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계 "지나친 위기설이 위기 부른다"

  • 입력 2000년 5월 25일 19시 59분


‘지나친 위기설이 위기를 자초한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총선을 전후해 빚어지기 시작한 정부 정책의 난맥상과 각종 개혁정책의 실현성 여부에 대한 의혹이 일고는 있지만 시장이 붕괴하고 제2의 외환위기가 도래할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는 반론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재계에서도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은 현재의 불안상황을 ‘신뢰성과 투명성의 위기’로 규정한다. 실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또 위기론이 시장불안을 증폭시켜 오히려 정책선택의 폭을 좁게 하고 그 효과를 반감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기론 근거없다〓현재의 자금시장 불안은 150조원의 고객자금을 운용하는 투신권의 부실청소와 이합집산을 앞둔 은행권 구조조정 방침이 오락가락하면서 불거졌다. 이 와중에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증시에 상장했다.

주식 물량이 쏟아졌지만 매수세력은 실종해 주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증시전문가들은 “주가하락은 개미투자자들의 체감소득 감소로 이어져 2년여동안의 구조조정 성과를 의심하고 위기론을 수용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한다.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측은 25일 각각 97년과 현재 경제상황 비교자료를 내놓고 시장불안이 경제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못박았다. 산업생산 설비투자 소비 등이 작년에 비해 20∼50% 정도 늘어났고 물가수준 역시 아직 인플레 압력을 걱정할 수준이 못된다는 것. 전철환 한은총재는 “경상수지 흑자폭이 줄곤 있지만 85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금융감독원 국제감독국 백영수 국장은 “97년 외환위기를 불렀던 단기외채 급증과 외환자금의 장단기불일치(미스매치) 문제 등도 이제는 금감원 등이 출범하면서 1개월에 한번씩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은 외환시장과도 “국제 차입여건이 악화하거나 가산금리가 치솟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며 위기론은 기우에 가깝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신뢰와 투명성이 문제〓그러나 경제위기설을 깎아내리는 전문가들도 정부정책의 신뢰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투신권 등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다 은행 구조조정 방안을 놓고 혼선을 빚으면서 ‘경제의 심장’에 해당하는 예민한 자금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

최근 월가를 다녀온 김주형 LG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총선전 공적자금 공방에 당국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국외 투자가들이 우리 금융권의 부실내용에 대해 의심을 품게됐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LG경제연구원장은 “정부정책이 국민에게 먹히지 않으면 신뢰성 위기가 경제위기로 번질 위험이 있다”며 “뚝심 있게 밀어붙일 힘이 문제이긴 하지만 정부가 중심을 잡고 정책을 이끌어나간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이필상교수는 “금융이 불안해지면 백약이 무효”라며 “금융시장에 만연한 (정부에 대한) 신뢰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투명하고 절제된 정책방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남일총 연구위원도 “정부는 위기설을 금융 등 구조조정작업을 제대로 하라는 시장의 메시지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책목표 우선순위를 정해야〓정부정책이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타이밍과 일관된 정책목표 수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이해집단의 이익이 충돌하는 현안을 총선이후로 미뤄놓았던 각 경제부처 고위관료들 상당수는 얼마전까지도 ‘남북정상회담쪽으로 국정 분위기를 몰고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곤 했다.

2년여동안 산업활동이 급속한 회복세를 보이면서도 인플레 압력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은 원화가치가 강세기조를 유지했던 때문. 그러나 정부가 최근 경상수지 120억달러 목표를 고수할 방침을 재차 강조하면서 금융전문가들은 벌써부터 ‘고환율→물가상승→고금리’라는 고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삼성금융연구소 관계자는 “일단 시장내 고금리에 대한 기대심리가 형성되면 하반기에 만기가 돌아오는 30조원대 회사채의 차환발행이 불가능해져 극심한 혼란이 우려된다”며 “정부정책의 우선순위와 ‘마지노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래정·이명재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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