실패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잠수함은 여전히 바닷속에 있습니다.또 다른 사고는 1983년 10월 황해도 과일군 월사리 잠수함 11전대에서 일어났던 ‘김선동 사건’입니다. 제대를 앞둔 평양 출신의 중사 김선동은 군의소 간호원과 연애하다가 들켜, 부대원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비판받고 처벌까지 받게 됐습니다. 10년을 복무하고 불명예 제대하게 되자 화가 난 김선동은 자신이 분대장으로 있었던 잠수함 전대 병기창에 들어가 자폭을 선택했습니다.목격자들에 따르면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착각할 정도로 버섯구름이 200m 이상 솟구쳐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병기창 갱도엔 한 발당 가격이 100만 달러가 넘고, 장약량도 수백㎏이 넘는 어뢰만 100발 이상 있었고, 거기에 기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다 보니 병기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병기창 경비병과 근무조 40여 명이 죽었습니다. 북한 해군으로선 지우고 싶은 악몽일 수밖에 없습니다.물에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의 고물 잠수함들에, 연료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훈련도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김정은은 전술핵공격잠수함이나 핵추진 잠수함으로 잠수함 전력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고 힘을 쏟고 있습니다.여기에 한국도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고 있다면, 그의 경쟁 심리는 더 불타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최신 잠수함 건조는 투쟁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잠항 상태에서 SLBM을 발사하는 김군옥영웅함의 사진부터 먼저 공개하면 북한의 잠수함 건조 능력을 조금은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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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집단 최면의 비밀[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파블로프의 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내자, 나중엔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린다는 것이다.19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러시아 생리학자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이 실험을 통해 원래 관련 없던 두 자극이 연합될 때 같은 반응이 일어나는 ‘조건 형성’을 증명했고, 현대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파블로프의 개는 인간 심리나 학습 과정에 대한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불행하게도 이 연구의 의미는 독재자들이 먼저 깨달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은 파블로프를 불러 연구를 정리해 달라고 했다. 3개월 뒤 파블로프가 가져온 40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레닌은 하루 만에 다 읽었다.이튿날 파블로프를 부른 레닌은 매우 감격한 표정으로 “이로써 혁명의 미래가 보장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레닌은 이를 대중 심리 조작 기술로 간주했다. 심리 조작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특정 동작을 하도록 세뇌하는 걸 의미한다. 종만 울려도 침을 흘리는 개처럼, 인간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레닌이 파블로프 연구의 가치를 알아본 지 100년이 넘었다. 만약 파블로프가 다시 살아 온다면 자신을 뛰어넘는 심리 조작 기술을 발휘하는 곳을 발견할 것이다.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침을 흘리는 단계를 넘어 인간 전체를 집단 최면에 걸리게 하는 심리조작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왜 집단체조를 계속 할까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일에도 북한은 집단체조와 열병식을 진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하지 못하다 5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한국 언론은 북한이 수십만 명을 동원해 집단체조나 광장 열병식을 계속하는 이유를 잘못 분석한다. 국력 과시용이라고도 하고, 외화벌이를 위해서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집단체조에 평양 인구 약 200만 명 중 대략 10만 명이 동원된다. 인구 1000만의 서울로 치면 어린이와 젊은이 50만 명이 최소 6개월 동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한자리에 모여 간단한 동작을 무한 반복 연습한다.국력을 키우려면 이들을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외화벌이용도 틀린 말이다. 외국인이 오지 않아도 집단체조와 열병식은 늘 한다.북한이 대규모 군중 행사를 지속하는 진짜 이유는 파블로프의 개에서 찾아야 한다.기자는 김일성대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에 김일성광장에서 배경대(카드섹션하는 사람들)도 해 봤고 행진대도 해 봤다. 잠깐이지만 열병식 훈련에도 참가해 봤다. 배경대 훈련 실례를 하나 들어 보자. 9월 9일 공화국 창건 기념일을 위한 배경대 훈련은 6월 중순 시작됐다. 오전 5시부터 일어나 식사하고 광장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어갔다.광장 바닥에는 수만 개의 점이 찍혀 있다. 가로세로 약 70㎝ 사각형 모서리마다 60-132, 156-30 하는 식의 숫자가 붙어 있다. 각자에게 점 하나씩이 배당됐다. 석 달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자리다.훈련은 매우 간단했다. 광장 주석단 지붕 가운데와 양 끝에 세 명의 신호수가 올라가 있다. 이들이 동시에 1부터 8까지 적힌 커다란 숫자판을 들면 우리는 3가지 종류의 꽃다발을 신호가 바뀔 때까지 쳐들고 있어야 했다. 가령 1번이 올라가면 빨간색 꽃다발을 들고, 2번은 노란색 꽃다발, 3번은 둘 다 같이, 5번은 빨간색 꽃다발을 열심히 흔드는 식이다. 자신이 서 있는 점에 따라 번호별로 다른 색 꽃다발을 들어야 했다. 그러면 김일성광장에 ‘김정은 장군 만세’ ‘경축’ ‘일심단결’ 따위의 글씨가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머리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이 8가지 동작을 익히는 데 드는 시간은 한나절도 안 된다. 그럼에도 이 같은 단순 동작을 3개월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되풀이했다.김일성광장 대리석 바닥은 한낮이면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힌다. 그늘도 없고 물도 없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불판에 올린 생고기 신세였다.사방에서 사람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졌지만, 주변 백화점 건물이나 지하차도로 데리고 가 그늘에 눕혀 놓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그래도 치유되지 않으면 그 점은 다른 사람이 채웠다. 살이 익어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쓰라렸다. 그러나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십만 명이 집단체조나 열병식, 군중 시위에 동원돼 광장에서 독재자를 위한 하나의 점으로 3~10개월을 존재해야 했다. 단순한 훈련도 3개월 하면 사람이 바뀐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선다.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면 엄격한 자아비판과 호상비판, 연대책임과 추가 훈련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에서 벗어나거나 이질감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된다.집단체조는 유치원생까지 참가한다. 평양에서는 집단체조에 참가해 보지 않은 학생을 찾기 어렵다. 왜 아이들을 6개월 넘게 간단한 훈련만 시키는가. 이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파블로프의 개처럼 세뇌하기 위해서다.김 씨 일가에겐 평양이 제일 중요하다. 지방 도시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더라도 평양에서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 1970년대부터 출신성분이 나쁜 시민은 지방으로 추방하고,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을 뽑아 평양 시민으로 만들었다.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다는 것은 김일성의 말을 꼭두각시처럼 추종하는, 무식하고 말 잘 듣는 DNA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체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머리 좋은 DNA는 외진 유배지로 끌려갔다.세뇌에 취약한 계층으로 평양을 채워 넣고도 부족해 김 씨 일가는 집단체조를 통해 끊임없는 세뇌를 이어간다. 지방 반란은 군대가 진압하면 된다. 어쩌면 도시를 몽땅 쓸어버리고, 주동자의 8촌까지 멸족해 반역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양이 반역하면 큰일이다. 평양은 김 씨 일가 안전에 직결되는 도시다. 평양까지 봉기할 정도면 군도 제대로 통솔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군 열병식도 핵심 병력을 끊임없이 파블로프의 개로 세뇌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본질을 알게 되면 왜 북한이 엄청난 인력을 낭비하며 집단체조를 계속하는지, 열병식을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씨 일가가 평양 시민과 군을 파블로프의 개로 세뇌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평양 집단체조와 열병식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 사이비 종교의 본질은 같다파블로프의 개는 종과 먹이만 있으면 침을 흘린다. 하지만 인간의 세뇌는 개보다는 훨씬 어렵고 정교해야 한다. 특히 대중 전체를 세뇌하기 위해선 파블로프 실험을 훨씬 넘어서는 정교한 대중 심리 조작 기술이 동원돼야 한다.북한 노동당 최고 인재들이 동원된 대중 세뇌 기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기자는 북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큰 기술 몇 개는 체험에 기초해 이해할 수 있다.대중을 세뇌시키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즉 정보가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외부 정보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당에서 주입하는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북한이 왜 개혁·개방이란 말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지, 끊임없이 폐쇄 정책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김정은이 최근 몇 년 동안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청년교육보장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만들어 외부 정보를 접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외부 세상을 알게 되면 하나의 사상이 주입되지 않는다. 파블로프의 개도 가만히 누워 있는 옆집 개가 더 맛있는 먹이를 먹는다는 것을 안다면 누워 있으려 하지 종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두 번째로는 신비성을 조작해야 한다. 당이나 지도자는 신 같은 특별한 존재로서 신비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방법은 사이비 종교 교주들도 쓴다. 자기는 대중을 구하는 신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세 번째는 대중에게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하게 만든다. 자기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비판하고 폭로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서로 연대감을 높인다. 북한에서 생활총화와 호상비판을 계속 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네 번째로 이념 주입 단계에서 이념을 성스러운 과학으로 만든다. 이념을 의심하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죄로 인식시킨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김 씨 일가가 왜 자기 이름으로 어려운 철학사상 논문을 계속 발표할까. 바로 이념을 성스러운 과학으로 만들어야 대중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은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놓이도록 교육한다. 사회주의를 위해선 자기 한목숨 서슴없이 바치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교육만 해선 대중이 따르지 않는다. 상벌이 있어야 한다. 생존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준다. 동시에 죽음을 불사하며 지시를 따른 자에겐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사상 개조를 거부하고 지도자나 당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가족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전장에서 포로가 되기 보다 자폭 같은 행위를 하면 가족까지 책임져 준다는 당근을 주는 것이다.이런 원리는 북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신자들을 세뇌한다. 중동 자폭 테러범도 똑같은 과정과 방식으로 세뇌된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와 파시즘, 사이비 종교는 세뇌 방식이 모두 똑같다.● 정교한 사상 주입 과정사상을 주입하는 방식도 정교해야 한다.우선 사람을 주변과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한 뒤 정보 입력을 극단적으로 제한하거나 과잉 주입시켜야 한다. 정보가 극단적으로 부족해 감각 차단 상태에 놓인 사람에게 입력하고자 하는 정보를 과잉 주입하면 뇌가 잘 받아들인다. 북한 매체에서 하루 종일 ‘김정은 원수님’ 타령을 하는 것이 이 같은 원리다.옛 소련에서는 오랜 기간 격리되고 정보 유입이 제한된 정치범이 취조관 기분에 맞춰 자신의 죄를 꾸며낼 뿐 아니라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 일도 일어났다. 감각 차단 상태에서 생기는 심리 조작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둘째, 뇌와 육체를 지치게 만들어 딴생각할 여유를 빼앗아야 한다. 북한 당국이 왜 쥐꼬리만 한 배급 때문에 굶주린 인민을 ‘100일 전투’니 ‘200일 전투’니 하며 쉬지 않고 내몰고, 생활총화와 각종 강연회로 정신없이 들볶는 이유다.심리 조작에서 제일 필요한 부분이다. 딴생각할 겨를없이 들볶으면 사상이 쉽게 주입된다. 대중을 피곤하고 지친 상태, 즉 결핍과 불안에 빠지게 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빼앗고 나면 이제 핵심 세뇌 과정으로 연결된다.지도자나 이념을 따르면 영생이 기다린다고 주입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거치면 사람들은 지도자를 위해 육체와 재산을 서슴없이 바치려는 심리 조작이 완전히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원리를 알면 북한이 제대로 배급할 형편도 못 되면서 왜 장마당을 폐쇄해 인민을 배급에 의존하게 만들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배급제가 존재한 지난 반세기 넘는 기간 북한 인민은 한 번도 배 부르게 배급을 받아 본 일이 없다. 북한이 제일 잘 살았다는 1970년대 초반에도 한 달 배급을 받으면 늘 2~3일 분량이 모자라 동네를 돌며 식량을 꿔 먹게 만들었다.이는 비단 북한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 사이비 종교나 일부 다단계 사업체도 모집한 사람들을 먼저 폐쇄된 방에 가둬 잠을 재우지 않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든 뒤 세뇌한다. 북한과 사이비 종교 원리는 같다. 기업이나 단체 연수원들이 왜 외진 곳에 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북한 김 씨 일가는 소련과 중국에서 배운 정교한 대중 심리 조작 기술을 80년 가까이 활용해 인민을 세뇌해 왔다. 김정은 얼굴만 봐도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북한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가 세뇌됐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국처럼 모든 정보가 열려있는 사회에서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데 하물며 폐쇄된 북한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북한 인민이 당한 세뇌는 깰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이 죽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이 죽지 않는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어야 할까. 그렇진 않다.세뇌의 첫 단계, 외부와의 접촉 차단부터 풀어야 한다. 북한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이 북한 인민을 세뇌에서 구원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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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팬티’ 북한군[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군이 씩씩하게 행진했다. 주석단에서 중국과 러시아 2인자를 옆에 두고 선 김정은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북한군이 입은 최신 전투복이나 각종 장비를 보고 “언제 저런 것을 도입했나. 대단하다”라고 분석할 남쪽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 옷과 장비는 행사용일 뿐이다. 행사가 끝나면 다음 열병식을 위해 벗긴다. 실제 북한군 복장 상태는 전혀 다르다. 북한군 병영을 무작위로 가 본다면 상거지가 따로 없다. 태반이 삐쩍 마른 몰골에 군복은 누더기에다 발가락이 드러난 신발을 신고 있을 것이다. 병력 자원이 없어 키 143cm, 몸무게 45kg 이상이면 무조건 입대시키는 현실이나, 얼마나 많은 군인이 영양실조와 싸우고 있는지는 더 말하지 않겠다. 북한군 피복에만 집중하려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군사분계선 북쪽에 차단물 공사를 하는 북한군들이 출몰한다. 남쪽에서 촬영한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새 군복을 입고 나왔다. 그래 봐야 한 달만 햇볕을 받으면 색이 누렇게 변한다. 천 재질이나 염색 수준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새 군복은 입었지만 바지를 벗기면 장담컨대 70% 이상이 ‘노팬티’일 것이다. 북한군 피복 규정에 따르면 군인은 1년에 광목천으로 만든 것과 흡사한 흰 ‘면 빤쯔(면 팬티)’ 두 벌을 공급받는다. 땡볕에서 며칠만 일하면 면으로 된 천은 땀에 젖어 쉽게 찢어진다. 더 큰 고통은 땀에 젖은 팬티가 정신없이 말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북한군엔 서혜부 탈장(헤르니아) 환자들이 많다. 못 먹어서 복근은 약해졌는데 고된 육체노동을 시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많은 군인은 사타구니까지 말려 올라간 팬티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팬티 입기를 더 싫어한다. 세탁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다. 일주일 입은 새까만 팬티라 할지라도 마를 때까지 잘 지켜야 한다. 안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훔쳐 간다. 팬티 같은 복장 검열은 엄격해 장마당에서 일반 팬티를 구입해 입으면 심각한 규정 위반이다. 없는 게 차라리 낫다. 팬티가 누더기가 돼도 버리질 못한다. 1년에 딱 두 벌뿐이니 귀하게 재사용해야 한다. 북한군은 양말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발싸개라 불리는 광목천으로 발을 둘둘 감싼다. 발싸개도 1년에 두 번 주는데 팬티 같은 흰 면 재질이다. 발싸개를 하고 천과 고무로 만든 군화인 ‘지하족’을 신는다. 신발 내부 저질 고무에 쓸려 며칠 만에 발싸개가 까맣게 변한다. 그래도 버릴 순 없다. 겨울에는 발싸개를 해도 발이 시려우니 팬티를 발에 감는다. 그것도 모자라면 발에 비닐을 더 감는다. 팬티를 보면 다른 피복도 알 수 있다. 여름 군복은 1년에 한 번, 겨울 군복은 2년에 한 번 준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제때 공급받지 못할 때도 많다. 여름 군복 한 벌을 7개월 넘게 입어야 한다. 한 번만 빨면 색깔이 누렇게 변하고, 몇 달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이 해어진다. 취사 당번을 서면 나무를 해 와야 하는데, 누더기처럼 된 면은 나무 가시에 약간만 스쳐도 쭉쭉 찢어진다. 농사와 공사가 일상인 북한군은 바늘과 실을 항상 군복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다가 찢어지면 바로 기워야 한다. 군인 규정에 그렇게 적혀 있다. 힘든 공사판에 동원된 군인들을 보면 수용소 수감자로 착각할 것이다. 신발은 1년에 여름 신발 두 켤레, 겨울 신발 한 켤레를 준다. 규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제대로 주질 못한다. 군모는 5년에 한 개 준다. 최근까지 북한군에서 10년 가까이 복무한 탈북민은 “동내의는 입대할 때 한 번밖에 입지 못했다”고 했다. 남은 것은 군 간부들이 빼돌려 장마당에 팔았을 것이다. 여성 군인들 사정도 상상해 보시라. “뭔 소리. 김정은이 시찰할 때 보니 다들 멋있는 군복을 입었던데”라는 반박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모든 부대에는 행사용 군복 보관 창고가 따로 있다. 김정은이 오면 꺼내 입고, 가면 다시 벗어 보관한다. 우크라이나 파병 북한 군인들은 각설이 행색에서 해방돼 좋은 팬티와 옷을 입게 됐다고 죽기 전까지 좋아했을 것이다.“전쟁에 만반으로 준비된 백전백승, 미제와 대적할 무적의 군대”라고 자랑스럽게 연설하는 김정은은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저기요. 애들 팬티부터 좀 입혀요.”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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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쌍십절은 어떻게 북한 노동당 창건일로 둔갑했을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본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10일은 북한이 기념하는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되는 날이다. 정주년(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을 중시하는 북한 특성상 당 창건 80주년 기념일은 올해 최대 명절로 간주한다. 이날 북한에선 열병식을 비롯한 성대한 행사가 열린다. 관련 보도도 그동안 많이 나와 남쪽에서도 10월 10일이 북한 노동당 창건일인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하지만 1945년 10월 10일에 북한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10월 10일은 중화민국(대만) 국경절이다. 대만은 1911년 우창 봉기를 기점으로 한 신해혁명이 시작된 10월 10일을 건국 기념일로 여기고 매년 10월 10일(쌍십절)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대만 쌍십절이 어떻게 조선노동당 창립일로 둔갑했을까.● 조작된 ‘인민의 생일’북한이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이라고 주장한 것은 1958년부터다. 그해 3월 노동당 제1차 대표자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에서 종파가 완전히 청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남로당, 연안파, 소련파를 완전히 숙청한 김일성은 이때부터 노동당의 역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13년 전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누구도 김일성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게 된 것이다.북한은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설립 대회가 열렸으며 이 대회에서 김일성이 ‘우리나라에서의 맑스-레닌주의당 건설과 당의 당면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 선전하고 있다.올해 3월 7일 북한 노동신문은 ‘위대한 조선로동당의 성스러운 80년 혁명영도사를 긍지 높이 펼친다’는 장문의 기사를 통해 10월 10일이 조선 인민의 참다운 생일이라고 주장했다.“우리는 오늘 조선 인민의 참다운 생일은 조선로동당이 자기의 탄생을 선포한 1945년 10월 10일이라고 당당히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날과 더불어 우리 인민의 존엄과 영예, 행복과 미래, 한없이 고귀하고 소중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하지만 북한이 말하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은 곧 ‘부인해야 할 역사의 사기’일 뿐이다.조선노동당이 창당된 날은 1945년이 아닌 1949년 7월 1일이다. 그해 6월 30일부터 7월 1일까기 평양 모란봉 회의장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남로당과 북로당이 통합돼 조선노동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통합 사실을 숨기다가 이듬해 6·25전쟁을 일으킨 뒤에야 공개했다.그렇다면 조선노동당 전신 북조선노동당은 언제 창건됐을까. 1946년 8월 28일부터 북한에 노동당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날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은 합당을 선언하고 당명을 북조선노동당이라고 지었다.그럼 북조선공산당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946년 6월 22일이다. 이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을 연고로 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한다. 서술조차 복잡할 만큼 조선노동당의 탄생 배경은 어지럽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1945년 10월 13일이다. 하지만 이때 북조선 분국은 김일성이 만든 것이 아니다.이날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리고 북조선 분국이 결성됐지만, 책임비서엔 김용범, 2비서엔 오기섭과 무정이 임명됐다. 북조선 분국은 그해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에 분국 형태로 나온 조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1945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로 임명됐다.10월 10일은 위에서 언급한 날짜 중 어느 것과도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10월 10일로 노동당 창건일을 조작했을까.중국에서 살았던 김일성이 쌍십절을 좋아해 그날을 노동당 생일로 지정한 것은 아닐까 싶지만, 확인할 바는 없다. 김일성이 북한에 단독 정부를 세운 날짜가 1948년 9월 9일, 일명 ‘구구절’이다. 아마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일은 ‘9·9’, ‘10·10’이라는 상징 조작에 당첨된 날짜일 가능성이 높다.● 토를 달 수 없는 역사노동당 생일까지 조작하는 북한이니 다른 것은 얼마나 쉽게 조작할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북한은 오랫동안 북한군 창건일을 4월 25일로 기념해 왔는데, 1932년 4월 25일에 김일성이 중국 안도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인민혁명군은 해방 전까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 군사 조직이다. 중국공산당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 인민’을 내건 군사 조직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32년 4월에 20세 김일성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더 나아가 북한은 김일성이 14세 때인 1926년 10월 17일에 만주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10세 이상 청년들을 부하로 지도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역사 조작을 밥 먹듯이 하는 북한도 정확히 인정하는 날짜가 있다.1945년 9월 19일에 김일성이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고, 9월 22일 평양에 입성했다는 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을 인솔해 평양까지 전투를 벌이며 당도했다고 조작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김일성이 소련 군함으로 왔다는 사실은 김일성 회고록에도 실려 있어 이제 와선 부인할 수 없게 됐다. 북한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다며 양복을 입고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이날 비로소 대중에게 김일성이란 이름을 공개했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것도 실제 역사와 다르다. 이날 열린 대회 명칭은 ‘소련군 환영 평양시 민중 대회’였다. 이날 소련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온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소련군을 입이 마르게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 물론 나중에 북한은 사진에서 소련 훈장과 소련군들을 삭제하고 김일성 혼자서 주석단에서 환호를 받으며 연설하는 듯 조작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 상식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국이 공개한 사실만으로도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평양에 들어온 지 20일도 안 된 김일성이 개선 연설도 하기 전에 익명으로 노동당을 창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하지만 북한에서 ‘수령님의 혁명 역사’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거나 토를 다는 일은 정치범이 되는 일이기에 누구도 말할 수는 없다.