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사진기자들은 하늘과 들판을 찍는 걸까?[청계천 옆 사진관]▶나른한 봄기운에 잎을 터뜨리기 시작한 버드나무 숲 앞에서 짙은 색의 황소 두 마리가 각자의 수레를 끌고 갑니다. 짐칸은 비어 보이는데 힘없는 모습입니다. 뒷모습이어서 더욱 무기력해보입니다. “버드나무 숲에 아지랑이”라는 간단한 제목과 어제 청량리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만 있습니다. 딸려있는 기사도 없고 사진에 대한 설명도 더는 없습니다. 성큼 다가온 봄을 전하는 것 같지만 묘한 느낌의 사진입니다. 1923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도시화가 완전히 진행된 지금이야 서울 청량리에서 버드나무 숲과 들판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만 100년 전에는 완전 농촌이었었군요. 하기야 동대문 서대문 등 4대문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라 청량리만 하더라도 도시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졌었을 겁니다. 사진하는 사람들이라면 탁 트인 농촌 풍경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사진작가들은 이런 풍경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한국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이라고 분류합니다. 물론 100년 전 사진하던 분들이 이런 사진을 스케치 사진이라고 불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SKETCH.” 스케치북을 펼쳐서 눈앞의 풍경을 그리듯이 카메라로 풍경을 ‘툭’하고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진기술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것이 아닌, 외래 문물이고 사진의 표현법도 분명 처음에는 외국의 사진을 본 따는 방법으로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스케치 사진은 상당히 한국적인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포토저널리즘 교과서에는 스케치 사진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인물사진, 사건사고사진, 천체 사진, 생태사진, 천체사진 등등 우리의 사진 분류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지만 우리의 사진 분류인 ‘스케치 사진’은 영어로 표현되지 않습니다.▶서양에서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지 않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도시 풍경이나 날씨 사진을 ‘Daily life’ 또는 ‘Feature‘ 사진 정도로 가볍게 촬영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들은 뉴스와 스포츠 사진 등에서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저도 산과 들판, 바닷가 등을 돌며 스케치 사진을 참 많이 찍었고, 봄꽃이 피는 순서를 복수초,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이렇게 외우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한국 사진기자들이 지금 촬영해 신문에 쓰는 스케치 사진을 외국 사진기자들은 거의 엄두도 못낼 겁니다. 소재를 발견하고 그림처럼 완벽한 구도에 피사체를 배치하고 시선까지 고려한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진기자의 스케치 사진은 최첨단의 앵글이라고 생각합니다.한겨레신문의 이정용 기자와 동아일보의 서영수 기자의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스케치 사진은 일본 강점기에 태동했다는 분석이 타당해보입니다. 일본 강점기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고, 처음에는 일본식 제작 및 취재시스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본 신문에도 한국의 스케치 사진과 유사한 형식의 사진이 아직 게재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스케치 사진의 역사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게다가 원조일 가능성이 높은 일본에서도 빈도가 낮은 사진이 왜 우리 사회에는 많았던 걸까요? 일제의 강압적 통치 상황에서 그나마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신문 제작자들의 의도가 있었을 거라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압제에 대한 반항이나 항쟁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책잡히지 않을 애매한 표현으로 글을 쓰듯이, 메시지가 애매한 풍경이나 날씨 사진으로 시대를 표현했을 가능성을 위의 두 석사 논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 시절, 한국 신문에서 스케치 사진이 더욱 빈번하게 게재되고 앵글이 첨단으로 발전했던 것 역시 사진이 억압적 권력 앞에서 어떻게 버텨 가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면 과한 걸까요? 군사독재시절 현장 사진으로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울 때 피 끓고 의욕 넘치는 포토그래퍼들이 에너지를 집중한 것이 날씨 스케치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정치 상황이 변했는데도 왜 아직 스케치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는 걸까요? 저는 한국의 사진기자들에게 세상이 아니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신문사의 구성원들과 독자들이 원하는 역할에 아직 ‘풍경의 전달자’ 역할이 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관성이란 게 무서워서 아직 달려오던 속도를 한꺼번에 줄이지 못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아직은 신문 독자가 농촌과 자연 속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세대이기 때문에 일종의 향수 같은 것도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스케치 사진은 최근 10년 사이에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 실리던 ‘조롱박 풍경’이나 ‘논두렁 물꼬트기’ 사진이 이제는 거의 실리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량리 들판에 100년 전 등장한 소달구지 사진을 보면서 눈에 띈 게 하나 있습니다. 농부인지 상인인지 모를 소달구지의 주인은 왜 달구지를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 걸까요?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1960년대 한국에 왔을 때 일화가 있습니다. 황혼녘 경주의 시골길을 지나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달구지에는 가벼운 짚단이 조금 실려 있었지만 자기 지게에도 따로 짚단을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지게에 짐을 따로 지고 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타고 가면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펄벅은 농부에게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지고 갑니까?”라고 물었답니다. 농부는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일을 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했으니 짐을 서로 나누어져야지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펄벅 여사는 감탄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저 장면 하나로 한국에서 보고 싶은 걸 다 보았습니다. 농부가 소의 짐을 거들어주는 모습만으로도 한국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꼈습니다.”▶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봄입니다. 황소처럼 힘차게 살아보시죠. 같이. 변영욱 기자 cut@donga.com}2023-03-18 11:48 
