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이웃에게 치매 부부는 상가를 넘겼다[히어로콘텐츠/헌트①-下]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14일 21시 00분


〈1-하〉 이웃의 얼굴을 한 사냥꾼
하나뿐인 상가를 담보로 내준 노부부
“금방 갚겠다”던 옆집에 6억 넘게 털려
지난달 17일 경기 시흥시의 한 요양병원 복도. 서향분 씨가 친척이 끌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원금 변제기일을 지체할 경우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적힌 빛바랜 차용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2016년부터 ‘딸 같은 이웃’에게 6억 원이 넘는 돈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했다. 평생을 바쳐 마련한 상가는 경매로 넘어갔고, 남편은 병세가 나빠져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17일 경기 시흥시의 한 요양병원 복도. 서향분 씨가 친척이 끌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원금 변제기일을 지체할 경우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적힌 빛바랜 차용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2016년부터 ‘딸 같은 이웃’에게 6억 원이 넘는 돈을 빌려준 뒤 돌려받지 못했다. 평생을 바쳐 마련한 상가는 경매로 넘어갔고, 남편은 병세가 나빠져 세상을 떠났다.
어떤 치매 환자에게 사냥꾼은 가까운 이웃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서울 종로구 서향분 씨(86) 부부의 옆집에 심영이(가명·65)가 이사 온 건 2014년 2월. 영이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금세 노부부의 생활에 들어왔다. 밥을 같이 먹고, 생일이면 케이크의 초를 같이 불었다. 몸이 불편한 부부를 위해 시장에서 장을 봐다 주기도 했다. 치매 남편과 둘이 살던 향분에게 영이는 오랜만에 생긴 식구 같았다.

● 이웃의 탈을 쓴 사냥꾼
이혼 후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어린 자녀 셋을 홀로 키운다는 영이에게 향분 부부는 마음이 쓰였다. 두 사람도 한때 식당을 운영했다. 광화문에 해장국집을 차려 장사를 키운 끝에 상가 한 채를 마련했다. 그 상가가 노부부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는 걸 영이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치매 남편과 둘이 살던 향분이 남편이 사망한 후 홀로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상가가 경매에 넘어간 후 향분은 우울증과 불면에 시달리다 4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치매 남편과 둘이 살던 향분이 남편이 사망한 후 홀로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상가가 경매에 넘어간 후 향분은 우울증과 불면에 시달리다 4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2015년 4월, 여느 날처럼 식사하던 중 영이는 처음으로 돈 얘기를 꺼냈다. “우리 딸이 좋은 대학에 붙었는데 등록금 650만 원이 없어서 입학을 못 하게 생겼어요.” 눈물을 흘리는 영이에게 향분은 망설임 없이 장롱 속 통장을 열었다. 그 등록금이 수년에 걸쳐 집안 전체를 좀먹는 ‘사기의 씨앗’이 될 줄은 모른 채.

그 후로도 영이는 명목만 바꿔가며 돈을 계속 가져갔다. 생활비가 모자란다며 100만 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200만 원. 어쩌다 한 번 갚기도 하며 믿음을 더 굳혔다. 돈 얘기를 꺼낼 때면 영이는 향분의 팔짱을 끼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며느리들이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향분은 “그런 소리 할 거면 오지 마라”며 초등학생 손자의 용돈 통장까지 영이에게 넘겨줬다. 영이는 거칠 게 없었다. 은행에 갈 때도 향분 남편의 팔짱을 끼고 창구에 섰다. 청원경찰이 “할아버지랑 늘 오는 그 여자, 딸 아니냐”라고 기억할 정도였다.


2016년 무렵, 영이는 한 단계 더 대담한 얘기를 꺼냈다. “동탄에 상속받을 땅이 있는데 사촌과 소송을 해야 합니다. 소송 비용만 도와주시면 바로 갚을게요.” 향분 부부는 그 말을 믿고 종로 상가를 담보로 8억7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그때부터 돈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2017년 7월 3일 1억 원, 9월 28일 2억7900만 원…. 차용증에 남은 기록만 따져도 영이가 가져간 돈은 39차례, 총 6억2680만 원에 이른다.