그렇게 해가 가면서 역사는 왜곡되고 굳어졌다. 북한 주민들은 출처도 없는 ‘참다운 생일 10월 10일’을 위해 올해 내내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피로 쓰는 ‘조선노동당사(堂史)’ 노동당의 역사는 피의 역사이기도 하다. 반세기 넘게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북한 사람들은 노동당을 김일성이 창건해 빨치산 부하들과 함께 이끌어 온 역사라고 인식한다.북한 주장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노동당의 뿌리라 인정한다고 쳐도, 그 분국의 초대 책임비서가 김용범이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북한 주민은 거의 없다.김용범은 김일성보다 10세 많은 1902년생으로 소련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평안도에 잠복해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몇 차례 구속되는 등 북한에선 손 꼽히는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북한에 진주한 북한군이 대놓고 김일성을 밀어 주면서 그는 두 달 뒤 제2비서로 밀려났고, 1947년 9월에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도 조용히 처형됐다.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결성된 뒤 회의 참가자들은 박헌영에게 이런 축전을 보낸다.“소련 붉은 군대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유리한 조건이 실현된 조선에서 박헌영 동지의 정당한 노선에 따라 북조선5도 연합회의를 개최하게 된데 대해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인 소련방 스탈린 대원수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조선무산계급의 영도자 박헌영 동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수령 스탈린 대원수 만세, 조선의 무산계급의 수령이신 박헌영 동지 만세. 1945년 10월 13일.”공산주의자들에게 1945년 10월 당시의 수령은 박헌영뿐이었던 것이다.6·25전쟁 이전에 열린 북한노동당 회의 참석자 명단을 보면,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이름을 알만한 빨치산 출신은 10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이후 10명 중 9명이 처형돼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어디 그뿐인가.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 대한 숙청은 현재진행형이다. 김정은이 격노할 때마다 많은 간부가 죽어 간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진 간부가 얼마나 많은지 누구도 알 수 없다.이런 노동당 역사를 북한은 ‘승리와 영광으로 아로새겨진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자랑하고 있다. 북한이 말하는 승리의 역사는 곧 처형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패자는 죽어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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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노동당 영화과가 선택한 인재, 따뜻한 남쪽 나라 감독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올해 7월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화센터 대강당에선 연극 ‘백학’이 초연됐다. 연극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북한 인민군 포로가 돼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 국군 소위와 하사의 삶을 그렸다. 70대 고령이 된 두 전우는 조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탈북을 시도하다 적발돼 목숨을 잃는다.“내 고향 남쪽으로 가고 싶다. 내 꿈은 언제 이루어지나.”백학은 시베리아 동토에 머물다가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겨울 철새 두루미를 말한다. 북한 최북단에서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오고 싶어 하는 국군 포로들의 희망과 좌절이 공연 내내 관객 가슴을 흔들었다.백학 극본과 연출은 탈북민 출신 오진하 감독이 맡았다. 연극엔 그가 살아온 인생이 녹아 있었다. 아니, 오 씨가 살아온 길은 연극보다 더 극적이었다.● 인민군에 끌려간 세브란스 학생오 씨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쪽에서 북으로 끌려온 의용군 출신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친은 서울에서 세브란스의과대학에 막 입학한 상태였다. 부친의 형 역시 세브란스의대 3학년이었다.형제의 아버지, 즉 오 씨의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군 부자였다. 부친 말에 따르면 영양군 감천리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땅 대부분이 할아버지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을 서울에 유학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인민군이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형제는 피난 갈 새도 없었다. 당시 학교 교수들은 군 트럭에 실려 북한으로, 학생들은 강원도 철원으로 끌려갔다. 철원에서 3일 동안 총 쏘는 법만 가르친 뒤 의용군이라며 전선으로 내몰았다.부친은 견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소속 대대를 열심히 따라갔는데, 대전에 도착도 하기 전에 대대가 전멸했다. 그날 부친이 식당 근무에 뽑혀 나무하러 가느라 숙영지를 떠났을 때 국군이 습격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2명뿐이었다.부대가 없어지자 부친은 고향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가는 도중 산에서 또 인민군에 잡혀 1사단으로 끌려갔다. 북한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끈 국군 1사단과 싸워 거의 궤멸당한 부대다. 부친은 전투도 해 보기 전에 미군 전투기 기총소사에 맞아 다리를 크게 다쳤다.부친은 차에 실려 중국 단동에 있는 북한군 중앙병원으로까이송됐다. 오랜 입원 생활 끝에 얻은 것도 있었다. 병원 간호사였던 모친과 사랑을 키운 것이다.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퇴원했다. 세브란스의대의 권위는 북한에서도 인정받아 부친은 김일성대에 입학하게 됐다. 낮에는 건설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다 소련 유학생으로 뽑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소련군 태평양함대에 파견돼 군함 기관실 일을 배웠다. 북한으로 돌아온 부친은 원산 제1함대가 조성될 때 기관 담당 기술자로 발탁됐다.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 한인들이 처음으로 귀국할 때 동원된 선박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물선이었는데, 부친은 그 배에서 소련 군인들과 일했다. 하지만 소련의 신원 검증은 엄격했다. 부친은 고향이 남쪽이란 이유로 곧 평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부친의 다음 일은 새로 건설된 평양종합방직공장 기술자였다. 오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공장 노동지도원이었고, 모친은 공장 탁아소 보육원이었다.함께 인민군에 끌려간 부친의 형도 전쟁에서 살아남아 유학생으로 선발돼 독일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직속 818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818연구소는 화학과 생물 특히 세균을 전문 연구했는데, 외형상으론 주사 약품을 개발한다고 했다. 군사위원회에 소속된 진짜 이유는 관련 분야 무기화 연구로 추정된다. 오 씨는 큰아버지가 생체 실험 관련 독일어 서적을 늘 들여다봤고, 가끔 부친과 만났을 때도 생체 실험 관련된 끔찍한 이야기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연구소 연구원 대부분은 과거 일본이나 한국, 외국에서 공부했거나 고향이 남쪽이어서 출신 성분이 나쁜 수재들이었다. 군 계급은 소좌부터 대좌까지였는데, 평양 시내에서 경무부대원들이 깍듯이 인사했던 것으로 봐서 특별한 신분증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수상했던 아버지의 삶오 씨가 태어난 평양 선교구역은 거대한 방직공장 마을이었다. 공장은 직원만 1만2000명이었고 면적은 67만㎡, 건물 넓이는 15만㎡에 이르렀다. 산학협동 시범 기업체로서 자체 기술기능공학교와 공장대학도 운영했다. 공장 직원 자식들은 커서 대개 부모를 이어 방직공장 노동자로 일하라고 권유받았다.부친은 공장 법규 지도원 겸 공장 소속 공산대학 철학 강좌장을 겸하고 있었다. 오 씨 눈에 비친 부친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김일성 사상으로 무장했어야 마땅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공책에 뭔가 계속 적었다. 그러다간 어느 날 내용이 적힌 종이를 쭉쭉 찢어 아궁이에 불태웠다.부친이 뭘 적는지 궁금했던 오 씨는 가끔 공책을 훔쳐봤는데, 어린 그가 봐도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반동 사상’임이 분명했다. 어느 날 부친은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을 훔쳐보니 전쟁 때 누가 죽었다는 기록밖에 없었다. 이런 수기나 일기는 가택수색을 당했을 때 죽음을 부르는 증거이기 때문에 부친은 숨겨 놓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아버지와 어울리는 사람도 전부 6과 대상이었다. 6과는 남쪽 출신과 일본 귀국자를 맡아 관리하는 부서를 말한다. 이들은 모여 술을 마시다가 북한 체제를 비판했고 “왜정 때도 이보다 나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체제 비판적인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남쪽 출신은 남쪽 출신끼리 사돈을 맺었다. 출신 성분이 나쁜 ‘까치’끼리 어울린 것이다.평생 고향을 그리던 부친은 1997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의 형도 2년 앞선 1995년에 63세로 사망했다. 오 씨는 부친과 큰아버지가 ‘고난의 행군’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오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수륙양용 장갑차를 몰다1980년에 만 16세가 된 오 씨는 평양산업기술고등중학교 졸업반이 됐다. 8월 졸업을 앞두고 3월 어느 날 수업 중에 불러내더니 입대하라고 했다.그가 배속된 부대는 113중도하여단이었다. 여단 산하 선견도하(상륙작전 또는 침투작전 시 먼저 투입되는 수륙양용차)와 개척 공병, 진지 공병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 중 오 씨는 ‘까연대’ 소속이었다. ‘까’는 러시아말로 K를 의미한다. 까연대는 소련제 K-61 수륙양용장갑차를 운용했다. 1개 소대원이 서서 모두 탈 수 있는 이 장갑차의 자체 방어 능력은 형편없어 5.56mm탄도 관통할 정도였다.그래도 북한에선 귀하고 비싼 장비를 다루다 보니 이 부대에서는 신병 훈련도 1년이나 했다. 다행인 점은 주둔지가 대동강 옆 평양시 대성구역 안악동에 있다는 것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오 씨는 신병 훈련 6개월째에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수륙양용장갑차 운전병 양성소에 파견됐다. 양성소 학제는 1년이었다.오 씨가 양성소에서 부대를 관찰하니 ‘기본 중대’인 까연대 7대대 1중대에 가야 입당도, 승진도 빨랐다. 기본 중대는 김일성이 현지 시찰했다는 중대여서 대원 선발도 까다로워 양성소 최고 성적을 받아야 했다. 최고만 엄선한 중대라 상부에서 훈련 판정을 나오면 기본 중대가 출동했다.기본 중대에 뽑히는 것을 목표로 한 오 씨는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며 훈련했다. 양성소를 졸업할 때 동기 217명 중 2명만 선발하는 기본 중대 대원이 됐다.그가 부운전수로 발령받은 115호 장갑차는 1968년 평양 대규모 수해 때 김일성이 타고 시내를 순찰한 차량이었다. 일명 현지 지도 차였다. ‘김일성 사적물’이기 때문에 늘 세워 두고 정비만 했다. 도하 훈련 때는 다른 차량을 운전했다.115호 장갑차 운전병은 엄청난 영예였다. 다른 부대에서 참관을 오면 오 씨가 차량의 ‘혁명역사’를 해설해 주었다. 보상도 확실했다. 제대할 때 중앙대학 추천을 받았다. 오 씨 앞길은 탄탄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운명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예성강 도하훈련 우승자1985년 8월 15일, 부대 에이스로 인정받고 분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장갑차를 몰고 광복절 기념 대규모 열병식에 참가했다. 김일성광장을 통과하며 주석단을 쳐다보니 김정일이 총참모장인 오극렬 귀에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주석단과 시내를 통과해 부대로 복귀하려는데 갑자기 지시가 떨어졌다. 장갑차를 몰고 황해도 배천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배천에 가 보니, 그의 부대는 4군단 직속으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다.김정일이 수륙양용장갑차 부대를 보고, 저 부대는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남진해야 하는 부대이니 평양에 두지 말고 최전방에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새로운 주둔지는 허허벌판이었다. 강 건너에 한국 해병대 2사단이 있었다. 북한은 6·25전쟁 때 이곳을 통해 북한군 최정예 부대 방호산의 6사를 도하시켰다.새 병영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4군단 소속이 되면서 새로 파견 나온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이 수륙양용장갑차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대 초급단체위원장을 겸했던 그는 어느 날 군단에 올라갔을 때 군단장을 직접 찾아갔다.“새로 부임한 군관들이 부교 도하부대 출신이라서 수륙양용차 같은 중장비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륙차 전문 지휘관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자 중장인 군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부대 전투력을 생각하는 기특한 분대장이구먼” 하더니 문제의 지휘관 몇 명을 변경 배치하는 조처를 해 주었다. 옆에 있던 군단 정치위원도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직접 하라”며 격려했다.이듬해인 1986년 가을 예성강에서 도하작전 훈련이 있었다. 각종 악조건을 가정하고 누가 가장 빨리 돌파하는지 시간을 쟀는데 오 씨가 운전한 장갑차가 1등을 했다.군단 정치위원이 그를 알아보더니 옆에 있던 참모장에게 “이 동무에게 일주일 휴가를 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북한군은 전군에서 휴가 제도를 없애고 사망 또는 결혼식만 3일씩 휴가를 줄 때였다. 엄청난 특혜를 받은 오 씨는 모처럼 평양 집에 와서 휴식을 취했다.● 눈앞에서 본 수백 명의 죽음군단 정치위원 눈에 든 뒤로 군 생활은 다시 잘 풀렸다. 7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하게 됐는데 입당 보증인이 군단 정치위원이었다. 입대 8년 차엔 사관장이 됐다. 사관장은 중대에 한 명만 있는 계급으로 하사관 중 제일 높았다.사관장 시절이던 1988년 2월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 어느 날 그에게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후방 지원 물자(주민들이 군대에 지원하는 식품, 의류품, 노동보호물자)를 갖다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평양-개성 고속도로는 1987년 건설을 시작했는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됐다. 그는 차에 물자를 싣고 공사 최대 난관이던 금천군 다리 건설 현장에 갔다. 무지개처럼 생긴 긴 아치형 교량이었다.다리 아래 늘어선 군인 천막에 도착하니 물자를 받을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맨 끝의 식당으로 쓰는 천막에 가 보니 막 차려 놓은 수백 명분 밥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취사병들이 밥을 지어 놓고, 200m 정도 떨어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부대원들을 데리러 간 듯싶었다.기다리려고 담배를 꺼내 피우는데 갑자기 엄청난 아우성이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쳐드니 짓고 있던 교량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공사 기간을 맞춘다며 겨울에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또 몰탈을 붓다 벌어진 사고였다. 다리 위에 바글바글하던 군인들도 추락했다. 몰탈도 함께 흘러내려 시신 찾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 있던 군인 100여 명이 맨손으로 몰탈을 헤치며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들것들이 오는 것을 보니 형체 없는 살점들만 실려 있었다. 한참 지나 구급차들이 왔다. 오 씨는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아 버렸다.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현장에 차마 갈 생각을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른 막사로 가서 부대에 전화했다.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개 대대쯤 몰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지금도 김이 올라오던 그 알루미늄 밥그릇들을 잊을 수가 없다.● 부유했던 운전기사의 삶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1990년 10월, 제대를 앞두고 김일성대 생물학부에 추천을 받았다. 여단 전체에 1장만 할당되는 김일성대 추천권을 그가 받은 것이다. 추천을 받는다고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대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김일성대 시험 합격은 부대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고위 간부 자식이거나 김 씨 일가 호위병 출신은 빈 시험지를 내도 붙지만, 일반 군단 출신에 남조선 혈통인 그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만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제대하고 집에 오니 대외경제사업부 해외물자공급소장 운전사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없는 인맥을 다 동원해 힘써 준 덕분이었다.공급소는 노동당 직속 의사당재정경리부 지시를 받아 해외에서 물자를 사 오거나, 해외 공관에 각종 물자를 보내 주는 일을 담당했다. 가령 김정일의 특각(별장)을 지을 때 중동 최고 카펫, 유럽 호화 샹들리에 등을 구입하는 것이다.사치품이라 해서 마음대로 수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와 사진을 내밀며 “이것이 장군님이 추천한 것”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돌며 꼭 그 물건을 찾아내야 했다. 이렇게 달러를 주무르는 부서 책임자의 운전사는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였다.하지만 소장 운전사 자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군에서 중대를 인솔하고 지시하다가, 갑자기 간부 발바닥을 핥아야 하는 일이 내킬 리가 만무했다. 공급소 직원들은 대개 평양외대나 국제관계대 등을 졸업한, 고위 간부 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외국 출장을 다니고 평양에서 제일 비싼 외화식당만 찾아다녔다. 공급소에 점심을 싸 오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이 뿔뿔이 차를 타고 외화식당에 가서 먹고 오고, 퇴근 후에도 돈 있는 사람끼리 또 외화식당에 가는 것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 보였다.반년쯤 소장 운전사를 하다가 이직을 선택했다. 이번에 얻은 직업은 지방공업부 일용공업총국 운전기사였다. 알고 보니 최고의 직장이었다.총국은 전국의 화장품이나 신발 공장 같은 생필품 공장에 자재를 공급했다. 지방 공장들에는 갑 중의 갑으로 행세했다. 전국의 공장 지배인들이 자재를 받겠다고 총국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돼지를 몇 마리씩 싣고 오거나 담배, 술 같은 뇌물을 잔뜩 준비해 왔다.총국 운전기사로 있는 동안 육류나 술 같은 것은 늘 넘쳐났다. 2년 정도 어느 간부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93년 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이 직장도 그만두었다.● 공포의 숙청 광풍1993년 12월, 그는 평양 간리역에 가서 화물열차에 실린 자재를 싣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화물차 여러 대가 역 앞에 늘어서 화물열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견장도 달지 않은 군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 30~40명이 오더니 “당장 대가리 박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앞에서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켜져 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이게 뭐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데 화물열차가 들어왔다. 차들을 비추던 불빛이 잠시 화차로 옮겨간 틈을 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엿보았다. 화차에서 머리에 마대 같은 것을 쓴 20명 가까운 남성들이 꽁꽁 묶여 짐짝처럼 던져지고 있었다. 옷을 보니 풍채 좋은 고위 군관들이 분명해 보였지만 신발도 신지 않았다. 오 씨를 감시하던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들을 차에 싣고 사라졌다. 훗날 들으니 그들은 소련 유학파 고위 군관을 대규모로 숙청한 ‘프룬제 군사대학 사건’에 휘말려 평양에 송환된 군관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공포에 질렸다. 물자를 받으려 수없이 와야 했던 간리역이 갑자기 지옥처럼 느껴졌다. 무자비하게 겁을 주며 뒤를 보지 말라고 명령하던 인간들 모습이 자꾸 어른거리고 그들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이곳 아니면 벌어먹을 데 없겠나’하는 생각에 다시 직업을 옮겼다. 이번에는 중앙당 38호실 소속 고려봉사지도국 택시 운전기사였다. 고려호텔과 양각도호텔 앞에 택시를 세워 두고 손님을 태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실상 차를 세워 놓고 빈둥거리는 일이 잦았다.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버리진 않았다. 다른 대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가 가고 싶은 대학은 평양영화연극대학 연출과 하나뿐이었다.오 씨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공연하는 것을 즐겨 했다. 군에서도 방송 원고를 많이 썼고, 충성의 노래 모임을 할 때면 늘 중대를 우승시켰다. 장래 희망도 연출가였다. 꿈을 놓지 않으니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은 군 사관장 출신은 특별히 당에서 관리한다. 인원 100명이 넘는 중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인재였기 때문이다.1994년 봄, 당 비서가 그를 불렀다. “중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동무를 평양영화연극대학에 입학을 추천했으니 다음 주에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는지 어리둥절했다.군에 있을 때 인민군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한 덕분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시 “꼭 영화연극대학에 가서 연출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는데,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그 인터뷰를 봤는지 “이 사람이 쓸 만해 보이는데 공부를 한번 시켜 보자”고 결정 난 것이다. 대학 입학이 결정된 뒤 위에서 시킨 대로 “당의 배려로 남조선 출신 자녀도 차별 없이 최고의 기회를 받는다”는 감사의 말을 수없이 하고 다녔다.● 탈북을 꿈꾸다1994년 4월 영화연극대학 첫 개교일이 왔다. 학교가 전투 동원령을 하달 받은 듯 어수선했다. 교실에도 들여보내지 않고 입학생들을 모아 놓더니 소대(반)별로 벼 뿌리를 캐 오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식량이 부족해 벼 뿌리를 대용 식량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소대에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무엇을 가져올 수 있을지 개인별로 물었다. 누구는 석탄을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여자 기숙사 천장 수리용 목재를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휘발유를 가져오기로 했다. 오 씨는 목재에 칠할 래커와 시너를 가져오겠다고 했다.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가져올 능력이 없는 사람은 대학 청소를 하거나 농촌 동원에 나가야 했고, 갖고 온다고 하는 사람은 2개월 동안 놀게 했다. 그는 농촌 동원 기간이 끝날 때까지 놀다가 래커와 시너 한 통씩을 갖고 올 생각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물자는 구하는 놈만 구해 올 뿐, 갖고 가지 않아도 처벌은 없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 집에서 놀았다. 5월이 지나고 6월에 들어서니 다들 당장 남북통일이 될 듯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어디 가나 흥분제 먹은 사람들처럼 ‘곧 수령님께서 김영삼과 회담하고 통일을 선언한다’고 수군거렸다. 동시에 불안한 소문도 같이 돌았다. 여기저기서 체포되어 사라진 사람이 많아졌다.동네 술친구들도 갑자기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 씨는 제대 후 동네 30대 초반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보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오갔다. 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기 시작했다.가까운 사이인 제대 군관 형이 먼저 사라졌다. 보위부 소좌인 친구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하니 그도 침울한 표정으로 “나도 오늘내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며칠 뒤 소좌도 사라졌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출근길에 군관 3명에게 계단에서 연행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두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특별재판소에 끌려가 처형됐다고 한다.가까운 주변 사람이 하나둘 잡혀 가니 ‘나는 언제 끌려갈까’ 불안해졌다. 연출 공부고 뭐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안 되겠다. 하루빨리 북한을 떠나야겠다.’그는 지도를 구입했다. 두만강으로 갈까, 압록강으로 갈까. 중국에 넘어가면 어딜 갈까. 당시는 본격적인 탈북도 이뤄지지 않던 때라 한국에 갈 생각까진 못했다.대학에선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찾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평양고려병원에 입원했다. 대학에 가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병상에 누워서도 도망갈 생각뿐이었다.평양고려병원은 백이 좋아야 입원하는 곳이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노동당 재정경제부 부부장 아들과 친해져서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그의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집이 궁궐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정일이 하사한 선물이 가득했다. 사우나가 있는 집은 처음 봤다. 거실 간식 바구니엔 외화 다발이 가득했는데 필요한 만큼 지갑에 넣고 나가면 다시 돈이 바구니에 채워지는 식이었다.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부장 아들도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본 미야타 자전거였다. 당시 평양에선 구할 수 없었다. 탈북 경비가 필요하던 오 씨는 만경봉호가 입항하는 원산항에 있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겨우 미야타 중고 자전거를 200달러에 구입했다. 부부장 아들은 수고했다며 1000달러를 주었다. 탈북 자금이 마련됐다. 언제 도망갈지만 결정하면 됐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7월 9일 정오에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것.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됐다. 병원 원장이 오더니 “수령님이 돌아가셨는데 편하게 병실에 누워 있을 수는 없다”며 당장 퇴원해 소속 기관으로 돌아가라고 했다.오 씨는 10일에 퇴원했다. 15일쯤 평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인연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인사나 하자는 생각으로 찾아다니다가, 보위부가 사람들을 체포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일성 죽음 직전에 보위부 내부에선 숙청 광풍이 불고 있었다.김일성이 죽기 몇 년 전부터 호위사령부와 보위부, 중앙당 사람들은 김일성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이는 김정일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과시하는 것이었다.