100년 전 오늘, 나라 잃은 설움에 ‘국산품 애용합시다’ 절규 그리고 사진 합성[청계천 옆 사진관]▶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도 같은 의미 일겁니다. 아무리 얘기하는 것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확실한 증명이고,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기자와 편집기자들이 많습니다.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들이 하는 역할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요즘 한국 정치에서는 사진이 정말 진실을 얘기하긴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사진과 영상이 현장을 증명해도, 정치인들이 “맥락을 좀 더 봐야 한다”며 사진과 영상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로서 이런 상황을 건너기 위해 무얼 더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도 됩니다. 아무튼, 이번 주 ‘백년사진’의 옛날 신문에서는 사진보다 기사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규(熱叫). 국어사전에는 나오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절규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네이버 사전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흰색 저고리를 입은 중년의 여인은 대중 앞에서 무엇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걸까요?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3년 3월 6일자 신문에 실린, 강연하는 여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합성 사진입니다. 왜 신문에 합성 사진을 실었던 걸까요? ▶토산 부인의 열규 - 청중 2500명에 달한 성황을 다한 아낙네 강연토산애용부인회 주최의 강연회는 예정과 같이 지난 4일 오후 7시 반경에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리었는데 원래 이 강연회에는 우리도 남과 같이 살기 위하여 우리 물건을 입고 쓰자는 강연회이라 이에 많은 열정을 가진 일반 민중은 정각 전부터 사면으로 모여들어 천도교당이 넘치고 터질 듯이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수효가 무려 2500명에 달하엿으며 먼저 홍옥경 여사의 정중한 개회사가 있은 후 최영아 여사는 내 살림 내 것으로, 박영자 여사는 자작자급이라는 문제로 김건우 여사는 실지로 행하자는 문제로 김계송 여사는 토산애용에 대한 여자의 책임이라는 문제로 각각 조선사람으로 조선물건을 입고 쓰고 하여야 할 것을 가장 재미있고 열렬하게 말하여 일반 청중에게 많은 감상을 주고 10시 경에 무사히 폐회하였더라. 사진= 성황을 이룬 부인 강연회 (기사 참조)▶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는 말 그대로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입니다. 종로구에 있는 천도교 회관에서 일과가 끝난 오후 7시 30분 강연회가 열렸고, 우리 물건을 쓰자는 취지에 공감한 일반 시민 2500명이 모여 연단을 향해 눈과 귀를 모으고 있는 모습입니다. 앞줄 오른쪽 3열과 4열을 중심으로 무릎에 아이를 앉힌 여성들도 보입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 볼 시간, 시내에서 열린 ‘깨어있는 신여성’의 모임에 동참한 것이겠지요. 홍옥경 여사의 개회사가 끝난 후, 최영아, 박영자, 김건우, 김계송 여사가 “조선 사람은 조선 물건을 입고 쓰자”는 열변을 토했다고 합니다. 2시간 30분이 지난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관중들의 시선이 불규칙합니다. 화면 왼쪽 1/2의 사람들은 왼쪽을 보고 있고 화면 오른쪽 1/2사람들은 오른쪽 정면을 보고 있습니다. 연설장의 일반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연단이 두 개라는 의미가 되는데 주최측이 그런 식으로 배치를 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사진은 두 장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습니다. 연사쪽에서 찍은 사진을 오른쪽에 붙이고 관중석 앞에서 찍은 사진을 왼쪽에 붙인 거죠. 지금이야 두 장의 사진을 각각 사용해서 설명을 따로 붙이는 방법으로 편집하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 방식보다는 사진을 붙여서 현장을 표현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왼쪽 한가운데 연사보다 더 큰 두 명의 얼굴이 이 사진이 합성일 가능성을 더 높여줍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 얼굴 가까운 곳에서 셔터가 한번 눌러졌고, 연사 옆에서 셔터가 한번 더 눌러진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사진 촬영의 기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2500명이라는 대규모 군중이 모여, 성황을 이룬 ‘국산품 애용 캠페인’ 현장을 표현하기엔 당시 사진촬영장비는 부족함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호소의 자리를 ‘열규’로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편집국의 분위기를 상상해 봅니다. 세상의 어떤 언어로 연사의 열변과 관중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찾던 중 ‘열규’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나라잃은 설움의 감정을 이 행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진을 담당하던 기자들과 직원들 쪽에서는 ‘합성’ 또는 ‘콜라쥬’의 형식을 택해, 현장의 규모를 최대한 크게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를 우리는 사진조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역사 속에서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가 한쪽에서는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살한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을 당하고 관련자들은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장기 말살 사건은 사진의 효용성과 기능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한편 저항정신이 사라져가던 민중의 혼을 일깨웠다는데 큰 뜻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이명동. 1977년 9월 신동아 “신낙균 저 ‘사진학 개설’의 복간” 기사에서)▶정치권에서나 사회적 갈등이 심한 이슈에서 인파(人波)나 군중을 찍는 사진은 항상 논쟁거리가 됩니다. 