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선을 타고 중국으로 탈북한 사례는 거의 없다. 탈북 화가 이지혜 씨는 그런 희박한 방법으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다.
배를 타고 떠났으면 바로 한국으로 오지, 왜 중국으로 갔느냐는 질문이 따르기 마련. 이 씨가 탄 배는 북한 어선이 아니라 중국 어선이었다. 북한의 연료난으로 해군 함정이 거의 가동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중국 어선들은 대놓고 북한 영해에 들어가 조업을 했다. 일부 선장은 대담하게도 야밤에 북한 땅에 배를 대고 사람을 싣고 오는 브로커 일을 하기도 했다.
2017년 여름, 22세 이 씨는 먼저 탈북한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 가족을 데리고 어느 날 몇 시까지 평북 어느 섬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탈북하는 줄도 몰랐다. 그 섬까지 배를 타고 가면 아버지가 거액을 갖고 나타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집을 떠났다.
북한 배를 타고 그 섬에 가서 기다리니 밤에 중국 배가 나타났다. 그 배를 타고 몇 시간 만에 중국 항구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전, 깊은 산골에 가서 금을 캐 돈을 보내겠다던 아버지였다. 중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여보, 사실은 내가 중국에서 큰 수산 기지를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 일단 수산 기지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이 씨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 씨와 여동생은 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하루빨리 돈을 받아 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왜 이 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한국으로 가자는 말을 못했을까. 왜 어렵게 가족을 배로 탈북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올해 10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린 이 씨 개인전 ‘인민의 소원’ 포스터.
●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만남
이 씨는 1995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배급을 받지 못해 몰래 숨어서 장사하느라 너에게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는 어머니 말은 많이 들었다.
아버지는 배를 탔다. 원래 공장 노동자였지만, 일찍이 공장에 매달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기로 하고 배를 탔다. 바다에서의 일은 고되고 위험했지만 돈은 많이 벌 수 있었다. 한번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 의사 실습생이던 모친을 만나 내처 결혼까지 했다.
알고 보니 두 집안은 서로 상극이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개천과 안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지주였다. 정미소도 있었고, 집도 세 채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모두 빼앗겼다. 할아버지는 가끔 아버지에게 “저기 보이는 땅이 다 우리 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집은 대대로 머슴을 살다가 해방이 돼서 팔자가 바뀌었다. 지주를 타도하고 빼앗은 집의 일부와 땅을 받았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지주 타도에 얼마나 열심히 앞장섰던지 리당위원장까지 올랐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너무나 다른 집안인 데다 의사와 어부라는 신분의 벽도 있었음에도 결혼까지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배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 배를 샀는데, 당시 북한에서 배가 있는 어부는 당 일꾼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벌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엔 의사가 어부에게 시집가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옳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어부들은 굶어 죽지 않았지만 의사는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다. 어머니도 병원을 나와 장마당에 앉은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물론 아버지가 벌어오긴 했지만, 가족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2023년 한 공유 오피스텔에서 일하던 이지혜 씨.
● 안기부 간첩으로 몰린 아버지
2009년은 이 씨 기억 속에서 가장 좋았던 해이자 가장 불행한 해이기도 했다.
그해 이 씨는 처음으로 쌀밥을 먹고살았다. 늘 배가 고파 “세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해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돈이 막 들어왔다.
아버지는 점차 영역을 확대해 중국에 수산물을 파는 일에도 손을 댔다. 이 일도 잘 돼 군부대 수산기지 기지장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는 각각 4000달러, 6000달러에 산 배를 두 척 소유하고 있었고, 1700달러와 2200달러씩 주고 산 외국 엔진도 두 개 있었다. 이 정도면 당당히 부자라 할 만했다.
하지만 북한은 눈에 띄게 잘 사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아버지도 만일을 대비해 여기저기 뇌물을 많이 뿌려 놨다. 하지만 군부대 보위부장은 액수가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날로 뺏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2009년 10월에 아버지를 갑자기 연행해 갔다. 이를 모르고 있던 가족은 그 이틀 뒤 갑자기 들이닥친 보위부원들 앞에서 혼비백산했다.
보위부원들은 TV, 냉장고, 세탁기를 비롯해 돈 될 만한 것을 모두 빼앗아 차에 싣고 떠났다. 그의 가족은 졸지에 알거지가 됐다. 갑작스런 불행에 할머니는 결핵에 걸려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이 씨 동생도 결핵에 걸렸다.