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확정되자, 김정일은 더욱 불안해졌다. 비밀경찰조직 보위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충성할지 떠봐야겠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보위부 간부들에게 통일관을 적어내게 했다.눈치 없이 배운 대로 “수령님 대에 꼭 조국을 통일하겠습니다”라고 적어낸 간부들은 얼마 뒤 모두 군복을 벗어야 했다. 김정일이 “이런 놈은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숙청 바람은 김일성이 죽은 날부터 더 심해졌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수령님이 서거하시니 우린 어떻게 합니까”라고 울부짖은 간부는 바로 옷을 벗었다. “비록 수령님은 서거하셨지만, 우리에겐 김정일 장군님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살 수 있었다. 중앙당 조직부가 책임지고, 보위사령부를 칼잡이 삼아 보위부를 감시하고 잡아갔다. 보위부가 제 코도 닦지 못할 상황이 되니 탈북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애도 기간 평양 시민은 출근하면 직장별로 조문하고 퇴근해선 가족 단위로 조문하고 주말에는 당세포 단위로 조문했다. 눈을 뜨면 조문했다.탈북을 꿈꾸느라 몇 달 동안 대학에 가지 않으니 퇴학 처리가 돼 있었다. 2000년 말 탈북을 다시 결심하고 중국으로 갈 때까지 오 씨는 평북에서 군(郡)당학교를 다녔고, 졸업 뒤엔 지방공장 체험 등을 하며 지냈다. 중국에선 3년 가까이 숨어 살며 한국행을 모색했다. 2003년 9월 제3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평양에선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연출 공부를 다시 해서 꼭 영화, 연극 연출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 대학로 무명 배우로 시작조사를 마치고 2003년 12월 서울 강서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오로지 그의 결심에 달렸다. 연출을 하고 싶고 연출가로 이름을 남기고 죽고 싶었지만 나이 40세에 아무런 경력도 없이 관련 분야에 뛰어들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먹고 살려면 돈도 벌어야 했다.그는 한 시사주간지 기자로 정착의 첫발을 뗐고, 모 대북 방송 리포터 활동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명을 써도 어떻게 그의 신분을 알았는지 북한에서 협박 문자가 여러 번 날아왔다. 북에 남은 가족이 걱정돼 기자 일은 2006년까지 하다 그만두었다. 그의 목표는 연출이지 기자는 아니었다.직장을 다니며 짬짬이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자본주의 제작 현장’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참관이 아닌 제작자로 일하고 싶었는데, 2004년 10월 지인의 도움으로 기회가 찾아왔다.그는 북한 인권을 다룬 단편 독립영화 ‘너는 내 것이라’를 만들었다. 원작을 쓰고 제작까지 책임졌다. 낯선 전문 용어가 어려워 선배 감독들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구하면서 제작팀을 꾸렸다.꼬박 2개월 동안 첫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얻은 경험이 이후 그가 제작자, 연출자, 극작가의 길을 걷는 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밑천이 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돈을 벌 수는 없었다.‘영화나 연극을 하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7년부터 대학로에 진출했다. 무명배우로 시작해 10년 넘게 작은 연극의 단역, 주연, 미니 드라마 단역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주말이나 연휴엔 대형 트럭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열심히 살다 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2012년 9월 김나윤 희원 극단 대표가 그를 찾아왔다. 그와 많은 얘기를 하며 재 보는 듯하더니 창작 뮤지컬 ‘언틸 더 데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달라고 했다. 대본을 보니 수억 원이 투자되는 대형 상업 뮤지컬이었다.오 씨는 뮤지컬 성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뮤지컬은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공연됐는데 매회 350석 객석이 가득 찼다. 뮤지컬 성공과 더불어 오 씨 이름이 언론과 방송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연출가로서 공식 데뷔를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뜻 뮤지컬을 맡겨 준 김 대표에게 언제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뮤지컬을 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부족한 점도 많이 깨달았다.‘한국에서 뮤지컬을 하려면 한국만의 정서를 익히고 전문 지식도 많이 필요하구나.’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하려 했지만 어느덧 50세였다. 2014년, 고민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공연예술 학사 과정과 영상미디어학 석사 과정을 연이어 마쳤다.한편으로 북한에서 왔다는 독특한 경력도 적극 활용했다. 2010년부터 그를 찾아와 북한말의 극적 화법을 배운 배우만 90명이 넘는다. 이들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스타도 여럿 있다. 2019년부터는 전국 말모이 연극제 이북 작품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불태울 열정오 씨는 한국에 도착해 20년 넘게 한 길만 달려왔다. 탈북할 때 품었던 연출의 꿈은 입국 10년 안에 이뤘고, 15년쯤 지났을 땐 기획과 제작 경영 그리고 극작도 겸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영화, 연극, 뮤지컬은 물론 연주회나 방송 컨텐츠까지 기획하고 각본을 쓰며 연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020년 56세 늦은 나이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새로 건립된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문화콘텐츠 개발 확산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엔 매년 연극, 뮤지컬, 단편 드라마를 한 편씩 만들 생각이었지만 지난해부터 욕심이 생겼다. ‘하나를 만들어도 국내 최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자. 마지막을 불태우자’지난해 60세가 되어 한국에 입국하던 39세 때의 열정으로 되돌아간 그가 만든 작품은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 과정을 담은 ‘열 번째 봄’이었다. 지가을엔 남북연합 음악회인 가을음악회 기획, 제작, 연출을 맡아 부산에서 공연했다.올해도 연극 ‘백학’을 7월에 초연했다. 그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백학엔 그의 삶도 녹아 있다. 이달엔 경기 김포에서 가을음악회를 연다.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세월은 야속하다. 올해 그는 61세가 됐다. 은퇴할 나이지만 여전히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언제까지 일할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능력 있는 후배가 와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기간이 길진 않지만 아쉬움도 많다.“제가 여기서 일하는 5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남북통일 공감문화 관련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는 예술가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현실과 법의 충돌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다름 아닌 그다. 한국 국민은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북한 대중음악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콘텐츠를 상영하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 북한 영화를 보여 주면서 북한 실상을 설명하고 싶지만, 이를 승인할 권한을 가진 공무원은 없다. 그렇다고 막는 사람도 없다. “네가 알아서 하고 책임도 져라”는 것이 공무원 사회 풍토다. 법을 위반하면 잡혀 가는 현실을 감내하고 영화를 상영할 순 없다. 연출가는 예술적으로 접근하고 싶은데, 이것이 행정규제와 부딪치면 이길 수 없다. 배가 산으로 가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다.그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5년은 극과 극을 오가는 대북정책 속에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해결책을 찾느라 진이 빠진 기간이기도 했다. 퇴직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다. 은퇴는 곧 죽음이다. 자판을 두드릴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전문 예술인이 되고 싶어 하는 탈북민을 키워 주고도 싶다.“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공연예술 계통에 몸을 담지 않았습니까. 배웠던 것들, 체험했던 경험 들을 다른 탈북민들에게 나눠 주고 싶습니다.”그가 만든 연극에는 탈북민 연기자들이 늘 출연한다. 가수도 될 수 있으면 탈북 가수를 쓰려고 한다. 재능 있는 탈북민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 가수, 성악 등 2명씩 탈북민 예술가를 데뷔시키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목표다. 그는 역사 앞에 평가받는 심정으로 임한다.“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통일이 된 뒤, 꿈을 찾아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온 오진하가 이렇게 꿈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고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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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구축함에 붙은 방탕하고 잔인한 이름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은 올해 두 척의 5000톤급 구축함을 진수했습니다. 4월 25일 남포조선소에서 ‘최현호’가 진수식을 가졌고, 6월 12일엔 나진조선소에서 두 번째 구축함 ‘강건호’가 진수했습니다. 강건호는 앞선 5월 21일 함북 조선조선소에서 김정은이 참가한 진수식 도중 넘어져 화제가 됐던 군함입니다.이들 구축함들이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고, 어떤 성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자력 항해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그럼에도 북한은 5000톤급이나 되는 군함을 자체로 만들었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자랑하고 싶은가 봅니다. 실패한 강건호 진수식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의 진수식에 김정은이 참가해 밤늦게까지 대대적인 경축 공연을 펼쳤습니다. 한국은 구축함이나 잠수함에 역사적 인물이나 국가에 공헌한 인물의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함께 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올해를 시작으로 매년 같은 배수량의 구축함을 두 척씩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내년엔 또 다른 이름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북한이 평양에 조성한 대성산혁명열사릉엔 모두 140여 명의 항일 투사들이 묻혀 있는데, 이 중 15명의 반신상은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중심으로 열사릉의 제일 꼭대기에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15명을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꼽으면 림춘추, 최현, 최용건, 김경석, 류경수, 안길, 김책, 김정숙,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 오진우입니다. 그러니 내년부터 만들어질 군함의 명칭은 예상이 되는데, 가령 안길이나 오중흡의 이름이 선정되겠죠.열사릉이 만들어진 때는 1975년으로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즉 김일성이 직접 뽑은 특별한 15인입니다. 그런데 이 15명 중에서도 김정은은 최현을 1번으로 뽑았고, 강건을 2번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방탕아의 대명사 최현과 아들들최현은 1907년에 길림성 훈춘 현에서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던 최득권의 아들로 태어나 1984년 75세에 사망했습니다. 최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5년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1932년까지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출소 후 최현은 연길 유격대에 입대했고, 연대장까지 했습니다. 당시 빨치산 연대는 많을 땐 200명까지, 적을 땐 100명 미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최현 부대는 용감했고 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하지만 용감성과는 별개로 최현은 죽을 때까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일성을 넘진 못했습니다.동북항일연군이 1940년대 초반 소련으로 들어가 88독립여단으로 개편됐을 때, 김일성은 대위로 1대대장을 맡았고, 최현은 상위로 중대장을 맡았습니다. 88독립여단 시절 김일성과 같은 대위급이었던 조선인은 1대대 정치위원 안길, 2대대 정치위원 강건(본명 강신태), 3대대 정치위원 김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여단장과 정치부여단장엔 중국인인 주보중과 이조린이 임명됐습니다.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온 최현은 1948년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 여단장을 맡아 한국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6·25전쟁 직전 처벌을 받아 강등됐다가, 전쟁이 시작된 뒤 2사단장, 2군단장을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민족보위성 부상, 1958년 체신상, 1969년 민족보위상, 1976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습니다.김일성보다 나이가 5살이 많았던 최현은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말을 놓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을 “일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은 최현에 대해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 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불같은 성격을 지닌 그는 무식하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김일성의 독재와 아들로의 권력 세습을 적극 도운 인물입니다.1956년 8월 노동당 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 세력들이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장에서 김일성의 유일 독재에 반발하자, 최현은 권총을 뽑아 들고 회의장에 들어가 “당장 쏴 죽인다”고 호통을 쳐 반대파들을 진압했다고 합니다.또 1972년 김일성이 자신의 환갑잔치에서 “누가 내 뒤를 이으면 좋겠냐”고 말하자, 최현이 앞장서서 “당연히 장남이 해야 한다”고 김정일을 밀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세습은 큰 반발을 부르는 민감한 일이고, 최용건 등 김일성의 빨치산 전우들도 반대했지만, 최현이 앞장서서 아들 세습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이렇게 김정일로의 세습에 큰 공로를 세운 최현은 자신도 세습의 열매를 배 터지게 따먹었습니다. 최현의 두 아들은 북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골’이 됐습니다.최현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부친입니다. 최현은 빨치산 시절에 김철호와 결혼해 최룡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38여단장 시절 일본군 간호사 출신인 여성과 바람을 피워 1950년 1월 최룡해가 태어났습니다.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한 처벌로 전쟁 전 최현은 처벌을 받았는데, 전쟁 뒤 김철호가 최룡해를 거두어 함께 키웠습니다.최현의 적자인 최룡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1942년생으로 알려진 최룡택은 김정일과 함께 자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사생아인 최룡해는 형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최룡택은 노동당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을 오랫동안 지내다가 2000년대 초반 뇌출혈로 쓰러져 물러났습니다. 그가 과장일 때, 부장은 장성택이었습니다. 장성택도 빨치산 적자 최룡택 앞에선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김정일은 최룡택에게 원하는 요직은 다 주겠다고 했지만, 최룡택은 거절하고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으로 쭉 있었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김정일은 1973년 3대혁명소조운동이란 것을 시작해 대학 졸업생들을 3년 동안 현장에 파견했고, 뛰어나게 활약하는 사람은 노동당에 입당시켰습니다.최룡택의 자리는 20대 초반인 전국의 여대 졸업생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서류를 통해 예쁜 여대생을 골라내 자기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입당을 포상으로 주었습니다.최룡택의 기행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최룡택은 북한에 단 한 대뿐인 빨간색 벤츠를 타고 다녔는데, 늘 어린 여성들을 태우고 전국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최룡택이 입에 올랐던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1990년대 중반 강원도당 사건이었습니다. 최룡택은 강원도 원산의 총련휴양소 3각을 자기들의 아지트로 삼고 장성택 등을 불러 엽기 행각을 벌였는데, 이것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김정일은 경고의 의미로 최룡택의 시중을 들었던 강원도당 조직비서 등 고위 간부 11명을 총살했고, 노리개가 됐던 여성들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갔지만, 주범인 최룡택과 장성택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최룡해도 형 못지않은 엽기 행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최룡해는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자리 역시 젊은 여성들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였습니다.그는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청년협주단이란 명목으로 기쁨조를 만든 뒤 방탕한 술자리로 밤을 새웠습니다. 변태적 성욕을 위해 여성들의 이를 다 뽑게 했는데, 이 한 개를 뽑는 대가로 200달러씩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김정일에게 보고 됐지만, 최룡해는 잠깐 혁명화를 갖다 오는 데 그쳤습니다. 농락당했던 협주단 여성들만 청진 수성에 있는 25호 관리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부전자전입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최현은 해방 후 많은 여성을 마구 건드리면서 “우리가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이 정도도 못 하냐”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김정일은 간호비서란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을 빨치산 출신들에게 공급했는데, 최현도 죽기 전까지 전국의 경치 좋은 별장을 다니며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실컷 놀다가 죽었습니다.최현이 빨치산에서 싸운 공은 인정한다고 쳐도, 해방 된지 80년째 되는 올해까지 본인과 아들들은 북한을 마적처럼 타고 앉아 세습해 가며 방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현은 북한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동생 부부를 죽인 강건최현이 원 없이 방탕하다가 죽었다면, 강건은 일찍 죽어 그와 비교가 되는 인물입니다. 강건은 경북 상주에서 1918년에 태어나 1928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본명은 강신태였는데, 이후 강건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새로 고친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정하는 명단에 늘 먼저 올라갑니다.강건은 16세 때인 1933년 한 살 아래인 동생 강신일과 함께 유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소년 형제들은 부대를 이끌고, 만주군에게 체포된 영안유격총대 대장 이형박을 구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강건은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승진도 빨라 88독립여단에서 대위 계급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을 맡았는데, 1950년 9월 8일 32세에 사망했습니다.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7월 27일 한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다가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는데, 북한군 총참모장도 낙동강을 넘으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강건은 고향 바로 옆인 경북 안동에서 차가 대전차 지뢰를 밟는 바람에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강건은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친동생과 그의 임신한 아내를 자기 손으로 교수형에 처한 사람입니다.이는 1980년대 중국에 생존한 항일 빨치산 출신자들을 인터뷰했던 유순호 작가의 저서 ‘김일성’에 나오는 내용입니다.1938년 강건은 주보중 휘하에서 5군 3사 9연대 정치위원으로 있었고, 한 살 아래의 동생 강신일은 8연대 정치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1938년 여름 5군은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많은 전사자를 냈습니다.그런데 8연대엔 5군에서 예쁘기로 소문이 났고, 춤과 노래를 잘 부르는 이생금이란 여대원이 있었습니다. 1938년에 이생금은 1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남편이 그만 원정 도중 전사했습니다.강신일은 여대원을 위로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같은 전우인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치위원과 미망인이 동거하기 시작하니 이는 말밥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이 일로 처벌을 받을 위험에 처하자, 강신일은 자신을 따르는 조선인 부대원들과 함께 도주했습니다. 그렇다고 일제에 투항한 것은 아니고, 흑룡강성 동북부에 있는 쌍압산시 집현현에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북만 지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도 만들었습니다.그런데 1939년 가을 형 강신태의 부대가 집현현 일대에서 식량을 구하다가, 강신일이 3군 9연대의 이름을 여전히 걸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강신태는 9연대 주력부대를 데리고 강신일의 부대를 습격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강신일과 이생금을 잡은 뒤 처형하겠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증언자들은 이때 이생금이 임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강신태는 “부대에서 도주한 자가 바로 내 친동생이기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다”며 동생을 반드시 죽인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8연대 1중대장 왕경운, 4군 유수처 지도원 조서염 등이 나서서 “일본군에 투항한 것도 아니고,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니 일단 상부에 데리고 가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말렸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결국 그는 강신일과 부인 이생금을 총살도 아닌,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선 해방 후 중국에 살았던 왕경운, 3사 정치부 주임 왕효명, 당시 17세였던 3사 8연대 1중대 소속 여대원 오옥청 등 여러 증언자가 있습니다.강신일은 오늘날 중국 쌍압산시 인민정부에서 ‘쌍압산의 항일영웅 강신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이생금도 역시 항일열사로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자료에는 강신일과 이생금의 죽음에 대해 “특정한 환경하에서 어쩔 수 없이 빚어졌던 착오적인 결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강신태-강건은 고작 32세에 남침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강창주라는 아들을 남겼는데, 강창주는 군단장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북한은 1956년에 그의 이름을 딴 강건군관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많은 북한군 장교들을 양성했는데, 오늘날엔 그 이름이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올해 2월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를 시찰한 김정은은 교내에 있는 강건 동상 앞에 헌화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잔혹한 강건의 업보인지, 오늘날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은 잔인한 처형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강건군관학교는 평양시 외곽인 순안공항 인근에 있는데, 학교 주변에 넓은 전술훈련장이 있고, 훈련장 안에 길이 100m, 너비 60m 정도인 사격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진행된 공개 처형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많습니다. 1980년 2월 북한의 최고 미인이라고 알려졌던 영화배우 우인희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처형됐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실패한 화폐개혁의 희생양이 돼 2010년 처형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김정은이 참가한 회의에서 졸았다가 2015년 처형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장성택의 심복들이던 리룡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노동당 행정부 부부장, 이설주의 과거사를 언급했다가 처형된 은하수관현악단 단원 12명 등을 들 수 있습니다.이런 공개 처형은 목격자가 많습니다. 한국에도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에서 직접 공개 처형을 목격했던 탈북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이곳에서 4신 고사총 처형도 이뤄진다는 증언도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북한 사람들은 이곳을 ‘고위층의 무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친동생 부부를 목을 매달았던 강건의 업보 때문일까요. 강건은 오늘날에도 잔인한 처형과 더불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됐습니다. 심지어 올해엔 그의 이름을 딴 구축함조차 바다도 나가기도 전에 넘어져 여러 사람을 죽게 했으니, 강건은 정말 죽음을 부르는 이름인 듯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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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평양에 숨어 있는 BTS 아미들

