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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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4-06-27~202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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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님들 잠시 쉬었다 가세요

    서울시의 한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에서 시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서울시는 여름철 무더위 속에서 일하는 배달라이더,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 기사 등을 위해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10월까지 운영한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혹한기에만 운영했던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올해부터 확대 운영하기로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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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서 발견된 고래 사진 전시회… 현상금 1000만원 걸린 귀신고래 사진은 언제쯤? [청계천 옆 사진관]

    해양수산청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이 8월 12일까지 ‘동해, 독도 그리고 고래’ 사진전을 개최 중이라고 23일 밝혔습니다. 우리 땅 독도와 고래에 대한 국민 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합니다. 전시회에는 고래연구소, 독도수산연구센터 등 3개 기관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은 포항수협 활어 회센터(19~29일)와 포항여객선터미널(30일~8월 5일), KTX 포항역(8월6일~8월 12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 한번 감상해 보시죠.이번 전시회에는 없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귀신 고래 사진입니다. 귀신고래는 오호츠크해와 한국 연안을 회유하는 수염고래류에 속하는 고래로 1912년 미국 탐험가 로이 앤드루스에 의해 ‘한국 귀신고래’로 명명돼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몸길이 14m, 무게 30t가량이고 회갈색 몸체에 따개비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77년 1월 3일 울산 방어진 앞 5마일 해상에서 귀신고래 두 마리가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선원들이 발견한 것이 마지막 목격이었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는 2003년 이후 동해안에서 귀신고래를 찾으려고 목시(目視) 조사를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습니다. 고래연구소는 2008년 1월부터 연안 어구에 혼획(混獲·우연히 그물에 걸려 잡히는 것)되거나 생존 또는 죽은 귀신고래를 발견해 신고하면 1000만 원을, 귀신고래가 유영하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고래연구소에 제공하면 포상금 500만 원을 각각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2024년 현재 아직 현상금을 타 간 사람은 없습니다. 2011년 1월 저도 귀신 고래를 찍으러 배를 탔던 적이 있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와 함께 ‘한국계 귀신고래’를 찾기 위한 항해였습니다. 결국 귀신고래는 못 찍고 참돌고래 무리만 찍을 수 있었습니다. 돌고래는 호기심이 많아 사람들이 탄 배를 잘 따라 온다고 하더군요. 고래 사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그 때 절감했습니다. 몸집이 커서 카메라로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물 위로 숨을 쉬러 나오는 순간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숨을 쉬러 나왔다 들어가면 한참 있다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 들어간 곳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에서 올라오더군요. 미국 캘리포니아 등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에 무려 1만8천여 마리 이상이 산다고 하니 언젠가는 동해에서도 발견되겠죠? 눈앞에 나타나면 꼭 찍어보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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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갑 하나 살까

