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온 세탁소 ‘작은 거인’… “세금 내는 재미에 삽니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역경을 넘어 한국에 와서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새 삶을 개척하는 용성옥 씨.
역경을 넘어 한국에 와서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새 삶을 개척하는 용성옥 씨.

올해 10월 서울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 ‘2025년 남북한 주민 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가 열렸다. 대상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56세 용성옥 씨에게 돌아갔다.

쟁쟁한 발표자가 많았지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키는 145cm에 불과한 용 씨가 심사 위원들과 청중에게서 높은 점수를 받아 대상을 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마다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성옥 씨가 걸어온 삶과 주어진 조건이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서울에 집과 가게를 장만하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여러분도 그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라고 외치는 여인. 그 앞에선 모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

“북한과 중국에서 제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 돌아봐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은 저 스스로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남은 인생은 열심히 살아온 저에게 상을 줄 겁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살았던 하늘도 쳐다보고 산도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살아가려 합니다.”

하늘과 산을 보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여인.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것일까.

용성옥 씨가 서울 강서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세탁소에서 포즈를 취했다.
용성옥 씨가 서울 강서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신의 세탁소에서 포즈를 취했다.


● “태어나 보니 장애인이었다.”
용 씨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69년 그가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부모는 모두 남쪽 출신이었다. 그래서 북에는 친척이 한 명도 없었다. 경기도 가평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의용군에 징집됐던 부친은, 강원도 남쪽 어느 산골에서 북으로 피난을 온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가 7세 때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마을엔 비료공장 암모니아 냄새가 늘 지독하게 풍겼고 아버지가 없는 집이 많았다.

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가 비료공장에 다녔다. 그래야 배급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남편 없이 자식 5명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늘 어두운 표정이었다. 용 씨는 어머니가 웃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가 20세 때 모친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병원 사정이 열악해 결핵이었는지, 늑막염이었는지 병명도 몰랐다.

용 씨는 태어나자마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됐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막내였던 용 씨는 늘 오빠들과 언니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1985년 용 씨는 16세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비료공장 노동자 자녀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부모 뒤를 이어 비료공장에서 일하게 하는데, 하필 그해에 졸업한 학생들은 용성기계공장에 무리배치(집단 배정)가 됐다.

집에서 가까운 비료공장에 갔으면 출퇴근이라도 쉬웠겠지만, 용성기계공장은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어야 했다. 사지 멀쩡한 애들은 한 시간이면 갔지만, 다리가 불편한 용 씨는 남들보다 더 일찍 나가 쩔뚝거리며 다녔다.

기계공장에선 그가 장애인이라고 압축기 운전공 업무를 맡겼다. 스위치를 조작하는 일이라 몸을 써야 하는 힘든 일보단 나았다.

그곳에서 용 씨는 1994년까지 9년을 일했다. 공장을 그만둔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전기가 없어 공장이 가동되지도 않았고 배급도 나오지 않아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7년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 있을 때 용성옥 씨(오른쪽)가 친한 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2007년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 있을 때 용성옥 씨(오른쪽)가 친한 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절. 함흥은 북한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을 겪은 지역에 속했다. 못 먹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이 길가에 쓰러졌다.

규찰대가 돌아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살펴봤다. 눈을 뒤집어보고 “하루 남았다” “사나흘 남았다”고 판단했다. 3~4일 이하로 남았다고 판단된 사람은 산에 버렸다. 어차피 살지 못할 사람들이니 길거리에서 시체를 미리 치우는 것뿐이었다.

어머니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용 씨는 집에서 오빠와 같이 살았다. 하지만 성성한 사람도 겨우 연명하는 상황에서 올케에게 장애인 시누이는 구박의 대상일 뿐이었다. 용 씨는 비료공장에서 비료를 훔쳐 인근 지역에 가서 팔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혼자서 먹을 것도 벌지 못했다.

오빠네 집을 전전하다가 언니네 집에도 갔다가 했지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남매가 굶어 죽을 사람을 지목하라고 하면 아마 서슴없이 그를 맨 먼저 꼽았을 것이다. 도무지 갈 곳이 없으면 거리에 나가 잤다. 근 1년을 처녀 꽃제비로 살았다.

