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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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4-03-20~2024-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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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우산의 모습 [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7월 20과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두 장 모두 비 내리는 서울의 모습입니다. 여름 비 치곤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서울 마포 나루터 풍경입니다. 배를 타고 서울로 전해진 물건을 실은 소달구지를 상인들이 점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상인들은 시내로 이 물건들을 갖고 가 시민들에게 이문을 남기고 팔겠죠?소달구지의 주인들 머리에는 대나무 재질로 된 것으로 보이는 모자가 하나씩 얹혀 있습니다. 큰 비가 아니라면 비를 피하는데 충분한 것 같습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이 물건은 ‘갈모’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사용한 방수용 모자. 구불구불한 삿갓 모양으로, 뼈대 위에 기름종이를 발라 만들어졌는데, 접으면 부채처럼 되고, 펼치면 고깔모자처럼된다’는 설명입니다. ▶ 이틀 후인 1923년 7월 22일자 사진입니다.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놓인 매대 위에 참외처럼 보이는 과일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다양한 재질의 우산을 쓴 상인과 시민들이 수레 옆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왼쪽 사람이 들고 있는 우산은 모양으로 봐서는 ‘지우산’ 같습니다. 지금이야 천으로 만든 우산이 주로 사용되거나 비닐 재질의 우산이 간편용으로 사용되지만, 조선시대에는 기름을 먹인 종이를 대나무 우산살에 붙여 사용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릴 적인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파란색 비닐 아래 대나무로 만든 우산살을 넣어 만든 1회용 우산을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편의점에서 파는 ‘오늘 하루만 비를 피하도록 해주는 비닐우산’ 역할이었습니다. 100년 전 사진에서 종이 우산과 천 우산이 함께 등장한 걸 보니 이 시대는 전통과 신문물이 공존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두 장의 비 사진에서 빗줄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장면이 모두 비오는 날 촬영된 사진이라고 믿습니다. 신문에 함께 실린 사진설명에서 비오는 날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진 속 인물들의 모자와 우산이 독자들에게 비를 상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카메라와 신문 인쇄기술은 가랑비도 독자의 눈에 보이도록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서울에 내린 비 사진을 보면서, 지난 주 비 사진에 대한 사진기자로서의 소회를 잠깐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 전인 지난 주 토요일 충청권과 영남권에 ‘극한 호우’가 내렸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와 달리 요즘은 신문사 기자들은 토요일이 휴무일입니다. 주 7일 24시간 가동되는 인터넷뉴스팀을 제외하고 그렇습니다. 신문사 사진부도 쉬는 날에 이번과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평소와 달리 취재 현장으로 달려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사진부의 경우는 새벽에 의사결정이 이뤄졌고 오전에 충청북도 괴산에 도착, 괴산댐 월류 모습부터 사진취재를 시작해 청주 오송 지하차도 주변 취재까지 했습니다. 근무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날은 자원자가 투입됩니다. 회사에선 필요한 차량과 비용을 지원합니다. 이렇게 취재된 사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신문 발행이 없으니 인터넷 뉴스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자 신문 1면 등으로 통해 지면에 게재되었구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기록이기에 휴일이지만 현장으로 가야 하는 게 사진기자들의 삶입니다. 보기에 따라선 안쓰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토요 근무를 했던 그 사진기자는 평일에 대휴를 썼을 겁니다. ▶‘극한 호우’는 사진기자들은 사실 여러 번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치수가 점점 잘 되어 매년 수해지역이 줄어들고 있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수해 장면들이 생겨 그걸 보도하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자연의 변덕스러움이 문제인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아직 부족한 지 잘 검토해서 내년과 후년에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 내린 비를 기록한 두 장의 사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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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노란 꽃 친구

    누군가 오래 세워둔 자전거 바퀴에 새 친구가 찾아왔네요. 이제 마음껏 달릴 순 없겠지만 외롭진 않겠어요. ―서울 종로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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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저 예쁘죠?