    영롱한 구슬 지갑 앞에 선 여성분이 급히 휴대전화를 검색합니다. 갑자기 구매욕이 발동하셨으려나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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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격 후 주먹 쥔 트럼프 사진, 왜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은 다른 사진을 썼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 트럼프의 포효 모습, 한국과 미국 신문에서 쓴 사진이 달랐다이번 주 한국을 뜨겁게 달군 사진은 미국 시간 13일 선거 유세 도중 총탄을 맞은 트럼프가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게 포효하는 장면이었습니다. 1초를 4000로 쪼갠 찰나로 카메라의 셔터 스피드를 설정한 사진기자는 이 장면을 트럼프 바로 앞 연단 아래에서 찍었습니다. 필요한 모든 요소와 감정이 집약된 순간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최소한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사고 나흘 뒤인 17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전광판에도 이 사진이 크게 비치고 있습니다. AP통신의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인 Evan Vucci(1977년생)는 한국에서도 갑자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보도사진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방송카메라 기자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에 대해 ‘사진 천재’라고 표현했다고 하더라구요. 덩달아 “美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총 맞는 순간을 찍을 수 있었을까”라는 제목으로 동아닷컴의 [청계천옆사진관] 코너에 올린 저의 글도 꽤 많은 댓글이 달려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주중에는 신문에 들어갈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입니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씩 매주 토요일, 100년 전 우리나라 신문에 실렸던 사진 중 한 장을 골라 여러분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게재된 사진을 소개할 에정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지난 주 트럼프 피격 사진을 쓴 한국신문과 미국신문의 차이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일하고 있는 한국 신문의 7월 15일자 1면 사진입니다. 완벽한 3분할(3각형) 구도의 사진으로 뒤에 성조기까지 완벽하게 보이는 사진입니다. 우리나라 독자와 네티즌 대부분이 그날 사건을 이 사진으로 기억하실 거 같습니다. 다음은 미국 신문의 1면을 모은 사진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진을 쓰기도 했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의 사진을 쓴 신문이 꽤 있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진적으로 완벽한 사진은 우리나라 신문이 쓴 사진일 겁니다. 미국의 사진기자들과 편집기자들도 아마 사진적으로 완벽한 사진을 꼽으라면 그 사진을 선택할 겁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의 편집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완벽하고 힘이 좀 없는 사진을 골랐습니다. 트럼프의 손이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고 성조기도 잘 보이지 않는 사진을 썼습니다. 한국 신문과는 분명 뉘앙스가 다릅니다. 왜일까 생각해보고 옆에 있는 사진기자 선후배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 아닐까?”라는 결론에 조심스럽게 도달했습니다. 위대한 트럼프라는 이미지를 주기 싫어한, 미국 주류 언론들의 사진 선택이었을 거라는 겁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진이 너무 선전효과가 크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사진은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대협이나 민노총 집회에서 의장이나 위원장을 기록하는 방식에 아주 가깝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연단 아래에서 위를 보며 찍음으로써 독자들이 주인공을 우러러보게 하는 동시에 배경이 하늘이 되어 피사체가 도드라져 보이는 사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사진 표현법입니다. AP통신 Vucci 기자가 찍은 사진이 트럼프를 대선에서 아주 유리한 고지에 도착시켰고 그 사진은 아마 퓰리처상을 받을거라고 예측하는 우리의 정서와는 달리 미국 신문사 기자들과 편집자들은 냉정하거나 아니면 평범한 느낌의 사진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손도 별로 안 올라가고 성조기도 덜 보이는 사진을 고른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100년 전 노동조합 결성식 사진에서는 왜 노조원들이 주먹을 들지 않았을까그럼 본론으로 들어와 이번 주 백년사진을 소개합니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관련 기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경성 인쇄직공조합 창립총회 印刷工組合創立인쇄 직공 조합을 조직하여로동운동에새 기치를 세워시내에 있는 인쇄직공(印刷職工)삼천 여 명이 모여 단결기관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중이라 함은 이미 본보에 보도한 바인데 지난 13일 오후 8시에 경성 인쇄 직공 조합 창립총회(京城印刷職工組合創立總會)를 시내 견지동 시천교당(堅志洞侍天敎堂)에서 열고 임시의장 리응종(李應鍾)씨의 열렬한 창립취지 설명이 있은 후 의사를 진행하였는데 경성에 있는 인쇄 직공은 전부 이 조합에 가입하게 할 일과 또 지방 인쇄직공 단결을 원조할 일과 또 조합비로 매월 10전씩을 받기로 결의한 후 위원 100여 명을 선정하고 위원장과 상무위원은 오는 21일에 열리는 제1회 위원회에서 선정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인쇄 직공 친목회를 인계한 후에 폐회하였는데 조선에서 노동계급이 자발적으로 계급의식(階級意識)을 가지고 모이는 모임으로는 새 기치를 세웠으며 조선노동운동의 발전과 장래를 위하여 매우 기꺼운 일이라고 일반 노동운동자들은 기뻐한다더라. 경성 시내에서 일하던 인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아무리 흑백사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밋밋한 느낌입니다. 요즘의 노동자 집회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수막이 붙어 있고 그 앞에서 위원장이 주먹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연단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집단적으로 주먹을 들어 결의를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조합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궁금증은 사실, 트럼프 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이지만 우리는 언제부터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고 팔을 펴는 사진에 익숙해졌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 역대 사진을 모아 둔 데이터베이스에서 ‘집회’ ‘구호’ ‘시위’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동아일보 DB에서 팔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은 1974년 8월 27일이 처음으로 검색됩니다.물론 그 전에도 두 손을 들어 만세를 외치는 사진은 있지만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하는 사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1980년도 이후에 그런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보였습니다. 1950, 60년대는 손으로 쓴 프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어깨동무하고 스크럼을 짜서 행진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그 전의 시위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현장에 있었다면 사진기자들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밋밋한 장면 보다는 동작이 있는 장면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노동자들의 집회 사진에서 손을 허공에 올려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아닌 것과 트럼프의 포효 모습 사진을 보면서 언제부터 우리는 팔을 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진에 익숙하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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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잉어들은 좋겠다