어머니와 이 씨는 아버지를 찾아 군부대에 갔지만 누구도 그드을 들여놓지 않았고,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달 넘게 군부대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불쌍해 보였는지 누가 “네 아버지는 안기부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평양에 잡혀갔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다려 봐야 소용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아버지 소식은 이듬해 5월이 돼서야 알게 됐다. 교화소에서 갓 출소한 사람이 집에 와서는 아버지가 2년 형을 받고 끌려와 함께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아버지는 2011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지주라는 출신성분에 중국과 무역했고 돈도 많이 축적한 아버지는 보위부 먹잇감으로 딱 좋은 대상이었다. 갑자기 한국 안기부 돈을 받았다는 무서운 혐의를 받고 평양에 끌려간 아버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너무 괴로워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제발 불러 주는 대로 다 적을 테니 살려 주십시오” 애원해도 “불러 주긴 뭘 불러 줘? 네가 지금 나를 잡으려고 하느냐”는 대답이 날아왔다. 죄를 알아서 만들어 내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만족할 답을 알아서 적을 때까지 고문은 이어졌다. 아버지 재산을 다 뺏어 나눠 가진 이상 보위부는 무조건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 죽여야 안전했다.
보위부 취조 과정에서 간첩으로 둔갑해 종신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최고재판소도 이건 너무 무리했다 싶었는지 사건을 다시 돌려보냈다. 덕분에 아버지는 2년 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
배운 것이 배 타는 것뿐이라 아버지는 다시 배를 탔다. 돈을 어느 정도 버는 눈치가 보이니 보위부에서 또 잡아갔다. 재산도 다시 몰수당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아버지가 오래 구금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억울하게 두 번이나 죽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이를 갈았다.
“이 땅에선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 남조선으로 가야겠다.”
2014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깊은 산골에 금을 캐러 간다고 말하고는 떠났다. 북한 체제에 대한 어머니의 충성심이 너무 강해 탈북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19세 맏딸에겐 북한을 뜬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남조선으로 가 3~4년 안에 꼭 연락할 테니 네가 엄마랑 동생이랑 잘 설득해 데리고 와라.” 그러면서 성공해서 사람을 보낼 때 사용할 암호까지 미리 말해 주었다. 아버지가 이런 이야기를 믿고 할 사람은 맏딸밖에 없었다.
한국에 와서 3년쯤 지났을 때 강원도 바닷가를 찾은 이지혜 씨.
● 국수 파는 11세 소녀
이 씨는 어느 아버지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믿음직한 맏딸이었다. 그는 6세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장마당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9세부터 11세까지는 오전 5시에 일어나 근처 공장에서 버린 불량 제품을 주어 하루종일 깨끗이 씻고 다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재가공해 팔았다. 혼자서 몰래 시작한 일이었는데, 나중에 이것도 소문 나 경쟁자들이 생기는 바람에 어린 이 씨는 밀려났다.
이후 옥수수 국수를 사서 시골에 가 마늘로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농촌은 늘 정전이라 옥수수를 가공해 먹기 어려웠는데, 도시는 잠깐 전기가 들어올 때가 있어 국수를 뽑을 수 있었다.
11세 소녀는 자전거 안장에 앉으면 페달에 발도 닿지 않았다. 처음엔 서서 자전거를 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너 시간 농촌 마을을 돌면서 마늘을 바꾸고 다시 돌아오면 오후가 됐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국수 바꾸세요”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처음엔 옥수수 10kg을 싣고 다녔는데, 앉아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을 땐 30kg씩 싣고 다닐 수 있었다. 바꿔온 마늘은 새벽에 평양에 올라가는 차에 팔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돈이 되는 것은 뭐든 싣고 다녔다. 복숭아씨도 받아 왔고 그릇이나 꿀도 다뤘다. 아버지는 먼바다에 나가느라 이따금 돌아왔다. 셋이 그렇게 노력해도 부유하게 살진 못했다. 이 씨는 늘 ‘세 숟가락만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자랐다.
이렇게 장사하면서 학교는 띄엄띄엄 다녔는데도 이 씨는 인민학교와 중학교 내내 최우등이었다. 학교에 간 날도 두 시간만 수업을 듣고 다시 장사하러 나왔다. 시험 칠 때는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최우등을 한 비결은 담임선생에게 아버지가 늘 생선을 가져다 주고, 이 씨는 마늘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배급이 나오지 않으니 교사도 점수를 팔아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늘 장사하는 처지였지만 꿈은 있었다. 이 씨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 간간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버럭 소리쳤다.
“그림이 밥 먹여 주나. 장사 열심히 해서 돈 버는 것이 최고야.”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번엔 어머니가 소리쳤다.