    각양각색의 액세서리들이 새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답답한 진열대를 어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인천 부평역 지하상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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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와이에서 온 고국 방문단을 기록하는 방식[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3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인천에는 아직 내리교회가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위치해 있는 감리회 소속 교회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벽돌 건물도 지금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 살던 교민의 자녀들이 한국을 방문한 모양입니다. 하와이 학생단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뜻밖에 ‘전북의 소리’라는 블로그에서 관련 소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하와이 학생단 군산에서도 성황’이라는 기사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포와(布哇)학생단 일행은 예정과 같이 지난 5일 오후 11시에 영광으로부터 군산에 내착 하였는데…. 군산역 앞에는 미선조합 양악대를 선두로 하여 오륙백명이 열을 작하여 성대한 환영이 있었다”▶ 3주가 넘는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을 소화했던 모양입니다. 조국을 잃은 슬픔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20년 남짓 고생을 하고 자녀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해 미국의 스포츠와 음악회, 교육 상황을 증언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분들의 가슴은 얼마나 절절했을까요?▶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엉뚱할 수 있지만, 고국 방문단의 모습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식 기념사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취재 경험담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년 전 쯤 어떤 중견기업의 독거 노인 돕기 캠페인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낡은 천정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를 바르고, 페인트를 칠하고 집 주변쓰레기를 청소하는 장면을 기록해서 보도하는 일이었습니다. 7~8명의 회사 직원들이 현장에 참여했고, 저는 그 중에 젊은 청년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가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을 독거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진설명에는 ‘아직 살만한 세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직장인들’ 이렇게 쓸 요량이었던거죠. 그런데 한 십여 분쯤 지나서였을까요. 현장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한 여직원이 저에게 “왜 다같이 봉사하는데 한 사람만 찍으세요?”라고 농담반진담반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요.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저는 ‘그림이 될 장면’을 하나 얼른 찍고 자리를 비켜주는 게 작업하는 분들과 독거노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저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분들을 좁은 골목에 다 모으고, 독거 할머니까지 가운데 위치시킨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신문에는 제가 처음에 찍었던 젊은 청년과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찍힌 ‘투 샷’사진이 실렸습니다. ▶ 우리는 기념사진을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등장할 수 있는 사진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뉴스를 전달할 방법이 있으니 사진을 다양하게 찍어 여러 등장인물들이 노출될 수 있도록 편집할 수 있지만, 예전에야 신문 지면이 유일한 매개체였기 때문에 한 장 또는 두 장으로 현장을 압축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해야 할 사람이 많은 경우 사진기자는 기념사진이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 1920년대에 독일 히틀러는 사진을 갖고 대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평하고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 밋밋한 사진을 주로 게재했습니다. 주인공이 없는 사진. 그런데 이게 한국식 공정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100년 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인 하와이에서 한반도까지 고국을 잊지 않고 방문한 학생단 한명 한명이 소중했을 겁니다. 만약 기념사진의 형식으로 사진을 ‘박’지 않았다면, 참가한 학생들도 보는 사람들도 뭔가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100년 전 하와이 학생단의 기념사진에서 우리의 ‘보여주기 방식’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저 사진에서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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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된 신문사에는 몇 명의 사진기자가 있었을까요?[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인터넷에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로 26번째 이야기입니다.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은 [청계천옆사진관]이라는 일종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년 사진]은 그 중 하나의 연재물입니다. 