    한여름 운동하는 시민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네요. 물속은 물 밖보다 시원하겠죠? ―서울 성북천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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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중한 생명 구할 장비 점검”

    15일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성동구 직원들이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점검하고 있다. 성동구는 다음 달 6일까지 관내 아파트 등에 설치된 AED를 점검한다고 밝혔다. AED는 심정지가 된 환자에게 초기에 전기 충격을 가해 심장 박동을 소생시킬 수 있는 장비로, 성동구에 총 159대가 설치돼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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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복엔 역시 삼계탕”

    초복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삼계탕 전문점 앞에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5일 중부지방은 체감온도가 최고 33도를 넘어서는 등 찜통 더위가 예상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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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총 맞는 순간을 찍을 수 있었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올해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둔 14일 일요일 오전(현지 시간 13일 오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버틀러에서 유세를 위해 무대에 오른 지 10분도 안 돼 발생한 사건입니다. 다행히 트럼프는 SNS에 올린 영상을 통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안전한 곳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세 현장 주변 건물 위에서 총을 쏜 범인은 현장에서 경찰과 특수기동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사진기자들이 총격 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포착했다는 점입니다. 현직 사진기자로 국내 정치 현장을 취재해 본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상황은 아주 돌발적이라 동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피격 직후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진은 이번 대통령 선거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으로 기록될 거라는 분석이 벌써부터 나옵니다. 공화당 지지자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이미 자신의 엑스(X·트위터)에 이 사진을 공유했고, 지지자들도 퍼 나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국내로 들어온 사진의 촬영 정보 메타데이터와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들의 바이라인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선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들과 연단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망원렌즈를 끼고 트럼프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험한 말을 하는 트럼프의 얼굴을 촬영하기에는 적당한 렌즈인거죠.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사진은 AP통신 Evan Vucci 기자가 촬영한 사진인데 1977년생인 그는 2003년부터 AP통신에서 일하고 있는 베테랑 사진기자입니다. AP통신 Evan Vucci 기자는 소니에서 나온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를 장착했습니다. 거기에 렌즈를 1.4배 좀 더 길게 기능할 수 있게 하는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기자들이 프로야구를 찍을 때 사용하는 600미리 렌즈 정도의 효과를 주는 세팅입니다. 오른쪽 어깨에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었다면 반대편 왼쪽 어깨에는 소니 알파9 카메라에 24-70렌즈를 끼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도 찍을 수 있는 세팅이라 연단에 쓰러진 트럼프 후보를 경호원들이 몸으로 감싸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고 곧바로 주먹을 쥔 채 연단을 내려오는 트럼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AP통신은 Evan Vucci 기자 이외에 한 명의 기자를 더 현장에 배치했습니다. Gene J. Puskar 기자 역시 소니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 그리고 1.4배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Vucci 기자가 연단 가까이서 촬영하고 Puskar 기자는 떨어져서 촬영했습니다.현장의 사진기자는 또 AFP 통신의 Rebecca DROKE, 로이터통신의 Bredan McDemid,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가 있었습니다.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 기자는 총성 직후 연단으로 접근해 고개 숙인 채 피를 흘리는 트럼프의 얼굴을 경호원들 발 사이로 찍었습니다. 빅클로즈업이었습니다. 이밖에 통신사 기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전 세계 주요 통신사 소속들입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인원이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문사 기자로는 뉴욕타임스의 더그 밀(Doug Mills) 기자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더그 밀 기자는 트럼프의 연단 바로 밑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찍은 사진은 트럼프의 오른쪽 귀를 스친 탄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의 배경으로는 트럼프 뒤의 임시 계단에 앉은 청중들의 모습입니다만 더그 밀 기자가 찍은 사진의 배경에는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연단 아래에서 트럼프를 밑에서 위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생인 더그 밀 기자는 미국 백악관을 1983년 로널드 레이건 시절부터 출입한데다 한미 정상회담 등도 커버했기 때문에 백악관 스탭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합니다. 그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는 최근에도 바이든 대통령 국정 운영 모습과 트럼프 후보의 유세 모습 사진이 올라왔었습니다. 사전에 사진기자들이 현장을 잘 촬영할 수 있도록 연단과 동선을 계획해서 행사를 준비하는 미국 정치 현장의 관행과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온 기자들이 찰나를 기록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해서 테러가 유도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겠지만요. . 지지자들의 감정을 흔들어버린 이 사진들이 올해 미국 선거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사진기자로서 무척 궁금해집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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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익선동 ‘줄행랑’을 아시나요 [청계천 옆 사진관]