그 스스로도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그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이다. 1998년 봄. 더는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이젠 죽겠구나. 그래. 제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유랑 중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북쪽 지역에 올라가면 피를 팔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 아직 몸뚱이와 피는 있으니 한번 가 보자.”

기차를 타고 함흥에서 회령까지 20일이 걸렸다. 기차에 붙어 기생하는 꽃제비들처럼, 그도 걸식하며 가까스로 회령에 도착했다. 이때 죽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생각에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회령역에 내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중국에 가겠다면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며 한 노파가 다가왔다. 용 씨는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거기 가면 살길이 있다는 말에 따라나섰다.

그해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그는 노파와 다른 여인과 함께 두만강을 몰래 건넜다. 함께 간 여인은 세 번째 탈북 시도 만에 중국에 무사히 왔다며 무척 좋아했지만, 용 씨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노파는 “4명은 데리고 와야 하는데 2명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며 툴툴거렸다.

그가 들어간 중국집은 전문적으로 북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집인 듯했다. 한 남성이 그들을 집에 들여놓기 전에 몸에 이가 많다면서 밖에서 옷부터 갈아입혔다. 방에 들어가서는 해 놓은 찰떡을 먹게 했다. 여자들이 왔다는 것은 그에게 돈이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것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물도 삼킬 수 없었다. 그 집에서 20일을 보냈다. 겨우 몸을 추스른 그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올해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을 찾은 용성옥 씨. 한강 건너편에서 18년을 살았지만 이때 처음으로 하늘공원에 와 봤다.
올해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을 찾은 용성옥 씨. 한강 건너편에서 18년을 살았지만 이때 처음으로 하늘공원에 와 봤다.


● 시골에서 보낸 9년
그가 팔려 간 곳은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 농촌이었다. 가까운 도시로 가려면 100km나 가야 하는 심심산골이었다. 전체 350세대 중 두 세대만 빼고 모두 조선족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먼 친척 관계인 듯 보였다.

그의 남편으로 정해진 남자는 7세 연상의 총각이었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용 씨를 살갑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때리지도 않았다. 배운 것도 전혀 없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이를 갖자는 말도 없었다. 용 씨 역시 책임도 지지 못할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이 마을에서 그는 9년을 살았다. 돈이 없어 벼농사도 짓지 못해 용 씨가 마을에서 각종 삯일을 받아다 해서 돈을 벌었다. 먹고사는 일만 반복됐다.

몇 년쯤 살다 보니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인간의 삶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돼지의 삶인 것 같았다. 쥐약이나 농약만 보면 먹어서 죽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마을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위 세척을 해서 살아났지만 돈은 돈대로 나가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있었다.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

용 씨가 그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탈북 여성 32명이 시집을 왔다. 다들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체포돼 북송됐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수모를 견디며 죽은 듯 사는 것이 몸에 배었다. 참는 것은 누구보다 도가 트였다. 말도 모르는데 마을을 떠났다간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유랑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래도 그 마을엔 누울 곳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누가 싸웠고, 누가 뭘 훔쳐 도망갔다 같은 탈북자들 욕을 했다. 용 씨는 더욱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다.

신기한 것은 그 9년 동안 그가 북송 한 번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안이 오면 오히려 “우리 집에 와 있으라”며 옆집 사람들이 집을 비워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를 “먹지 못해 온 거지들”로 봤다. 그들이 어떤 일을 견디지 못해 하면 “그런 거지들이 똑똑한 척, 잘난 척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용 씨는 달랐다. 누구와도 말썽을 만들지 않았고 늘 겸손했다. 혈연으로 엮인 마을에서 골치 아픈 친척 총각 거둬 주고 먹여 주고 말썽 없이 조용하게 사는 그에게는 나름 존재 이유가 분명했던 것 같다.

2006년 태국에서 생활하던 용성옥 씨.
2006년 태국에서 생활하던 용성옥 씨.


● “우리를 받는 곳이 있다고?”
2006년 5월 돈을 벌겠다고 한국에 갔던 마을 사람이 용 씨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내가 한국에 와 보니 북에서 온 사람을 탈북자라며 국적도 주고 돈도 주고 임대아파트도 주더라. 네 각시도 숨어 살게 하지 말고 여기 보내서 사람답게 살게 해.”

용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간 탈북민들 얘기를 들었다.

‘아,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 주고 사람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있구나.”