오늘은 원래 준비했던 사진 이야기 말고 사진기자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동아일보 지면과 인터넷 블로그에서 두 명의 낯선 사진기자 이름이 등장할 거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기사라고 올리느냐는 댓글이 예상되긴 하지만, 100년 전의 신문 지면에 실리는 사진이라는 ‘역사성’과 어울린다고 생각에 동아일보 사진부에 최근 합류한 사진기자의 이야기를 [백년 사진] 코너를 통해 전하려 합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니 바쁘신 분들은 다른 뉴스 포스팅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을 신문 기자라고 할 때, 신문에 실리는 사진 밑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을 사진기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사진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친구나 지인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보다 많이 없으실 겁니다. 사진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희소해서 그렇습니다. 2023년 현재 전국에는 약 450명 정도의 종이 신문 소속 사진기자와 비슷한 규모의 인터넷 신문 사진기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업인으로서의 사진기자는 1000명이 채 안 되는 숫자입니다. 동아일보에는 지난주까지 13명의 사진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15명으로 늘었습니다. 약 두 달간의 전형 과정을 거쳐 두 명의 젊은 사진기자가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올 하반기와 내년 연말에 두 명의 정년퇴직이 예정되어 있어서 이번에 경력 공채를 했습니다. 대학에서 각각 미디어와 사진을 전공했습니다.▶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되어 올해로 103년째 지면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대 사진기자는 몇 명이나 될까요? 예전에 동아일보 사사(社史)와 지면을 훑어보면서 대략적인 규모를 추정해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1920년 창간 때 사진부 세팅에 역할했던 분을 1호로 봤을 때, 1996년에 입사한 제가 약 70호쯤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번에 입사한 두 명의 젊은 사진기자는 동아일보 103년 동안 사진기자로서는 연번으로 약 80번째 전후가 될 겁니다. 중요하지는 않은 얘기를 너무 복잡하게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포토저널리즘은 한국의 문화 사회 정치적 환경에 맞춰 세팅되어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고유한 특성을 이어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에 변화에 따라 계속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있구요. 몇 년 전부터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운영하고 있는 [청계천옆사진관]도 시대 변화에 따른 저널리즘의 변화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에 대한 계획은 2001년인가 2002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즈가 홈페이지를 통해 “뉴욕타임즈가 자랑스러워 하는 사진기자들을 인터넷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라며 사진기자들의 블로그 시작을 선언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는 데는 15년 이상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번에 동아일보 사진부에 합류한 두 명의 젊은 포토그래퍼들도 새로운 저널리즘을 여러분에게 제공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너무 사사로운 말씀을 길게 드렸습니다. 그래도 이번 주 100년 전 지면에서 특별한 사진 하나는 여러분과 공유해야겠죠?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사진으로 전체 지면을 채웠던 날이 있었네요. 1923년 7월 5일자 6면에 실린 정구대회 선수들과 응원단 모습입니다. 무더운 여름 틈틈이 운동하시면서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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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자기 땅 소작인에 기부하고 서울서 아이스크림 파는 남성의 얼굴 [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1923년 6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모자를 쓰고 멜빵 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성과 앳띤 얼굴의 청년 한 명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제목은 아이스크림입니다. 100년 전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아이스크림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어보았습니다.▶자기 힘으로 일하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을 착취해서 사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러워 자신의 논밭을 소작인에게 주고 장사를 시작했다는 강택진씨라는 설명입니다. 