    안녕하세요. 여러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도망간다는 말을 할 때 ‘줄행랑을 치다’라고 하잖아요. 행랑은 옛날 양반집의 하인들이 먹고 자던 조그만 방을 말하는데요 여기에 ‘줄’을 붙여 길게 이어진 행랑, 그러니까 하인이 아주 많은 부잣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1924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양반이 출타할 때 하인들이 끌었을 인력거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뒤로 커다란 한옥집이 보입니다. 익선동 줄행랑 사진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지난 주 백년사진에 실렸던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 에 대해 독자분이 보내 주신 메일이 있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과거 청백전이고, 일본은 홍백전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모든 게 홍백전입니다. 기원은 아시다시피 건페이 전쟁에서 왔습니다. 그럼 우리 청백전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왜 바뀌었는지 제가 알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노인분들에게 물었더니 분명한 기억으로 그때는 홍백전이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해방되고 청백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왜색 문화 척결이란 의미에서 바뀌었거나, 반공(反共) 차원에서 적색을 사용 못하게 하려고 흰색으로 바뀌었을 겁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독자분의 메일로 인해 새로운 맥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번 주 ‘익선동 줄행랑’ 사진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50일간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 기사 중 하나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익선동에는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내외주점이 많고 밀매 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런지? 그러나 내외주점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내놓코라도 병목정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행랑 많은 루동궁(樓洞宮)이나 들추어 보려합니다.“익선동 줄행랑”이라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 집 행랑인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부터 7,80년 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군의 별명을 듣는 영평군(永平君이 홍판서의 집을 사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 주인 조선귀족 후작 리해승 각하는 곰배대왕의 오대손이라고 합니다.곰배대군의 후손으로 리해승 양반도 한때는 세력이 빨래줄 같았겠지요.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이라는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영락하기가 가이 없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금의 형님이든 곰배대군의 후손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남종 여종이 드나들던 행랑방에는 인연도 없는 뭇사람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오직 빗물이 고여 있는 앞마당에 놓인 인력거 한 채가 그래도 후작댁의 체면을 보존하는 듯합니다. 정해자(正解者)라는 원래 문제나 퀴즈 따위를 제대로 푼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사를 쓴 시민이라는 의미입니다. 방관생 선생님이라는 분이 이날 신문에서 익선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뉴스()를 운영하는 송종훈 선생님의 해석으로는 방관생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익명일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방관(傍觀)하는 서생(書生)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술집과 사창가가 있었는데 청진동이나 병목정(지금의 쌍림동 부근이라고 합니다)에 비해 규모가 작아 내세울게 아니라 그나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익선동 줄행랑’을 소개한다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루동궁(樓洞宮)이라고 하는 큰 한옥이 있었는데 이 집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철종의 큰형인 영평군이 살던 집인데 지금은 영평군의 5대 손인 조선귀족 후작 ‘이해승’의 집입니다. 한때 권력을 누렸는데 일본의 조선총독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보잘 것 없어졌다고 합니다. 행랑채에 있던 하인들도 이제는 다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빗물이 고여도 닦을 사람이 없는 인력거 한 대만이 이 한옥집이 옛날 권력자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가 이해승이라고 하는 양반의 쇠락을 비꼬는 듯 합니다. 이해승과 그가 살던 루동궁이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1974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한양도읍 이후 살펴본 동네 명칭의 변화”라는 시리즈에 익선동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사실(史実)속의 우리동네- 한양도읍(漢陽都邑)이후 살펴본 동명연혁(洞名沿革)] 익선洞 - 강화도령(江華道令) 철종(哲宗)때의 ‘익랑골’을 개명(改名)익선동(益善洞)은 현재 행정동인 종로구 권농동(勸農洞)관할에 속해있는 법정동 이름이다. 익선동은 1914년 일제총독부가 이른바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궁동(宮洞) 익동(益洞)돈 녕동(敦寧洞)의 일원과 니동(泥洞) 한동(漢洞)등의 일부를 합하여 만든 새 동네다.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네이름은 대부분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동네이름은 후세에 와서 지나치게 미화(美化)가 된 나머지당초의 동명(洞名)의미를 상실해버린 경우도 있다. 익선洞이 바로 그와 같은 예다.