    #2022년 9월 이란 ‘히잡 시위’는 1979년 이슬람공화국 건국 이후 최대 규모 시위였다. 22세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고 체포돼 의문사하자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왔다. 530명 이상이 사망하고, 2만2000명 이상이 체포돼도 한 달 넘게 진압되지 않았다. 고령의 이란 지도부는 당황했다. “이런 강경 진압에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그들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10대 소녀들이 대거 나와 ‘여성, 생명, 자유’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은 몰랐다. 초기 시위를 주도하다 맞아 죽은 10대 소녀들이 블랙핑크의 이란 팬클럽 간부였고,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 ‘아미’ 멤버들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몰래 연결과 뭉침을 경험한 세대였다. #2019년 10월 BTS는 해외 가수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 단독 스타디움 콘서트를 열었다. 3만 명 관객 다수는 여성이었다. 여성 인권이 최악이었던 사우디지만, 공연 나흘 전 자국 여성이 혼자서도 숙박업소에 투숙할 수 있도록, 또 외국인 남녀는 같은 방에 투숙할 수 있도록 이슬람 율법을 바꾸었다. 왕족들도 10대들이 허벅지를 드러낸 남자들을 보며 환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 아미의 주도 세력이 다름 아닌 공주이자, 후궁들이니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한류는 사우디 역사를 바꾸었다. 그리고 사우디 여성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도 바꿀 수 있구나.” 한류 팬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중국 국무원이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최악의 위기’라고 했던 2019∼2020년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선 발에 밟힌 BTS의 캐릭터 토끼 인형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아미들을 격앙시켰다. 2019년 10월 칠레 지하철 요금 인상 시위에선 전 세계 K팝 팬들이 시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칠레 내무부의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최근의 네팔, 튀르키예의 반정부 시위, 러시아의 반전 시위 등에서도 젊은 층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2일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을 분석하면서 “119개국 2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한류 팬으로 여겼고 팬클럽의 68%가 K팝에 집중돼 있다”고 전했다. K팝 열풍이 얼마나 폭발적인지를 전하는 기사는 많지만, 그것이 10대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는 많지 않다. 지옥 같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을 탈출해 시리아, 그리스를 거쳐 영국까지 온 BTS 팬인 10대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언제 총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BTS의 노래는 나도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어요. 그들의 노래가 아니었으면 난민촌 삶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앞서 언급된 국가들은 대다수가 독재국가들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중국은 180개국 중 178위, 이란 176위, 러시아 171위, 사우디 162위, 튀르키예 159위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에리트레아와 함께 번갈아 꼴찌를 기록하는 북한에선 K팝이 영향을 발휘할까. 김영미 분쟁 전문 프리랜서 PD는 몇 년 전 이란 한류 팬들을 취재할 때 “평양의 팬클럽과 소통하고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해외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이나 무역 일꾼들의 자녀들은 아니었을까. 10여 년 전 중국에만 북한 국적자가 20만 명 넘게 상주했다. 같은 민족인 북한만큼 K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그들만큼 자유와 희망을 꿈꾸는 청년들이 어디에 있을까. 문제는 김정은 역시 오랜 해외 체류 경험으로 한류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시작으로 2021년 ‘청년교양보장법’, 2022년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잇달아 제정해 한류의 싹을 자르려 애쓰고 있다. 한국 노래를 들으면 5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이는 북한이 한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케데헌 열풍이 전 세계에 불면 김정은의 공포도 커진다. 하지만, 평양에 숨죽여 살 과거 아미들의 기억은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K팝을 응원한다. “K팝이여. 세계를 쾅쾅 울려라. 평양까지 흔들어라.”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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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 먼저 온 탈북 교사…최영실 통일사랑교육협의회 회장의 꿈[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 3만4000여 명 중에는 교사 출신이 300명을 넘는다. 하지만 이들 중 정식 임용고시를 통과해 교사가 된 사례는 전무하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탈북민 수십 명은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고 의사 국가시험을 통과해 의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은 의사가 되기보다 훨씬 장벽이 높다. 남북 교육 과정이 그만큼 판이하다는 사정이 있지만, 아직 우리 학부형들이 탈북민 선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도 이유다.북한에서 15년 동안 교사로 일한 최영실 통일사랑교육협의회 회장도 25년 전 한국에 와서 그 장벽을 넘어 보려고 애썼지만 끝내 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교사 출신 탈북민들이 나름의 전문성을 살려 살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들려고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북한에서 교사는 인기 직업입니다. 남북 교육 과정이 많이 다르고 인문계 교사 출신은 ‘재활용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이공계 출신 교사 중 상위 10%는 재교육시켜 기회를 준다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 통일 후 남북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한국에서 25년째 살고 있는 최 씨는 올해 환갑을 맞았다. 노후 준비도 다 했다. 10세 때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아들도 훌륭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후배 북한 이탈 주민과 탈북 교사들의 멘토로 현역에서 뛰고 있다.● 19세 소학교 선생님최 씨 고향은 함경북도 경원군이다. 북한은 1977년 경원군에 새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2005년 다시 경원군으로 바꾸었다.1965년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철도 역장이었고 모친도 여맹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경원읍에 1930년 개통한 철도역 ‘역장 집 딸’은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그는 다 커서야 부친이 일본 도쿄 유학생 출신이고 어머니도 전남 무안 출신이란 것을 알았다. 부모는 숙청당하지 않으려고 북한 최북단에서 숨을 죽여 살았던 것이다.최 씨는 북한 베이비붐 세대다. 시골이지만 인구가 많은 탄광 지역이어서 한 학년 학생이 500명을 넘었다. 학급 정원도 65명이나 됐다.1981년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졸업생 500명 중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간 졸업생은 8명밖에 없었다. 중앙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사범대(중학교 교사 양성)나 교원대(인민학교 교사 양성) 지방 의대가 최대치였다. 신분이 세습되는 북한에서는 시골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출세 길이 막히는 것이다.사대나 교대를 보내는 이유도 시골 지역 선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직업을 결정하는 북한에선 개인 능력으로 이 굴레를 벗기는 불가능했다.최 씨는 1984년 19세로 3년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경원에 돌아와 인민학교 선생님이 됐다. 그때부터 13년 동안 교사로 있었다.1990년엔 군당 고위 간부 집안 아들과 결혼했고, 그해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큰 기업소 자재 담당 자리를 얻어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돈도 많이 벌어 왔다. 그 덕에 1990년대 초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차례나 보위부에 수감1997년 12월 남편이 탈북했다. 식량 구입하러 간다고 떠난 남편은 중국으로 가고 싶다는 여성 3명을 데려갔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 중 한 여성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체포돼 북송된 뒤 보위부에 실토했다.보위부가 최 씨 집에 찾아왔다. 처음엔 “남편 어디로 갔냐”고 따지다 최 씨를 9일 동안 보위부 구류장에 잡아 넣고는 “인신매매로 돈을 번 게 틀림없으니 실토하라”고 추궁했다. 최 씨는 “남편이 했던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변했다. 실제로 그랬다. 보위부는 결국 그를 풀어 줬다.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보위원들은 남편을 잡기 위해 그의 집에서 잠복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6명이 교대 근무를 섰고, 낮에도 2명씩 집에 와 있었다. 보위부와의 ‘동거’는 4개월이나 이어졌다.온 동네에 “최 선생 집에 보위부가 잠복하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이듬해 봄, 두만강으로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그제야 보위부는 철수했다. 국경인 두만강은 강폭이 넓은데, 얼음까지 떠내려 오면 도강이 불가능했다.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잘 알고 지내는 여성이 집에 와서 “(당신) 남편 심부름으로 왔으니 두만강 변에 가서 돈을 넘겨받자”고 했다. 하지만 최 씨는 보위부의 함정인 듯싶어 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보위부 스파이였다. 최 씨가 함정에 빠지지 않자 보위부는 다른 수법을 썼다.1998년 5월 보위부는 다짜고짜 그를 다시 잡아 인신매매 방조범이란 누명을 씌웠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파리를 새로 둔갑시키는 보위부에 통할 리 없었다. 그때 취조를 받으며 쇠꼬챙이로 맞은 손등 상처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흉터로 남아 있다.● 재산 다 뺏기고 추방되다수감 한 달이 지났을 때 최 씨는 낡은 화물차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쉼 없이 달린 차는 어느 산골 돼지 축사 앞에 멈춰 섰다. 좀 있더니 다른 차가 와서는 그의 8세 아들과 이불 몇 채, 옷 약간을 내려놓았다.“너는 추방됐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보위부 사람들은 떠났다. 기가 막혔다. 집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어린 아들과 함께 추방된 것이다. 집에 있던 TV, 자전거, 오디오 같은 비싼 가전제품과 가구는 누가 빼돌렸는지 알 수도 없었다. 남편이 없어지기 전에 사놓은 3년치 식량과 땔나무도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경원읍에서 차로 두 시간이나 떨어진 용현이라는 농촌이었다. 농촌 부락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였다. 앞이 막막했다. 선생님에서 졸지에 돼지치기 신세가 됐다.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였다. 뼈만 남은 농촌 주민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겨우 걸어 다녔다. 내일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먹을 것도 없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밤에는 들짐승 우는 소리가 무서웠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나진에 살던 언니가 소식을 듣고 일주일 만에 찾아왔다. 장사를 해서 나름 잘 살던 언니는 동생 처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엔 행정력도 붕괴돼 관리자나 책임자에게 뇌물만 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언니가 디젤유와 농사용 비닐 등을 잔뜩 싣고 와서 “동생이 많이 아프니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하자 농장 관리위원장이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최 씨는 탈출했다.나진 언니 집으로 간 그에게 언니는 북한 돈 2만 원을 빌려주면서 장사를 시작하라고 했다. 당시 2만 원은 큰돈이었다. 하지만 교사만 한 터라 장사할 줄을 몰랐다. 아는 지역이라곤 고향밖에 없었다. 장사할 생각으로 몰래 고향 친구 집을 찾아갔다. 친구는 최 씨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줄 알았는데 정말 기적이라며 반가워했다. 친구를 통해 경원에서 생산된 식량을 구입해 차로 청진으로 싣고 가서 두 배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장사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서 자본과 시장을 배우게 됐다. 이후 미국 달러를 교환해 주는 일도 했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싣고 다른 도시로 가서 도매도 했다. 장사하며 사귄 친구 4명과 함께 큰 차를 빌려 거래 규모를 늘렸더니 이윤도 늘어났다. 그 4명 중 3명이 한국에 왔다.● 아들과 함께 탈북2000년 8월 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들이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벽돌건물 앞에서 찍은 남편 사진이었다. 그 건물이 하나원 건물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았다.사진 뒷면엔 아무 설명 없이 그와 아들의 생년월일만 적혀 있었다. 문뜩 남편이 사라지기 전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생년월일을 사진 뒷장에 적어 보내면 내가 인편으로 보낸 건 줄 알아라.” 당시엔 남편이 중국으로 탈북하려 한다는 것도 모를 때여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사진을 보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낮에 어떤 여인이 와서 엄마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곧 다시 오겠으니 엄마 보고 장사 나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그때부터 장사를 접고 그 여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포기할까 싶을 때 여인이 나타났다. 당시 북부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해 길이 다 끊겨서 늦게 온 것이다.“남편이 1000달러를 보내 준다는데, 나보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합디다”라는 여인의 말에 최 씨는 아들과 함께 바로 떠났다. 엄청나게 큰돈이기도 했지만, 다시 남편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지체할 수 없었다.그 여인과 도착한 곳은 두만강 상류에 해당하는 회령의 깊은 산골이었다.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여인의 말이 바뀌었다.“국경은 위험해서 (남편이) 강을 넘어올 수 없으니 중국에 와서 돈을 받아 가라고 합니다. 두만강을 무사히 넘어갔다 오도록 다 준비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밤에 국경경비대원이 나타났다. 그 군인은 최 씨와는 밧줄로 몸을 묶고, 최 씨 아들은 어깨에 목마를 태우고 강을 건넜다. 2000년 10월이었다.● 탈북 3일 만에 도착한 한국강을 넘자마자 그 여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었다. 거의 3년 만에 듣는 남편 목소리였다.“추방됐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어.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아들과 함께 내가 오라는 곳까지 오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잘살 수 있어.”통화를 마치니 승용차가 나타났다. 차는 최 씨와 아들을 연길의 어느 공안원 집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없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실은 대련이란 곳에 있어. 그곳까지 오면 돼.”다음날 공안이 최 씨 모자를 데리고 나가 사진을 찍게 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무사히 갈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하니 그대로 믿었다. 이후 심양이란 곳에 가야 한다며 모자를 기차에 태웠다. 밤새 달려 심양역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나타났다.그 남성은 비행기를 한 번만 더 타면 남편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다며 공항으로 데려갔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몰라도 무사히 심사대를 통과해 비행기에 탔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곳은 중국이 아닌 인천공항이었다. 최 씨는 한국으로 오는 줄도 몰랐다.“그땐 남편이 한국으로 오라고 했으면 안 갔을 것 같아요. 북한에 있는 부모 형제 안위가 걱정돼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남편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 중국에 좀 있다가 돈을 갖고 북으로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내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죠.”최 씨가 두만강을 넘어 한국까지 도착한 기간은 단 사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렇게 빨리, 아무 고생 없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누구나 그랬듯이 최 씨도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 갔다. 한국까지 온 것은 본인 뜻이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한국에서 잘 정착하고자 결심했다. ● 전혀 다른 한국 생활2001년 3월 최 씨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임대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한국 아파트 생활은 북한 가정생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만족도가 높았다.북한에선 한겨울에 물을 길러 새벽부터 다녔는데 여기선 항상 더운물이 콸콸 쏟아졌고, 언제든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북한에서처럼 땔감 걱정, 전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밸브만 돌리면 새파란 불이 올라와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입식 부엌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 밖에 나가면 슈퍼마켓이 있어 언제라도 쌀이든 부식물이든 살 수 있고 심지어 겨울에 과일도 살 수 있었다. 그가 왔을 당시 국내 입국 탈북민은 1000명 남짓에 불과했다. 특히 북한에서 교사를 하다가 온 탈북민은 희소했다. 그 덕분에 최 씨는 통일교육원 소속 강사로 위촉돼 경찰청, 국정원, 각급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북한 실상을 증언했다. 몇 년 동안 위촉 전문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를 알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점점 안정돼 행복감은 커졌다. 하지만 북한 관련 강의를 가서 질의응답 시간에 고난도 질문을 받으면 “여기 사람들은 참 많이 알고 있는데, 내 지식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대학원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2007년 이화여대 석사 과정에 입학해 2010년에 석사가 됐다. 곧바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해 2013년에 수료했다. 해가 갈수록 입국하는 탈북민도 늘어나면서 강사로 계속 살 순 없었다.2009년 9월 그는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탈북민이 1년에 2500명을 넘자 한국교육개발원도 북한 출신 청소년 교육에 신경을 쓰기 시작해 탈북민 교육자 출신을 뽑은 것이었다.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최 씨가 북한이탈주민 적응 실태 조사 현황을 살펴보니 탈북 청소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북한 교사 출신들이 한국에서는 경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을 재교육해 탈북 청소년을 이끌어 주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는 ‘NK교사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NK교사 아카데미는 북한 교사 출신 탈북민에게 한국 교육 과정을 초급 및 심화 과정으로 나눠 1년 동안 가르친다. 교육을 마친 이들이 탈북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 지도 및 학교 적응 상담을 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서울 강서구나 노원구처럼 탈북민이 밀집한 임대 아파트 주변 학교에는 탈북민 자녀들이 많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탈북민 학생들도 생소한 한국 학교 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어한 만큼 한국 교사들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탈북 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특히 탈북민 학부형을 만나면 상담하기 난감한 상황이 많이 생겼다.● 현장 누비는 통일전담교육사최 씨는 교육부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있는 학교엔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를 채용하도록 정책 제언을 했다. 교육부도 그 필요성을 인정해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방과 후 탈북민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같은 북한 출신이라 탈북민 학부형들 만족도가 높았다.탈북 학생은 한부모 가정인 경우가 많다. 또 부모도 한국 정착이 어려워서 아이들을 돌볼 경황이 없을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잘 돌봐 주는 것도 코디네이터 몫이었다.당시 한국에 탈북민 학생이 10명 이상 다니는 22개 학교에 NK교사 아카데미 1년 과정을 마친 탈북 교사들을 선발해 보냈다. 비록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탈북 교사들이 자신의 경력을 활용하고, 탈북 청소년도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이 최 씨의 목표였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통일 교육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2012년 탈북민 정착을 담당하는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정식 출범하면서 교육부 소속이던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남북하나재단 소속 통일전담교육사로 소속과 명칭이 바뀌었다.최 씨는 2013년 5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나와 통일전담교육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한 노원구 용동초등학교에는 탈북민 학생이 43명이나 있었다.탈북하면서 온갖 고생을 겪다 보니 많은 탈북민 학생이 기초 학력 부진과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방과 후 학습과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담임선생님과 탈북민 학부형 사이 소통을 중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최 씨는 자기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학교 교사들에게 탈북 학생 및 가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강의를 했고, 탈북 학생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탈북 학생 개개인에게 맞춤인 교육을 통해 꿈과 끼를 키워 줘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초등학교에서 2020년 3월까지 7년 동안 일했다.● 통일을 내다본다면…통일전담교육사를 그만둔 그는 탈북민 교사 출신들이 주로 가입된 법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설립했다.현재는 회원 100명이 넘는 비영리단체로 성장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탈북민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 안보 교육 용역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약 3년간, 연 500회 이상 탈북민 강사가 군부대를 돌며 안보 교육 강의를 진행했다.올해 35세가 된 최 씨의 아들은 ‘인서울’ 대학을 나와 현재 제주도의 한 호텔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다.최 씨가 탈북민 교사 모임인 통일사랑교육협의회를 만든 것은 먼저 한국에 와서 정착한 교사 출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바람이 컸기 때문이다.하지만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은 지금도 북한에서의 경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아쉬운 대목이다. 그가 볼 땐 북한에서 수학 물리 화학 생물 같은 기초 과학을 가르쳤던 교사 중에는 수재도 꽤 많이 있다. 학교 졸업생 15% 정도만 대학 및 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해 교사가 됐다는 것 자체가 인재란 의미다. 한국 교육 과정을 재교육시키면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재교육 과정도, 임용고시 기회도 없는 게 안타깝다.“통일이 되서 북한 교육 과정을 짧은 기간에 싹 바꾸다 보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교육자 수만 명을 갑자기 양성할 수도 없으니 북한에 있는 교사들을 재교육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다면 우리 정부도 북한 출신 교육자들을 재교육해 활용하는 예행연습을 해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는 유치원 교사 출신까지 포함해 북한 교육자 출신이 300명이 넘습니다. ‘미리 온 통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한 명도 자신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입니다.”많은 탈북민이 한국에서 25년을 살아 온 그에게 “정착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우선 운전면허를 따세요. 자격증도 가능한 많이 따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늘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책임감과 인성입니다. 그걸 갖춘 사람들은 빨리 정착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겉돌며 삽니다.”그의 나이 60세. 인생의 황혼에 들어섰지만 힘닿는 한 탈북민의 맏언니처럼, 엄마처럼 계속 살아갈 생각이다. 탈북민 사회에서 그가 가장 남기고 싶은 삶의 흔적은 하나뿐이다.“최영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학교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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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금 1억 원 넘게 내는 국군포로의 손녀, ‘청류’ 김유경 사장이 걸어온 길[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최애 맛집이요? 청류라는 곳입니다. 불고기도 맛있고, 어복쟁반도 맛있고. 평양냉면집 굉장히 유명한데, 청류에 꼭 가서 맛보셨으면 좋겠어요. 매력이 달라요. 밥 말아 드세요.”흑백요리사에 출연해 4강에 오르며 유명해진 윤남노 세프(요리하는 돌아이)가 인스타그램에서 이렇게 극찬한 평양 냉면집 ‘청류’는 서울 은평 한옥마을과 송파 문정동에 식당 두 개를 운영하고 있다.윤 세프의 극찬이 아니더라도 청류는 이미 평양냉면 마니아들 속에서 소문이 난 식당이다. 점심마다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이미 식당의 인기를 말해주고 있다.기자가 직접 방문해 먹어보니 육수 맛이 일품이었고, 면은 재료비를 아끼지 않고 좋은 메밀을 넉넉히 썼다. 소고기 전골, 샐러드, 물김치 등 다른 요리들 역시 맛도 훌륭했지만, 마주했을 때의 비주얼이 화려하면서도 깔끔했다. 보는 순간 “아, 맛있겠구나” 싶어 침이 꿀꺽 넘어가는 그런 식당이었다.점점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정작 청류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여사장이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외손녀 출신의 탈북 여성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올해 42세의 김유경 사장은 1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끝에 지금은 1년에 세금만 1억 넘게 내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성공은 그냥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한국에 와서 20년째인데, 아직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제주도도 식당을 하기 전에 한 번 놀러 갔다 왔습니다. 애를 낳기 전날까지 식당에서 일했고, 출산 일주일 뒤부터 또 식당에서 일했습니다.”이 말엔 가냘픈 몸으로 버텨온 삶의 여정이 모두 녹아있다.● 풍족했던 유년 시절김 씨는 북과 남에서의 ‘팔자’가 너무나 극명하게 바뀐 사람이다. 한국에 와서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지만, 북에선 남는 게 시간뿐인 ‘놀새’였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도 하도 심심해서 중국 ‘관광’을 왔다가 어쩌다 보니 오게 됐다.그가 1983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정부 기관 소속의 운전사(운전기사)였다. 