주최측은 사람이 너무 적게 표현됐다고 하고 반대의견을 가진 측에서는 과장에서 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후보들이 군중들을 등 뒤에 둔 채 사진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한 이유도 자신을 지지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사진에 담기기 위해 스스로 연출을 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고도화된 연출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사회 단체들이 만든 미쟝센 앞에서 기계적 중립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최소한 지금의 포토저널리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년 전 서울에서 벌어진 ‘토산애용부인회’ 행사를 주최측은 최대한 규모를 많이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신문의 편집자들은 그 의도에 맞춰 사진을 붙여 만들어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우리는 당시의 열기를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2023-03-11 14:00 
100년 전 오늘,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다 [청계천 옆 사진관]▶지난달 [백년사진 No. 7 - 장충동 부녀 살인 현장에 나타난 콧수염의 검은 망토들] 글에 달린 댓글 중에는 우물가서 숭늉을 찾는 독자? 분들의 글이 몇 개 있었습니다. 사건의 결론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셨죠.당일 신문에 난 내용은 ‘스트레이트 기사’였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도한 거지요. 다만 한 명의 여성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무려 3꼭지의 기사가 게재된 것으로봐선 당시에 기자들과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00년 전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을 계속 추적했을까요? 후속 보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살인사건 현장검증 보도 1주일 후인 후인 1923년 3월 1일자 신문에 아래 내용의 후속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신문 원문을 제가 나름 읽기 쉽게 고치고 띄어서 재작성한 것입니다. <송정규는 원래 악한 - 자기 누나 동생까지 죽이고자, 시체의 김재유는 죽어서도 시집>지난 23일 오후 3시에 장충단 공원 남산장 뒤에서 자기의 본처 김재유를 무참히 찔러 죽인 송병우의 둘째아들 송정규(20)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엄중한 취조를 마치고 예심에 부쳤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원수로 변한 남편의 독한 칼날에 무참히 세상을 버린 김재유의 시체는 그후 서소문통 전중환(田中丸) 병원에서 해부까지 한 후 지난 26일에 그의 시부되는 송병우가 익산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에 그 가해자의 평소의 지내던 행동을 다시 듣건데, 그는 겉으로보면 아무 탈이 없는 듯 하나 그 성품은 매우 음독하여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음해가 많을 뿐 아니라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두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누이와 아우들에 대하여도 칼로 찍어 죽이러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였음으로 그 부모되는 자의 감독은 물론이오 비록 남매간이오 형제간이라도 그 아우와 그 형을 대할 때에는 매우 조심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피살된 김재유도 여러번 위험한 일을 당하여 오던 바, 작년 12월경에도 면도를 품에 품고 그 아내를 죽이려는 눈치가 있음으로 이 사실을 가해자의 아우되는 송석규가 짐작하고 비밀히 그 사유를 피살자의 가정에 통지하여 김재유의 친부되는 김희 씨는 말하되 ‘나는 음력 설 전에 시골집을 갔다가 어제야 이 소문을 듣고 오늘 나왔습니다. 가해자인 송정규로 말하자면, 그것이 무슨 인종이라 할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간단히 말씀하자면, 평일 그와 같은 음독한 성질로 필경은 누구든지 죽이고 제 몸까지 망칠 줄을 짐작한 바인고로 지금 내 자식이 저와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도 그리 뜻밖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의 품성이 갈수록 더욱더욱 못되어감으로 생각다 못해 그 친부되는 송병우를 작년 12월에 내 집 ’공평동 48번지‘으로 청하였다가 어찌하면 그 성품을 고치어 사람이 되게 할까하고 사돈간에 의논한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별로히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잠깐만 없더라도 만드시 소위 제 계집이라는 것을 불러내이어서 무수히 때리는 일이 많음으로 자연 이런 것을 막기 위하여 별로히 출입을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죽은 것도 내가 없었던 까닭이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쌍하나 한편으로 또 생각하면 남의 자식 원망할 것 무엇있겠소. 내 자식의 운명관계이니 도로 지금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소이다’하고 말하더라. ▶ 사건 발생 후 2달이 채 안되어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주장했네요. 1923년 4월 20일 기사입니다. <송정규는 구형 10년>지난 3월 23일 오후 3시에 자기 아내를 장충단 공원에서 찔러 죽인 송정규에 대한 공판은 지난 19일 오전에 경성 지방법원에서 삼시(三矢)재판장과 산중(山中)검사가 입회하고 결심하였는데 입회하였던 산중 검사는 징역 10년에 처하는 것이 상당하다 구형을 하고 변호사 리종하(李琮夏) 송본정관(松本正寬) 두 사람은 송정규의 처는 근본부터 내외간에 함께 죽자는 상의가 있었고 또 그 아내가 칼로 찔러 죽일 때에 조금도 저항을 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살인이 아니라 그가 자살하려는 것을 도와준데 지나지 못하니 징역 2년에 처하여 집행유예를 시켜달라고 변론을 하였으며 판결기일은 오는 24일이라더라.▶동아일보 기자들은 최종 판결까지 사건을 따라갔었네요. 1923년 4월 25일자에 짧은 기사가 실렸는데 송정규는 실형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너무 우울한 100년 전 사건으로 여러분의 시간을 많이 뺏은 건 아닌가요? 다시 원래의 취지로 돌아와 신문을 뒤적입니다. 제가 옛날 사진을 뒤적이고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은 막연하지만 오늘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0년이라는 시간 너머에 있었던 이미지가 오늘 우리 눈 앞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로 믿고 있습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애급 고분에서 파낸 각종 보물” 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고분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많은 보물이 나왔다는 의미 같았습니다. 