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파병돼 지뢰 제거에 투입됐던 북한 공병부대원들이 귀국했는데 김정은이 이들과 희생자 및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 환영식을 열었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13일 “해외 작전지역에 출병했던 조선인민군 공병부대 지휘관, 전투원들이 부과된 군사 임무를 완수하고 승리의 개가 드높이 귀국하였다”며 12일 평양 4·25문화회관 광장에서 진행된 ‘제528 공병연대를 위한 환영식’ 모습을 보도했다.
와이셔츠에 검정색 가죽 점퍼를 입은 채 김정은이 12일 “해외작전지역에서 당의 전투명령을 관철하고 귀국하는 제528공병연대 환영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조선중앙TV와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송출된 40분짜리 편집영상은 뉴스 기록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뮤직비디오에 가까웠다. 북한이 스스로 표현한 ‘숭엄한 화폭’이 되도록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는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해외작전지역에서 당의 전투명령을 관철하고 귀국하는 제528공병연대 환영식이 12월 12일 수도 평양의 4.25문화회관광장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장엄한 행사장을 만들기 위한 배경 작업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게 늘어진 인공기였다. 원래 인공기는 가로와 세로 비율이 2:1이라서 3:2의 태극기에 비해 한쪽이 길다. 그런데 이날 4·25문화회관 안에 걸린 인공기는 천정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미장센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사가 파격을 줄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김정은의 행사에서만 가능한 파격이다.
4·25문화회관의 실내 추모의 벽에서 희생자 가족들이 초상화를 만지고 있다. 길게 늘어진 인공기와 검은색 벽은 추모의 분위기를 엄숙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9명의 희생자 초상화가 걸린 추모의 벽은 검정색 배경으로 만들어졌고 이에 걸맞게 배경 음악은 무거운 리듬이 선정되었다. ● 주인공은 연단 위에, 군인들은 위를 바라보며 박수
평양 시민들이 광장 입구에서 박수를 치며 김정은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부터, 로우 앵글과 틸트다운을 오가며 김정은을 중심에 두는 카메라의 시선까지 모든 것이 정확히 배치돼 있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해외작전지역에서 당의 전투명령을 관철하고 귀국하는 제528공병연대 환영식이 12월 12일 수도 평양의 4.25문화회관광장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김정은이 탄 차량의 번호판은 727-1953이었다. 7·27 전승절과 정전협정의 해를 합쳐 만든 상징 같은 숫자였다. 연단에 선 김정은의 발 아래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병사들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경례를 했다. 화면 안의 위계는 말하지 않아도 정확히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 휠체어를 탄 젊은 북한 사람은 낯선 장면
지뢰제거 과정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늙은 참전 군인이 아닌, 젊은 부상병의 모습이 보도된 것은, 희생의 일부라도 노출시킬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이번 영상에서 가장 낯선 장면은 휠체어에 앉은 젊은 병사들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북한 선전물에서 장애나 부상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이번에는 지뢰 제거 과정에서 다친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모습은 ‘희생의 실체’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활용되었다. 영상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라는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은 희생자들과 생존장병을 추모하거나 환영하는 형식일 뿐, 실제로는 김정은의 파병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강하다. 김정은을 향해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와 가족들의 모습은 여러 번 반복되었고, 카메라는 그 울음이 어떤 표정이어야 하는지, 김정은을 바라볼 때 어떤 자세가 옳은지까지 안내하는 듯했다. 파병에 대해,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에 대해 지도자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박수와 경례를 해야 한다는 정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의 울음을 표현하는 방법
12일 저녁 진행된 환영 음악회 장면에서 김정은이 울먹이는 듯한 표정이 병사들의 울음과 교차편집되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야간에 이어진 환영 음악회 중간중간 김정은의 표정도 교차되었는데, 클로즈업을 하지 않는 대신 중간 거리에서 잡아 ‘울먹이는 듯한 분위기’ 정도로만 전달했다. 대신 이춘히 아나운서의 울분 섞인 나레이션이 감정을 대신 밀어 올렸다. 보는 사람이 김정은의 감정을 직접 보기보다는 나레이션을 통해 ‘이 장면은 이런 감정으로 보라’는 안내를 받는 방식이다. ●김정은의 이미지를 콘트롤 하는 현송월
현장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장면은 현송월의 움직임이었다. 김정은과 포옹을 기다리는 병사와 유족들을 줄 맞춰 정리하고, 포옹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끊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북한이 공개한 40분짜리 영상에서 현송월은 화면 곳곳에서 등장했다. 김정은의 화면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평양 노동신문=뉴스1)이는 김정은의 스킨십 장면이 영상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라는 의미였다. 곁에서 어색함 없이 장면이 흘러가게 만드는 현장의 ‘감정 조율자’ 역할을 현송월이 전담하고 있었다. ● 무릎 꿇는 지도자는 처음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해외작전지역에서 당의 전투명령을 관철하고 귀국하는 제528공병연대 환영식이 12월 12일 수도 평양의 4.25문화회관광장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평양 노동신문=뉴스1)추모의 벽 앞에서 김정은이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순간은 자연스러운 장면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앞에는 이미 액션캠이 설치되어 있었다. 무릎을 꿇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 장면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에는 없는 이 이미지는 북한이 인민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치적 세트장의 가리키는 방향
전체 영상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해외 파견이라는 결정을 정당화하고 그 희생을 영웅의 서사로 묶어내려는 목적이다. 사망한 9명의 병사 사진을 들고 울부짖는 유족의 모습이 반복되는 동안 김정은은 늘 그 중심에서 ‘슬픔을 함께 나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취하고 있었다. 영상은 병사들의 희생을 말하면서도 결국 김정은에 대한 결사옹위 서사로 귀결된다. 반복되는 경례의 구호는 ‘결사옹위’였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해외작전지역에서 당의 전투명령을 관철하고 귀국하는 제528공병연대 환영식이 12월 12일 수도 평양의 4.25문화회관광장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평양 노동신문=뉴스1)결론적으로 이 환영식은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세트장이었다. 북한의 카메라는 그날 있었던 일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카메라는 감정을 설계하고, 그 감정이 다시 국가의 메시지로 흘러가게 만드는 도구다. 이날 행사는 평소보다 50% 정도 많은 카메라맨이 동원되었다. 스틸 카메라맨은 3~4명, 동영상 카메라맨은 8~12명 정도였다. 그래서 질문은 언제나 같다. 무엇을 보여주었는가보다 왜 이렇게 보여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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