사진 왼쪽 젊은 청년에 대한 설명은 없어, 강택진씨의 지인인지 손님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흥미로을 것 같은데 이날 신문에는 더 이상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자는 전화로 일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필요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때 찍는 사진도 있지만, 사진기자가 스케쥴을 챙겨 현장에 나가 사건과 행사를 기록하거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재미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나 현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사진기사라고 해서 사진을 위주로 하고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진도 분류하자면 일종의 사진기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사진기사라고 하지만 스토리가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강택진 아이스크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두 개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70▶ 두 개의 기사는 모두 경상북도 영주의 지역 언론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에 따르면 강택진씨의 사연은 이미 2달 전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되었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실제로 1923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강택진씨 부부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주들의 독한 손에서 죽어오던 조선의 소작인들도 근년에 이르러는 최후의 피와 힘을 다하여 각자의 권리를 세우며 로동이 보수를 완전히 얻기 위하여 완악한 지주들에게 반항하며 따라서 지주들도 시세를 깨닫고 양심에 찔리어 소작인들의 요구를 다소간 들어주는 모양이나 아직 시원한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소작인 운동은 점점 맹렬하여 가는 터인데 수월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되는 사실이 있었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삼십여년 동안 지주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토지 19000평)을 소작인 조합에 내어주는 동시에 ‘소작인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지어 그곳 소작회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강씨는 여러 해 동안 만주 상해 등지에서 돌아다녔으며 강씨의 맏아들은 고향에 있는 자기 형에게 부탁하여 보통학교에 다니며 지금은 자기 아내와 둘째아들(7세) 등 세 식구가 살아가는 터인데 방금 벌이 할 방법을 구하는 중이라 하며 강씨의 금년 나이는 32이라 한다. ▶경상북도 영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가 만주 상해를 돌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귀국한 강택진 선생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영주 지역신문의 기사는 강택진 선생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1925년 향년 35세의 나이로 순국해서 일까요? 그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인터넷에서 많이 검색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만이 이후에도 강택진 선생의 생애를 증명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멜빵 바지와 콧수염, 이색적인 아이스크림 박스에 눈이 끌려 들여다 본 사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네요. 강택진 선생의 사진에서 여러분은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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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한강 다리에 설치된 ‘자살하지 마세요’ 표지판[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은 1923년 6월 22일 자에 실린 사진을 골랐습니다.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표지판 사진입니다. 사진의 구도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눈 높이에서 보이는 그대로 찍어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오른쪽 철교 기둥의 수직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왼쪽 화면의 넓은 하늘 모습도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피했을 ‘불필요한 여백’입니다. ▶100년 전에도 한강의 철교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나 봅니다. 한강 다리 위에 일본어와 한글로 ‘잠깐만 정지하시오’라는 쓰인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표지판 앞 인도에는 갓을 쓴 성인 두 명이 각각 앉아 있거나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한강 다리를 건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겠죠?▶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이 100년 전에도 꽤 있었나 봅니다. 오늘날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하고 신문 지면을 더 훑어보았더 이사진과 조금 떨어진 지면에 관련 기사가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철교 자살- 미수자 또 3명한강 철교에 빠져 죽으려 하는 사람을 재작 이십일에도 세 사람을 다행히 구하였다. 고양군 한지면 왕십리 임익수(49)는 신병을 견디지 못하여 고양군 룡강면 아현리 종지명(61)은 홀아비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병 구원하기가 어려워 또 고양군 둑도면 신당리 한의소(61)는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죽으려는 것을 소과인도교 파출소에서 발각하여 각각 간곡한 설유를 한 후 돌려보내었다더라. ▶1923년 6월 20일 하루 동안에만 자살하려고 한강 다리를 찾았다가 경찰에 발견된 사람이 무려 3명이나 있었습니다. 망설이며 한강 다리 위를 서성이던 40대 1명과 60대 2명 등 총 3명이 한강 근처 파출소 경찰관에 의해 발견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사입니다. 병을 견디지 못해, 어린 아들의 병간호에 지쳐,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자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기사는 자살을 하려고 했던 3명의 이름과 주소, 나이를 모두 표시해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지금과는 다른 보도 방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신문에서 자살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보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00년 전 보도처럼 실명을 밝히면서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직설 표현을 하는 것이 것인지, 익명의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우회 표현이 나은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생명이 더 보호되고 존중되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진과 함께 용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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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北발사체 인양 성공…신문에 美잠수함 사진을 함께 게재한 이유는?[청계천 옆 사진관]