“엄마를 봐라. 의사보단 장마당에 앉아 돈 버는 일이 훨씬 어렵다. 장사나 해라.”
지난해 10월 남북통합문화센터 그림 전시회장 앞에서 이지혜 씨가 전시회 포스터 앞에 서 있다.
● 한국 라디오 듣는 아버지와 딸
이 씨와 아버지 사이엔 어머니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뱃사공에겐 날씨 예보가 생명이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사서 몰래 남조선 방송을 들었다. 일기예보를 들으려 시작한 일이지만, 남조선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금단의 열매를 따 먹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나중에 아버지는 집에 와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었다. 어머니에겐 절대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라디오를 들을 때면 이 씨 보러 어머니가 장마당에서 돌아오는지 망을 보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시간엔 그도 아버지와 함께 남조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채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탈북민이 출연하는 자유아시아방송, 열린북한방송, 극동방송을 아버지는 즐겨 들었다. 한국사람이 하는 말은 억양도 이상하고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탈북민이 하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아버지는 늘 라디오 옆에 수첩을 펴놓고 뭔가 받아 적었다. 어느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성국이라는 탈북 작가가 불쑥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며 자기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그 번호를 받아 적었다.
나중에 탈북한 중국에서 아버지는 최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직접 만나 보니 “한국에 있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말하다가 실수한 셈인데, 북에서 그 번호를 받아 적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신기해했다.
청취가 끝나면 라디오를 지붕 아래 볏짚 속에 철저히 숨겨 놓았다. 그 바람에 보위부가 두 차례 집에 와서 재산을 몰수해 갈 때도 들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며 맏딸에게 남긴 말도 이랬다.
“남조선이 정말 이렇게 잘 사는 나라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구나. 정말 잘 살면 온 가족을 꼭 데리러 오겠다.” 집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이 씨뿐이었다.
올해 7월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맞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탈북 청년 작가 5인 전시회’에서 이지혜 씨(오른쪽)가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 장마당에 나타난 20세 옷 장사꾼
16세이던 이 씨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때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 온 가족이 거지처럼 살 때라 대학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김정일 사망 관련 행사에서 충성심을 보이면 혹시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여동생과 함께 한겨울 새벽부터 저녁까지 김일성 동상과 영생탑 앞을 매일 청소하며 지켰다. ‘보위부 간부님들. 저희가 이렇게 충성 분자이니 아버지를 좀 봐 주세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손에 입은 동상 탓에 지금도 겨울이면 찌릿찌릿 아픔이 올라온다.
2012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피복 공장에 동창들과 함께 단체로 발령 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사하며 살던 그가 얌전히 앉아 재봉기나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공장에 매달 쌀 10kg 이상 살 수 있는 북한돈 6만 원을 내기로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대다수 북한 공장은 일정 액수의 돈을 내면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 준다. 그렇게라도 돈을 벌어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야 공장 간부들도 먹고살기 때문이다.
이 씨는 그릇을 들고 전국을 다니며 장사했다. 17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장사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돈을 좀 버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102그루빠(비사회주의 단속반)’에 걸렸다. 아버지도 실종된 터라 빠져나가지 못하고 화학공장 보위대에 들어가게 됐다. 총을 메고 공장을 지키는 보초 일이었다. 그보다는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한다며 밤 11시 반까지 뭔가를 외우게 하는 일이 더 힘들었다.
1년쯤 눈치껏 보위대 생활을 하다가 단속이 다시 잦아들었을 때 또 나와 장사를 했다. 이번엔 장마당에 앉아 옷을 팔았다.
아버지가 보위부에 세간을 다 빼앗기긴 했지만, 숨겨 놓고 끝까지 불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1000달러짜리 배 엔진이었다. 이 씨는 그걸 아끼고 아끼다가 팔아 옷 장사 밑천으로 삼았다.
20세 처녀가 장마당에 앉아 옷을 사라고 외치는 건 얼핏 부끄러운 일 같지만, 북한에선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장마당에 앉는다는 자체가 이미 돈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장마당 매장을 가지려면 자릿세만 200달러 정도 내야 한다. 거기에 초기 투자가 필요한 옷 장사를 하려면 300~400달러는 있어야 했다.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장마당 옷 장사는 선망받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옷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사는 동네는 옷 사는 데 돈을 쓸 만한 사람이 부족했다.
