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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부쩍 따가워진 요즘, 파인애플을 닮은 다식물 ‘괴마옥’은 벌써 선글라스까지 장착했네요. 여름나기 준비 완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모스크바 시가행진 주변을 걷는 조선의 젊은 기자192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외국인들의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 설명을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설명은 단순한 사진 캡션이 아니었습니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를 직접 취재를 했고 그리고 그 현장을 촬영한 이가 조선에서 파견된 기자라는 사실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언론이 러시아에 기자를 보낼 만한 여력이 있었을까요? 또 그 기자는 누구였을까요?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유럽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이관용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5월 행사 취재를 위해 2달 남짓 앞선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출발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도 4월 초순 경이었습니다. 요즘에야 하루 이틀이면 전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그야말로 장기간 출장을 떠나야 국제 이벤트를 취재할 수 있었던 시대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출장 출발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그의 나이 31살 때입니다.아래는 1925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관용 기자 관련 기사를 압축 정리한 내용입니다. ● ‘붉은 나라의 진실을 전하라’ — 동아일보, 1925년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기1925년 2월, 동아일보는 철학박사 이관용을 소련(당시 적로국)에 특파원으로 파견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된 소련은 ‘세계의 비밀 나라’로 불릴 만큼 폐쇄적인 곳이었다. 이미 동포들이 러시아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현지 동포들의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때, 동아일보는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전하고자 결단을 내린다.이관용은 유럽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특히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소련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다.그가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첫 보도한 내용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행사였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적십자 거리에서는 노동인민위원장이 열병을 지휘했고, 수십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이관용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펼쳐진 ‘붉은 도시’의 정치 선전 장면을 생생히 기록했다.하지만 이관용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위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소련 사회 곳곳의 불안정함을 목격했다. 시내에 만연해 하루에만 3차례 직접 목격한 소매치기,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검문검색, 공무소 출입에 필요한 복잡한 허가 절차, 반혁명 세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은 당시 소련의 내부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행자는 군경에게 언제든 신분을 제시해야 했고, 공산당 기관 방문에는 특별 허가증이 필요했다.그는 또한 신경제정책 하에서 상인 계층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도 지적했다. 노동을 하지 않고 개인 영리 사업에 종사하는 자, 즉 ‘넵만(Nepman)’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서너배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도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심각했다. 노동복을 입지 않고 부르조아 신사복을 입고 다니면 ‘넵만’이라고 업신여겨지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 특히 외교관과 기자 이외는 사치스러운 의복을 모스크바에서는 볼 수가 없다고 전했다. 구걸하는 이들에 대한 공산당원들의 냉담한 반응은, 혁명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이관용의 보도는 일상에도 닿아 있다. 그는 러시아의 국(羹) 문화가 조선의 국밥이나 찌개와 비슷하다고 소개하며, 서유럽인이 기피하는 생선 요리 ‘쏠랸카’가 조선의 생선지짐이와 유사하다고 적었다. 식당에서는 여전히 종업원이 외투를 받아주며 팁을 기대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새로운 체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구체적인 생활 풍경은 그의 관찰력의 깊이를 드러낸다.이관용은 5월 16일 모스크바를 떠나는데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로 출장을 이어간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국 허가뿐 아니라 통과 국가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의 영사관 승인과 주러 일본영사관 승인까지 총 6개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금전 소지 한도는 300엔 이하로 제한되었고, 여덟 차례에 걸친 휴대품 검사가 이어졌다.