    ▶드디어 북한 우주 발사체 잔해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발사한 ‘천리마 1형’ 발사체가 서해에 추락한 지 15일 만인 16일 인양돼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11년 전 북한 로켓 ‘은하 3호’의 1단계 추진체 잔해의 언론 공개 행사를 취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을 출발한 ‘은하 3호’가 북한 발표에 따르면 성공적으로 역할을 한 후, 9분 만에 서해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우리 군 당국이 잔해를 바다에서 육지로 인양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 군 당국이 평택시 해군 제2함대 사령부로 취재 희망하는 언론사를 초청해 북한 미사일 발사체를 촬영하도록 했었습니다. 부슬부슬보다는 많은 비가 내렸는데 배의 조타실 쪽에 올라가 아래 갑판에 놓여있는 ‘북한제 깡통’을 찍는데 왠지 마음이 착잡했었습니다. 역사적 현장이라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일상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북한의 행동을 로케트 잔해를 통해 직접 확인하는 현장이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금방 뭍으로 올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름이 걸렸습니다. 북한 스스로 실패라고 한 발사였기 때문에 이번에 인양한 발사체 ‘천리마 1형’은 ‘깡통’이 아니라 그 안에 북한이 우주로 쏘아 보내려고 있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손상없이 물 위로 올리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2023년 6월 17일자 전국 신문의 1면에는 북한 ‘천리마 1형’ 잔해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사진기자협회 소속 2개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대표 취재(POOL 취재)한 사진에서 고른 사진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문에서 북한 발사체 사진과 함께 미국의 핵잠수함 사진을 나란히 실었습니다. 같은 날 부산항으로 입항한 미국 7함대 소속 핵추진 잠수함인 미시간호(SSGN 722)가 해군 부산 기지에 입항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모든 언론사의 단말기에 북한 추진체와 미국 핵잠수함 사진이 들어왔지만, 같은 사진을 어떻게 쓰는가는 각 언론사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서 최종 지면이 편집됩니다. 북한의 도발 흔적과 함께, 굳건한 한미 동맹의 상징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정보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이고, 뉴스의 강도가 ‘보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난 북한 도발 흔적’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입니다. ▶ 서설이 좀 길었습니다. 다시 100년 전 신문 지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1923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대회 중 재미있는 장면 2장을 아래위로 나란히 편집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지금도 2장의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행사가 벌어지면 화보 형식으로 여러 장을 보여주어 다양한 모습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지면이라는 게 제한이 있으니 보통 2장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 3장 정도의 사진을 게재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 때문에 2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한 장의 이미지로 ‘임팩트’있게 지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도 있고, ‘균형’있는 지면이 중요하다고 주장도 있습니다. 2장의 사진은 균형을 중시하는 의견이 우세할 때 게재됩니다. 여당 사진이 들어가면, 야당 사진도 들어가야 하고, 북한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꽤 많습니다. 과문해서 전 세계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기계적 균형의 정도는 우리나라 지면이 좀 높을 겁니다. ▶2장의 사진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사진편집의 경향이 100년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체육대회 장면 중에서 위의 두 사진은 ‘장년층 행사’와 ‘유년층 행사’를 골라서 게재했습니다. 성별로 나눌 수도 있고, 종목 별로 나눌 수도 있는데 연령별로 나눠서 사진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행사 중에서 딱 한 장의 사진만을 골라서 지면에 실어야 한다는 주문이 왔을 때 저라면 두 장의 사진 중 어떤 걸 골랐을까요? 고민을 좀 해봤는데 난제네요. 어렵습니다. 결국 두 장 정도 사진을 쓰는 방향으로 타협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사진을 고르셨을 거 같으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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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사진에 나타난 고도비만과 과로 흔적, 공개 의도는?