올해 5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한 이지혜 씨가 짬을 내 오사카 도톤보리 다리 ‘글리코 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아버지의 연락과 탈북
이 씨는 다시 옷을 잔뜩 넣은 짐을 메고 시골을 돌기 시작했다. 가을철 농촌은 제일 풍족한 계절이지만 너무 바빠져서 장마당 갈 시간이 없기도 했다.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옷을 팔았다. 옷 파는 일은 국수를 바꾸는 것과는 다른 노하우가 필요했다. 장사 잘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관찰한 결과 비법은 말을 잘 들어 주는 데 있었다. 상대이야기를 잘 들으며 같이 웃고 울어 주니 고객들이 주머니를 아낌없이 열었다. 높게 가격을 불렀다가 깎아 주고, 한 개보다 세 개를 사면 더 할인해 주고 양말 같은 서비스를 하나 더 챙겨 주는 것도 이때 배운 노하우다.
그렇게 따라하니 장사가 잘 됐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주부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들어 줬다. 이 주부가 고맙다며 동네 친구들까지 다 불러 그날 옷을 다 사준 일도 있었다. 북한도 사람 사는 동네였다.
장사에 어느덧 적응됐을 때 불쑥 집에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가 알려준 암호를 댔다. 그 사람을 따라 신의주로 갔더니 아버지와 전화할 수 있었다.
“지혜야. 아버지는 중국에 와서 돈 많이 벌었어. 가족을 데리고 오라. 엄마한테는 국경에 와서 가족사진 찍어 보내 주어야 아버지가 확인하고 돈 많이 보낸다고 해라.”
아버지 말투가 바뀐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 듣던 남조선 억양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조선에 왔다는 말을 맏딸에게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말실수할까 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은 눈치로 알아챘다. 기뻤다. 아버지가 드디어 뜻을 이루었구나.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설득해 중국으로 데리고 왔다. 아버지가 사는 부자 동네라고 속여 심양까지 겨우 왔는데 그만 사고가 터졌다. 그들을 데리고 온 중국 브로커들이 갑자기 수고비를 두 배로 내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그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브로커들은 이 씨와 여동생을 불러내 갑자기 차에 태우곤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요즘 중국에서 이 나이 또래 처녀가 진짜 비싸니 돈을 더 주지 않으면 팔아 먹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했다.
갑자기 딸 둘을 잃게 된 아버지는 전력을 다했다. 한국 친구에게 급히 돈을 꾸었지만 브로커들이 부르는 값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여권까지 내주며 믿어 달라고 사정했고 마침내 브로커들은 차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기로 오지 말고 다른 주소를 알려줄 테니 거기로 가라.”
딸들이 돌아와서 다시 브로커들 협박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워 다른 한국행 브로커에게 딸들을 넘겼던 것이다. 이 씨는 두 살 어린 여동생과 함께 동남아로 향했다.
2023년 한 재가복지센터에서 일하던 이지혜 씨.
● 중국에서 날아온 부모님 체포 소식
둘은 무사히 동남아의 어느 국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성경 공부를 3개월 시킨 뒤 한국에 보내는 기독교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있다가 2018년 1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 심양에 남은 아버지와 어머니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2018년 6월 모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뒤 그는 부모 소식부터 알아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수없이 싸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탈북한 부부가 그렇게 싸우며 오래 있을 수 없는 법. 어떻게 신고가 들어갔는지 부부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아버지는 인신매매범이란 누명을 썼고 어머니는 북송됐다. 자신의 의지대로 북에 돌아갔지만, 북한 당국이 칭찬해 줄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남편과 자식들이 한국에 갔으니, 한국행 시도로 몰려 잘못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다. 지금도 이 씨는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
일단 아버지부터 살려야 했다. 하나원을 나와 서울 양천구에 자리 잡은 이 씨는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어느 정도 체류하다 온 탈북민은 그래도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체험했지만, 이 씨처럼 북한에서 곧바로 한국에 온 탈북민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남조선과 그가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은 너무나 달랐다. 마치 가상 도시인 듯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원시생활을 하다가 문명 도시로 나온 느낌이었다.
취직은 늦지 않게 이뤄졌다. 첫 일자리는 강남의 어느 횟집이었다. 하루 12시간 일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선뜻 받아주고 돈을 주는 사장이 고마웠다.
이 씨는 쉬는 시간에도 식당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었다. 어느 정도 횟집에서 일하다가 월급 180만 원을 받는 회계 사무실에 취직했다. 여기서도 자신을 받아준 것이 고마워 쉬는 시간에도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쓰레기도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여기는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이 씨는 뭔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아 계속 할 일을 찾아 나섰다.