독일에서 기자는 “모스크바에서 보지 못한 중절모, 모피코트, 유행복을 입은 여성들을 보고 부르주아 세계에 온 듯했다”며, “사람들이 마치 기계처럼 살아가고, 소부르주아적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또 기자는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을 방문, 도시 곳곳에 배어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붉게 핀 칠엽수 아래로 정장을 한 시민들이 걷고,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자연스레 칸트의 사색이 떠올랐다. 이 도시는 분명 철학이 자라날 만한 토양이다”라고 표현했다. 4개월에 걸친 소련과 독일 출장을 마친 기자의 경험담을 나누기 위해 동아일보는 1925년 6월 17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적로·독일 시찰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한다. 평양 사리원 신의주 개성 대구 전주 광주 부산 원산 함흥 청진 철원 인천 등이 대상이었다. 이 강연은 마침 독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과 맞물려, 사회주의 소련과 군국주의 독일이라는 유럽 양대 체제의 변화를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 변화를 보려 했던 도전100년 전, 한국의 신문사가 소련으로 기자를 특파한 것은 단순한 외신 보도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이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했던, 전례 없는 도전이자 실천이었습니다.철저한 감시 사회 속 불안과 모순, 혁명 후유증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의 열정과 문화를 담아낸 이관용의 보도는 조선 언론이 세계 정세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구글로 추가 검색을 해 보니 1894년생인 이관용 기자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1920년 스위스에서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귀국한 후 기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 신간회 활동 중 체포돼어 2년 남짓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출옥했다가 1933년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다 횡사했습니다. 그의 굵고 짧은 인생이 아쉽습니다. 아래 사진은 AI로 강화시켜 본 이관용 기자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신문이라면 아마 현지 취재 중인 기자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겁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모스크바를 걷던 젊은 기자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두산 경기에서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오른쪽)이 시구하고 있다. 시타는 김 장군의 전우였던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현직 F-15K 조종사 강병준 소령.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현충일인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 2025 KBO 리그 두산베어스 대 롯데자이언츠 경기에서 특별한 시구 시타가 펼쳐졌다. 1927년생 98세의 6.25 참전 공군 조종사인 김두만 장군이 시구에 나섰다.1949년 학사사관 5기로 임관한 김두만 장군은 6.25 전쟁 때 총 102회 출격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100회 출격한 기록을 갖고 있다. 공군 작전사령관, 제 11대 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한 김 장군은 을지무공훈장, 은성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고, 6.25 전쟁 10대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대한민국 공군 창군 멤버였던 김신장군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공군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장군은 이날 시구를 마친 후 “전쟁 때 백 번 넘게 출격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러 오늘 만원 관중 앞에서 시구까지 하게 됐습니다. 강호륜 장군 손자가 저렇게 훌륭하게 커서 F-15K 조종사가 된 걸 보니 기쁘고, 안전하게 비행 잘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날 시타는 김 장군의 동료 참전 조종사 고 강호륜 장군의 손자인 강병준 소령이 맡았는데, 현재 공군 제 11전투비행단 제 102전투비행대대에서 3편대장을 맡고 있다. 할아버지 고 강호륜 장군은 전쟁 중 평양 대폭격작전 등 총 78회 출격했다. 이날 특별한 두 사람의 시구 시타 행사 직전 공군 F-15K 편대가 경기장 위에서 기념비행을 하기도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지하철 7호선 보라매역에서 시민들이 ‘보라매 아래숲길’ 앞을 지나가고 있다. 시는 ‘매력가든·동행가든 프로젝트’로 최근 보라매역 빈 공간을 활용해 실내 정원을 조성했다. 가좌역, 삼각지역, 녹사평역, 왕십리역에 이어 다섯 번째로 조성된 지하철 역사 정원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애견 미용실에서 ‘댕댕이’가 꽃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뒷다리 털은 조금 남겨 두고 싶었는데, 엄마는 여름이라 짧은 게 좋다고 하셨나 봐요. ―서울 중랑구 묵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평양 시민운동회와 무명의 마라토너개인적으로 마라톤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직 한 번도 직접 뛰어보진 못했고, 그 대신 수십 차례의 마라톤 대회를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2만 명의 선수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촬영하기도 하고, 주요 선수들을 가까이서 기록하기 위해 뒷걸음치며 함께 달려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들과 시민들의 모습을 매번 렌즈 너머로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마라톤 사진을 소개하려 합니다. 1925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부록 1면에 한 마라토너의 사진이 실렸습니다.