희망이 생기고 가슴이 뛰었다. 남편에게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 늘 그랬듯이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온 마을 주민을 통해 브로커와 연결돼 일행 5명과 함께 한국으로 떠났다. 중국과 태국 국경에서 험한 산을 넘을 땐 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기어코 산을 넘었다.

태국에 도착하니 다른 브로커가 마중 나왔다. 그는 “미국에 가려면 도와줄 텐데, 한국에 가려면 알아서 가라”고 했다. 당시엔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간주해 입국을 허용하는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지 1년이 지난 뒤였다.

브로커가 무슨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 씨는 미국에 가겠다며 남았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몰랐지만 혼자 알아서 가라는 말이 무서웠다.

미국에 가기를 희망하는 탈북민은 방콕에서 유엔 관할의 어느 호텔에 묵게 했다. 하지만 미국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미국에 간 탈북민은 2025년까지 200명이 간신히 넘는데, 모두 1년 넘게 제3국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는 그 호텔 생활을 8개월 동안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호텔에서 먹여 주고 입혀 주니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중 다른 탈북자를 따라 한인 교회에 가게 됐다. 교회 사람들은 “미국행은 기약이 없으니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해 주었다. 실은 용 씨에게 미국이든 한국이든 큰 의미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8개월 만에 한국행 대열에 합류했다.

방콕 이민국 감옥에 들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태국에서만 그렇게 1년을 허비했다.

하나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비로소 삶의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나원에서 가르쳐 주는 영어 단어를 익히면서 ‘중국에서 돌처럼 살았던 9년이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하게 됐다.

2012년 아는 언니가 비행기표까지 끊어 주며 “쉬어야 한다”고 끌고 온 제주도에서.
2012년 아는 언니가 비행기표까지 끊어 주며 “쉬어야 한다”고 끌고 온 제주도에서.


● 한계를 깨달은 초기 정착 과정
2007년 11월 2일 그는 하나원을 졸업해 서울 양천구 신정동 임대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과거의 용성옥이 아니었다. 껍질을 벗고 땅 위로 올라온 애벌레마냥 새로운 인생을 예고한 존재였다. 나이 38세.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필수라는 컴퓨터도 전혀 할 줄 몰랐고 휴대전화 사용도 서툴렀다. 집에서 혼자 밥에 고추장을 며칠 비벼 먹으니 갑자기 또 외로움이 찾아왔다.

“여기서는 더 이상 외롭지 말자. 먹고 잘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일하자.”

벼룩시장을 뒤져 찾은 첫 직업은 경기 용인시의 어느 정신병원 간병인 자리였다. 그곳의 다른 간병인들은 대개 70대 조선족이었다. 몇 달 일하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되니 다른 직장을 찾으라”고 했다. 그때쯤 그는 간병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은 체구로 우람한 환자들을 옮길 수도 없었고, 장애인 몸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설거지를 하려고 해도 키가 작아 불편했다.

하지만 다른 직장 생활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직장이라고 하면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곳인 줄만 알았다. 컴퓨터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 귀인이 나타났다. 그가 사는 동네 교회의 한 장로가 야간에 작업할 사람이 필요하니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장로 부부는 종이 쇼핑백 끈을 자르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데, 밤에도 일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용 씨는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작업했다. 기계로 하는 작업이었지만, 16세부터 기계공장에서 기계공을 한 그로서는 두렵지 않았다.

하루 일당은 10만 원이었다. 돈을 쓸 곳이 별로 없어 들어오는 족족 모두 통장에 저축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생활을 하니 참 좋았다.

장로인 사장은 “북한 사람이 참 일을 잘한다”며 좋아했다. 이후 사장은 다른 탈북민들도 받아 일을 시켰는데 조용하게 일하는 성격인 용 씨는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2년 넘게 일한 그가 먼저 일을 그만두었다.

자동차 운전을 하고 있는 용성옥 씨. 힘들게 딴 운전면허이지만 14년째 무사고 운행을 하고 있다.
자동차 운전을 하고 있는 용성옥 씨. 힘들게 딴 운전면허이지만 14년째 무사고 운행을 하고 있다.


● 운전면허로 얻은 자신감
한국에 와서 처음 느낀 큰 성취는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일자리를 찾아도 거리가 멀고 교통수단이 좋지 않아 가기 힘든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많이 걷는 것도 힘들었다. 그에게 운전면허 취득은 절박한 일이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 양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사들은 “그렇게 하면 너무 위험하니 운전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들은 운전면허학원 원장은 그에게 따로 강사를 붙여 줬다.