“내일까지 갚겠다” “오후 3시까지 꼭 갚겠다”고 적힌 차용증과 각서가 수십 장으로 늘었지만 돈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부부의 삶은 서서히 무너졌다. 2021년, 향분은 돈을 받지 못하는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병문안을 와서도 영이는 “금방 갚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 일가족을 좀먹다
남편이 사망한 2022년 향분은 가스 불을 켜두고 잊거나,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더니 결국 그해 치매 판정을 받았다. 지난달 17일 아들이 요양원에 다녀간 날에도 “아들은 왜 오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로 기억이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남편이 사망한 2022년 향분은 가스 불을 켜두고 잊거나,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더니 결국 그해 치매 판정을 받았다. 지난달 17일 아들이 요양원에 다녀간 날에도 “아들은 왜 오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로 기억이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부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결국 이듬해 남편은 스트레스로 병세가 악화하며 숨을 거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영이는 갚을 것”이라고 믿었다.

남편이 떠난 뒤 향분의 삶도 급격히 무너졌다. 부부가 평생 일궈낸 종로 상가는 결국 경매로 넘어갔고, 향분은 식음을 전폐했다. 우울증과 불면에 시달리다 4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충격은 뇌까지 갉아먹었다. 가스 불을 켜두고 잊거나,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더니, 결국 그해 치매 판정을 받았다. 주치의는 “사기를 당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치매를 가속했다”고 진단했다. 이후 소송을 맡아 처리하던 둘째 아들마저 스트레스로 콩팥이 손상돼 일주일에 세 차례 투석을 받고 있다.

재판에서 영이의 변호인은 “많은 액수를 여러 번 빌리긴 했지만 갚을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향분의 남편은 정신이 또렷했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중앙지법은 올해 9월 영이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며 “치매 노인의 재산을 집중적으로 노린 계획적 범죄”라고 적시했다.

향분의 기억은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아들이 요양원에 다녀간 지난달 17일 오후에도 “왜 아들은 코빼기도 안 비추냐”고 말할 정도다. 사라진 노부부의 재산과 삶은 형벌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 1원 입금 후, 빚쟁이가 된 치매 노인
이달 3일 경남 진주시의 한 임대주택에서 문영식 씨가 채권추심착수통보서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서류를 보며 얼굴을 감싸고 있다. 영식은 2년 전 겨울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30대 여성에게 휴대전화 개통을 강제당하며 통장을 넘겨주게 됐다.
이달 3일 경남 진주시의 한 임대주택에서 문영식 씨가 채권추심착수통보서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서류를 보며 얼굴을 감싸고 있다. 영식은 2년 전 겨울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30대 여성에게 휴대전화 개통을 강제당하며 통장을 넘겨주게 됐다.
문영식(가명·76) 씨는 노리기 쉬운 ‘사냥감’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평생 홀로 살았다. 본인의 휴대전화 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해 케이스에 적어 뒀다. 거기에 어눌한 말투까지. 그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명선(가명·31)은 길 한복판에서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2023년 겨울, 경남 진주 중앙시장 앞. 올이 풀린 영식의 카키색 점퍼를 누군가 잡아끌었다. “새 폰 하나 해야겠습니다. 싸게 해드릴게.” 영식이 주름진 손을 휘휘 내저으며 불편한 다리를 절뚝였지만, 명선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결국 영식의 신분증을 뺏다시피 챙겨 들고 자기 가게를 비롯해 휴대전화 대리점 5곳을 돌았다. 인터넷과 TV를 설치하겠다며 영식의 집에 찾아와 “아빠, 문 좀 열어주이소”라고 외치기도 했다.