유통시장이 빈약한 북한에선 운전사는 잘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아버지는 그냥 운전사가 아니라, 수십 톤급 대형 트럭을 몰았고, 북한에서 구하기 힘든 물자들을 날랐다.덕분에 김 씨의 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컬러TV와 냉장고 등을 갖추었다. 고난의 행군 기간엔 중국과 무역을 하는 업자들이 줄을 지어 찾아와 물량을 실어달라고 했다. 중국과 평양을 한 번씩 오가면 기름이나 설탕, 대게 등 각종 비싼 것들이 집에 드럼통이나 마대로 들어왔다.학창 시절도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들을 잘 주니 선생들이 모두 그를 예뻐했다. 부친은 겨울에 땔감을 하라고 학교에 석탄을 자주 싣고 왔고, 지방에 가야 하는 농촌동원 때엔 반 아이들이 배고프지 말라고 식량도 많이 구해 주었다.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잡은 것 때문에 어깨를 쫙 펴고 살긴 했지만, 사실 부친의 출신 성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김 씨의 할아버지는 강원도 춘천 태생인데, 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돌아갔다. 북에서 남조선 출신은 아주 나쁜 출신성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간부가 될 출신성분도 아니었다. 상황을 빨리 판단한 부친은 기술직을 선택했다.외가는 확실히 출신성분이 나빴다. 김 씨의 외할아버지는 국군포로 출신으로 전쟁이 끝난 뒤 함북 회령에 있는 학포탄광에 끌려왔다. 부산 출신인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발발한 뒤 15세에 학도병 출신으로 참전했다. 이후 국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며칠 전에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그래서 정전협정 때 교환된 포로 문서에도 외할아버지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결혼해 김 씨의 모친을 포함해 자식을 다섯 명 낳았다. 늘 고향인 부산에 가고 싶다고 하소연해서 그때마다 자식들이 “아내와 자식이 다 여기 있는데, 15년밖에 살지 않은 부산엔 왜 가고 싶어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고향에 오고 싶어 하던 외할아버지는 코로나 시기 눈을 감았다.김 씨는 한국에 와서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전사자 명비에 외할아버지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름이 특이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김 씨가 입국해서야 한국 정부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살아있음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국군포로 외손녀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전혀 없었다. 부산에 살았던 외할아버지의 형님이 지금까지 대신 전사자의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중국에 대한 동경김 씨는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 기간에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 시내에 나가면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고, 배가 고파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도 늘었지만, 오히려 이때 김 씨의 집은 더 잘 살았다. 식량이 귀해지니 무역이 활발해졌고, 대형트럭에 대한 수요도 많아진 것이다. 짐을 나르고 받은 대가 중 상당액을 간부들에게 상납하고도 아버지에게 떨어지는 몫은 많았다.김 씨는 15세인 1998년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진에 있는 2년제 회계경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솔직히 꿈과 희망도 모를 어린 나이에 부모가 가라고 하니 간 학교였다.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2000년에 졸업을 하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청진에 있는 공장·기업소들은 거의 다 멈춰 서 있다 보니 17세 어린 여자애를 받겠다는 곳도 없었다.집도 잘 사는데, 굳이 일을 다닐 이유도 없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이 그의 하루였다. 끼리끼리 놀다 보니 친구들도 부자였다. 여름이면 바다에 나고, 추워지면 당구장에 가고, 영화관에 갔다. “오늘은 어딜 놀러 갈까”가 유일한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지방 도시에 돈을 뿌리며 놀만한 곳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중국에 가게 된 계기는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 중에 항일투사 집안의 손녀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청진에서 판사를 지내다가 평양에 올라갔다. 이 친구는 평양상업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종종 청진의 친구들에게 놀려왔다. 어느 날 2~3년 보이지 않던 친구가 염색한 매직 머리를 하고 나타났을 때 김 씨는 깜짝 놀랐다. 여러모로 보아 사람이 훨씬 세련되게 달라진 것이다.“나 2년 동안 중국 옥류관에 종업원으로 나갔다가 왔어. 월급은 100달러씩 받았는데, 나라가 어려우니 50달러는 바쳤어.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지. 중국은 전혀 다른 세계였어.”친구가 보여주는 중국 생활을 담은 사진을 보며 김 씨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사진만 봐도 정말 청진과는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나도 꼭 중국에 갈 거야.” 하지만 출신성분이 나쁜 그가 해외식당 종업원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탈북할 결심까진 서지 않았다. 청진역 앞을 지나다닐 일이 많았는데, 중국에서 체포돼 북송된 뒤 수갑을 차고 호송되는 탈북민들을 많이 보았다. 짐승처럼 취급받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잡히면 죽는 게 낫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때까진 탈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남조선에 갈게요”그를 두만강을 건너게 만든 일은 우연히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두만강 옆에서 살다 보니 가끔 놀러 갈 때가 있었다. 21세 때인 2004년 가을에 외할아버지 집에 갔다가 가까운 친척이 중국과 밀수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친척은 중국에도 친척이 많았는데, 강 건너 마주 보이는 중국집도 친척 집이었다. 친척은 동네에 사는 경비대도 다 끼고, 두만강을 안전하게 오가며 장사를 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중국에 놀러 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친척이 중국에 갈 때 졸랐다.“나 중국에서 한 달만 놀다 오고 싶어. 나도 좀 데려가 줘.”“그래? 그럼 이번에 데려갈 거니 실컷 구경하고 와.”이미 경비대를 다 알고 있는 터라, 두만강을 건널 때 크게 긴장하진 않았다. 강을 건너 친척 집에 들어가니 창고에 사과가 한가득 쌓여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이틀 있었는데, 한 번도 정전이 되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이틀 뒤에 연길에 사는 친척이 그를 데리러 왔다. 연길은 역시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진 도시였다. 친척들이 그를 데리고 다니며 관광을 시켜주었다. 북한에 가기 싫어졌다. 그렇지만 부모에게 말도 없이 온 중국이라 돌아가긴 해야 했다. 물론 돌아갈 때도 친척 집을 통해 안전하게 갈 수 있으니 겁나는 것은 없었다. 중국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일주일쯤 지나 친척이 갑자기 이런 제안을 했다.“너 남조선에 가보고 싶진 않니? 거기 가면 정착금으로 2000만 원을 준대….”중국 돈으로 환산한 액수를 듣고 김 씨도 놀랐다.“그 많은 돈을 공짜로 준다고? 그럼 내가 남조선에 가서 그 돈을 받고 다시 돌아와도 돼?”“그럼, 얼마든지 가능하지.”김 씨는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북한에선 소속된 직장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으니 1년 정도 사라졌다가 나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중국에서 식당 종업원을 했던 친구는 1년에 고작 600달러를 받았다고 했는데, 자신은 남조선에 가서 정착금과 일을 해서 번 돈을 합치면 1년 만에 수만 달러를 벌어 고향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집이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수만 달러는 북한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돈이었다.게다가 그는 북한에서 몰래 돌아가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이미 다 보았다. 드라마 속 남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더 번화하고 재미있는 곳일 것 같았다.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고, 덤으로 부자도 될 수 있으니 한국에 가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저 남조선에 갈게요.”● 대타로 당첨된 한국행중국에 건너온 지 열흘 만에 김 씨는 그보다 나이가 어린 탈북 여성과 짝을 이뤄 한국행 길에 올랐다. 그가 이런 기회를 잡은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다.당시 한국에 있는 한 북한인권단체가 연길에서 탈북민 일가족을 데려오기로 하고 모금까지 다 했는데, 이 일가족은 불행하게도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공안에 체포돼 북송됐다. 탈북민을 데려온다고 모금까지 마친 단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탈북자라도 데리고 와야 했다. 그래서 연길에서 당장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탈북민을 수소문했는데, 여기에 김 씨가 대타로 ‘당첨’된 것이다. 이동 준비도 다 끝난 터라 김 씨는 곧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그의 안내원은 조선족 할머니였는데, 손녀 두 명을 데리고 여행하는 기분으로 도시를 이동했다. 침대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여긴 뭐가 유명하다며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었다. 셋은 그렇게 공짜 관광을 즐기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쿤밍까지 갔다.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을 빼곤, 다 좋았다. 북한에서 살 때 그는 함경북도 밖은 가본 일이 없었다. 자그마한 지역에 갇혀 살다가 그 넓은 중국 대륙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으니 21세 처녀는 정말 신이 났다. 한 번 이동할 때마다 날씨가 더워져 옷을 한 벌씩 벗는 것도 신기했다. 반소매 셔츠를 입고 지금쯤 북에서 외투를 꺼내 입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하니 자신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어느 지역에 가서 택시를 타고 밤새 달리니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라오스라고 했다. 여기서 할머니는 둘을 다른 인솔자에게 넘겨주고 돌아갔다. 새로 등장한 브로커도 두 명의 탈북민을 데리고 있었는데, 다섯 명이 밤새 산을 넘어갔더니 이제 중국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라오스의 한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관에서 묵다가, 며칠 뒤 작은 배를 타고 메콩강을 건넜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인솔자가 나타났다. 이번엔 한국 남자였다. 김 씨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한국 남자를 처음 보게 됐는데, 선한 얼굴에 매너도 좋았다.한국 남자는 그들을 데리고 방콕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인계해 주었다. 한국대사관은 그들을 다시 현지 한인교회에 데리고 갔는데, 교회에선 탈북민을 위한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성들만 있는 숙소에 가니 이미 먼저 온 3명의 탈북민 아줌마들이 있었다.이때부터 방콕 생활이 시작됐는데, 여권이 빨리 나오지 않아 무려 6개월이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름 나쁘진 않았다. 숙소가 한 층을 통째로 쓰다 보니 다섯 명은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이들에게 매달 생활비가 나왔는데, 이 돈으로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었다. 명절이면 교회 한국인 집사들이 집에 데려가 맛있는 음식도 먹게 하고, 며칠씩 재워주기도 했다. 방콕은 중국과 또 달랐고, 신기한 것도 많았다. 특히 구경도 하지 못한 각종 과일이 많아 행복했다. 김 씨는 방콕에서 파란 바나나를 처음 봤다. 북한 장마당에서도 바나나가 팔렸다. 바나나를 살 수 있는 집은 엄청 부자였다. 쌀이 1㎏ 20원 할 때 중국에서 나온 바나나는 1개에 50원에 팔렸다. 그런데 시장에 나온 바나나는 하나같이 시꺼먼 색이었다. 그래서 김 씨는 바나나는 원래 시꺼먼 과일인 줄 알았다.북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세상 물정 몰랐던 김 씨는 종종 함께 있는 탈북민들에게서 “너 간첩이 아니냐”는 오해도 샀다. 가령 북한 집에서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워먹었던 이야기를 하니 “북한에 전자레인지 있는 집이 어디 있냐. 너는 정말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식이었다.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2005년 5월쯤 되니 갑자기 방콕에 오는 탈북민이 많아졌다. 7월에 방이 비좁다고 느낄 때쯤 그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이때까지 행운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온 직후에 탈북민끼리 싸움이 벌어져 처소가 없어졌고, 이후에 온 탈북민은 모두 방콕 감옥에 몇 달 수감돼 있으면서 한국행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3년만 버텨보자!”방콕에서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김 씨는 처음으로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이 비행기에 오르면 집에 다시 가지 못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한국에 도착해 조사를 받고, 하나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때가 2005년 11월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빨리 돈을 받고 중국에 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그런데 정작 와보니 정착금 2000만 원을 일시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3년에 나눠 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직장에 취직해 일하면 매년 500만~600만 정도 나온다는 것이다.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왕 왔으니 방법이 없었다.“그렇다면 3년 동안 정착금을 꼬박 모으고, 그리고 3년 열심히 벌어 내가 생각한 돈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중국에 갈 거야. 3년만 버티자.”집은 양천구에 있는 17평 임대아파트를 받았다.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물이 나오고, 겨울엔 뜨뜻하고, 정전도 안 되는 아파트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집에만 박혀 있을 순 없는 일. 빨리 취직해야 했다. 복지관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정착 한 달도 안 돼 그는 군포에 있는 시트지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한 시간 반 걸렸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에 억척스럽게 다녔다. 토요일까지 주 6일, 8시간 이상 일했는데, 월급은 60만 원이었다. 지금도 김 씨는 첫 월급 명세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힘들 때마다 첫 월급 명세서를 꺼내봅니다. 그때를 돌아보며, 내가 이때도 견뎠는데, 지금은 훨씬 나아진 것 아니냐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그땐 정말 친구도 없어 너무 외로웠고, 말투도 이상하다고 놀림도 받았습니다. 지하철 타는 법도, 버스 타는 법도 몰라 집을 못 찾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3년 돈 벌고 집에 간다고 세탁기도 사지 않고 손빨래를 하면서 버텼는데, 돌아보면 그때가 제일 힘든 시절이었죠.”몇 달쯤 지났는데, 그가 북에서 회계경리전문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을 알고 누가 변리사 사무실에 소개해 주었다. 변리사 사무실은 강남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경리 보조로 일하게 됐다. 월급도 세후 115만으로, 이전보단 훨씬 많아졌다. 양천과 군포만 오갔던 그는 강남에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드라마에서 보던 남조선이 여기에 있었네.”강남에 가보니 너무 황홀했다. 하지만 그에겐 돈을 벌어 3년 뒤 집에 간다는 목표가 있었다. 한 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고, 교통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몇 만원만 썼을 뿐이었다. 화려한 강남은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3년 만에 장만한 아파트3년만 버텨보겠다던 강남에서 그는 2014년까지 9년이나 회사 생활을 했다. 집으로 가겠다는 결심이 흔들린 것은 한국 생활이 2년차에 접어들었던 2007년경부터였다. 이때 그는 업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2년제 전문학교 야간반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드디어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친구들과 함께 휴일에 서울 시내 곳곳을 놀러 다니기 시작하니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그는 놀새였다. 각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북에 가면 가족과 살 순 있겠지만, 이제 내가 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서울을 경험한 뒤 북한에서 살 미래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나름 새로운 논리가 만들어져 머릿속을 흔들었다. “내가 여기서 잘 살면 부모님도 기뻐할 거야. 북에 와서 사는 것을 원치 않을 거야.”어쩌다 보니, 남자 친구도 생겼다. 북에 돌아가 북한 남자랑 결혼해 사는 상상은 하기도 싫어졌다. 북에 가겠다는 결심은 점점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여기에 남아야겠다고 생각하니 임대아파트에서 나와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첫 번째 목표가 됐다. 그는 억척스럽게 모은 돈으로 2008년에 은평뉴타운에 30평짜리 아파트를 2억9000만 원에 분양받았다. 대출도 받긴 했지만, 김 씨처럼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자기 아파트를 장만하는 탈북민은 드물다.세월이 흘러 2014년이 됐다. 이제는 업무 전문성도 높아지고, 월급도 세후 250만 원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미래를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변리사들이 얼마를 받아 가는 지를 잘 아는데, 자신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월 500만 원은 벌고 싶었다. 하지만 전문직 자격증을 따기엔 역부족이니 선택지는 자영업밖에 없었다.첫 창업은 김밥집이었다.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서초 선릉역 인근에 계약금 5000만 원에 월세 250만 원짜리 가게를 열었다. 김밥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가게를 내기 전에 다른 김밥집에 몇 달 동안 알바로 취직해 일했다.2014년 4월 13일 작은 테이블 3개가 겨우 들어가는 9평짜리 작은 가게이지만, 마침내 자신의 식당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날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3일 뒤 주방에서 티브이로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날 받은 충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의 브랜드를 찾다김밥집은 생각보다 잘 됐다. 고되긴 했지만, “돈을 버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아침 6시에 가게에 나가 재료를 준비하고, 9시에 문을 열어, 저녁 9시까지 일하는 일과가 반복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1년 동안 열심히 벌어 모은 돈으로 2015년에 서울 남부터미널 인근에 김밥집 2호점을 냈다. 자영업을 시작하고 한국에 와서 처음 사귄 뒤, 8년째 연애를 해왔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고, 2015년에 딸이 태어났다. 그는 출산 전날까지 그는 김밥을 만들었고, 출산 일주일 뒤 다시 식당에 나와 김밥을 말았다.김밥집으로 번 돈으로 2015년 여의도 KBS 앞에 이번엔 감자탕집을 열었다. 좀 번듯한 식당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자탕은 장사가 잘되지 않아 얼마 뒤 접었다. 하지만 큰 식당을 운영하면서 배우는 점도 많았다.그때부터 그는 매년 식당 하나씩 만드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김밥 가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다음 식당은 고깃집이었다. 고깃집은 더 힘들었지만, 잘 됐다. 김밥집을 처분하고, 고깃집에 매달렸다.2019년 그는 위례신도시에 갈빗집을 냈다. 상호는 ‘류경식당’으로 정했다. 드디어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진 것이다. 류경식당은 직원이 직접 갈비를 구워주는 식당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 됐다. 특히 코로나 때 거의 대박이라고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몰려왔다.돈이 생기니 내 가게를 가지는 것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 위례 식당은 매달 1400만 원씩 월세를 냈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만 매출이 떨어져도 마음이 불안해졌다. 게다가 장사가 잘되면 건물주가 언제 나가라고 요구하고, 식당을 차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식당을 차릴 땅을 찾느라 많이 다녔다. 그리고 결국 찾은 땅이 은평뉴타운 한옥마을 인근이었다. 집을 은평에 분양받다 보니 아무래도 살고 있는 지역이 더 잘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땅값이 만만찮게 비쌌다. 건물을 올리려고 하니 건축비도 혼자서 부담하기엔 쉽지 않았다.목표가 생기니 길도 나타났다. 과거 냉면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서관면옥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대표가 일 잘하는 그를 눈여겨보았다. 이후 둘은 동업자로서 친해졌는데, 은평에 세우는 건물에 똑같은 지분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반반씩 투자해 5층 건물을 짓고, 이 건물에서 운영하는 식당은 서관면옥 분점으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건물이 올라갔고, 2022년 10월 마침내 은평에서 식당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언제까지 다른 브랜드로 영업할 순 없었다.그는 ‘류경’이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2024년부터 독립했다. 그해 9월 문정동에 청류라는 브랜드를 단 식당을 냈고, 올해 1월 은평의 식당 이름도 ‘청류’로 바꾸었다.● 세금 1억 내는 탈북민열심히 일한 덕에 이제는 주변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도 듣고, 세금도 많이 내게 됐다. 지난 1년 동안 그가 국가에 납부한 세금만 1억 원이 넘는다.식당도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좀 편히 살 수도 있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특별히 계획을 세워놓고 사는 인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발을 펴고 살 생각도 아직은 없다. 당면한 목표는 청류를 미슐렝에 등재하는 것이다.그는 청류에서 사용하는 쌀 등 식재료를 일부러 민간인통제선(DMZ) 안에서 재배한 것들로 골라 사용한다. 요리 한 그릇 안에 자연과 사람, 그리고 철학을 담아내겠다는 뜻이다.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젊은 세프들이 모여서 청류만의 평양냉면을 함께 만들어냈다.지금까지 억척스럽게 살아온 삶인지라, 정착이 어렵다고 주저앉아 하소연하는 탈북민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국군포로의 외손녀지만, 국가에서 뭘 기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아무 혜택도 받은 것은 없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우리가 이 땅에 맡겨놓은 게 하나도 없는데, 자꾸 국가만 쳐다보며 손을 내밀면 안 됩니다. 북한에선 아무리 일해도 돈을 주지 않는 동네인데, 북에선 열심히 살다가 엉뚱한 곳에 와서 보상을 기대하면 안 되죠. 어떤 일이든, 돈 버는 일은 다 힘듭니다. 탈북민들은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길까 봐 겁내지 말고, 임대아파트에서 하루빨리 독립하고, 나라에 세금 내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는 한국에 와서 20년을 살면서 아직 여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바쁘게 살다 보니 외국에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제주도는 두 번 가봤는데, 한 번은 일 때문에 간 것이라, 여행으로 간 적은 한 번 뿐이다.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엔 여행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사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평양입니다. 저는 북에서 살면서 함경북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보니, 어렸을 때 평양에 그렇게도 가고 싶었습니다. 여기 식당 앞이 통일로인데, 40㎞ 정도만 차를 타고 가면 북한 땅이거든요. 나중에 통일이 되면 이 길을 따라 평양에 갈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땐 북한에 사는 옛 친구들을 다 부른 뒤, 평양에서 놀새 모드로 변신해서 다시 진하게 놀아야죠. 하하하~.”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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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애는 ‘여왕’이 될 수 있을까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의 딸 김주애가 베이징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설마 했는데, 실제로 아버지의 중국행에 동행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딱 한 번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김주애의 첫 외교 무대 등장입니다. 많은 언론들은 그가 북한 권력 승계 구도의 ‘선두 주자’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주애가 베이징에 도착한지 하루 뒤인 4일 노동신문은 돌연 “우리 국가의 고유한 특징은 혁명 위업의 계승 문제를 완벽하게 실현한, 계승성이 확고한 전도양양한 나라라는 것”이라는 뜬금없는 자랑도 했습니다. 1면엔 김정은과 김주애가 의전을 받는 사진을 싣고, 2면엔 전승절과 무관하게 “우리 공화국은 사소한 편향이나 우여곡절도 없이 계승 문제를 성과적으로 해결해 왔다. 우리나라에선 일찍부터 혁명의 대를 잇는 것을 만년지계의 국가 대사로 내세우고 이 사업에 많은 품을 들였다”고 보도했습니다.북한 주민들이 1면과 2면을 보면 “완벽하게 해결했다는 후계자가 김주애인가”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편집입니다. 그렇다면 올해 12세밖에 되지 않는 이 소녀의 현 위치는 과연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할까요.● 어린 딸을 내세우는 이유김주애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22년 11월 27일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김정은은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7호 발사 현장에 9세 딸의 손을 잡고 등장했습니다. 이때 북한 매체들은 그를 ‘존귀하신 자제분’이라고 호칭했습니다.이후 3년 동안 주애는 아버지 옆을 늘 지켰습니다. 현지 시찰 사진에 주애가 보이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9세밖에 되지 않는 딸을 왜 공개했을까요. 주애의 공개 시점은 공교롭게도 김정은이 코로나에 걸려 심하게 앓고 난 직후였습니다. 2022년 8월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은 평양에서 열린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 토론 연설에서 “이 방역 전쟁의 나날 고열 속에 심히 앓으시면서도 자신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인민들 생각으로 한 순간도 자리에 누우실 수 없었던 원수님”이라고 언급했습니다.오빠가 코로나19로 의심되는 고열을 앓았고, 이후 치료를 통해 회복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김정은은 2023년 1월에도 코로나에 다시 걸려 사경을 헤맸다는 정보도 있습니다.