컴퓨터의 확대기를 이용해 기사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실, 저는 농담반진담반으로 만약 사진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고고학자가 되었을거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조선시대 집터와 우물터를 발견했다고 하면 왠지 가슴이 뜨겁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외국 여행을 가면 그 나라 박물관을 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애급(埃及)은 한자로 이집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100년 전 오늘 신문에 고대 이집트 왕의 무덤을 발굴하는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의 주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름은 아니겠죠?설마… 하는 마음에 기사를 읽어보니, OMG! 투탕카멘의 무덤 사진입니다. 작년 2022년, 발굴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세미나 그리고 전시회 및 출판 등으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 투탕카멘 말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3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이집트 고분 발견. 46척 장신의 황금궤- 애급 고분에서 파내인 옛날 보물의 가지가지]지난 십구일 ‘애급(埃及)’ ‘룩솔’에서 고대 애급 왕릉을 파내이고 이를 다 기록할 수 없는 보물을 많이 꺼내었는데 그 안에 네자 높이 여섯자 길이 되는 황금 궤짝을 발견하였는데 그 궤짝 안에는 보석으로 꾸민 관곽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동상과 기명이 무수하고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도 여러 채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보물을 다수히 캐내였다 하며 그 발굴 역사의 감독인 ‘칼터’씨의 말을 들어보면, 사진박고 검사하여 보관할 곳으로 보내는 시일이 적어도 2년간을 허비하겠다하며 이번에 그 구경을 갔던 사람 여러 천 명 중에 백이의 황족과 영국 귀족은 일부러 애급까지 갔다더라. ▶ 지난 19일 이집트 고대 왕릉을 파서 많은 보물을 꺼냈는데, 그 중에 네 자 높이, 여섯 자 길이의 황금 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종 동상과 그릇, 황금 마차 등 희귀한 보물을 꺼냈다. 발굴을 지휘한 ‘칼터’씨에 따르면 보물을 일일이 사진찍고 보관창고로 보내는 데만 2년 이상 걸릴 정도로 양이 많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집트로 몰려 온 수천 명의 외국인 중에는 벨기에의 황족과 영국의 귀족도 있다.▶과학계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22년 11월 26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3200년 만의 발굴이라는 어린이과학동아 2022년 11월호 [이달의 과학사-1922년 11월 26일 3200년 만에 발굴! 투탕카멘의 무덤]기사에 따르면“1922년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 약 320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2년 9살에 이집트 왕이 된 뒤 18살에 사망했어요. 그동안 아무도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1922년 11월 4일 이 무덤을 발견했지요. 다른 왕들의 무덤과 달리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왕의 매장 풍습을 알게 해 준 의미 있는 무덤입니다.”▶ 11월에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 모습이 한국 신문에 게재된 것은 그로부터 2달 반이 지난 시점이네요. 빛의 속도로 살고 있는 지금의 언론 상황에 비춰보면 너무 늦은 보도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백년 전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암흑기에 세계의 문화 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뉴스를 전했던 사람들과 그 뉴스를 읽었던 독자들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 사진은 굴을 파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10여명의 인부들과 땅 위에서 중절모를 쓴 채 현장을 감독하는 ‘칼터’씨 모습 뿐입니다. 황금마스크 사진을 볼 수는 없지만, 이 장면 만으로도 고대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사진 왼쪽 위에 놓여있는 의자는 칼터씨가 현장을 지키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겠죠?▶ 우연치곤 좀 특별한데요,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된지 10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3월 26일까지인데 저도 어제 금요일에 구경하고 왔습니다. 전시회에는 화강섬록암 재질의 투탕카멘의 좌상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의 소개글을 옮기며 오늘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투탕카멘 왕 무덤의 발견 -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의 무덤들은 대부분 고대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1800년대 후반 ‘왕가의 계곡’에서 집중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이후 추가적인 발견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 여겨졌지만,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있을 거라 믿었고, 부유한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아 조사를 지속했다.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여섯 시즌이 지나가자 카터는 카나본 경에게 한 시즌만 더 해보겠다고 애원했다. 결국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네 개의 방에서 발견된 5천 점이 넘는 부장품은 양적으로도 , 질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발견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미디어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파라오의 저주’라는 뉴스를 퍼뜨리며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은 금방 죽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고 17년이나 지난 후인 1939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0년 전 기사와 100년 후의 전시장 소개글이 비슷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2023-03-04 11:10 