    2021년 10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국가정보원(국정원) 보고를 토대로 기자들에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체중이 2019년 140㎏에 비해 약 20㎏ 감량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지난 올해 5월, 이번에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이 김규현 국정원장의 보고를 토대로 “김 위원장의 체중이 140㎏대 중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의 추정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하 호칭 생략)의 체중은 지난 10여 년간 80㎏에서 140㎏까지 늘었다(그래프 참조).북한 ‘1호 사진’ 공개 건수 급증국가기관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체중을 분석하고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최고지도자가 유고 또는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우리 국가 안보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 체중을 외부 관찰자들이 어떻게 특정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 김 의원과 유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안면 분석과 체중 추적 모델, 초해상도 영상 분석 기법 등으로 체중을 추정한다고 한다. 이런 분석이 가능한 것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진, 즉 김정은의 ‘1호 사진’이 과거와는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쇼잉’ 좋아하는 김정은우선 북한 내부 요소로는 ‘쇼잉(showing)’을 좋아하는 김정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아버지 김정일 때와 달리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북한 정권은 그야말로 ‘사진의 시대’를 맞았다. 드론을 띄워 평양 시내 모습과 그 속의 김정은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김정은의 개인 활동을 홍보하기도 한다. 북한 ‘노동신문’ 지면을 기준으로 할아버지 김일성은 1주일에 평균 1.32번, 아버지 김정일은 3.92번 등장한 데 비해, 김정은(집권한 2012년 1월 1일부터 17개월간)은 평균 7.58회 등장했다. 빈도를 분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김정은의 사진은 북한 어느 시대보다 빈번하게 노출되고 있다. 전 세계 어떤 지도자와 비교해도 공개된 사진량이 많아 보인다.디지털 사진 원본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읽으면 촬영 시간과 장소 등 메타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은 해상도는 높되 촬영 정보를 가릴 수 있는 PDF 파일로 김정은 사진을 공개한다. 또한 아무나 김정은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5명 규모의 전속 사진가 그룹만 사진을 찍도록 통제하고 있다. 다만 사진 양 자체가 많기에 김정은 동향에 관심 있는 외국 정보기관은 충분한 분석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경우 클로즈업 촬영을 허용하고 군중으로부터 지도자가 분리되는 망원렌즈 촬영도 빈번하다. 사진 분석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진 것이다.두 번째 변수는 인공지능(AI)이나 빅테이터 분석 능력 등 기술 발전이다. 북한이 제공하는 고해상도 사진을 토대로 일반인 평균치를 적용해 김정은의 체중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촬영 각도가 동일한 사진을 골라 같은 골격에 붙은 살의 부피를 비교함으로써 연도별 변화를 추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얼굴의 점과 티눈까지 그대로 보일 만큼 높은 해상도의 컬러 사진을 북한 스스로 제공하고 있어 얼굴 색깔로도 건강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건강 상태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다크서클, 긁은 흔적, 티눈, 뾰루지 등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지워서 내보내지 않는 것일까. 북한은 얼마 전 미사일 부대 간부로 추정되는 인물을 김정은 사진에서 모자이크 처리해 배포한 적이 있다. 북한 측도 ‘뽀샵’을 전혀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북한에선 사진일지라도 김정은 얼굴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당신이 평양 시내 아파트 완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사진을 찍는 전속 사진가라고 상상해보자. 김정은은 전날 야근하고 오늘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잤는지 뒤쪽 머리가 가지런하지 않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찍은 사진을 골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사에 전송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이 고른 사진이 AP 평양지국을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될 수도 있다. 당신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뒷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할 것인가, 아니면 찍은 사진 중에서 그나마 ‘똘똘한’ 커트를 고를 것인가. 혹시 포토샵으로 사진을 건드렸다가는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을 총괄하는 누군가가 세세하게 주문하지 않는 이상 건강과 관련된 작은 힌트들은 사진에 그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북한 정권과 최고지도자의 동향을 분석하는 근거 자료가 사진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점이다. 20여 년간 북한 언론 속 ‘1호 사진’을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필자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이미지는 유용한 정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라면 사진 분석에 머물지 않고 휴민트(인적 정보), 텍스트, 감청 등 다른 형태의 정보를 종합해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보당국도 이미 충분히 종합적인 정보 분석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이 같은 종합적 정보에 덧붙여 사진을 본다면 그 이면에 숨은 북한 정권의 맥락과 동기를 더 깊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향후 행보도 예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北 ‘야간 사진’ 공개 늘어난 배경 눈길김정은은 쇼잉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쇼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가 주목하는 사진 형식 중 하나가 김정은 시대 특히 늘어난 야간 사진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축포가 자주 등장하고, 야간 군중집회를 내려다보는 김정은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기술적으로 필요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낮이 아닌 밤에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도 특이해 보인다.