익선(益善)이란 글자그대로「더욱 착하다」또는「더욱 잘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옛날 중국의「楚」「漢」시대의 명장 韓信은 漢高祖가『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면 잘싸울수 있겠는가』고 물었을때 자신있게「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군사가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한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익선(益善)洞은 그러한 군사를 잘 쓴다든지 또한 모든 일을 더욱 잘하고 더욱 착하게한다는 등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益善」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익랑골」이라는 동네가있었던데서 비롯됐다고한다.「익랑골」의 유래는 바로 이곳에 李씨조선의 제25대 哲宗의 장형(長兄)인 永平君이 거처하던 누동궁(樓洞宮)이란 궁궐이있어 그 궁궐주위에 익랑(翼廊)、즉 대문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늘어서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왔다 한다.李씨 조선 제24대 헌종(憲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다음 대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어 全溪君(璜)의 제3대인 속칭「江華道令」으로 왕통을 계승케한 것이 철종왕(哲宗王)인데 그는 친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廟)도 이「누동궁」안에 모시고 장형인 영평균(永平君)을 살게 해 그후 永平君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哲宗은 즉위와 함께 이곳에「누동궁」을 지었는데 그는「江華道令」으로 통칭될만큼 왕실의 분쟁이 심한중에 서울에도 있지 못하고 멀리 강화島로 들어가 농부생활을 하는등 고생을 했던터라 같이 고생하던 실형(實兄)을 위하고 또 친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도 올릴수있게하기위해「누동궁」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온다。哲宗은 그건문양식도 특별히 공을들여 궁궐대문앞에 동서로 익랑(翼廊)을 광대하게 짓게하고 시종들이 살도록 했는데 그후부터 이지역은「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을 얻게 됐다。그런데 이러한 연유에서 생긴「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은 어느사이엔가 익랑동(翼廊洞)에서 익동(益洞)으로까지 변천을 했으며 또 부근의 일부 지역은 역시「누동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궁동(宮洞)으로 불려졌다。그후 일제 총독부가 동네를 폐합、새로운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예전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인다는 뜻에서 익동(益洞)에 선(善)자 하나를 더 추가해 익선동(益善洞)이라는 새 동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네이름이 후에 와서 전혀 의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뀜에 따라 본래의 역사적 사실은 아득히 망각돼가고 있다는 것이 서운한 점이다。두 기사를 종합해 보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익선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행랑이 많아 마치 새의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대궐같은 집(누동궁)에서 유래한 익랑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랑’이 빠지고 좀 더 좋다는 의미의 선(善)을 넣으면서 익선동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행랑이 많다는 것은 권력과 돈이 많은 누군가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100년 전 익선동에 살던 주민의 이야기로는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의 주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 알았다는 설명입니다. 홍판서 →영평군 →리해승(영평군의 5대 손)으로 변했는데 리해승과 관련한 검색을 해보니 “1910년 10월 16일 21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侯爵)작위를 받았고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본 정부에 협조했던 왕족의 추락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줄행랑을 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원래 하인들이 묵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도망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꽁무니를 빼며 도망가는 모양과 비슷해서 생겨난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권세가 있던 양반가가 몰락하면서 줄행랑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줄행랑이라는 표현이 100년 전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이해승의 집과 하인들의 도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검색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에 대한 다른 해석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항범 교수(충북대 국문과) 교수는 줄행랑이 갖는 의미를 행랑을 죽 이어서 쌓는 것을 보통 줄행랑을 치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치다는 벽 따위를 둘러서 세우거나 쌓는다는 의미로 담을 치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텐트를 치다는 표현도 같은 어원일 것 같습니다. 행랑을 길게 치는 것이 줄행랑을 친다는 건데 마치 꽁무니를 뺀 채 줄달음을 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이서 도망치다 = 줄행랑을 치다 로 관용적 의미가 생겨났다고 추정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익선동에 있던 행랑 사진으로 ‘줄행랑’의 의미를 유추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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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날 좀 보소