마침내 운전면허를 딴 그는 지금까지 14년째 무사고 운전을 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는 일을 해내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던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고민이 있었다.

“이런 일은 영원히 할 일이 아니다. 나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다리에 힘이 없어질 텐데 늦지 않게 나만의 일을 찾아 보자.”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여기저기 다양한 가게를 찾아가 살펴보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 머리카락을 잘라 주던 일이 생각나 미용실도 가 봤지만, 한국 미용실은 가위질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된 일이 세탁이었다. 하루는 동네 전단을 보다 ‘머리밴드 고무줄 끼우는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고무줄을 끼우면 1개에 10원씩 주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재봉기란 것을 처음 봤다. 60세가 훌쩍 넘은 여인이 재봉질하는 것을 보고는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하는 일인 데다 연령 제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재봉일도 기술이 필요한 법. 그는 미싱학원을 검색하고 등록했다.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다니면서 6개월 동안 학원 주말 반에 부지런히 다녔다. 왼발로 발판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박음질을 하려니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나이 들어 배우니 더 힘들었다. 하지만 다녀 볼수록 내 일이란 확신이 생겼다.

옷 수선도 이 학원에서 처음 알게 됐다. 여기저기 옷 수선집을 찾아 살펴보니 대개 60~70대 사장이 운영하고 있었다.

“정년이 없이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전문직 주간 반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학원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오전엔 학원에 가고 오후엔 옷 수선집에서 아르바이트한 뒤 저녁엔 다른 부업을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집에 미싱을 사놓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자신의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접수하고 있는 용성옥 씨.
자신의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접수하고 있는 용성옥 씨.


● 나의 세탁소를 열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2014년 3월 그는 살던 동네에서 옷 수선집을 열었다. 옷 수선만 해서는 수입에 한계가 있을 듯해 세탁 체인점과 겸했다.

그렇지만 세탁과 옷 수선은 기술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객 대응법과 인사법, 돈 계산법, 컴퓨터 타자술, 세탁 품목 익히는 법, 가게 운영법 등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품이 뭔지 밍크가 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수선을 위해 손님들 옷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 두려워서 가위를 들었다 놨다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실전은 학원과 달랐다.

지금까지 조용히 살던 성격도 문제였다. 분명히 손님이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는데, 말이 입에서 맴돌아 손님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힘을 주어 말하면, 조선족이냐고 했다. 이때마다 그는 북에서 왔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동네에 세탁소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남들이 3000원 받을 때 2000원을 받았다. 가격 경쟁력을 내세우니 고객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3년쯤 세탁소를 운영해 보니 한계가 보였다.

그의 세탁소는 그냥 동네 고객들에겐 싸고 착한 가게였다. 남들처럼 똑같이 수선도 하고 세탁도 할 자신이 생겼지만 가격을 높이려고 하자 고객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굳어진 이미지가 문제였다.

3년 만에 가게를 옮겼다. 스스로 봐도 당당하게 할 수 있는데, 그 동네에선 굳어진 이미지를 벗기 힘들었다. 2017년 서울 양천구 지하철 5호선 목동역 인근에 새로 세탁소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쉬지 않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세탁이나 수선 기술만 있다고 해서 편히 살게 두지 않았다. 점점 성능이 뛰어난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오고 주변에 코인 세탁소도 늘었다. 유튜브 등으로 세탁 기술도 많이 공유되면서 세탁업 입지는 매년 줄어들었다. 게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세탁 체인점 본사가 폐업하자 손님도 줄었다.

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발 세탁을 떠올렸다. 신발 세탁은 까다로워서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임이 제일 많은 것도 신발 세탁이어서 세탁소에서 선뜻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말마다 경기 의정부나 안양 그리고 한양대 등에서 ‘수업료’를 내면서 신발 세탁 기술을 배웠다. 온라인 세탁 카페나 세탁 밴드 등에 가입해 비결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직접 신발 세탁을 시작하니 잘하는 집이라고 소문이 났다. 차에 신발을 가득 싣고 찾아오는 고객이 많아졌다. 그렇게 번 돈을 모아서 2020년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자그마한 집도 샀다. 한국에 온 지 13년 만에 내 집이 생긴 것이다.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용성옥 씨. 올해부터 삶의 여유를 가져 보려고 악기를 배우고 있다.
기타 연습을 하고 있는 용성옥 씨. 올해부터 삶의 여유를 가져 보려고 악기를 배우고 있다.