장충동 부녀 살인 현장에 나타난 콧수염의 검은 망토들 [청계천 옆 사진관]▶요즘 법조인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야당 대표는 대장동 아파트 부지를 허가하면서 특혜를 줬다는 혐의로 검찰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다음 주 국회에서 여야가 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이고 만약 체포동의안이 통과되면 전직 변호사 출신의 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 여부는 판사가 결정하게 됩니다. 소위 50억 클럽에 들어가 건설업자들로부터 큰 댓가를 약속받은 듯한 전직 법관과 검사들의 운명도 다시 한번 법의 심판대에 올리라는 여론이 높습니다.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의 잣대로 봤을 때 대장동 공방이 어떤 결론으로 마무리될지, 아니면 지루한 법리 다툼으로 허송세월할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발견한 ‘백년사진’에는 독특한 복장의 남성들이 등장합니다. 1923년 2월 24일자 지면입니다. 망토를 걸치고 중절모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보니 검사와 판사 그리고 경찰입니다. 살인사건이 났다네요. 그 현장을 검증하고 있는 모습이랍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소개하는 [백년사진] 일곱번째 이야기입니다. ▶ 사진과 함께 보도된 기사 내용을 한번 보시죠. 세 개의 기사가 관련되어 있습니다.<백주 본처 참살 - 재작일 오후 3시 장충단에서 20세 청년이 아내를 죽이어>23일 오후 3시반경에 시내 장충단공원 남산장 뒤에 있는 솔밭 가운데서 슬프게 부르짓는 소리가 들림으로 그 부근으로 돌아다니던 그곳 원정(園丁) 두 사람이 소리나는 곳을 찾아가 본즉 어떤 한 남자가 여자를 가로타고 앉아있어 소리를 지르고 달려간 즉, 그 남자는 일어나서 장충단 뒷길로 달아나고 그 자리에는 젊은 여자가 목과 어깨에 6,7 군데에 칼을 맞고 붉은 피를 흘리면서 마른 숲풀 위에 죽어넘어져 그 참담한 광경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는데 원정 한 사람은 그곳에서 지키고 한 사람은 범인을 따라 산길을 넘어 즉시 신정순사파출소에 알리는 동시에 범인은 정신없이 신정 유곽 부근에서 헤매는 것을 여러 사람과 협력하여 붙잡아 파출소로 끌어갔더라. <판검사 출동- 현장 시체 임검>이 급보를 들은 본정경찰서에서는 복전(福田)사법계 주임,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서는 말광(末廣)예심판사와 산중(山中)검사가 계원을 데리고 다섯 시경에 현장에 가서 여덟시 경까지 시체를 임검하고 여러 가지 증거물을 압수하였다더라. <남자는 부자 자식> -세배 갔다 오는 안해를 끌고가 죽여이와 같이 참혹한 비극을 일으킨 주인공은 어떠한 사람인가. 서리 같은 칼을 들고 약한 부인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는 부자 송병우의 둘재 아들 송정규(20세)라는, 현재 낙원동 한성강습원 생도요 무정한 칼끝에 세상을 버린 여자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 설던 김희의 맏딸 김재유(22)라는 가해자의 아내되는 사람이라. 작년 봄에 그여자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 시내 공평동 48번지에서 살림하게 됨을 기회로 공부하는 자기 남편을 따라 작년 가을에 서울에 올라와 하늘같이 믿는 남편과 같이 자기 친정에서 살은 터인데 지난이십일일전 그 여자는 시내 숭이동 시백모의 집에 세배하러 갔다가 재작일 돌아오는 길에 자기 남편이 따라와서 같이 전차를 타고 장충단에 까지 끌고가서 그와 같이 죽인것이더라. ▶ 제가 이해한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 뒤쪽 소나무 숲에서 여성의 비명 소리가 나, 그 곳의 인부 두 명이 가보니, 여성을 한 남성이 칼로 지르고 달아나고 있었고 그를 뒤쫒아 기생집 근처에서 배회하는 것을 잡아 파출소에 넘겼다. 목과 어깨 6~7곳을 칼레 찔린 여인은 결국 사망했고, 사진은 이 사건을 맡은 판사와 검사가 경찰들과 함께 현장을 검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검사와 판사가 같이 현장에서 시체를 검사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는 O, ㅁ, X 의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신문을 제작하는 편집기자가 사진에 표시를 한 것 같은데요, 각각 죽은 여인의 시체, 판사 그리고 검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에는 경찰관도 출동했다고 나와 있지만 누가 경찰인지는 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판사가 사건 현장에 직접 나오는 경우는 드물고 게다가 사건 초기에 검사와 판사가 함께 현장에 나타난 모습은 아주 특이합니다. 가운데 사람은 조명기구를 들고 사건현장을 비추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일본인 경찰과, 검사 그리고 판사 등이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현장 검증을 벌였는데 사진은 오후 7시경에 촬영된 겁니다. 한 겨울임에도 무려 3시간 동안 살인 사건 현장을 꼼꼼히 살펴보았군요. 복장이 눈에 띄는데 중절모에 콧수염. 게다가 망토와 검은 구두. 권력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도 망토를 입었을까요? 혹시 망토가 일본인 권력자들의 트레이드마크였을까요? 복전(福田), 말광(末廣), 산중(山中) 은 각각 경찰, 판사, 검사의 이름인데, 모두 일본인 이름입니다. 백주 대낮에 벌어진,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을 일본인들이 조사하고 있는 모습인 거죠. ▶ 등장인물들은 왜 카메라를 보고 있을까요? 카메라를 의식하고 마치 기념사진에 응하는 듯하죠? 사진 설명을 보면 이 사진을 촬영한 시각은 오후 7시입니다. 겨울철임을 감안하면 이미 사방이 어두운 시간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사진을 찍기가 참 어렵습니다. 지금이야 카메라 플래시가 발달해 연속해서 촬영이 가능하지만 100년 전에는 지금처럼 가볍고 빨리 충전되는 플래시가 없었습니다. 큰 전구라고 할 수 있는 벌브를 터뜨려야 인공 조명이 발생했습니다. 이 벌브를 터뜨리는 순간 큰 섬광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피사체는 누구라도 카메라맨을 향해서 시선을 돌리게 되고 그 순간이 필름에 기록됩니다. 벌브를 터뜨리고 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벌브를 갈아 끼워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장전하고 촬영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카메라맨과 피사체 모두 어색한 분위기였을 겁니다. 현장은 그야말로 한 장으로 승부를 내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 경찰이 모두 카메라를 쳐다보는 어색한 모습이지만 이 사진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은 ‘백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2023-02-25 09:00 