    정면 사진을 찍고 싶은데 모델이 영 비협조적이네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고양이에게 닿기를.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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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픽 기념 ‘佛 먹거리’ 판매

    강성현 롯데마트·슈퍼 대표이사와 필립 베르투 주한 프랑스 대사가 11일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에서 열린 ‘프랑스를 맛보다’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26일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을 기념해 25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열리며 치즈, 와인 등 프랑스 대표 먹거리를 판매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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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운전 중 직진 신호를 기다리는데 앞에 서 있는 버스의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잡이의 색깔이 초록 파랑 빨강 노랑이 섞여 있습니다. 초록색 일색이었던 옛날 버스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었지 하고 생각해봅니다. 하기야 화려한 칼라 시대에 승객의 감수성이 달라지면 버스 내부의 인테리어와 서비스가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따로 경기에 대해 설명하는 기사는 보이지 않고 사진과 간단한 설명만 인쇄되어 있습니다. ●치마를 입고 배구 경기에 열중하는 여학생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여학생들이 배구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예닐곱 명의 심판이 양복을 입은 채 높은 곳과 지표면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텐트가 여러 동 설치되어 있습니다. 치러지는 경기의 숫자도 많고 참가자와 응원단도 많은 대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배구에 출전한 선수들의 숫자가 좀 많아 보이시죠? 지금의 6인제 배구와 달리 양측 선수가 각각 10명이 넘어 보입니다. 원래 9인제 배구도 있었다곤 하는데 이 사진을 보면 9인제보다도 더 많은 선수들이 보입니다. 운동복이 아닌 치마를 입고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띠로 단단히 고정시킨 모습에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긴장감이 느껴지지도 합니다. 양팀 뒤로 응원단인지 후보 선수인지 알 수 없는 여학생들이 머리띠를 두른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사진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머리띠였습니다. 흑백사진이라 색깔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청색과 백색으로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청백색 머리띠를 하고 팀을 구별하는지 궁금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면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머리띠를 하고 계주를 하거나 줄다리기를 하거나 공굴리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청군 백군을 구별하는 머리띠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대신에 조끼나 모자 등으로 청군과 백군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 에서는 학생들이 머리띠를 하고 운동회에 참여하는 학교도 있겠지만 대체로 ‘갬성’을 강조하는 지금 세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머리띠가 사라지고 새로운 패션 아이템으로 팀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생들이 부모가 되고 교사가 되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부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머리띠는 진지하거나 절박함을 상징했던 아이콘 입니다. 공부만이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니 실제로 그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머리 좋은 아들 딸들이 책상 앞에 앉아 ‘합격’을 써넣은 머리띠를 두르고 밤을 새우던 이미지가 신문과 방송에서 반복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시작 시점에 생존권을 요구하며 사회 각층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도 머리띠는 꼭 등장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감수성도 변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백년 전 머리띠를 두르고 배구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여학생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청백팀 머리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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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아빠의 특급 비타민

    노트북 주인의 따님이 쓴 응원 메시지라네요. 그럼 에너지 충전하고 오늘 하루도 힘내 볼까요? ―서울 용산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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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마트 기술로 건강 관리 더 쉽게

    2일 서울 성동구청을 찾은 시민들이 건강 관련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성동구는 이날 스마트 기술을 활용한 건강 및 돌봄 관련 정보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스마트 포용 건강, 돌봄 일번지 성동’ 박람회를 열었다. 박람회에는 27개 업체가 참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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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거위의 꿈

    테라스에 홀로 남겨진 거위 인형이 실내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네요. “더워요, 나도 안에서 살고 싶어요” 하는 듯해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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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에 왜 ‘김정은 얼굴 배지’가 등장했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