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검은 배경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집중하게 된다. 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야근이 많다는 의미다. 불규칙한 수면뿐 아니라 불규칙한 식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밤에 먹는 간식이 나이 마흔 살이 코앞인 남성의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지금 서해에서는 북한이 쏘아 올린 군사위성 발사체의 잔해를 찾고 있다. 실패한 발사 현장이라 김정은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성공했다면 사진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북한은 공식 매체를 통해 고도비만 상태인 김정은 모습을 공개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은 사진의 촬영과 공개에서 우연은 없다는 점이다. 1호 사진가와 그 사진의 배포를 최종 허락하는 사람들의 경력은 외부 관찰자보다 길고, 사진 선택 과정은 훨씬 전략적이라는 얘기다. 건강 정보 유출이라는 손해보다 내외부 선전 효과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북한 사진, 특히 김정은 사진을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이 기사는 에 실렸습니다]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장 cut@donga.com}

    •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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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피사의 사탑…탑은 그대로인데 사진의 주인이 바뀌었다[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서 피사의 사탑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세계 7대 경이로운 문화재’를 연속으로 소개하는 연재물 두 번째 기획기사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냥 ‘사탑(斜塔)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대에는 기울어졌다고 해서 ‘피사의 경사탑’이라고 표현했었네요. 문득 저 피사의 사탑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1923년 신문에 실린 피사의 사탑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오늘날과 달리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였는지, 사진의 출처와 주인에 대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에서 사진기자가 이탈리아 현지로 출장을 가진 않았을 겁니다. 저 사진의 주인은 일반 시민이라기 보다는 사진 전문가가 찍었을 겁니다. 카메라가 비싼 물건이라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으니까요. 카카오톡으로 챗GPT에게 “1923년 세계 인구가 얼마나 됐어요?”라고 물어봤습니다. “1923년 세계 인구는 약 1.93억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사치일 뿐이며, 과거의 인구 수는 정확한 데이터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추정치에 불과합니다”라고 답변을 해주네요. “그러면 그 당시 인구 중에 카메라를 소유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라고 다시 질문을 하니 “1923년에는 카메라를 소유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카메라는 고가의 럭셔리 제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 인구 대비 카메라 보급율은 현재와 비교할 때 매우 낮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라고 답을 줍니다. ▶ 만약, 우리가 오늘 인터넷으로 ‘피사의 사탑’을 검색해서 이미지를 확인한다고 했을 때 나오는 사진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인공지능(AI)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피사의 사탑’ 사진이 인터넷에 떠 있습니다. 하나의 실물인 ‘피사의 사탑’이 무한 숫자의 사진으로 기록되어 떠돌아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지가 흔해지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이용된다고 해서 지금을 사진의 시대, 영상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인류들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세계 각국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거나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전문가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신문사 기자들만이 신기한 것을 찍어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시대 말입니다. 지금은 사진의 주인이 무한 확장되는 시대입니다. 더 이상 권위적인 소스(source)에 의해서만 현실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신문 제작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Post-protocol era”(Costas M. Constantinou, 2018)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진기자가 사건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도 아닙니다. 