100년 전 오늘, 무선통신으로 사진이 전송되었다[청계천 옆 사진관]▶ 1월이 벌써 끝나고 한 해의 두 번째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지난 주 [백년 사진 no. 3]에서 소개된 성병 치료제 광고[100년 전 오늘, 독일제 안경·성병 치료제 수입돼 절찬 판매 중[청계천 옆 사진관] (donga.com)]에 대해 독자 분이 메일을 보내셨는데, 성병이 당시에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이유에 대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면서 유곽을 양성화하면서 성의 상업화가 시작된 것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분석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독자 분은 댓글을 통해 필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유럽전쟁을 막았던 독일 안경이 다수 도착했다”는 표현은 “유럽전쟁 때문에 수입이 막혔던 독일 안경이 다수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취지일거라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문맥상 적절한 해석이라는 판단이 되어 공유합니다. 100년 전 신문이라 표현법에 대해 제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독자들께서 이렇게 알려주시면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번 주에도 시간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100년 전인 1923년 2월 1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흑백 사진이지만 단번에 외국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 모자를 쓰고 있는 영국 황실의 왕자 사진입니다. 갑자기 왜 영국 황태자의 얼굴 사진이 신문 지면에 실린 걸까요? 왕위를 계승한 걸까요? 아니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다 전쟁터에서 사망하기라도 한걸까요?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기사를 보다 저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니, 그 어렵다고 알려진 무선통신을 통한 사진 전송이 100년 전에 성공했다고?▶ 기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무선 전보 기술이 발달해서 통신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사진 전송도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 ‘데일리 메일’ 신문사에서는 무선 전송기를 설치하고 100야드(약 91미터) 거리 떨어진 곳에서 무선 수신기를 설치했는데 3분 만에 흑백 사진 1장을 전송했다는 것이다. 비록 시험 성적이 아직 불완전하지만 놀랄 만한 성적이며,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전송하는 것도 멀지 않은 것 같다”는 게 영국 신문사의 설명입니다. 100년 전에 무선망으로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전송했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 제가 신문사에 입사했던 해가 1996년인데 그때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필름 스캐너를 들고 다니며 필름을 스캔한 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약 3메가바이트 정도의 jpg 파일을 노트북에 저장해 신문사의 메인 컴퓨터로 보냈습니다. 내 컴퓨터와 회사 컴퓨터 사이에는 유선 전화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atdt 01440을 명령어로 쳐서 전화선 모뎀을 통해 내 노트북과 회사 컴퓨터에 접속했습니다. 중간에 회사 기사사진수집 프로그램을 구동시켰구요. 접속 후, 디지털화 된 사진 한 장을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빠르면 2분, 늦으면 10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 기술력만 해도 선배들에 비해서는 아주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A4용지 크기의 필름 스캐너 대신에 아주 큰 전송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이었기 때문에 외국 출장을 가서 사진을 보내려면, 호텔에서 국제 전화를 이용해 사진을 보내야 했는데 칼라 사진 한 장을 보내는데 30분이 걸렸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았습니다. 출장비 중 통신비를 따로 신청해야 할 정도로 국제전화비로 큰 돈이 들었습니다. 국내 출장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진을 보내려면 전송기를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었습니다. 한 장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에 따른 시외전화요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큰 뉴스가 발생하면 현장에 파견된 사진기자가 필름을 가까운 기차역으로 가서 서울행 기차에 탁송을 의뢰했습니다. 그러면 서울 본사에서 막내 기자나 사환들이 서울역에서 필름을 찾아와 현상해서 신문에 게재하곤 했습니다. 급할 경우 신문사 헬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날아와 초등학교 운동장에 필름 가방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 유선 전화선을 통해 노트북과 회사 컴퓨터를 연결해서 사진을 보내던 방식은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에서 CDMA 기술을 시험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세대교체 되었습니다. 휴대폰을 노트북에 연결시키면서 ‘무선 전송’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처음으로 휴대폰과 노트북을 연결하던 그 감격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설악산 정상에서도, 독도 앞바다에서도 기지국이 근처에만 있으면 사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선 전화선을 찾으러 관공서나 영업하는 가게를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는 현장 사진기자에게는 축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물론 이제 사진은 핸드폰 5G 속도의 덕택으로 촬영과 거의 동시에 회사 컴퓨터로 전송됩니다. 원하면 내 노트북을 펼치지 않고 카메라에서 바로 회사 컴퓨터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카톡으로도 사진을 보낼 수 있는 만큼 회사에 통신비를 따로 신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북한 또는 남극이나 북극 지방에서 사진을 보내려면 별도의 통신 방식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인거죠. 그만큼 현장 기자도 편하고 회사도 컨텐츠를 수집하는데 비용이 줄어들어드는 윈윈(win-win)의 상황이 된 겁니다. ▶ 무선 통신을 통한 사진 전송이 100년 전에 가능했다는 소식에 묘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 기술이 빨리 상용화되었다면 저를 비롯한 사진기자들의 수고로움이 훨씬 줄어들었을텐데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시장성이 없어서 무선사진전송 기술이 한참동안 발전하지 않으면서 현대의 사진기자들이 본사 데스크의 방해를 덜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사실 요즘은 현장에서 찍힌 사진을 서울 사무실에서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주문 생산해야 하는 사진’이 아주 많습니다. 전송이 어렵다면 그냥 놔두었을 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주문’하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출장지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없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사진 속 쌍꺼풀의 영국 황태자의 얼굴에도 묘한 미소가 보입니다. 제가 느낀 묘한 배신감을 100년 전에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말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2023-02-04 14:00 