김정은은 신장 170㎝에 몸무게 140㎏나 나가는 비정상적인 체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고혈압, 당뇨, 통풍 등 대표적인 비만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사람은 코로나에 걸렸을 때 정상인보다 사망할 위험성이 몇 배로 커집니다. 고열 속에서 꿍꿍 앓으며 김정은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내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김 씨 왕조는 어떻게 될까. 우리 가족은?’이라고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겼을 겁니다. 이는 ‘혹시 내가 죽어도 우리 집안을 지킬 후계자는 미리 만들어야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험’이란 생각으로 이어졌을 수 있습니다.김정은은 부친인 김정일, 할아버지 김일성이 모두 심혈관계 질병으로 유언을 남길 새도 없이 급사한 것을 봤습니다. 심장병이 가족력인데, 김정은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훨씬 심혈관 질병에 취약한 체형을 갖고 있습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뒤 후계자부터 지정한 것은 아버지 김정일에게서 배운 것일 겁니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심각한 뇌졸중으로 쓰러져 3개월 가까이 거동을 못 했습니다. 그해 11월 다시 나타났을 때는 훌쩍 말라 있었고, 왼손과 왼발에 마비 증세가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겨우 살아나 ‘저승사자’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김정일은 복귀하자마자 후계자부터 지정했습니다. 두 달 뒤 북한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내렸다는 소식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북한의 3대 세습이 공식 확인됐습니다.실제론 김정일은 병상에서 의식을 회복한 뒤부터 후계자 지정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후계자가 당연히 물려받아야 할 것들이 꽤 있는데, 김정은에게는 비밀경찰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보위부 통제권을 가장 먼저 물려주었습니다. 불만 세력부터 정리하라는 뜻이었겠죠. 이후 군권, 당권, 금고를 차례로 물려주었습니다.김정일은 마침내 201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에 김일성광장 주석단에 아들 김정은을 데리고 나와 북한 인민에게 “내 후계자”라는 것을 확실히 인증시켰습니다.김정일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깨어난 지 3년 뒤 사망했습니다. 그 3년은 후계 구도를 만드느라 전념했던 기간이었고, 자기 할 일을 다 마치고 급사했습니다. 20대의 김정은이 집권 후 항간의 예상과 달리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은 김정일이 이처럼 필사적으로 아들에게 튼튼한 기반을 닦아 주었기 때문입니다.만약 이런 ‘권력 물려주기 및 공식 인증’ 과정이 없이 김정일이 갑자기 죽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북한에선 후계 세습을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가령 북한의 실권자였던 장성택은 장남 김정남이 후계자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직지도부는 김정은을, 또 어느 세력은 김정은의 형 김정철을 밀었을 겁니다. 저마다 “이것이 김정일의 뜻”이라고 주장했겠죠.권력자가 확실하게 후계 구도를 정하지 않고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인류가 수천 년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많이 봤습니다. 대개는 형제의 난이 벌어졌고, 왕국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김정은도 고열 속에서 이 문제를 고민했겠죠.그래서 주애를 데리고 나와 북한 인민에게 “내게도 자식이 있고, 내가 죽으면 이 애가 권력을 물려받을 것”임을 각인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급사해도 권력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면 겨우 9세인 딸을 그렇게 급하게 노출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김정은에겐 아들이 없을까?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깁니다. 김정은에게 아들은 없는 것일까요.김정은에게 2009~2010년 태어난 아들이 있다는 정보는 많았지만,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들이 있다고 해도 2022년 이전에 사망했거나 외부에 노출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거나 등의 이유로 김주애가 후계자 순위에서 최선이었을 겁니다.김주애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2017년경 자식을 낳았다고 밝혔지만, 성별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017년 태어난 아들이 있다면 이제 겨우 8세입니다. 김정은이 쓰러졌던 2022년엔 5세밖에 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어린아이를 후계자로 공개하기엔 무리였을 것입니다.딸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것도 부담이 매우 큰 일입니다. 주애가 다른 성 씨의 남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면 김 씨 왕조가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다른 김 씨와 결혼해 김 씨 성의 아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혈통이 꼬이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그러니 김정은도 가능했다면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싶을 겁니다. 김정은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설주가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서 얼마든지 아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신도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지금 김정은에겐 어머니가 다른 어린 아들이 여럿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너무 어려서 현재론 ‘유사시’를 대비한 후계자용으론 김주애를 대신할 수는 없겠죠.아들이 20세 안팎으로 성장할 때까지 김정은이 무사히 살아있다면, 그때 가서 주애를 뒤로 물리고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북한 주민들이 후계자로 알았던 김주애가 새로 나타난 ‘세자’를 깍듯하게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후계자의 권위는 더 오르겠죠.● 김주애는 권력을 물려받을까.물론 이 역시 위험 부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딸을 너무너무 사랑한다면 말이죠. 만약 어머니가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면 주애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 후계자는 권력의 누수를 막기 위해 정통성을 갖고 있는데다 북한 주민들이 오랫동안 후계자로 알았던 주애를, 나아가 모친인 이설주까지 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정은 본인이 이복형 김정남을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독살한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후계자를 교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손으로 딸을 죽이는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애에게 권력을 넘기거나, 가장 아끼는 자식임을 오래오래 과시함으로써 누가 후계자가 되더라도 함부로 주애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습니다.김정은은 또 본인의 경험을 통해 주애를 어려서부터 노출하는 것이 나쁘진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2010년 10월 새파랗게 젊은 25세 김정은이 등장하자 북한 주민들은 “어린 애가 알면 뭘 알겠냐”며 수군거렸습니다. 김정은은 실권을 잡고 있던 고모부 장성택이나 다른 고위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앞에선 깍듯이 대하면서 뒤에선 무시하는 시선을 수없이 받았을 겁니다. 그때 받은 분노가 “내 후계자는 일찍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면, 어린 주애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물론 현시점에서 주애가 후계자라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진으론 수없이 등장했지만, 아직 북한 주민들에겐 그의 이름이 공개된 바도 없습니다. ‘존경하는 자제분’ ‘조선의 샛별’ 등으로만 불려졌기 때문입니다.20년 뒤에도 김정은이 무사히 숨을 쉬고 살고 있다면, 그때 가서 후계 구도에 대한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주애는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기괴한 왕국’의 후계자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일생과 운명은 과연 어떻게 끝을 맺을지 점점 궁금해집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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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하층민’ 자식만 골라 파병한 북한

    지난해 여름 북한에선 이런 소문이 퍼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우리 특수부대 300명이 가서 점령당한 도시를 탈환했는데, 한 명만 전사했대. 너무 잘 싸워서 6월에 우리나라에 온 푸틴 대통령이 ‘특수작전에서 공을 세운 조선 동지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대.” “비행사도 많이 갔는데, 거의 다 죽었대. 우크라이나 대공망이 너무 강해 자폭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길영조의 아들 길훈이도 죽었대.” 작년 여름은 북한군이 러시아에 파병되기 전이다. 북한은 지난해 8월 28일에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그 전에 러시아로 간 소수의 특수전 병력이나 비행사들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식 파병 이전에 북한군이 파병됐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길영조는 북한이 크게 내세우는 ‘비행사 육탄 영웅’이다. 1993년 원산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장 나자 김일성 동상에 추락할까 봐 탈출을 포기하고 바다로 기수를 돌렸다고 선전한다. 그의 아들 길훈은 대를 이어 비행사가 됐고, 2014년엔 김정은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6·25전쟁 때 소련이 비행사를 몰래 보내 북한을 도왔고, 북한도 베트남전에 비행사부터 은밀하게 파병했음을 고려하면 비행사 파병설은 무시할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이전의 특수전 병력 파병은 그냥 소문에 불과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당시 북한군과 싸웠다는 말이 없었다. 이런 소문은 왜 퍼졌을까. 북한 당국이 파병에 앞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미리 영웅담을 만들어 ‘군불’을 피웠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보도가 실종된 북한에선 소문의 힘이 매우 강하다. 이런 점을 역이용해 북한은 오래전부터 소문을 전문적으로 퍼뜨려 유리한 여론을 만드는 비밀 팀을 운용하고 있다. 주로 은퇴한 고위급 노동당 간부 출신들이 평범한 노인으로 위장해 역전 등 공공장소에서 지시받은 소문을 퍼뜨린다. 파병 소문이 퍼지던 시기, 즉 김정은의 공식 지시 이전에 북한에선 러시아로 파병될 군인들을 비밀리에 뽑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에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다. 북한군 고참 군인이었던 A 씨도 자원했지만, 탈락했다. 그는 “러시아로 보낼 군인을 뽑을 때 집안 배경이 매우 중요했다”며 “농장, 탄광, 군수공장 지역 출신 군인 위주로 뽑혔다”고 했다. 이들의 특징은 하층민들의 자녀들이며, 닫힌 지역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산골 오지에서 자라다 보니 한류 등으로 오염되지 않아 세뇌가 잘 먹힌다. 산골 하층민은 죽어도 소문이 산을 하나 넘기 어렵다. 힘없는 부모들은 불만을 터뜨릴 엄두도 못 낸다. 반대로 평양 등 대도시의 간부 자녀들은 파병군에서 제외됐다. 간부는 불만 세력이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또 이들의 자녀들은 한국 드라마 등 외부 문물을 많이 접한 소위 ‘깬 세대’이기에 세뇌가 잘 먹히지 않는다. 1만2000명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파병군이 특수부대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죽어도 괜찮을 군인들을 뽑아 구성한 부대였다. 물론 전투엔 대체로 특수부대 소속 군인들부터 투입됐겠지만, 특수부대 자체가 가난한 집 자식들이나 가지, 간부 자녀들은 거의 가지 않는다. 훈련이 매우 고되고, 중간에 자식을 대학으로 빼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해외 작전부대 전사자 101명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며 유가족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전투 유공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에선 대표적 영웅이라는 12명의 공훈이 소개됐는데, 대다수가 자폭한 군인이었다. 12명 소대원이 함께 자폭, 둘이 껴안고 자폭, 부상당하니 총을 머리에 쏴서 자결 등의 내용이다. 22세 군인이 자폭하려고 수류탄을 터뜨렸는데 왼팔만 잘려서, 오른팔로 다시 머리에 대고 터뜨렸다는 영웅담도 나온다. 공연을 보면 북한군은 싸우러 간 것이 아니라 자폭하려고 파병된 군대인 것 같았다. 세상을 모른 채 산골에서만 자란 청년들은 “나의 자결로 가족의 운명이 바뀐다”고 믿는다. 농장과 탄광, 군수공장 근로자의 자녀는 신분이 세습된다. 군복무를 마치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아 산골로 돌아간다. 이들에게 자폭은 가족을 ‘천민 세습 지역’에서 해방시켜 평양 시민으로 재탄생시키는 자기희생이다. 실제로 가족은 평양 거주라는 보상을 받았다. 이처럼,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을 자폭 찬가가 넘치는 광신도의 땅으로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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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가 북한에서 골프를 친다면? 기이한 북한 골프 이야기[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김정은도 만나시고, 북한에 ‘트럼프 월드’도 지으셔서, 제가 그곳에서 골프도 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좋아요. 우린 할 수 있어요.”미국 워싱턴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에선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북한의 해외판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26일 두 사람이 보란 듯이 북한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나섰습니다.조선신보는 “최근 평양에서의 골프 관광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조선에서도 관광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관광 유형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이어 평양골프장과 서산골프연습장을 거론하며 “아름다운 자연 경치와 온화한 기후조건으로 하여 골프 관광에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고 자평했습니다.이렇게 열심히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북한에 경기를 할 수 있는 18홀 골프장은 딱 한 개밖에 없습니다. 골프장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가 골프 관광을 홍보하다니, 참 기이한 일이죠. 그런데 북한 골프 이야기를 해보면 기이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반동 부르주아 운동북한에서 야구와 골프는 오랫동안 혁명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동 부르주아 운동’으로 간주돼 왔습니다.야구의 경우 경기는 보통 주말 오후나 저녁에 시작돼 4시간 정도 열립니다. 축구처럼 프로팀들이 있고, 주말에 주로 경기가 열립니다.그런데 북한 당국이 매일 4시간씩이나 주민들이 야구에 정신이 팔리도록 놔둘 리가 없죠. 그 시간이면 일을 시키던가, 하다못해 강연회라도 해서 사상 선전을 해야죠. 그나마 축구는 90분짜리 경기라 야구보다 훨씬 짧습니다.또 축구는 공 하나와 공터가 있으면 다 할 수 있지만, 야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야구 방망이, 야구공, 글로브 등 장비도 많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북한이 인민이 좋으라고 그런 것을 공급할 리가 없습니다.골프는 야구보다 훨씬 더 부르주아 운동입니다. 골프는 넓은 잔디밭에서 해야 하는데, 그런 잔디밭이 무려 18개나 있어야 합니다. 사람 먹을 강냉이 재배할 땅도 없는데, 한 개 작업반이 일할 수 있는 30헥타르 규모의 방대한 땅을 잔디에 양보할 순 없겠죠. 전기나 물도 없는데 양수기를 돌려 잔디를 키워야 하고, 농장 김매기에 동원될 사람들을 뽑아 잔디를 깎아주어야 합니다.경기 시간도 야구보다 더 많이 잡아먹습니다. 결정적으로 골프를 하려면 수천 달러의 장비를 각자 갖추어야 하는데, 노동당이 인민을 위해 골프 장비를 사줄 리도 만무합니다.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북한에서 골프 선수들이 출전한 겁니다. 선수 4명 모두 40대 후반의 아저씨들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일본에 사는 조총련 소속 남성들이었습니다. 물론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은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대다수 북한 주민이 골프장이나 골프 치는 모습을 처음 본 시기는 1992년이었습니다. 이때 김정일의 지시로 ‘민족과 운명’이란 다부작 예술영화가 제작됐는데, 영화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골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그때에야 북한 주민들은 “아하, 골프라는 것이 저런 잔디밭에서 저런 채를 휘두르면서 치는 것이구나”하고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드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저 장면은 도대체 어디에서 찍었지? 우리나라에 골프장이 있단 말인가?”● 김 씨 일가의 골프 수준알고 보니 인민들 모르게 있긴 있었습니다. 1987년에 평양에서 약 30km 떨어진 남포 강서구역 태성호 주변에 골프장이 건설됐던 것입니다.이것도 북한 당국의 의지로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북한에 큰돈을 들고 찾아오는 조총련 기업인들이 “평양에 와보니 놀게 너무 없다. 돈은 우리가 대줄 테니 골프장 하나 지읍시다”라고 한 것입니다.돈 대준다고 하니 김정일은 태성호 주변 땅을 내주어 총면적 12만㎡, 전장 7㎢, 18홀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됐습니다. 물론 인민들은 얼씬할 수도 없었죠. 평양을 방문한 조총련계 인물들과, 장성택, 김경희 등 북한의 ‘로열패밀리’ 일원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김정일은 골프를 했을까요? 북한이 “김정일이 평양골프장에서 생애 첫 라운딩을 해 11개의 홀인원을 포함해 38언더파를 기록했다”고 선전하고 있다는 말이 지금도 돌지만, 이는 호주의 이름 없는 매체가 옛날에 지어낸 말입니다.그렇지만, 김정일도 골프에 관심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김정일의 여러 별장을 가봤던 탈북민은 “골프 연습장 수준의 잔디밭이 있는 별장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하지만 김정일은 골프에 별로 소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체형 자체가 골프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또 골프를 치려면 팀을 이뤄야 하는데 ‘최고 존엄’이 아래 것들과 ‘굿샷~’ 이러며 돌아다니기도 내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김정은은 골프를 치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체형을 떠올리면, 절대 골프를 칠 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운의 금강산 골프장평양골프장이 외부에 본격적으로 문을 연 시점은 2005년입니다. 그해 8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가 평양에서 총상금 1억 원을 걸고 평양오픈골프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19세 송보배 선수가 우승했습니다.이때는 남북 관계가 매우 좋았던 시기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여행사를 통해 평양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재명 대통령도 돈을 내고 평양 관광을 다녀왔죠. 금강산 관광도 활성화됐고, 개성공단도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12월 한국 기업 아난티가 850억 원을 투자해 금강산에 골프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강산 골프장은 참 비운의 골프장입니다. 2008년 완공돼 일반에 오픈도 하기 전에 한국인 박왕자 씨가 피살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아난티는 금강산 골프장 회원권을 2500만 원에 팔았는데, 4000명 이상이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금강산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회원권 가격 반환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습니다. 아난티의 잘못이 아닌 천재지변에 해당됐기 때문이죠. 아난티는 골프장 건설로 큰 수익을 얻었습니다.이후, 이 골프장은 방치돼 있다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분노한 김정은의 화풀이 대상이 됐습니다. 그해 10월 이곳을 찾은 김정은은 “너절한 남측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올해 위성사진엔 금강산에 있던 ‘아난티 골프 리조트 앤 스파’의 메인 클럽하우스와 스파 건물이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돈맛을 알게 한 골프대회금강산골프장과는 달리 평양골프장은 지금까지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골프장 운영을 통해 돈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2011년 4월 영국에 있는 루핀이라는 여행사가 평양에서 ‘국제 아마추어 골프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하자 북한은 흔쾌히 승인했습니다. 명색이 대회이지만, 상금은 없고 오히려 돈을 내고 가야 했습니다. 1회 대회에선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8개국의 아마추어 선수 17명이 참가했는데, 84타를 기록한 25세 핀란드 청년 올리 레토넨 씨가 우승했습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1인당 999유로를 냈습니다. 물론 평양에서 마술쇼를 보고 묘향산과 비무장지대 등을 방문하는 관광 일정까지 포함된 비용입니다.루핀여행사가 주관한 대회는 2016년까지였습니다. 북한이 “왜 영국 여행사가 돈을 벌게 하지? 우리가 벌면 되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2017년 려명골프여행사를 만들어 직접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대회를 열었고, 이름도 ‘골프애호가경기’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외국 관광객 참가가 중단됐습니다. 2023년부터 다시 받는다곤 했지만, 실제로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가장 최근인 2025년 ‘봄철골프애호가경기’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렸고, 30여 명의 골프 애호가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외국인은 없고, 나이든 북한 아저씨들이 엉성한 폼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이 일부 공개됐습니다.이 대회에서 사용된 골프용품은 놀랍게도 한국의 골프용품 브랜드 ‘랭스필드’입니다. 2007년 랭스필드는 ‘2007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에 참가해 평양골프장에 ‘LF701′과 ‘골드’ 두 종류의 골프채 30세트를 기증했습니다. 다행히 이 골프채는 ‘너절한 남측 장비’로 단죄되지 않고, 외화벌이를 위해 닳고 또 닳을 때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잘 친 샷~!”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봄철골프애호가경기를 보도하면서 “이번 경기는 단체경기(총구획별경기, 구획별경기, 남자복식경기, 혼성복식경기)와 구획별 경기방식으로 승부를 겨루는 대항경기로 나눠 진행됐다”고 했습니다. “경기 참가자들은 다양한 치기 기술과 전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인상 깊은 경기모습을 펼쳐보였다”라고도 했습니다.치기 기술과 전술이란 말은 참 생소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골프를 치려면 기존에 알던 용어를 다 잊어야 합니다. 골프 용어는 거의 다 영어인데, 북한은 이를 다 ‘주체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령 ‘파(Par)’를 ‘기준타격횟수’라고 하고, 그린을 ‘정착지’라고 하는 식입니다.평양골프장에서 안내원에게 규칙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옵니다.“봉사 건물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위생실도 들려 준비하십시오. 골프장 중간에 있는 간이매대에도 위생실이 있습니다.1번 타격대에 도착하면 순서대로 공알받침을 놓고, 가장 긴 나무채로 공알을 향해 힘껏 휘두르기를 합니다. 잔디구역에 도착하면 ‘잘 친 샷’ 이렇게 소리치며 박수를 쳐줍니다.휘두르기를 한 공알이 경계선 밖으로 가면 벌타를 먹고 하나 더 치는데, 모래웅덩이나 물방해물을 잘 피해야 합니다. 그로브는 7번 쇠채로 많이 칩니다. 긴 거리나 짧은 거리가 아닌 첫 중간거리에서 빠를 잡으려면 두 번째 휘두르기로 정착지에 올라타고 커브 구멍에 바닥채를 써서 꽂어넣기나 살짝 공넣기를 하면 됩니다. 꽂아넣기 전문가들은 한번에 넣어 버디를 하기도 합니다….”북한 용어를 적다 보니, 문뜩 이런 상상이 듭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날이 온다면, ‘정착지에 올라 탄’ 그의 ‘구멍 꽃아넣기’를 보고 김정은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이렇게 소리치겠죠.“잘 친 샷~!”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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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필 작성은O 혼자 휴대폰 녹화는X… 유언장의 기술[브레인 아카데미 플러스]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번주는 법률편입니다.》솔로가 대세인 시대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전국 1인 는 1002만1413세대였다. 사상 처음 1000만 세대를 돌파했다. 전체 세대의 41.1%로 다섯 세대 중 두 세대가 홀로 사는 것이다. 1인 세대 가운데 연령별로는 70대 이상이 198만297세대로 가장 많았다. 60∼69세가 185만1705세대로 뒤를 이었다. 특히 60대 이상에선 1인 세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1인 세대가 증가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고령화와 비혼주의 확산이 꼽힌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선 ‘나는 요즘 고독사를 할까 봐 걱정한다’는 응답이 35%나 됐다. 1인 세대가 많아지면서 ‘나 혼자 산다’ ‘나는 솔로’ ‘미운 우리 새끼’ 같은 홀로 사는 사람들을 다룬 TV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 트렌드를 따라가는 TV 특성상 독거(獨居)족의 모습은 더 많이 시청자의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홀로 살다 죽으면 그 재산은 어디로? 혼자 살면서 겪는 천태만상을 다루는 TV 예능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독거노인이 점점 늘고 있는데, 이들이 세상을 떠날 경우 그 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들어가는 돈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국고에 귀속된 무연고 사망자 상속 재산은 총 1200만 원에 불과했지만 2021년부터 매년 20억∼30억 원까지 늘어났다. 한국보다 먼저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일본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일본 최고재판소(한국 대법원 격)에 따르면 2022년 국고 귀속 무연고자 재산은 768억 엔(약 7231억 원)에 이른다. 2013년 약 336억 엔에서 10년도 채 안 돼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무연고자 상속 재산은 정해진 용처 없이 세수에 포함돼 국가 재정에 활용된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이 국가 부수입처럼 쓰인다면 아무리 애국심이 강하다 해도 기꺼워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나 자녀 같은 법적 상속인이 있다면 별도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법에 따라 상속 절차가 진행된다. 그렇지 않다면 생전에 유언장을 확실히 남겨 본인의 뜻에 맞게 유산을 쓰게 해야 한다. 정작 유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유언을 써서 공증을 받으면 된다는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유언 내용을 바꾸려면 다시 증인을 세운 뒤 공증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한다. 