신문에는 마라톤뿐만 아니라 운동회 소식도 여러 군데에 소개돼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모은 특집지면입니다. 마라토너 얼굴 옆에는 출발선에서 막 튀어나올 듯한 예닐곱 명의 선수들이 함께 포착돼 있습니다. 신문 1면에 실릴 정도면 혹시 손기정 선수일까 싶었지만, 기사를 읽어보니 아니었습니다.이미 1920년대부터 조선 곳곳에서는 마라톤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 열기는 언론과 학교, 운동회, 청년조직을 통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혼자 서 있는 사진 속 인물은 그 많은 대회 중 하나였던 1925년 5월 24일 평양시민운동회에서 우승한 박량성 선수라고 합니다. 박량성 선수의 직업은 신문 배달부였습니다. 이날 운동회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됐고, 32개 단체에서 247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관람객 수는 무려 8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우승 단체에는 우승기와 메달이 수여됐고, 마라톤 우승자에게는 순금 회중시계가 주어졌습니다.국가기록원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에 따르면,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마라톤 경기는 1920년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한 ‘경성 일주 마라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오른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었습니다.그렇다면 손기정 선수는 언제 처음 신문에 등장했을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손기정의 첫 등장과 성장1932년 3월 21일, 경성과 영등포를 잇는 장거리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고려육상경기회 주최로 열린 제2회 ‘경영(京永) 마라톤’ 대회에서, 훗날 조선 스포츠사의 한 획을 긋게 될 이름 손기정이 신문 지면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며, “상쾌한 봄기운 속에 열린 제2회 경영 마라톤 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으며, 총 31명의 선수가 광화문 동아일보 앞 광장을 출발해 영등포를 돌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15마일(약 24km)을 달렸다.”고 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프 마라톤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출발은 낮 12시였습니다. 이 보도에서 손기정은 ‘신의주 출신 청년 손기정’으로 소개됩니다. 결승점인 경성운동장에서 비교적 빠른 기록으로 들어온 그는 “경쾌한 발놀림이 인상적이며 장래가 유망한 주자”로 언급됐습니다.비록 그날 우승자는 경성 출신의 변룡환이었고, 1시간 21분 54초의 기록으로 “연습의 결실이 빛난 날”이라 극찬을 받았지만, 손기정에 대한 주목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대회를 종합적으로 조망한 기사에서는 “지방 출신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그중에서도 신의주 대표 손기정의 주법은 안정적이어서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평가가 따랐습니다.이후 손기정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여러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1933년부터는 경평 마라톤, 신춘 마라톤 등 다양한 대회에 꾸준히 출전하며 기록을 단축했고, 1935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니쇼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라는 당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936년 6월 20일, 장도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을 거쳐 독일로 향하는 조선 출신 선수들의 모습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이 기사에서 신문은 ‘장도(長途)를 떠나는 조선 청년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며, 그들의 결연한 의지와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강조했습니다.“조선인의 자긍심을 품고 국제무대로 향하는 이들이 곧 세계와 맞서 싸우며, 조선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다.”이러한 표현을 통해, 단순한 출국 보도를 넘어 당시 조선 청년들 몸에 실린 시대의 무게와 국민의 염원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마라톤은 시대의 주자였다우리가 기억하는 마라톤의 시작은 대개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 곳곳에서 ‘달리기’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하던 시민들에게는 축제였고, 어른들이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년들에게는 영감이 되었을 것입니다.비싼 장비나 시설이 필요 없었기에, 아이들은 골목에서 저마다의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 중 한 소년이, 훗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 소년에 대해 사회 전체가 관심과 응원 그리고 재정 지원을 했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1933년 11월 3일자 신문을 보면, 중국 안동현의 사업가들 30명이 “19세 중학생으로 비록 비공인이지만 세계 기록을 깨뜨린 손기정의 소식을 듣고 소속 양정고 교장에게 27원30전을 송금하며, 스파이크 한 켤레라도 사는 데 보태 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출발한 손기정 선수는 포함되지 않지만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본진 선수 들과 임원들을 위해 올림픽 특별열차를 편성해 부산 서울 평양 신의주를 통과해 대륙으로 편하게 갈 수 있게 했다는 보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193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무명의 마라토너 사진을 통해, 한국 마라톤의 출발선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뿌리 없는 꽃은 없다’는 말처럼, 손기정 옹의 올림픽 우승이라는 영광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기적이 아니라 시대의 열망과 천재의 노력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대 대선 사전투표 둘째 날인 30일에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한 투표 열기가 이어졌다. 