100년 전 오늘, 서울에 비가 내려 유리 장판처럼 미끄러웠다 [청계천 옆 사진관]▼ 미국에서 온 편지지난 주 (1월 14일)에 백년사진의 글을 처음 포스팅을 한 후 회사 이멜일로 미국에 살고 계신 교포 한 분이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아주 귀한 사진을 찾고 계시다는 내용인데 본인의 허락을 받아 여기서 공유합니다. “변 사진 기자님,미국에 살고 있는 연세의대 1962년 졸업생 허정입니다(1937년생).변선생의 기사를 읽고 수년간 찾고자하는 역사적인 사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1884년에 미국 의료선교사 호레스 엔 알렌(“안련 참판” Horace N. Allen, M. D.)이 한국에 와서 이듬해 1885년 4월 10일에 제중원을 열었고, 한국 역사상처음으로 시행한 수술이 에텔ether 마취를 하여 대퇴부 골수염수술을 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사진을 이분의 손자인 의사가 워싱턴 소재 한국대사관에게 보내어 한국으로 전달하라고 습니다. 그때가 아마 100주년 수교기념 때인 것 같습니다(군사정권시절).알렌 후손들(증손녀들)과 접촉하며 지내는 동안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또한 손자가 대사관에게 잘 받았는지, 어디로 전달했는지 여부를 알려달라는 서신에 답장도 못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 대사관, 외교통상부, 청와대에 문의를 했지만 답장한번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진이 어디에 사장되어있는데, 변 선생님이 찾아서 연세의대 동은 박물관에 전달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알렌후손들이 알렌이 고종에게서 받은 훈장, 안경, 사진 등을 희사하여 동은 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생전에 좋은 소식을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감사합니다. 허 정 1-352-***-****”요지는 의료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술 사진’을 찍은 미국인이 계셨는데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에 즈음하여 워싱턴 소재 한국대사관에 보냈는데 그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사진을 접수했고 어디에 전시 또는 보관하고 있다는 답변을 못 받았다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고 우선 이렇게라도 세상에 알려두는 게 좋겠다 싶어 이곳에 기록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혹시 관련되셨던 분이나 내용을 알고 계신 분은 저에게 메일로 알려주시면 미국에 계신 허정 선생님(87세)께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이번 주에도 시간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100년 전 오늘 동아일보 신문에 실렸던 사진 중에 가장 눈에 띈 사진입니다▼ 블랙아이스 현상에 시민들이 웅성웅성한겨울에 내린 비 때문에 서울 시내가 빙판을 이뤘다고 합니다. 한겨울 새벽에 내린 비에 서울 시내 도로가 얼어 시민들이 미끄러지기 쉬운 상태를 ‘유리 장판’에 비유했네요. 사진설명을 잘 보면, 시민들은 한겨울에 내린 비를 안 좋은 징조로 해석하기도 한다는데 흉흉한 민심이 간접적으로 전해집니다. 오늘날의 기상청일 측후소에서는 ‘별 일 아니다. 오후에 개인다’고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 우산 그리고 시민 가까이 간 사진가이 사진을 보면서 제일 눈에 띈 것은 오른쪽의 큰 우산입니다. 보기에도 아주 튼튼해 보입니다. 오히려 요즘 편의점이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우산보다 더 튼실해 보이지 않나요? 저 우산은 메이드인 재팬이었을까요 메이드인 조선이었을까요? 사진적으로 눈에 띈 점은 사진가가 피사체 근처로 충분히 접근해서 화면의 원근감이 잘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약중강약의 리듬감이 사진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쉬운 건 아니었을텐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카메라에 방수 대책을 어떻게 했을까요? 조수가 씌워 준 우산 아래서 사진을 찍었을지 혼자서 우산을 들고 카메라를 조작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요즘 사진기자들은 혼자서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카메라의 방수 기능이 좋아져서 잠깐 동안 비를 맞는 것은 카메라 성능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카메라 전용 우비를 씌우고 현장에 나갑니다. 또 하나. 요즘 사진기자들은 날씨 스케치를 하는데 애를 먹습니다. 피사체에 다가가면 시민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망원렌즈로 멀리서 찍습니다. 그러다보면 앞에 있는 사람이나 뒤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크기로 표현되어 단조롭습니다. 시민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요즘 문제되는 초상권 시비는 없는 사진이 100년 전에 있었군요. 한 수 배웁니다. ▼ 가운데 키 작은 청년글을 마무리하다 사진을 한번 더 봤는데 가운데 우산을 쓰지 않은 작은 키의 사람이 보입니다. 오른쪽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있습니다. 학생 같지는 않고 중절모를 쓴 신사를 향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집에 있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음식을 사기 위해 가방에 든 뭔가를 팔아야 했던 건 아닐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2023-01-21 12:41 
‘두차례 퓰리처상’ 사진기자, 한국의 문화를 앵글에 담다[청계천 옆 사진관]그는 한 때 한국 사진기자들의 롤모델이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사진의 전성시대를 만끽하는 미국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미국 LA타임즈와 AP통신과 로이터 통신에서 활동했으며 기자들이 노벨상으로 생각하는 퓰리쳐상을 2번 받았다.LA폭동과 9.11 테러 등 미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을 지켜보며 기록했고, 백악관을 출입하며 미국 대통령을 촬영했다. 중학교 시절 이민을 가, 미국 UCLA에서 정치학과 국제외교학을 전공한 후 현지에서 33년간 사진기자 생활을 마친 그가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계의 중심인 미국과 국제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건에만 카메라를 들이대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고국과 레거시(legacy)에 대해 포커스를 맞춘다. 한국의 삽살개, 진돗개, 독도, 정치인, 청년, 공동체문화 등이 요즘 그의 작품 소재이자 주제이다. 