학업과 전시회, 일을 병행하는 바쁜 스케줄 속에선 앉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졌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면서 쪽잠에 빠진 이지혜 씨를 친구가 찍었다.
● 1학기 4.5점 만점에 4.41
이 씨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 청소년반에 편입돼 공부했다. 처음 듣는 내용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시험만 치면 늘 100점을 받았다. 그때 “아,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북한에서 장사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공부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공부할 순 없었다. 그를 기특하게 본 주변 사람들이 “24세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7년 형을 선고받은 상황이라 변호사 비용이며 영치금 등은 모두 이 씨가 조달해야 했다. 대학에 갈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아무런 기술이나 자격증 없이 일하며 살 순 없었다. 일을 하면서 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 퇴근한 뒤 무조건 3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사회복지사와 요양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활용해 재가복지센터에 취직했다. 요양복지사, 주야간 보호사, 사무국장 등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은 다 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대학에 가고 싶은 꿈이 살아났다. 복지센터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오후 6시에 퇴근해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학원에서 공부했다. 주말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투잡, 쓰리잡,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무리하다가 영양실조로 퇴근길에 졸도까지 했다.
그의 목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었다. 실기가 매우 중요했는데 이 씨는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1년 3월, 26세의 이 씨는 대학 신입생이 돼 교정을 밟게 됐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이 버거웠다. 특히 영어는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 너무 힘들었지만, 1학기엔 휴학도 되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자신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다른 신입생들이 입학의 기쁨을 누리며 즐기고 있을 때, 그는 하루에 네댓 시간만 자며 모르는 것은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해될 때까지 들었다. 공부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위장병도 생겼고 코피를 쏟는 일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1학기에 그는 4.5점 만점에 4.41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공부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니 돈을 벌 수 없게 된것은 또 문제였다. 혼자서 최대한 아끼며 살 순 있지만, 감옥 생활을 하는 아버지 수발은 포기할 수 없었다.
휴학하고 2년간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2심 재판을 이어가는데 변호사비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동생도 취직해 열심히 함께 벌었다.
이지혜 씨가 올해 10월 ‘인민의 소원’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 북한 마을에 옥수수와 알약이 쏟아지고, 가랑잎이 휴지 대신 박혀 있는 재래식 화장실 밖에 진짜 휴지 두루마리가 내린다. 비 오는 날 비닐을 쓰고 달려가는 소녀 머리 위로 우산이 쏟아진다. 북한의 결핍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 탈북 작가로 성장하는 삶
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마침내 아버지가 중국에서 석방돼 한국에 돌아왔다. 북한에서의 감옥 생활 2차례에 더해 7년을 중국 감옥에 있다 보니 폐인이 됐다. 아직까지 요양 중이다. 그래도 그에겐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이 씨는 복학해 지금은 3학년 2학기를 마쳤다. 1년 더 대학에 다녀야 한다. 아버지가 왔으니 한숨 돌릴 법도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쉬는 법을 모른다. 남는 에너지를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는 데 쏟고 있다.
올해 10월 ‘인민의 소원’이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벌써 12번째 개인전이다.
그의 그림은 탈북민 화가 작품 중에서도 특이하다. 화폭 하나에 남과 북이 함께 담겨 있는데, 남북의 명암을 뚜렷하게 대비하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어둡지도 않다.
‘자력갱생’ 간판이 붙은 북한 농촌 마을에 옥수수 비가 내린다거나, ‘사회주의 무상치료 만세’가 적혀 있는 간판 위로 알약들이 떨어지는 식이다.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밝고 해학적으로 남북을 보여줄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풍요와 결핍을 한 작품 속에 녹여 내면서 아픔도 위트 있게 풀어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 씨 작품은 타고난 듯 어렵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이 씨의 오랜 고민 끝에 나왔다.
“한국에서의 평범한 일상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담고 싶고, 북한에서의 불편하고 어두운 진실도 담고 싶은데 너무 무겁지 않게 함께 풀어가려고 나름 찾은 해답입니다.”
힘든 길을 어렵게, 너무나 아프게 걸어온 그였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멀다.
당면하게 목표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것이다. 30세까지 그는 본의 아니게 남들이 마음 먹는다고 해서 겪을 수 없는 엄청난 백그라운드를 쌓았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인권의 불모지에서 아픔을 겪었고, 이를 탈출해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삶과 경험만 잘 녹여도 충분히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다.
남은 것은 그의 몫이다. 20세에 장마당에서 옷을 팔던 북한 처녀가 10년 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듯이, 그가 만들 미래의 더 큰 기적 역시 지금 우리가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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