부산 남구청 대강당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자녀를 동반한 유권자가 아이와 함께 투표하는 모습. 광주 광산구 평동 드림센터 사전투표소에서 94세 어르신이 부축을 받으며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주민센터에서 투표를 마친 대학생들이 인증샷을 찍고 있다. 광주 북구 삼각동 사전투표소에서 육군 제31사단 장병들이 투표를 위해 줄을 서고 있다(위쪽부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부산=뉴스1광주=뉴스1}
29일 개관을 앞둔 서울시립사진미술관에서 열린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에서 한 관계자가 전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 도봉구에 들어선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공립미술관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우량아 선발대회의 뿌리1970~80년대 성장기의 기억을 가진 분들에게 ‘우량아 선발대회’는 익숙한 단어일 것입니다. 뽀얗게 살이 오른 아기들이 기저귀까지 벗겨진 채로 탁자로 올라서 있고 그 아기들을 엄마들이 넘어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심사위원으로 나선 의사들이 아기들의 건강 상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점수를 매기던 것이 ‘우량아 선발대회’였습니다.1925년 5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우량아 선발대회의 시초라고 할 만한 행사 사진이 실렸습니다. 1924년 시작된 ‘아동건강진찰’의 두 번째 해 행사라고 하는데 이날 선발된 1등 4명이 행사장 한 곳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입니다. 줄에 매어 높이 띄운 찬란한 종이 풍선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공중을 날았고, 천막을 친 식장 안에는 꽃다운 아기들과 기쁨에 찬 어머니, 할머니들로 가득하여 거의 300여 명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당시 기자는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화여자관이 주관하고 구영숙, 박선이, 유영준 등 의사들이 참여한 이 행사에 참가한 아동은 126명 이었고 1차 심사를 통과한 32명을 다시 검사해서 가장 건강한 아이를 선발했습니다. 심사 후 동요 공연과 위생 강연, 태화코러스의 합창 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아, 일종의 지역 축제였었습니다. 1등에 선발된 4명은 사진 왼쪽부터 송신임(43개월, 여자), 김용문(17개월), 임표(5개월), 장주원(29개월)입니다. 동아일보에 비해 조선일보는 당시 이 행사를 좀 더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수상자의 이름과 함께 가정에 대한 내용도 함께 보도하고 있습니다.1등 상을 탄 아기들은 행복한 가정에 태어났다.송신임 양은 관철동 18번지 송경서(宋景瑞) 씨의 따님이요, 임표 군은 동아일보 기자인 임원근(林元根) 씨의 아들이며, 김용문 군은 조선일보 기자 김양수(金良洙) 씨의 아들이고, 장주원 군은 시내 중앙예배당 목사 장락도(張樂道) 씨의 아들이라 한다● 전국민적 관심사로 발전한 우량아 선발대회우량아를 선발하는 행사는 위 사진처럼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되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전 국민의 행사가 된 것은 1971년 남양유업이 시작한 우량아 선발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6~24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몸무게와 영양 상태를 심사하며, 분유 판촉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머리와 가슴둘레의 균형, 혈색, 근육과 골격 발달, 치아 수 등도 꼼꼼히 심사했다고 합니다. 전국적인 예선을 거쳐 MBC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선 대회는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승 아기는 1년 치 분유와 상금을 받고 청와대 초청 및 분유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선발된 우량아가 분유통 옆에 앉아 있는 광고 사진이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는 1983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모유보다 우유나 분유가 좋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전국 단위의 우량아 선발대회는 없고 간간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개최하는 건강한 모유 수유아 선발대회 정도의 행사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행사를 잘 보도하지 않습니다. ● 앨범 커버 속 아기의 눈물: 초상권 및 아동 성적 착취 논란우량아 선발대회가 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반면, 아이의 얼굴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유통된다는 것은 다른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니지만, 엄마아빠가 허락한 광고사진 속 아이가 성인이 되어 초상권 소송을 건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록 밴드 너바나(Nirvana)의 1991년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 커버에 등장한 아기 사진과 관련된 초상권 및 아동 성적 착취 논란입니다. 