그의 렌즈를 통과한 한국의 풍경과 에피소드들은 아무래도 독특한 느낌을 준다. 한국 사진기자들보다 미니멀리즘에 익숙한 작풍 때문일 수도 있고, 색에 대한 감각도 서로 차이가 있어서 일수도 있다. 어찌됐건 독특할 수밖에 없는 그의 작품들은 또 한번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에 오픈된다. 그가 사진집을 냈다. 지난 몇 년간의 기록이다. ‘Visual History of Korea’(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 도서출판 알에이치코리아. 2022년 9월 20일 인터넷과 서점에서 살 수 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인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진가’라는 특징 때문에 그의 사진 밑에는 영어 설명이 붙어 있다. 사진은 만국의 공통어고, 국경이 없는 언어이며, 그래서 말이 필요없다곤 하지만, 사진 작품 중에 ‘무제(無題)’의 제목은 다큐멘터리나 정보를 다루는 사진에서는 적절하지 않아 꼭 설명이 들어간다. 하지만 한국어 사진 설명은 아무래도 우리를 세상에 알리는 데 한계를 갖는다. 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은 한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에 비해 정작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에 제대로 소개하는 자료는 여전히 미흡하다. 미국에서 활동한 사진가 강형원의 스토리텔링은 한국의 이미지를 영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고 귀한 방식이다. 그가 기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사진은 우리가 숱하게 보아왔던 기존의 사진과 조금씩 다르다. 4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아오며 ‘외부인의 눈’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면서도 ‘내부인의 눈’으로 고국의 가치를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게 출판사의 설명이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갖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기록이나 작업이 끝나면 내 주변, 작지만 더 소중한 것을 기록하고 싶다는 꿈. 미국 무대에서 젊은 사진기자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다시 한번 중년의 사진기자들에게 롤 모델로 변신 중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2022-09-20 14:53 
연(蓮)꽃에 숨겨진 생명의 이야기를 담다[청계천 옆 사진관]여기, 도시와 도시 사이에 있는 저수지 연꽃들에서 생명과 우주를 발견하는 작가가 있다. 살아서는 화려하게, 죽은 것 같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 연꽃에 대한 기록이며 찬사다. 코로나19로 세상이 힘들 때 작가는 집에서 8km 떨어진 저수지(시흥 관곡지)를 찾았다. “지난밤 밤새도록 퍼부은 폭우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노랑어리연이 몰살당했다… 가뜩이나 시국이 어수선하고 살아가기가 힘겨운데 왜 이렇게 물 폭탄으로 절단 내는지 하늘이 야속하기만 하다. 듬성듬성 비를 피해 숨어있는 연꽃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줄었다. 하지만 꽃이 없으면 잎이 있으며 연밥, 연대가 있다. 모두 하나의 연으로 생각하고 사진을 찍는다. 연꽃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두 사라진 게 아니며 부활은 계속 진행 중이다. [‘부활은 계속 진행 중’에서]밤과 낮 그리고 새벽에 그곳으로 간다. ‘일년 열두 달 공휴일이나 쉬는 날, 휴가도 없다’. 깜깜한 새벽 4시 30분까지는 촬영 장소에 가야 하기 때문에 새벽 3시에 일어난다.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는 농부에게 작가는 사진 찍는 것도 농사일처럼 참 고단하다고 말을 건넨다. 끈질기게 매달려야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하늘도 그런 사람을 이길 수는 없는가 보다“라고 혼자 되된다. 많은 자연의 피사체 중에 연꽃에 천착하게 된 이유는 뭘까. ”오래도록 연꽃을 집중적으로 찍을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신비로움을 연에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연꽃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말라죽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라죽은 연꽃 자리에는 또 다른 형체가 생겨나고 꽃 외의 연대, 연잎, 연밥은 여러 모양의 디자인 예술품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죽은 게 아니었다. 그런 연꽃을 찍으면 찍을수록 점점 더 깊게 연꽃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같았다. 연꽃의 신비로움에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아하면서 도도한 것 같아도 겸손하게 다가오는 연꽃,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연꽃을 찍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엄숙해지면서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지은이의 말’에서] 지은이 최병관은 인천시 남동구 소래포구 근처에서 태어나 사라져 가는 고향 풍경을 비롯해 주제를 선정해 사진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는 작가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필터도 쓰지 않고, 원래 찍은 프레임을 자르거나 색을 조정하는 후작업은 최대한 피한다. 피사체를 존중하고 작심(作心)을 숨긴다. 시인이라고 하기엔 글이 길고 소설가라고 하기엔 담백하다. 글쪽으로 따지자면 수필가 쯤 될까? 그러기엔 그의 사진과 그의 시선은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사진찍는 철학가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싶다.1996년에는 육군본부 DMZ 사진작가로 선정되어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최초로 1997~1998년 동안 DMZ의 서쪽 끝 말도부터 동쪽 끝 해금강까지 ‘휴전선 155마일’을 3차례 횡단하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이 사진들는 2010년 뉴욕 유엔본부에서도 전시됐다. 사진 책 28종, 포토시집 2종 등을 출간했으며, 국내외에서 45번의 초청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대의 큰 사진가가 피사체에 접근하는 방법을 궁금하다면, 일상과 자연에서 미를 어떻게 찾아내서 포착해 사진으로 표현하는지 궁금하다면, 그리고 이미지에 언어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범벅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일독해볼 만하다. 미리 작가의 접근법을 스포일링 하자면 ‘사진을 찍을 때도 머릿속으로 편집을 해가며 찍어야 한다’. 출간이나 전시라는 사진의 목적을 갖는 대가의 꿀팁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2022-07-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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