며칠 후 영식의 통장에 처음 보는 문구가 찍혔다. ‘네이버9029’ ‘토스922’ ‘4562삼성’ 같은 이름으로 1원이 입금됐다. 스마트폰의 통화 기능밖에 쓸 줄 모르는 영식의 통장에 찍힌 첫 폰뱅킹 흔적이었다. 명선이 영식의 명의로 휴대전화 3대에 통장까지 개설한 뒤 보낸 인증번호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영식이 사기꾼의 ‘가짜 본인 인증’에 쓰인 1원 입금 내역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영식은 기초생활 생계급여마저 뺏기고 빚쟁이가 됐다.
영식이 사기꾼의 ‘가짜 본인 인증’에 쓰인 1원 입금 내역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영식은 기초생활 생계급여마저 뺏기고 빚쟁이가 됐다.
그때부터 명선은 영식의 통장을 마치 개인 지갑인 것처럼 이용했다. 나흘 후엔 영식이 만든 줄도 몰랐던 인터넷 은행 계좌에 47만 원이 들어왔다가 곧바로 빠져나갔다. 12월 20일엔 장애수당과 생계급여 등 43만7460원이 입금되자마자 다른 계좌로 이체됐다. 기초연금 33만4810원도 당일 그대로 빠져나갔다. 설을 앞두고 들어온 명절 위문금 2만 원마저 ‘알뜰하게’ 빼 썼다.

더 큰 문제는 이후였다. 잔액이 바닥나자 영식은 통신 요금을 상습 연체한 ‘빚쟁이’가 됐다. 피해액은 851만 원. 지난해 12월 31일 뒤늦게 신고를 받은 노인보호전문기관이 통장을 틀어막고, 경찰과 협력해 휴대전화를 통한 추가 인출을 차단했다. 그러나 이미 잃어버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치매 노인의 돈을 맡아 보호해 주는 민간 은행의 신탁 상품이 있지만, 최소 가입 금액이 수천만 원이라 영식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영식의 임대주택에 통신료 독촉 고지서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빚쟁이’가 된 영식은 구청에 긴급생계보호를 신청했다.
영식의 임대주택에 통신료 독촉 고지서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빚쟁이’가 된 영식은 구청에 긴급생계보호를 신청했다.
영식은 결국 구청에 긴급생계보호를 신청했다. 이 과정에서 올 8월 치매 진단도 받았다.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진단이 늦었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치매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식은 명선을 경찰에 고발했지만 그는 벌금형으로 빠져나갔다.

여전히 그의 집 우편함에는 고지서가 쌓여가고, 통신료 독촉 전화가 걸려 온다. 지금 영식이 바라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돈만 돌려받으면 돼. 너무 억울해 잠도 안 오고,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통장을 바라볼 때마다 ‘이제 나는 껍데기만 남은 사람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친다고 했다.

“금명선이는 이제는 안 보이더라. 경찰서 가면 주소 나올 텐데….” 초점을 잃은 영식의 시선 끝에, 수십 장의 고지서와 통장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통장에 찍힌 ‘1원 입금’ 알림에서 시작된 치매머니 사냥은 그렇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빚과 불면의 구덩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영식이 통신사에서 날아온 ‘채권추심 착수 통보’ 내역을 들어보며 머리를 감싸고 있다. 3일 취재팀과 만난 영식은 “억울한 마음에 통지서와 영수증을 다 모아놨다”고 말했다.
영식이 통신사에서 날아온 ‘채권추심 착수 통보’ 내역을 들어보며 머리를 감싸고 있다. 3일 취재팀과 만난 영식은 “억울한 마음에 통지서와 영수증을 다 모아놨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헌트: 치매 머니 사냥’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취재: 전혜진 박경민 최효정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재희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
▽그래픽: 박초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정시은 CD 임선영 인턴

QR코드를 스캔하면 치매 노인의 자산을 노리는 ‘사냥’의 실태를 디지털로 구현한 ‘헌트: 치매머니 사냥’(https://original.donga.com/2025/HUNT)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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