그럼 혼자서 유언장을 써서 남기면 되지 않을까.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스스로 작성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만 민법에서 정한 형식 요건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무효가 된다. 먼저 유언장은 자필(손으로 쓴 글씨)로 작성해야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쓰면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유언장에는 날짜, 성명, 주소(아파트 동호수, 번지수까지)도 빠지지 않고 자세히 적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도장이 찍혀 있거나 자필 서명이 있어야 한다. 요즘에는 휴대전화로 유언을 녹음하거나 영상을 찍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 경우도 법이 정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기 십상이다.● 필수가 된 유언장 작성 유언장을 쓰다 보면 막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채무 관계다. 내가 빌린 돈이라면 갚는 것은 쉽다. “남은 유산에서 얼마를 누구에게 넘겨주라”고 적으면 된다. 하지만 받아야 할 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에 소멸시효란 것이 있다. 법에서 정해 놓은 일정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 간 금전 거래에서 법이 정한 소멸시효는 10년이다. 돈을 빌려주고 난 뒤 10년 동안 채무자에게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았다면 돈을 받을 수 없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 ‘아차’ 싶다면 소멸시효가 지났는지 확인하고, 지나지 않았다면 일단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해야 한다. 이 경우 소멸시효는 다시 10년 연장된다. 다만 채무 반환을 독촉한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빌려준 돈이라고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법적으로 쓰일 것을 알면서도 빌려준 돈은 돌받을 수 없다. 다만 빌려준 돈이 소액인 경우 이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할 소송비용이 더 클 수도 있다.● 솔로 시대 ‘이혼 전술’ 1인 가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주요 원인의 하나로 이혼율 증가가 꼽힌다. 통계청 ‘2024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 건수는 9만1151건이다. 평균 이혼 연령은 남성 50.4세, 여성 47.1세다. 한국에서 이혼 사유는 크게 재판상 이혼 사유와 협의상 이혼 사유로 나눈다. 재판상 이혼 사유(민법 제840조) 첫 번째 항목은 ‘배우자의 부정행위’다. 배우자가 간통이나 그에 준하는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를 의미한다. 현실에선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불륜 사례가 많다. 우리나라 기혼자 셋 중 하나는 ‘불륜을 저질러 본 적이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잘못한 자가 벌을 받게 하는 것은 ‘정의의 심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한 상대를 심판대에 올려놓으려면 ‘심판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사랑과 전쟁’에서 승자가 되겠다고 아무 방법이나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배우자 휴대전화를 몰래 뒤져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간 역공을 당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법과 판례는 어디까지를 불륜, 바람, 외도라고 인정하고 있을까. 단순한 만남, 손잡기, 키스, 잠자리 등 어디서부터 불륜인지 애매하다. 불륜의 세계엔 보통사람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일들이 많다.● 복수의 한계는 어디까지? 올해 6월 서울 강남구 두 곳에 배우자의 불륜을 폭로하는 플래카드(현수막)가 걸린 사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한 아파트 앞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애 둘 유부남 꼬셔서 두 집 살림 차린 OOO동 OOO호. 남의 가정 파탄 낸 술집 XXX 김OO 꽃뱀 조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파트 동·호수와 이름 끝 자는 별(★) 모양으로 처리됐다. 비슷한 시기 한 빌딩 앞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애 둘 유부남이 총각 행세, XXX와 3년 동안 두 집 살림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적반하장에 반성도 없는 파렴치한’이라고 쓰였다. 이 플래카드에서 남성 이름과 직장은 모자이크 처리됐다. 이 두 플래카드에는 불륜 당사자로 추정되는 남성과 여성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인쇄돼 있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의 눈은 검은색 줄로 가렸다. 플래카드를 두 곳에 건 사람은 불륜남의 아내로 추정됐다. 지난해 2월에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경축. 상간남 소송 피고 완패.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한 상간남 김OO. 동네에 더러운 놈 있으니 아내·여자 친구 관리 잘하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입길에 올랐다. 상대방 이름과 거주지를 불분명하게 처리한 이 플래카드들을 내건 사람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형법 제307조 제1항에 따르면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해당 플래카드들을 내건 행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는 보기 어려운, 사적 복수의 영역에 포함된다. 플래카드에 등장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해 법적 다툼으로 가는 경우, 플래카드 내용을 통해 누구를 지칭하는지 일반인이 알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만약 알게 된다고 판단되면 플래카드를 내건 사람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는다면 법원에서 원고와 피고 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여야 할 것이다. 8월 현재, 플래카드에 등장한 사람들이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QR코드를 스캔하면 28일 채널A에서 방송된 브레인 아카데미 ‘건강편’을 볼 수 있습니다. ‘법률편’은 9월 4일 오후 10시 방송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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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강에서 와인 마신 신혼부부의 말로[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최근 북한 김여정이 한국을 향해 연일 독설을 내뱉습니다.18일 이재명 대통령이 을지국무회의에서 “작은 실천이 조약돌처럼 쌓이면 상호 간 신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하자, 다음날인 19일 곧바로 등판해 “마디마디, 조항 조항이 망상이고 개꿈”이라며 “이재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위인이 아니다”고 했습니다.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8월 들어 일주일에 한 번꼴로 등장해 “허황된 개꿈, 너절한 기만극, 헛된 망상” 등의 악담을 쏟아냅니다.오빠에게서 한국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난하라는 임무를 받은 듯합니다. 악역을 여동생에게 맡긴 김정은은 광복절 당일에 러시아 예술단 공연을 참관할 정도로, 러시아에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윗동네 러시아에 붙어 살길을 찾는 와중에, 아랫동네 남쪽에서 자꾸 ‘들이대니’ 짜증이 난다는 것을 김여정을 통해 전달합니다.지난해부터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아예 마주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남 메시지도 “나, 최고 존엄이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를 씁니다.● 대동강 문명 띄우기이렇게 남북 관계가 철저히 단절되고 있는 와중에 북한에서 눈여겨볼 만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북한 매체들이 대동강을 열심히 띄우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는지 살펴보니, 기사마다 부쩍 대동강 문명이 언급됩니다. 그러니 대동강 기사는 결국 ‘대동강 문명론’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주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역사는 이렇게 바꾸는 것이다’를 보여주려는 듯합니다.대동강 문명론은 세계에서 오직 북한만이 가르치는 역사입니다. 북한은 세계에 ‘5대 문명’이 있다고 교과서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과 인더스 문명을 일컬어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동강 문명도 당당하게 포함된다는 것입니다.한반도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 초에 세워졌는데, 이것이 대동강 문화의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북한은 대동강 유역에 집중된 고인돌 무덤과 돌판 무덤, 큰 부락터 유적, 옛 성, 집터 등이 발견됐다고 주장합니다.대동강 문명이란 말이 최근에 나온 개념은 아닙니다. 1998년 북한 역사학학회가 처음 주장한 개념인데,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대량 아사가 발생하자, 주민에게 한반도 역사의 중심이 평양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급조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대동강 문명의 창조는 1993년 단군릉 발굴 사건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김일성이 지목한 곳을 파보니, 5011년 전에 살던 남자와 젊은 여성의 깨끗한 뼈가 나왔는데, 이것이 단군과 그 부인의 유골이라는 겁니다. 북한은 이 유골의 연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자스핀공명법’이란 것을 사용했다고 합니다.전자스핀공명법은 오차가 1000년 이상씩 나오기 때문에 10만 년 정도의 단위를 재는 측정법인데, 북한은 정확한 연도까지 측정하는 외계 기술을 발명한 것 같습니다.아무튼 그렇게 단군과 부인의 유골이 나왔으니, 고조선 역사는 기원전 2333년부터가 아니라 기원전 30세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북한 주장입니다.북한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위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하지만, 북한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대기근이 지나간 뒤엔 대동강 문명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시절의 사기극인 줄 알았던 대동강 문명론이 요즘 갑자기 북한 매체에 부쩍 등장합니다.김정은이 남북을 두 국가로 규정한 뒤 이를 뒷받침할 논리를 열심히 찾다가 결국 대동강 문명을 다시 꺼내 든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지는 아주 간단명료합니다.“우리는 대한민국, 쟤들하고 역사부터 다른 나라야. 그리고 우리는 대동강 문명을 이어받은 훨씬 정통성이 있는 나라야.”북한이 대동강 문명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이러면 조만간 단군의 부친인 환웅과,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한 단군의 모친 웅녀의 유골도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외계인급 기술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상한 대동강 문명대동강 문명을 띄우려니 대동강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대동강 관련 기사들이 나올 때마다 여기에서 얼마나 화려한 문명이 펼쳐지는지 보여주는 사진들이 등장합니다.대동강을 끼고 지어진 건축물과 함께, 대동강을 누비는 유람선도 자주 등장합니다.그런데 그걸 아십니까. 대동강에선 맥주를 마시고, 불고기는 먹을 수 있는데, 와인을 마시면 가련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지난달 북한은 “대동강에서의 유람용 원형 보트 봉사가 이채를 띠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사진 속에 등장한 원형 보트는 대동강의 옥류교와 대동교 사이를 오가며 매일 운영되고 있는데 6명 좌석, 12명 좌석의 두 종류입니다.원형 보트에는 불고기 식탁이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불고기를 맛보며 즐겁고 유쾌한 휴식의 한때를 보낸다는 것이죠.원형 보트를 타본 각 계층 시민들의 반응도 자주 나옵니다. “대동강의 풍치를 유람하는 것도 좋지만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의 불고기 맛은 그 어데 비길 데 없이 독특한 정서와 낭만을 안겨준다”는 식입니다.이런 자랑을 보니 2021년 북한이 ‘비사회주의 현상을 폭로한다’며 만들었던 내부 영상이 떠오릅니다. 이 영상은 북한 내부 주민들을 협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외부에선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 내부의 누군가가 영상을 찍어 밖으로 유출했습니다.영상에선 아나운서가 잔뜩 흥분한 높은 목소리로 비사회주의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책, 주소까지 언급하며 준열하게 비난합니다.결혼을 앞둔 남녀가 껴안고 사진을 찍어도 반동적 현상이고, 사진관에 가서 2인용 자전거를 타고 포즈를 취하고 찍어도 퇴폐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올림머리를 했다고,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었다고 마구 욕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퇴폐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법정에서 머리를 숙이고 재판을 받는 장면도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그런데 이 영상에 대동강에서 와인을 마시는 남녀가 등장합니다. 아나운서는 이들의 사진을 계속 보여주며 이렇게 꾸짖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의 생활 감정과는 전혀 맞지 않는 불건전하고 나태한 생활 세태들, 지어 저들 자신도 익숙 되지 못한 왜식왜풍을 남이 시키는 대로 흉내 내느라고 모질음을 쓰는 가련한 저 신랑 신부들이 하나같이 당의 품속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이란 것입니다.자기들을 품 들여 키워주고 내세워준 당과 조국의 믿음에 천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신통히도 당에서 하지 말라는 짓만 해대고 있으니 과연 저런 인간들이 준엄한 시련의 시기에 당과 조국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잘생긴 신랑, 신부가 했다는 너절한 짓은 대동강의 보트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와인을 마시는 행동이었습니다.북한에선 와인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자체로 생산하지 않는 데다, 소비층이 거의 없어 수입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와인을 좋아하는 김정은을 위해선 조지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최고급 와인들이 꾸준히 들어가긴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구경하기 어렵습니다.그런 귀한 와인을 구입해 대동강 보트에 올라 마시니 높은 고위 간부의 자녀들이 분명합니다. 대학까지 나오고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이라고 했으니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분명합니다.그렇지만 전 국민이 보는 비판 영상에 등장해 ‘당과 조국의 은덕을 저버릴 예비 배신자’로 낙인이 됐으니 처벌도 심하게 받았을 겁니다. 평양에서 추방돼 깊은 산골 농민으로 가거나, 탄광 노동자로 가면 그나마 다행일 겁니다.비판 영상에 등장했던 신혼부부는 지금 북한 매체들이 자랑하는 원형 보트를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요.“저 사람들은 불고기도 구워 먹고, 맥주도 마시는데, 우린 대체 뭘 잘못한 걸까. 와인을 마신 죄밖에 없는데, 왜 우린 가련한 자가 되고, 저들은 행복한 평양 시민이 되는 걸까.”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죠.이들이 잘못한 점은 노동당에서 대동강에서 불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죄인 것 같은데, 그것도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2021년에도 북한이 자랑하는 대동강 유람선 ‘대동강호’에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 식사는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굳이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맥주잔이 아닌 와인잔을 부딪친 죄밖에 없습니다. 이쯤 되면 지금의 대동강 문명은 참으로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봐야겠죠. 혹 평양에 관광을 간다면 정말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지 모릅니다.“선글라스를 껴도 되나요? 양주는 마셔도 되나요? 하품은 해도 되나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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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후 다시 끌려가 고초…5수 끝 마침내 서울서 간호사 됐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허요셉 씨 인생은 한번도 쉽게 풀린 적이 없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보니 월남자 가족이라 평생 운명이 결정돼 있었다. 남들처럼 군대에 가긴 했지만, 수십만 톤의 쌀을 깔고 앉아 있었어도 10년 내내 배고픔에 시달렸다.탈북했지만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에 다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쪽에 오긴 했지만 평생의 직업을 찾는 데 14년이나 걸렸다.그럼에도 그는 주저앉은 적이 없었다.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지만, 어떻게든 살아냈다. 노력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며 살고 있다.● 월남자 가족의 운명허 씨는 1976년 두만강 옆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회령 토박이였다. 하지만 해방 후 회령에서 시계수리공을 하던 작은할아버지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배급받으며 살기 싫다면서 1949년 가족을 데리고 월남했다.허 씨가 한국에 와서 들은 바로는 작은할아버지 허중풍과 그의 딸 허길자는 1960년대 종로에서 금은방을 크게 했다는데 찾지 못해 만나 보진 못했다. 작은할아버지도 27년 뒤에 태어날 종손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시내 근처 채종(採種)농장 농장원으로 있었다. 더 내려갈 것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죄로 허 씨가 초등학생 때 읍에서 70리(28km)나 떨어진 산골로 이사를 해야 했다.그 마을엔 항일투사의 조카가 살고 있었다. 위세가 당당한 그는 회령담배공장 담당 보안원(경찰)을 끼고 비리를 저질렀다. 담배뿐만 아니라 물엿도 생산하던 담배공장에서는 양곡 원료를 많이 소비했다. 어느 날 부친은 투사의 조카가 양곡을 빼돌리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나중에 비리가 발각되자, 항일투사 조카는 허 씨 아버지가 밀고했다고 생각했다. 그 조카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허 씨네 가족을 통째로 인근 농촌으로 추방시켰다. 하지만 허 씨 부친은 밀고하지 않았다. 부친은 억울함을 풀겠다고 중앙당과 도당 등에 끊임없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주민들이 국가기관과 공무원의 부당한 행위로 권리가 침해됐을 경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제기하는 신소(申訴)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1년 뒤 항일투사 조카는 끝내 비리가 밝혀져 감옥에 갔고, 보안원은 공장 보일러공으로 강등됐다. 허 씨 아버지가 이긴 것이다.하지만 북한 사회에선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었다. 힘 있는 자들을 잘못 건드렸으니 보복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아버지는 이기고 나서도 추방된 농촌보다 더 깊은 산골로 도망갔다. 그렇지만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속에 화가 있는 법이다. 도망간 곳이 두만강을 끼고 있는 외진 마을이었던 덕분에 나중에 쉽게 탈북할 수 있었다.● 군수창고 경비원허 씨는 월남자 가족이어서 대학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컸다. 설사 성분이 나쁘지 않더라도 그가 살던 산골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허 씨의 진로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1993년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허 씨는 당연한 듯 군에 입대했다. 그가 간 부대는 평북 구성에 있는 군수동원총국 산하 경비부대였다. 구성은 고려거란전쟁 때 귀주대첩이 벌어진 지역이다. 이곳에서 그는 2002년 제대될 때까지 만 10년을 복무했다.공교롭게도 그가 복무한 기간은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특히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는 구성은 북한에서도 가장 먼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곳이다. 산이 많다 보니 이곳은 오래전부터 북한의 핵심 군수공업 기지로 활용됐다. 깊은 산골짜기들을 따라 전차공장, 탄약공장, 피복공장 같은 군수공장들이 갱도 속에 숨겨져 있었다.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배급이 갑자기 중단되자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발버둥칠 겨를도 없이 죽어 갔다. 일반 공장은 배급받지 못하면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다니거나 산에 올라가 화전을 개간해 농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군율이 적용되던 군수공장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북한이 늘 강조하는 ‘자력갱생’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노동자들 가족이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었지만, 반년쯤 지나니 껍질 벗길 나무조차 남지 않았다. 나무가 사라지는 숫자만큼 산에 무덤이 늘어났다.허 씨는 이 참혹한 현실을 수십만 톤의 식량을 깔고 앉아서 목격했다. 그가 속한 경비대대는 구성 산골짜기에 숨겨진 식량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구성엔 군수동원총국이 관리하는 매우 큰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가 많았다. 예비 물자엔 식량과 연료, 무기 부품이 들어 있었다. 탈곡하지 않은 벼를 가마니에 담아 수많은 갱도에 나눠 보관했다. 오래 보관하면 벼가 썩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갱도의 벼를 실어 내가고, 새로 수확한 벼를 채웠다. 그때마다 화차 20개를 연결한 열차가 가마니를 잔뜩 싣고 오간다. 쉬지 않고 진행해도 교환 작업은 3~4개월씩 걸렸다.구성 갱도들에 쌀이 얼마나 저장됐는지 알 순 없었지만, 수없이 드나드는 차량들을 보면 수십만 톤은 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산마다 거대한 쌀 창고들이 있는데도, 구성 사람들은 단 한 톨의 쌀알도 받지 못하고 무리죽음을 당했다.전쟁에 쓸 연료는 바위산 하나를 통으로 파내 만든 저장탱크에 보관했는데, 이곳이 터지면 구성 시내가 날아간다고 했다.● 제대 1년 뒤 탈북굶주림은 민간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쌀 창고를 지키는 군인 속에서도 허약자들이 속출했다. 갱도 안에 쌀이 많아도 이걸 건드리면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 주변은 민간인 접근 금지구역이라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어도 도둑맞을 걱정이 덜했다는 것이다. 또 식량 교환이 이뤄질 땐 화차 경비를 서기 위해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가마니에서 새어 나온 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그렇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였다는 의미일 뿐, 배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도 옥수수가 익을 때쯤부터 밭에 몰래 들어가 옥수수를 생으로 씹어 먹었다. 겨울엔 먹을 것이 소금에 절인 무밖에 없었는데, 이걸로 몇 개월 내내 반찬과 국을 만들어 먹다 보면 염독이 올랐다.배가 고프니 군기도 바닥에 떨어졌다. 경비대대 안에서 사건, 사고가 계속 터져 나왔다. 1994년엔 민가에 내려가 가축을 훔쳐 잡먹은 동료 3명이 총살되기도 했다. 구타는 비일비재했다. 1995년엔 먹는 것 때문에 구박을 받던 병사가 상관 2명을 사살하기도 했고, 보초 나갔다가 동료를 사살한 사건도 벌어졌다.굶주림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2002년이 왔다. 10년이나 청춘을 바쳤지만, 문제의 부대 출신에 월남자 후손이기도 한 그는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했다. 제대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선 농사밖에 할 일이 없었다.얼마쯤 지나서 보니 다른 길도 보였다. 젊은이 중엔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밀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만강을 낀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 사는 것이었다.허 씨도 밀수를 시작했다. 매월 중국 돈 20위안을 내면 농장 일을 하지 않아도 눈감아 주었다. 그 돈으로 비료도 사 오고, 굶주린 노약자들도 먹고 살았다.밀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허 씨는 2003년 6월 동생을 찾으려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전에도 중국 땅을 여러 번 오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넓은 중국 땅에서 동생을 쉽게 찾을 순 없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용정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5개월쯤 일했을 때 한국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탈북민을 알게 됐다. 그는 허 씨에게 북한의 각각 다른 지역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오거나, 가족사진을 가져다 주면 그 대가로 한국에 갈 수 있는 선을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중국에서 일하면서 허 씨는 북한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알게 됐고, 한국으로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허 씨는 주저 없이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하지만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북한에서 여러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은 점점 꼬여갔다. 가족 한 사람은 데려왔지만, 다른 가족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지만 가족사진은 확보했던 터라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12월 강추위에 강으로 접근하다 국경경비대에 발각됐다. 얼음물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추격을 따돌렸다.사진을 전달해 주자, 심부름을 시킨 한국의 탈북민은 산동성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다. 그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해서 믿음이 생기면,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알려준 교회를 찾아간 그는 두 달 동안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다. 그동안 그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실패한 한국영사관 진입2004년 2월 11일, 허 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 앞에 나타났다. 그와 함께 영사관 진입을 시도할 탈북민은 모두 18명이었다.계획은 여권을 분실한 한국인인 것처럼 위장해 영사관 정문 접수실로 접근한 뒤 경비 서는 공안들을 한꺼번에 밀쳐 내고 진입하는 것이었다. 18명이 영사관 정문 앞에서 서성이면 주목을 받기 때문에 몇 명이 먼저 진입조가 돼 뛰어들기로 했다.28세 건장한 청년에 10년 군 경력을 가진 허 씨가 앞장섰다. 영사관 정문에 가서 여권 업무 때문에 왔다고 하니, 경비원은 “오늘은 쉬는 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문을 따고 들어갈까, 아니면 다른 날에 올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경비원이 눈치를 채고 신호를 보냈다. 영사관 주변엔 잠복한 공안들이 많았다. 공안들이 달려오자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던 다른 탈북민들이 우르르 흩어졌다.허 씨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맨앞에 섰던 그는 공안의 집중 표적이 됐다. 한참을 뛰다 보니 길이 막혔다. 