낚싯바늘에 매달린 1달러짜리 지폐를 향해 헤엄치는 알몸 아기의 모습을 담은 이 앨범 표지는 2023년 빌보드가 선정한 ‘역대 100대 앨범 커버’ 14위에 오르는 등 인기가 많습니다. 너바나는 당시 앨범을 발표하면서 아기 부모에게 사진 사용료로 200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앨범 커버 속 아기였던 스펜서 엘든(Spencer Elden)은 2021년 서른 살이 되었는데, 자신이 4개월 때 촬영된 이 사진이 동의 없이 사용되었으며 아동 성적 착취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너바나의 생존 멤버들과 리더였던 고(故) 커트 코베인의 유산 관리자, 사진작가 커크 웨들 등을 상대로 약 2억원 가량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이 소송은 법적 시효 문제로 여러 차례 기각과 재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022년 1월과 9월, 1심 법원에서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엘든의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12월, 항소심 재판부는 앨범 커버 이미지가 2021년 30주년 기념 재발매 등으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각 재발행이 새로운 개인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엘든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급심의 기각 결정을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다만, 항소심에서는 앨범 표지가 아동 포르노의 정의를 충족하는지 여부는 쟁점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현재 이 사건은 다시 하급심에서 심리 중이며, 최종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너바나 측은 “무가치한 소송”이라며 강력하게 방어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이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이처럼 ‘우량아 선발대회’와 ‘너바나 앨범 커버 논란’은 시대에 따라 아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이 지나 예상치 못한 개인의 권리 침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종로 야외에서 열렸던 ‘건강한 아이 선발대회’의 1등 수상자 사진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열기 어려운 이 같은 행사가, 그때는 왜 가능했을까요? 여러분은 사진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좋은 댓글로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천 하류에서 열린 ‘안전한국훈련 및 긴급구조 종합훈련’에서 소방대원들이 드론을 활용해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 튜브를 전달하고 있다. 이날 훈련에는 서초구, 서초소방서, 서초경찰서를 포함한 11개 기관에서 300여 명이 참여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1일 서울 양천구 양천구선관위에서 관계자들이 21대 대통령 선거 ‘거소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있다. 거소·선상 투표는 함정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군인 등 투표소와 멀리 떨어져 직접 투표가 곤란한 유권자 8만7166명을 위한 투표 방법이다. 국내 투표용지 인쇄는 25일 시작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딱딱하고 권위적인 급훈은 옛말. 친숙한 급훈에 오히려 더 정신줄을 붙잡게 됩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게 교육의 시작이겠죠. ―서울 한 중학교 교실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선거철이 되면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현장을 정치인들이 방문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고, 낙후된 주거지를 둘러보고, 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정치인들이 현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일까요? 그런 목적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입니다.사진에 등장한다는 건 단순한 ‘보여주기’가 아니라 적어도 그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로 읽혀야 합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는 ‘챙기겠다’, ‘함께하겠다’,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요즘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토굴이나 움막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높게 솟은 빌딩과 바쁘게 오가는 인파 사이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만든 주거 형태는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불과 백 년 전 서울 종로 서대문 동대문 일대에는 실제로 토굴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토굴(土窟)’이란 말 그대로 땅을 파 만든 움막을 뜻합니다. 집도 방도 아닌 그저 비와 바람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임시거처였습니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종로경찰서 관내 토굴 빈민 15가구에 대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기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봄은 가고 여름은 오는데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날그날의 먹이를 구하다가 저녁이 되면 저물어 가는 해의 그늘을 따라 침침하고 후덥은 토굴(土窟) 거적자리로 기어 들어가는 토굴 생활자가 얼마나 되는가. 