● 시련은 파도와 같은 것
인생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들을 보호한다며 2020년 정부 여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임대차 3법’이 진짜 서민인 그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됐다.

2023년, 세탁소가 세든 건물 주인이 갑자기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했다. 자신이 들어와 장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속셈은 당시 월세 60만 원에서 어차피 5%밖에 올릴 수 없으니 그를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더 높은 월세로 받겠다는 얘기였다. 한편으론 세탁소는 기계가 많아 쉽게 옮기지 못할 것이란 타산도 있었던 듯하다.

세탁소는 단골 관리가 핵심이다. 다른 데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세탁소를 처음 차리는 것과 비슷한 모험이다. 주인은 아예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견이 있으면 변호사와 상의하라는 문자 메시지만 왔다. 사정사정해서 20만 원을 더 주고 2년 계약을 새로 맺었다.

올해 5월 다시 2년 만기가 다가오자 용 씨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인에게 보냈다. 2년 전의 불친절한 태도로 보건대 재계약에 목을 매면 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알 수 없어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집 인근에 새 가게를 구했다. 기존 세탁소에선 수백 m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사비만 1000만 원이 들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그가 떠난 세탁소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비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 고객을 잃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많은 단골이 더 멀어진 그의 세탁소로 찾아왔다. 새로운 가게는 ‘세탁스토리’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운동화 위주 세탁과 옷 수선을 함께 한다.

그에겐 어디 가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파도 같은 시련을 넘고 또 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 자리 잡았다는 것처럼 뿌듯한 일도 없다. 손이 떨려 더 이상 가위질을 할 수 없을 때까지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

지난해 몽골을 찾은 용성옥 씨. 한국 정착 17년 만에 처음 가 본 해외여행이었다.
지난해 몽골을 찾은 용성옥 씨. 한국 정착 17년 만에 처음 가 본 해외여행이었다.


● “저를 보고 힘내세요.”

사회통합 사례 발표 대회에서 그는 말했다.

“대한민국 3만 탈북민은 저를 보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포기만 하지 않고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꼭 기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한다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그 끝이 가져다 주는 희열도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도 압니다.”

그는 한국 생활 초기에 장애인 수당을 받으며 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부 탈북민은 장애인 등급을 받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생계비를 지원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보기에 거의 없었다. 생계비와 장애인수당을 받으려면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 이름으로 차도 살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봐도 정부 지원 생계비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더군요. 그걸 버려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내려놓아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이죠.”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삶이 그는 매우 자랑스럽다. 재산세와 소득세 같은 세금을 낼 때마다 ‘받지 않고 오히려 내는 사람이 됐다’는 사실에 대단히 뿌듯하다.

그의 꿈은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자그마한 실수에도 북에서 와서 그렇다고, 장애인이어서 그렇다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두려워 압박감 속에 살았다. 그렇게 18년을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강박관념이 생겼다. 그걸 내려놓자는 것이다.

이미 여유롭게 살기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한국에 와서 늘 바쁘게 살다 보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난해 그는 교회 봉사단체 일원으로 3박 4일간 몽골을 다녀왔다. 그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올해 6월에는 베트남도 가 봤다.

예전엔 하늘을 여유롭게 바라볼 틈도 없었다. 이제는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낀다. 어쩌면 그에겐 새로운 업그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려는 순간 그가 다른 탈북민들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세탁업이 정말 매력 있는 일이라고 꼭 알려 주고 싶어요. 정년도 없고 AI 시대에도 사라지는 직업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도 미국 이민 초기에 세탁업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한민족이 손재주가 있다는 증거인데 제가 보니 북에서 온 사람들은 더 손재주가 있어요.

저와 인연을 맺어 세탁업을 하게 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지금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저처럼 키도 작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나이 마흔에 시작해 서울에 집도 사고 자기 가게도 얻었습니다. 의지만 굳세면 왜 못 하겠습니까.”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탈북민#사회통합#소아마비#고난의 행군#중국 탈출#세탁업#장애인 자립#한국 정착#자영업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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