따라오는 공안 두세 명을 때려눕혔지만, 이내 10여 명이 몰려와 덮쳤다. 전기곤봉이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18명 중에 허 씨와 여성 2명이 잡혔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다. 그는 베이징 국제구류소에 수감됐다가 무장경찰에 호송돼 단둥으로 옮겨졌다. 2주 뒤에는 북한 보위부가 중국으로 와서, 수감돼 있던 15명가량의 탈북민을 넘겨받아 신의주로 끌고 갔다.수갑과 쇠고랑을 차고 신의주에 가서 들은 첫말은 “반역자 새끼들, 대가리 까라”는 호통이었다. 허 씨처럼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던 탈북민은 한국행 기도자로 엄중히 처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들의 체포 경위를 넘겨주지 않았는지, 신의주 보위부에선 그를 중죄인으로 분류하지 않고, 회령에서 온 보위부 호송원에게 넘겨주었다.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회령 보위부로 이송됐다. 호송원이 수갑 하나를 자기 손과 허 씨 손에 함께 채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선 그래도 밥을 몇 숟가락 주었지만, 회령은 쓰레기죽을 한 국자 반만 주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한번은 보위부가 그를 끌고 그의 고향에 가서 농민을 모아 놓고 비판 모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죄명은 터무니없게도 “남조선으로 가려다 연길 비행장에서 체포됐다”는 것이었다.‘회령 보위부는 내가 베이징 영사관에 들어가다 잡힌 것을 모르는구나….’그렇게 생각하니 희망이 보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체포됐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하도 완강하게 주장하니 보위부도 단순 탈북자로 간주했는지 그를 노동단련대로 보냈다.그런데 반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 그의 몸무게는 42kg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보위부는 병보석을 허가했다. 그때가 2024년 6월 말이었다.두 달 동안 집에서 열심히 치료받았다. 하지만 살이 붙으면 다시 단련대로 끌려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주저앉아 오라를 받을 순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된 8월 25일 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한국 입국과 캐나다행중국에 다시 넘어왔지만, 지난번 도강과 이번 도강은 성격이 달랐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훨씬 더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뻔했다.그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 일하면서 한편으론 산동성 조선족 교회에 다시 연락했다. 영사관 진입 실패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교회에서 그에게 다시 다른 선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중국에 넘어간 지 3개월 뒤 다시 한국행 길에 올랐다.이번엔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갔다가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곤명을 거쳐 미얀마로 넘어가는 루트였다. 이번엔 사고가 없었다.2004년 12월 그는 미얀마 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다른 탈북민 12명과 함께 3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끝에 미얀마 한국대사관에 인계됐고, 다시 태국으로 보내졌다.미얀마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땐 회령 보위부에서 만났던 30대 부부가 계속 생각났다. 이 부부는 미얀마까지 갔다가 북송된 사람들이었다.미얀마에선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운명을 갈랐다.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모르고 무작정 넘어온 탈북민은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중국 공안에 인계되는 순간 북송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부부는 한국행 기도자란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올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태국에서 얼마쯤 있다가 남들처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쳤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날은 2005년 8월 18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다른 탈북민들처럼 좌충우돌 정착 과정이 시작됐다. 영등포의 한 기계 제작 업체에 처음 취직했다. 그곳을 6개월 다니다가 다시 간판 만드는 회사로 옮겨 갔다. 박봉은 참을 수 있었지만, 탈북자라고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힘들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삶의 동아줄을 내밀어 주었던 교회에 나가 위안을 얻었다. 2006년엔 북한에서 쓰던 이름 대신 허요셉으로 개명도 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의 삶을 책임져줄 순 없는 일이었다.계속 현실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던 2007년경 탈북민 사회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캐나다는 북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에 거주하던 탈북민도 난민으로 인정해 주었다.많은 탈북민이 캐나다로 떠났는데, 허 씨도 멋모르고 따라나섰다. 홀몸이라 비행기표를 구해 훌훌 털고 떠나는 데 어려움도 없었다.캐나다 생활은 마음에 들었다. 가자마자 임시 영주권을 받았다.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게 했고, 오후에는 꽃집에서 일했다. 무엇보다 탈북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6개월쯤 지나니 함께 캐나다에 온 사람들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국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캐나다에서, 그나마 의지했던 일행이 돌아간다고 하니 겁이 났다. 허 씨는 운 좋게 외국 바람 쏘인 것에 만족하고 함께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5수 끝에 간호사가 되다서울로 돌아온 허 씨는 2008년 적십자간호대학에 입학했다. 3년제 전문대였는데 졸업하면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허 씨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엔 캐나다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토론토에 살 때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남자 간호사를 보았다. 남자가 간호사를 한다는 것을 그때까진 상상도 못 했다.한국에 돌아와서 어디에 취직할지 고민하다가 직업 상담사에게 “혹시 한국도 남자 간호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될 수 있고, 또 뜨는 직업이다”는 대답을 들었다. 간호사가 되면 전문성을 갖고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공부가 쉽진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초가 달려 따라가기 어려웠다. 1년 반 뒤 대학을 그만두었다. 이때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막노동도 해 보고 공부도 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적응하기가 어려웠다.‘아, 나는 이 사회에선 적응이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란 말인가.’9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한 번 더 도전해 보자. 이번엔 목숨을 걸고 해 보자.’2010년 백석대 간호학과에 다시 입학해 4년제 과정을 밟았다. 처음에 안 됐던 공부가 이번이라고 잘 될 리는 없었지만, 버티고 또 버텨 2015년에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덟 과목을 치는 간호사 국가고시에서 떨어졌다. 대학 동기 63명 중 3명이 떨어졌는데, 그중 한 명이 됐다.자신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일과가 이어졌다. 건설, 식당, 이사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하지만 국가고시 합격이라는 목표는 손에 잡힐 듯 말 듯, 계속 피해 도망갔다. 2016년 과락…. 2017년 평락…. 2018년 또 평락….시험장에 들어갈 땐 또 왔냐는 시선이 부끄러워 정문을 피해 담장을 넘어 들어가기도 했다. 해가 흘러가면서 공부했던 문제집이 허리까지 쌓이는데 왜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르겠다는 것이 더 고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공부 방법을 몰라서 헤맸던 것 같습니다. 요령을 모르고 자기 생각만 앞세우며 고집을 부린 것이었죠.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 나이에 포기하면 다른 일이라고 쉬울까 싶어 오기로 다시 일어섰습니다.”다섯 번째 시험을 앞두고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자신 있는 과목부터 풀어라. 시험 전날은 쉬어라. 시험장에 들어갈 땐 늘 먹던 음식을 먹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3번을 찍어라.”그 조언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2019년 2월에 친 다섯 번째 시험에선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을 본 그 심정은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조언해 준 교수조차 “인간 승리”라고 울먹울먹할 정도였다. ● 정상에 오른 희열간호사가 되기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다. 이미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자격증을 받고 쉴 겨를도 없었다. 간호사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집에는 쌀 한 줌과 달걀 두 알만 있었다. 집세도 못 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시험 합격 후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성 간호사는 없어서 못 쓰는 게 현실이라 구직이 어렵진 않았다. 2019년 3월 그는 서울의 한 유명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취직했다. 그렇지만 그에겐 쉬운 일이 없었다. 병원과 일에 적응한다는 것은 새로운 난제였다. 환자들은 초보 간호사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항의했다. 주사는 잘 놓았는데, 상황 판단 능력은 경험과 비례했다. 20대 여성 간호사에게 “이런 것도 못 하냐.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신랄하게 추궁당해 쩔쩔매는 43세 아저씨 간호사의 모습은 누구나 상상하는 그대로였다.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시험공부할 때보다 더 많았다. 첫 직장은 결국 6개월 버티다 그만두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서울은 너무 빡세구나. 지방에서 배우고 오자’는 생각에 청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 취직해 일했는데, 거기서 많이 배웠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간호사 수요가 많아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응급실은 물론이고 코로나19 전담 간호사도 해 보고, 급성기 병동에서도 일했다. 점차 경력도, 실력도 쌓여 갔다.2023년부터 영등포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요양병동에선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 멀리 바라보며 살 수 있어 좋다. 6년 차 간호사가 된 그를 이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 후배 간호사들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경험 많은 간호사가 됐다.점점 일도 재미있어지고, 자신의 장점도 알게 됐다. 여기저기서 일을 해 보니 자신에겐 체력과 순간 판단이 중요한 응급실보단, 인성과 진심이 중요한 노인 환자를 상대하는 일이 맞았다.그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할 때 가장 기분이 좋다. 퇴원한 환자들이 보낸 편지를 받을 때 너무 행복하다. 드디어 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으로 삶이 즐거워진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돌아오는 사회라는 말의 참뜻을 이제 깨달았다.한국에 와서 정착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다른 탈북민을 보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저는 남들 척척 붙는 간호사 시험도 다섯 번 만에야 통과한 사람입니다. 포기도 하고 싶었고, 죽고도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지만, 노력하며 흘린 땀방울의 대가는 꼭 돌아옵니다. 다른 탈북민들도 다섯 번이나 재수해 43세에 간호사가 된 저를 보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허요셉 씨는 끝끝내 정상에 오른 자의 희열을 깨달은 사람이다. 또 다른 삶의 고개를 맞닥뜨릴지라도 이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올라갈 것이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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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전향장기수 안학섭 씨의 북송을 찬성합니다[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비전향장기수 안학섭 씨(95)가 최근 정부에 북한 송환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8일에도 안 씨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열린 송환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안 씨의 고향은 북한이 아닙니다. 강화도에서 나서 자랐지만,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했고, 1952년 7월 강원도로 남파돼 활동하다가 1953년 4월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4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다가 199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습니다.그가 43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이유는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도 그는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안 씨가 북한으로 갈 수 있다면 25년 만에 북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가 될 것입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그해 9월 비전향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송환됐습니다. 당시 안 씨도 북한에 갈 수 있었지만 “미군이 나갈 때까지 투쟁하겠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이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북에 묻히고 싶어 송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정부는 그의 북송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이미 63명도 보냈는데, 95세 노인의 소원을 못 들어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북한이 그의 송환에 응해 판문점에 나온다면, 남북의 대화채널이 복원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할지도 모릅니다.하지만, 정부가 승인해도 김정은이 안 씨를 받아들일까요. 북한은 최근 한강 하류에서 발견된 북한 주민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도 받지 않고 무시했습니다.북한의 대남 기관도 지금 안 씨의 송환 요구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열심히 주판을 튕기면서, 송환이 이뤄졌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부작용을 정리해 김정은에게 보고할 겁니다.만약 김정은이 승인한다면 “북에서 장례식을 치러줄 만한 충분한 선전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현재의 북한은 2000년에 비전향장기수를 받을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안 씨가 감내해야 할 달라진 변화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우선 북한은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선언한 이후 통일이란 말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정책의 불똥은 비전향장기수들에게도 튀었습니다.북한은 귀환한 이인모 씨를 포함한 64명의 비전향장기수를 ‘통일애국투사’라고 불렀는데, 작년부턴 ‘애국투사’로 호칭이 바뀌었습니다.안 씨가 북에 가도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고 자부할 그의 평생은 부정될 것입니다. 단순한 ‘애국투사’가 되겠죠. 북한이 안 씨를 내세워 선전하려고 해도 통일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부각할 순 없으니 선전 효과가 반감이 될 것입니다.둘째로 북한이 경험한 학습 효과입니다. 북한은 과거 비전향장기수들을 내세워 북한은 우월하고, 한국은 나쁜 사회라고 선전했습니다. 선전에 가장 많이 활용됐던 사람이 1993년 3월 북송된 이인모 씨였습니다.북한은 그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지칭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씨를 본 북한 주민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남조선 감옥은 어떤 곳이기에 34년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살아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남조선은 참 괜찮은 곳인 것 같다.”북한은 감옥에서 3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34년 옥살이는 상상도 못 하죠. 그래서인지 북한에선 이런 얘기가 퍼졌습니다.이인모가 북한의 감옥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북한에서 간부들만 수감되는 제일 좋은 사리원 감옥을 참관시켰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이 씨가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이 소문은 누구나 들었습니다.그리고 북한에선 신념을 지킬 기회조차 없습니다. 만약 누가 북한에서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지조를 지킨다”고 하면 즉각 사형이지, 절대 살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북한에 수감됐던 북파 공작원을 단 한 명이라도 보내달라고 해보십시오. 100억 달러를 준다고 해도 보낼 수가 없을 겁니다. 살아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이인모 씨의 송환 때 느꼈던 북한 주민들의 생각은 63명이 살아오면서 더 확실해졌습니다. “이인모가 별종이 돼 살아온 줄 알았는데, 저긴 대체로 수십 년씩 감옥생활을 해도 멀쩡하구나. 그리고 적이라고 해도 죽이질 않는구나.”북한은 고작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처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한국이 얼마나 관용적인 사회인지는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씨가 돌아가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인지를 증명하는 홍보물이 될 것입니다.“42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하고 나왔는데도 95세까지 살아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쉬쉬 말이 나오겠죠. 그러니 김정은이 안 씨를 쉽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세 번째 이유는 안 씨가 내세울 만한 대단한 업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인모 씨에겐 반일 활동 경력과 종군기자였다는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 씨는 남파돼 9개월 만에 체포됐습니다. 북한 주민들을 감동시킬만한 전투 공로도 없습니다. 게다가 고향은 북한이 아닌 강화도입니다. 여기에 더해 안 씨가 한국에서 30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까지 한 것을 알면 충격을 받겠죠. 간첩 또는 반동이 젊은 아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안 씨는 자신을 북으로 돌려보내달라며 며칠 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얼마 안 남은 인생, 이제는 동지들 곁에서 보낼 수 있도록 북으로 보내 주세요.”아마 그는 북에 돌아간 동지들이 불과 9개월 만에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팔며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장면을 봤을 겁니다. 2001년 6월 북한은 조선중앙TV에 비전향장기수들을 출연시켜 좌담회를 했습니다.사회자인 여성 아나운서가 “장군님의 위인적 풍모는 그야말로 온 남녘땅에 장군님 흠모 열풍을 안아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을 꺼내자 귀환 장기수들은 저저마다 남한의 ‘현실’을 이렇게 전하더군요.“남조선 거리에 나가면 장군님이 입으신 잠바가 유행의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남조선 청년학생들 속에서는 장군님의 영상을 가슴에 모시고 사진을 찍지 못하면 좀 시대에 떨어진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대학에서는 벽보판 상단에 장군님 영상을 모시고 장군님의 혁명 경력과 빛나는 업적을 대서특필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장군님 열풍 때문에 큰 백화점 점원들은 인민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닙니다.”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봐야 했을 영상입니다. 북한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사상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는 사람들을 9개월 만에 사기꾼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중엔 머리를 숙이고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매만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양에 돌아간 지 1년 뒤 63명 중 한 명이 남쪽에 남은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몰래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어떻게 전했는지는 알려지면 안 되니 생략하겠습니다.그 편지엔 “여긴 자네들이 생각했던 곳이 아니다. 나는 실수했지만, 당신들은 제발 오지 말고 남쪽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그 편지를 읽어봤을 비전향장기수들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그래서인지 그동안 북으로 가겠다고 열심히 조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안 씨가 나타났습니다. 아마 그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내가 돌아가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힐 일밖에 더 남은 것이 있을까”고 생각할 겁니다. 묻힐 일뿐이라면, 북한에서 그를 굳이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그러니, 우리가 그의 소원을 막을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사상과 이념을 떠나 95세 노인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사회라는 것을 북한에 당당하게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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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우크라이나 전쟁 북한군 포로, 언제까지 외면할 건가

    이재명 정부는 북한에 잘 보일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하고도 꼼꼼하게 취하고 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에 이어 5일 확성기 20여 개가 하루 만에 철거됐다. 지난달 초에는 국가정보원이 50여 년간 운영한 대북 라디오 및 TV 방송 송출을 전격 중단했다. 표류해 넘어왔던 북한 주민 6명 송환도 빨리 이뤄졌고, ‘북한 주민 접촉 신고 처리 지침’도 폐기됐다.이렇게 성의를 보여도 북에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국제적 각광을 받아 보기 위해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 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지난달 28일 선언했다. 그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 입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일정 조정이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 카드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정부 관계자들 머릿속이 “김정은, 그리고 이 대통령을 만족시킬 아이템이 무엇일까”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수만 리 타향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청년 두 명이 7개월 넘게 방치돼 있다. 이들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혔지만, 한국에선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우크라이나 사정에 정통한 인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이 처음에는 (한국으로의) 포로 송환 대가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젠 대가를 포기하고라도 (한국이) 데려간다고 하면 그냥 보내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그렇지만 한국에서 이 포로들을 데려올 수 있는 관계 부처는 찍힐까 봐 말도 못 꺼내는 것 같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이 데려오라고 지시하면 즉각 이뤄질 일이다. 한국 정부 공무원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서 국제법에 의거해 송환 절차를 밟으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북한군은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다. 국정원은 북한군 1만5000명이 파병돼 전사자 600여 명을 비롯해 사상자 4700여 명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 사상자들 가운데 포로가 단 2명 나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극단적으로 세뇌된 북한군은 포로가 되기보다 자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우크라이나 군인들은 “북한군은 부상당한 전우를 데려갈 수 없으면 사살하고 퇴각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부하가 포로가 되면 상관에게 엄격한 연대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인류 전쟁사에서 전투 중 다친 부하를 죽이지 못했다고 지휘관을 처벌하는 군대는 없었다. 전투기 자살 공격인 ‘가미카제(神風)’로 악명 높았던 일본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우크라이나군은 북한군을 포로로 잡기 위한 특수부대를 운영했지만 부상한 두 명만 생포할 수 있었다. 이 포로들은 “수류탄이 있었다면 자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최초로 포로가 된 북한군은 부상이 심해 죽었다고 우크라이나군이 발표했지만, 실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공개된 다른 북한군 포로의 손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은 부상 때문이 아니라 자결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이런 현실에서 두 명이 포로가 된 것도, 마음을 바꾸어 한국으로 오겠다고 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북한 청년들이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전우를 서슴없이 죽이는 잔혹한 군인이 된 것도, 삶을 서슴없이 포기하도록 세뇌된 것도 김정은 탓이니 우리와 상관없는 일인가.한국은 세계 난민을 위한 모금 광고가 TV에서 나오는 나라다. 그런데 불과 수십 km 북쪽에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에서도 고작 돼지비계 한 덩이에 흐뭇하게 웃는 동포가 살고 있다. 러시아에 파병되면 죽을 땐 죽더라도 배부르고 뜨뜻하게 살 수 있다며 자원하는 청년들이 있다.우리가 북한 주민을 모두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옥’ 같은 전장에서 생존한 20세, 26세 청년들이 하루빨리 새 삶을 살게 손은 내밀 수 있다. 이들을 외면한다면 이재명 정부가 주장하는 남북 인도주의의 의미는 달리 해석돼야 한다. 김정은에게 잘 보이는 것만 인도주의이고 잘 보일 수 없으면 인도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두 청년은 오늘도 “우릴 언제 한국에 데려가느냐”고 묻고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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