서대문과 동대문 두 곳 관내에 대해서는 이미 보도한 바 있으므로 이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거니와 다음으로 종로경찰서 관내의 통계를 들어보면 총 호수가15호에 인구가 51명인데, 그 중 40명이 남자이고 11명이 여자이라는데 본정서 관내의 9호 47명과 함께 시내 경찰서 중 가장 적은 수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흩어져 사는 곳을 보면 경운동(慶雲洞) 96번지에 1호 3명이 살고, 원동(苑洞) 241, 27번지 등 관유지 안에 3호 10명이며, 광화문통(光化門通) 1번지 총독부 산림 속에 역시 3호 10명이요, 루하동(樓下洞) 242번지 리완용후(李完用侯) 소유 토지 안에 3호 4명, 서대문 밖 행촌동(杏村洞)으로 넘어가는 성지, 즉 사직동(社稷洞) 보안림(保安林)안에 4호 17명이며 도렴동(都染洞) 105번지 양정고등보통학교 옛터에 1호 일곱 명이 살고 있다는데,그중 여자와 함께 사는 곳은 경운동과 루하동 사직동 세곳으로 경운동이 한명 루하동이 두명 사직동 여섯명이라하며 움집살이는 움집살이나 어쨌든 순전히 토굴은 아닌 반토굴 반가옥의 움집 생활자가 38호로 전기 15호를 합하면 전부 53호인데 그들의 직업을 들어보면,▲ 날품팔이 24▲ 모군 4▲ 지게군 5▲ 車夫 6▲ 職工 5▲ 雇傭人 7▲ 行商賣藥等 6▲ 飮食店 떡장사 3▲ 도배군 1▲ 配達夫 1▲ 상두군 1▲ 洗濯業 1▲ 其外 거지若 약간인데 그 중 제일 수입이 많기는 도배군으로 그는 하루에 일원 50전까지도 벌 때가 있다하며 그와 반대로 지게군 날품팔이 등이 제일 수입이 적은데 운수가 틔여야 50~60전 돈을 벌게 되는 외에는 대개는 30전 내외인데 그나마 날이 궂은 날 같은 때에는 한 푼 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고 한다. 1925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종로경찰서 관내의 토굴빈민 15호 - 가장 많기는 사직골 부근, 직업은 날품팔이가 제일”토굴과 움막의 삶을 담은 사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1924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움막 사진이 실린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 을지로 부근입니다. 그리고 1960년 12월 31일자 기사에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서울 용산역 인근 토굴을 방문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말 민정 시찰 중에 대통령이 토굴을 직접 찾았다는 것은 단순한 퍼포먼스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직접 보고 듣고 해결책을 찾겠다는 메시지로 읽힙니다.이처럼 토굴과 움막은 1920년대부터 최소 40년간 사회적·정치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주거 형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최근 다시 선거철이 찾아오며, 각 정당의 후보들이 서민의 삶의 현장을 찾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기호 1번, 2번, 4번 후보들 모두가 거리와 시장, 쪽방촌을 찾아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그들이 5년 임기 동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이 진심이고 그 관심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선거철마다 넘쳐나는 고해상도의 후보들 사진을 보면서 문득 그런 기대가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왕년에 그라운드를 누볐던 역사를 몸이 기억하는 걸까요. 고교 야구선수들 앞에서 심판이 팔굽혀펴기를 선보입니다. ―서울 양천구 목동야구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제79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전이 열린 5월 13일 목동야구장. 이날 그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셔터를 받은 선수는 단연 김성준(18·광주제일고)이었다. 카메라 기자들의 시선은 경기 전부터 그를 좇았고, 관중의 기대는 묵직하게 그에게 실려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의 오타니’라 불리며 투타 겸업 유망주로 주목받아온 김성준이 미국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와 130만 달러(약 18억 원)의 계약을 사실상 확정지은 직후, 처음으로 나서는 공식 경기였기 때문이다.경기 초반 흐름은 김성준의 스타성과 비례했다. 3번 타자이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한 그는 1회초 첫 타석에서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고, 후속타에 이어 홈을 밟으며 팀에 선취점을 안겼다. 경기 초반만 놓고 보면 영화 같은 시나리오였다. 김성준은 2회까지 4-0으로 앞선 팀 분위기를 이끌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나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광주제일고의 흐름은 3회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북고가 집중력을 높이며 점수 차를 서서히 좁혔다. 4회말 무사 1,3루 상황에서 광주제일고는 김성준을 마운드에 올렸다. 마운드 위 김성준은 시속 153km의 강속구를 뿌리며 투지로 응수했지만,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유격수의 실책이 겹치고, 희생플라이로 점수가 추가되면서 4-3,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했다.5회말, 드라마의 전환점이자 김성준의 고교 마지막 등판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김성준은 이닝 중 5안타와 볼넷 하나를 허용하며 무려 6실점. 특히 2사 2루에서 경북고 이승빈에게 맞은 쐐기 2점 홈런은 뼈아팠다. 결국 김성준은 마운드를 내려가 다시 2루수로 돌아갔지만, 그 표정은 흔들림 없는 담담함 속에 복잡한 감정이 얹혀 있었다. 경기 뒤 그는 인터뷰 없이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경기는 경북고의 11-4, 7회 콜드게임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날의 패자는 결코 조연이 아니었다. 김성준은 경기를 통해 여전히 자신이 ‘이름값’을 지닌 선수임을 증명했다. 마운드에서는 결과가 아쉬웠지만, 타석에서의 집중력과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은 MLB 팀이 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김성준은 15일 미국으로 출국해 18일 텍사스와의 정식 계약을 앞두고 있다. 185cm, 83kg의 체격에 최고 구속 시속 154km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김성준은 고교 시즌 동안 마운드에서 2승 1패 평균자책 1.13, 타석에서는 타율 0.333에 1홈런 8타점 3도루를 기록했다.