    ● 북한 배지 문화의 변화일요일인 30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0차 전원회의 2일 차 회의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얼굴이 단독으로 새겨진 배지가 처음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회의에 참석한 참석 간부 전원이 배지를 왼쪽 가슴 위에 달고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최고 지도자의 얼굴을 배지로 만들어 인민들이 ‘심장에 모시도록’ 하는 정책을 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이다. 다만 2024년이라는 국제화 시대에 이게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젊은 지도자의 얼굴이 들어간 배지가 새로 만들어졌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싶다. ‘Why?’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북한 내부에서는 어떤 의사결정 과정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일단 우리 민족의 문화에 배지라는 게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사진이라는 것도 없었고 쇠에 그림을 붙이는 기술도 없었으니 배지가 없었을 테고 그럼 일제 시대에 그런 문화가 있었나?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럼, 한국과 북한에서 지도자의 얼굴을 배지로 만들어 달고 다니는 것은 언제부터 이렇게 차이가 나기 시작했을까? 의심해 보는 것은 북한의 배지가 중국에서 넘어간 문화일 가능성이다. 중국에서 모택동(마오쩌둥)의 배지가 대중화된 것은 1966년 문화대혁명 시작 때부터이다. 봉건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받을 만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면서 일반인들은 최고 권력자인 주석을 숭배하는 경쟁에 몰두하게 된다. 마오쩌둥 사진과 어록, 포스터, 배지 등은 정치적으로 안전한 상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배지는 홍위병들 사이에서 획일적인 복장에 개성을 주는 포인트 아이템으로 인기를 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오쩌둥 배지는 ‘진품’과 ‘짝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허가한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진품은 모든 인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지급되지 않았다. 어떤 순서와 서열에 따라 보급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에 대해 충성 경쟁에 나섰던 홍위병들은 배지를 사기 위해 상점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줄을 섰으며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배지를 판매하는 암시장도 번창했다. 상하이의 경우 75개의 공장이 잔업까지 하면서 한 달에 1500만 개의 배지를 찍어냈고 우한은 600만 개. 난징은 100만 개 배지를 생산하였다. 1968년이 되자 전국의 배지 생산량은 한 달에 5000만 개를 상회하였다. 천안문 광장 주변에는 작은 마오저뚱 사진 열 장과 배지 한 개를 교환하는 장터도 형성되었었다. 랑크 디쾨터가 쓰고 고기탁이 옮김 “문화대혁명(2017)”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 김일성 김정일 쌍상 배지를 가장 먼저 가슴에서 떼버린 김정은 부부김정은과 부인 리설주는 젊은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이런 구시대적인 배지 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도 상상해 본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식 후계자가 된 이후 할아버지 김일성 초상휘장을 왼쪽 가슴에 달기 시작했다. 2011년 12월 아버지 김정일 국방 위원장 사망 직후에도 김일성 배지를 달았다. 그러다가 2012년 4월 7일 해군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은이 북한 내부에서는 처음으로 김일성-김정일의 얼굴이 같이 들어가고 크기도 커진 ‘쌍상(雙象)’ 배지를 달았다. 흥미로운 점은 2018년 북미정상회담에 나서면서 김정은이 북한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떼고 나타났었다는 점이다. 김여정과 최선희 등 Team North Korea의 모든 수행원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나왔다. 트럼프와 폼페이오 장관 등 Team USA의 성조기 배지처럼. 하지만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 북·중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에도 배지를 달지 않았다. 사실 2015년 여름부터 김정은과 부인 리설주는 간헐적으로 쌍상 배지를 달지 않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리설주의 경우 처음 북한 인민들에게 얼굴을 보이던 몇 번을 제외하곤 배지 대신 여성들이 좋아하는 큰 브로치를 달고 등장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쌍상 배지를 가장 먼저 달았던 최고지도자 부부가 가장 먼저 배지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선대로부터 독립적인 지도자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중국의 지도자들조차 마오쩌둥 배지를 거의 달지 않는 국제 정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함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최고지도자의 배지라는 상징을 배척해 왔다. 중국 외교관 리자오싱은 2014년 펴낸 자서전에서 중국이 마오쩌둥 우상화를 위해 노력하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1967년 10월 케냐 정부가 중국 대사관 측이 마오쩌둥 저작과 어록 그리고 상장(휘장)을 케냐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고 1969년에는 마오쩌둥 저작을 케냐 영토 안에서 발행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는 설명이다. 2015년 중반 김정은 부부의 가슴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김일성-김정일 배지. 이게 북한 변화의 상징이길 기대했었다. ● 배지 배급은 권력 순서대로 김정은의 착용 이후 쌍상 배지는 북한 사회에서 공식 배지가 되었으며 권력의 크기 순서에 따라 착용하기 시작했다. 쌍상 배지의 배급은 북한 내부의 서열과 계층 순서에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2018년 6.12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날 평양역에서 북한 주민들이 야외 스크린을 통해 전날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야간 외출 보도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신 사진기자가 찍은 이 사진 속에 등장하는 평양의 일반 주민들은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지, 쌍상 배지는 받지 못한 것 같았다. 2018년 3월 평양에서 열린 한국 공연단을 보러 온 사람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했던 태권도 공연의 경우에는 관람하는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꼭 기득권이 아니더라도 뉴스에 등장해야 하는 경우 쌍상 배지를 우선 지급받는 것 같았다. 2013년 5월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재북송되었던 꽃제비 청소년들이 쌍상 배지를 달고 북한 방송에 출현한 것은 이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개수의 배지가 시장에 풀리면 그걸 먼저 착용하는 사람은 출신 성분을 증명할 수 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 밀착시키는 효과와 함께 충성심이 높은 순서대로 줄을 세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가슴 속에 아이콘을 하나씩 갖고 있다. 