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하는 데다 강한 멘탈과 기본기까지 겸비했다는 점에서 MLB에서도 투타 겸업을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미국 구단들이 ‘한국의 오타니’라며 주목한 이유는 단순한 수치 너머에 있다. 김성준은 경기 전후로 자신이 흘린 땀과 주변을 돌아보는 태도까지도 ‘프로’의 품격으로 보여주었다. 평소에도 팀 훈련이 끝난 뒤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줍는 모습에서, 자신이 닮고자 하는 오타니의 진짜 모습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투타 모두에서 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처럼, 오늘의 패배는 김성준에게 내일을 위한 불씨가 될 것이다. 목동야구장에서 그의 마지막 황금사자기는 끝났지만, 그의 야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 사진 속 그가 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처럼, 김성준의 시선은 이미 더 넓은 무대, 더 치열한 도전을 향해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콘크리트 바닥 틈새로 풀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공사하신 분들의 실수였을까요, 배려였을까요? ―경북 김천종합스포츠타운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100년 전 운동회‘백년사진’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연재입니다. 이번 주 100년 전 신문에는 유난히 사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이 없었습니다.청량리 들판에서 밭을 일구는 황소 달구지와 농부, 창경궁으로 추정되는 연못가의 오리떼, 장충단 공원의 푸른 잔디를 바라보는 소녀들, 그리고 다양한 스포츠 행사 사진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소개할 만한 인상적인 비주얼은 아니었습니다. 독자들의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장면에는 쉽게 놀라지 않습니다.하지만 100년 전, 당시 사진기자들이 그 장면들을 찍고, 신문 지면에 실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1925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학생 운동회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틀 뒤인 5월 10일자에는 전국 축구대회 개막 소식과 함께 운동장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게재되었습니다.오늘날 같으면 골을 넣는 순간이나 환호하는 장면이 실렸을 법한데, 당시에는 관중의 어깨 너머로 펼쳐진 넓은 그라운드가 대표 이미지였습니다.사진 왼쪽 아래, 둥근 물체는 구경 나온 아가씨의 양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성 관중 사이에 끼지 않고 좀 더 거리를 둔 게 사진의 원근감을 주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넓은 앵글, 요즘 스마트폰의 파노라마 촬영 기능을 연상시키는 구도는 새삼 놀랍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사진 촬영과 보여주기의 방식이 확연히 느껴집니다.● 변화하는 스펙타클의 풍경100년 전 5월, 다양한 스포츠 행사가 잇달아 열렸습니다. 시민들과 신문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대단한 볼거리’였던 듯합니다.5월 5일자 2면에는 “오는 6월 초순, 제12회 조선여자정구대회가 열릴 예정이며 곧 상세한 계획을 알릴 것”이라는 안내기사가 실렸습니다. 서울, 개성, 도쿄 등지에서 펼쳐진 승부와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청춘들의 모습은 하나의 스펙타클이었고, 당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 지면에 꼭 한 장씩, 그 풍경이 담겼던 것이겠죠.스펙타클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잡는 장치입니다. 사회적 감정이 움직이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누가 주최하고, 누가 조명되며, 무엇이 강조되는가에 따라 그 시대의 의도와 욕망이 드러납니다.청년회가 주최하고 언론이 주목한 일련의 체육행사는 단순한 운동경기를 넘어서, 그 시대를 사는 이들의 몸짓과 감정, 의지를 담은 상징적 장면이었습니다.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누워 있지 않겠다는 조용한 저항이었을 것입니다. “몸이라도 건강하자”는 다짐,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외침이었겠지요.● 오늘의 스펙타클, 그 양면성지금은 볼거리의 종류도 많고, 기술은 더 화려해졌습니다. 일상 곳곳이 스펙타클이고 놀라운 장면은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 스펙타클은 곧 ‘자본’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영향력을 키우는 것. 에너지음료 브랜드가 익스트림 스포츠 이벤트를 여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시대가 달라지며 스펙타클도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그것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붙잡고, 붙잡은 마음을 통해 무언가를 이룹니다.100년 전 청년회가 건강과 자긍심을 원했다면, 지금의 이벤트 주최자들은 돈과 대중의 지지를 원합니다.정치도 예외가 아닙니다.요즘의 정치 무대는 거대한 전광판, 수천 대의 스마트폰 카메라, 각종 이미지 전략과 퍼포먼스로 가득합니다. 후보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정치인의 얼굴과 연설은 하나의 콘텐츠가 됩니다.유권자들은 마치 100년 전 운동회 관중처럼 열광하지만, 그 열광이 항상 주최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을 보면 그 단면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오히려 ‘희화화’되는 최악의 효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눈은 붙잡았으나 마음은 전혀 못 잡고 있습니다. 그게 원했던 목표였다면 성공입니다. ● 다시, 스펙타클의 본질을 묻다100년 전, 축구장의 한 컷은 ‘살아 있음’의 증거였고, 지금은 그것이 이미지 정치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스펙타클은 시대를 관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스펙타클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입니다.‘볼거리’가 곧 ‘권력’이 되는 시대, 우리는 어떤 장면을 응시하고, 어떤 장면에 박수를 보내고 있을까요? 오늘은 100년 전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온 국민의 눈을 집중시켰던 스포츠 이벤트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57번 상추, 517번 고추…. 도시 농부들이 두 평 남짓한 주말농장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습니다. 펜스를 치고 부지런히 물도 줍니다. 텃밭에 직접 심고 가꾼 채소를 곧 수확해 식탁에 올릴 마음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백년사진’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연재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주는 조금 바쁘게 보냈습니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열리고 있는 ‘제 97회 동아 수영대회’ 사진 취재를 위한 출장 중이기 때문입니다. 화요일부터 오늘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일정 동안, 전국에서 모인 초등학생부터 일반 선수들까지 수영인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경영 다이빙 수구 등 60~80 종류의 예선과 결선이 펼쳐지는데요, 모든 장면을 다 촬영해 기사용 사진으로 마감하지는 않습니다. 스토리가 있거나 시각적으로 흥미를 끌 만한 장면들만 선별해서 보도용으로 전송합니다. 물론 모든 경기가 소중하고, 각 선수와 가족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쏟았던 노력을 생각하면 어느 순간 하나 버릴 수 없는 장면들이지만, 사진기자는 언제나 ‘선택’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 단체사진, 어디까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이런 가운데, 백년 전 이번 주 신문을 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단체사진은 몇 명까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1925년 5월 3일자에 동아일보에는 신문사를 견학하러 온 지방 학생들 얼굴이 실렸습니다. 이 사진 속 52명의 얼굴은 신문 지면에서도 꽤 뚜렷하게 식별됩니다. 그럼 만약 300명, 500명, 혹은 1천 명의 단체사진이 신문에 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신문 지면에서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천 명 정도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진이 차지하는 면적을 극단적으로 키우는 조건에서만 그렇습니다. 기사 본문은 최소화하고 지면의 80~90%를 사진을 할애해야 겨우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1만 명은 어떨까요? 제 판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 신문에 얼굴을 담는 물리적 한계요즘 발행되는 신문의 본문 글자는 보통 11포인트입니다. 이는 현대 독자가 식별할 수 있는 최소 글자 크기로, 신문 한 개면을 빽빽하게 채우면 200자 원고지 기준 25장 정도, 약 5,000자의 글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얼굴도 최소한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누군지 식별할 수 있겠죠.신문은 보통 가로 기준으로 5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진은 크기에 따라 1단 사진, 2단 사진, 3단 사진, 4단 사진, 통단 사진으로 구별됩니다. 글자수를 세어보면 1개의 단에는 대략 25자 정도의 글이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1단 사진에는 25명 정도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사람 얼굴이 글자처럼 옆 사람과 딱 붙어 있을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간격을 둔다면 1단 크기 사진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맨 앞줄 기준 최대 10명 내외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처럼 촘촘히 배열하더라도 제한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는 인원을 찍은 사진이 지면에 실리면 결국 ‘모두를 보여주려다 모두를 놓치게 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각종 동창회 소식지나 기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단체사진이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많은 얼굴을 담으려는 욕심이, 오히려 어느 누구도 돋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p.s. 기분 좋아지는 사진 한 장, 삼청동의 빨래터오늘 소개한 단체사진은 사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재미가 있는 사진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진을 좋아하실 분들을 위해 1925년 4월 29일자 신문에 실린, 삼청동 빨래터 사진을 함께 공유합니다. 지금은 카페와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터로 유명한 서울 삼청동 계곡에서 우리의 할머니들이 빨래 방망이질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존대말로 상황을 설명하는 사진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사진 속 왼쪽 아래 부인이 힘차게 휘두르는 빨래방망이가 ‘토드락토드락’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연휴도 평안하고 따뜻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오늘 수영대회가 폐막하면 서울로 돌아갑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