연예인일 수도 자기 아이일 수도 부모일 수도 꽃일 수도 여행지일 수도 있다. 충성하지 않으면 배제될 거라는 두려움에 북한 인민들은 충성의 상징인 배지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한 권력자의 얼굴이 배지로 만들어졌다는 뉴스를 보며 든 생각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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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재동의 명물이었던 흰 소나무[청계천 옆 사진관]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년 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중에 한 장 골랐습니다. 서울 재동에 있었던 백송(白松) 사진입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동아일보 3면에는 2장의 사진이 매일 실립니다. 기획 기사가 50일간 연재된 것인데요 간판으로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안국동 감고당, 종로 종각, 원동 모기, 공평동 재판소, 계동 위생소, 수송동 기마대, 화동 복주우물, 가회동 취운정, 소격동 종친보 등이 연속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 중 7월 1일자에 실린 재동 백송 사진을 보겠습니다. 소개를 하는 사람은 동아일보 기자가 아니라 재동에 살고 있는 시민 김숙자씨입니다. 다른 날짜의 기사도 동네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이름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재동(齋洞) 백송(白松)정해자(正解者) 재동 김숙자 우리 재동에는 장안에서도 유명한 백송이 있습니다. 백송이라는 것은 글자대로 흰 소나무라는 뜻입니다. 흰소나무라니까 솔잎까지 흰 줄로 알지 마십시오. 솔잎은 다른 소나무나 마찬가지로 사시장춘(四時長春) 푸르고 나무줄기가 보통 소나무와 달라서 허였답니다. 이 백송은 지금 경성 여자 고등보통학교 재동제2 기숙사안에 있는데 몇 백년 전부터 그곳에 그렇게 흰 몸을 버티고 섰삽니다. 그리고 이 백송의 고향은 중국입니다. 그 때가 아마 이조시대 이겠지오. 부끄러운 이야기지마는 그때에 우리나라 에서는 청국에 조공을 바치러 사신이 늘 들어다녔습니다. 이 백송이 그 때 청국에 들어갔던 어느 사신이 나무가 하도 기이함으로 조그마한 백송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 심고 기른 것이 지금 재동 그 백송이지요.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어서 사모풍잠(紗帽風簪)한 정승판서가 거들던 그 소나무 밑에는 지금은 검은 옷 입은 일본 사람 여학생들이 요새 같이 더운 날에 그늘을 찾아 그 백송 밑으로 와서 책을 읽는 답니다. 참 세상 변하는 것이란 모를 것입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나중에 경기여자고등학교가 됩니다. 지금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종로에 있었던 것이죠. 그 자리에는 지금 헌법재판소가 위치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홈페이지에 재동 백송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재동청사의 부지는 구한말 개화파 공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 선생의 저택이 있었고,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Allen)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혜원(廣惠院, 1885-1887)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그 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 등이 위치하여 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교육의 요람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또 부지 내에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희귀수인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백송이 자리 잡고 있다.”그렇다면 헌법재판소 뒤뜰에 있는 백송은 100년 전 신문에 소개된 그 소나무일 가능성이 아주 높네요. 다만 사진 속 백송이 한 그루처럼 보이는데 현재 헌법 재판소 백송은 한 그루지만 밑둥부터 두 개의 큰 가지로 나뉘어 자라 두 그루처럼 보입니다.헌법 재판소 경내에 들어가려면 입구 경비실에서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기입하고 방문증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근처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우리나라 최고의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와 지금도 명물인 헌법재판소 백송을 한번 구경하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백년 전 신문에 실렸던 서울 재동의 백송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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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담벼락 기차

    누가 오래된 담벼락에 이렇게 예쁜 그림을 그렸을까요? 기차에 탄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듯해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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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 응원 신나요”

    2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인촌기념관 강당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응원단을 따라 응원을 하고 있다. 이날 고려대에선 ‘2024 국제하계대학(ISC) 입학식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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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혈, 생명 살리는 아름다운 나눔

    25일 서울 성동구청 옥외주차장에서 구청 직원 및 지역 주민들이 생명나눔 사랑의 헌혈 행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헌혈 행사는 불안정한 혈액 수급의 안정과 생명나눔 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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