작년인가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는 사람들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활주로를 이륙하려는 군용 비행기에 올라타서라도 탈출하려는 절박한 사람들의 모습과, 이륙한 비행기에서 바닥으로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충격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찍은 사람은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자도 현장에 없었지만 그 현장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그리고 아마 역사에서 한번 언급되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인이 SNS에 올린 동영상에서 결정적 장면을 기자들이 정지화면으로 캡쳐했습니다. 100년 전 피사의 사탑 사진처럼 사진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모르는 시대가 된 걸까요?▶여기서 쓸데없는 고민 한 가지를 해봅니다. 그럼 사진기자의 존재 이유는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건을 기록하고, 심지어 AI가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시대에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기자의 역할이 있을까요?역설적으로 SNS와 AI 시대에는 전문가 그룹으로서의 사진기자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뢰성 높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의 오보는 그야말로 회사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사진이 계속 들어가야 하는 시대, 매번 포스팅에 들어갈 사진을 검증해야 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찍은 사진이 확실하다고 할 때 그걸 프린트하거나 포스팅하는 게 전혀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게 사진기자의 존재 이유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 피사의 사탑은 어쩌면 그대로인데, 피사의 사탑 사진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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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곳에 올라가 찍는 사진 vs 눈앞에서 찍는 사진[청계천 옆 사진관]

    ▶백년 전 이번 주 7일치 신문에는 하루 1장 정도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중 고른 사진은 1923년 6월 2일자 신문에 실린 학교 개교 기념식 사진입니다. 기사 본문의 잉크가 번져 pdf 파일 판독이 잘 안되는데다 사진과 직접 관계가 없는 행사에 대한 묘사가 많아 기사 전체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으려 합니다. 우선 사진과 함께 게재된 기사 본문을 보겠습니다.▶이화(梨花)냐 백합(白合)이냐 -깨끗하게 단장한 삼백의 학생 이번 놀이의 중심되는 정원극시내 정동 리화학당에서는 예보와 같이 재작 삼십일일 오후 4시부터 녹음이 우거진 동교 앞뜰 잔디밭에서 성대한 개교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정각전부터 모여든 내빈과 학부형은 거의 몇(?)백 여명에 이르러 입장을 사절하는 사정에까지 이르렀다. 내빈석에는 다수한 외국인과…. 곱게 차린 삼백 여명 학생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운 ‘아편설라’ 교장의 지도하에 입장식을 마치고 뒤를 이어 유치원 아해들의 단심주라는 유희와….만장의 박수 소리는 맑게 개인 하늘에 울려 넘치는 중에 순서는 차차 전개되어 보통과 3학년의 유희 체조 고등과 학생들의 세련받은 기계체조 보통과 아해들의 우승꺼리 체조가 있은 후 비로소 리화학당의 한자랑꺼리이며 조선에 하나이라 할만한 리화학당합창대의 고은 노래가 울려나왔다….▶지금도 서울 시내 명문여고로 명성 높은 이화학당의 개교 기념식을 촬영한 사진이네요. 5월 31일 오후 4시 이화학당의 잔디밭에서 수백 명의 내빈, 학부형,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 기념식이 열렸는데 행사장이 인파를 감당하지 못해 일부 학부형은 교내로 들어오지 못하기 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의 오른쪽에 학부형들이 있고 가운데 계단을 내려온 왼쪽 아래쪽에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왼쪽 위쪽 그러니까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에 교장선생님과 내빈들이 앉아 있을 겁니다. ▶머리를 길게 길러 땋은 여학생의 뒷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교복이라는 같은 복장을 하고 헤어스타일도 같은 모양을 한 일련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진찍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규칙이 있는 패턴을 좋아합니다. 화면이 정리되어 깔끔하게 표현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사진의 특징은 행사가 열리는 잔디밭이라고 하는 지표면에 카메라가 있지 않고 건물이나 나무 위에 위치해 있다는 점입니다. 즉, 눈높이(eye-level)이 아니라 내려보기(high-level) 지점에서 촬영된 사진인 것이죠.▶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찍으면 지금처럼 학생들 행렬의 뒤쪽에서 촬영하는 것 보다는 정면에서 표정을 찍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면, 당시의 독자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저 현장에 있는 그당시 어린 여학생들 몇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겠지만, 사진기자는 얼굴 대신 행사의 전체 모습과 정리된 ‘패턴’을 택했습니다. ▶ 높은 곳에서 전체를 보여주면서 정리정돈된 행렬을 보여주는 사진은 한국 신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진입니다. 지금이야 어떤 행사나 인파가 모인 현장을 보여주는 뉴스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앵글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신문에 딱 1장 또는 2장의 사진을 게재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전체를 다 보여주는 사진을 게재했고, 사진기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진을 주로 촬영했습니다. 옛날 사진기자들이 다양하게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문에 실린 사진 말고도 다양한 앵글로 현장을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들이 전경 스타일이 많다는 것은 사진기자들도 거기에 적응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찍어와 봐야 안 쓰니까 쓸 사진만 찍게 되었을 거라는 추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할까요? 한국 사진기자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걸 선호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진을 한국 기자들은 못찍었던 대표 사례가 있습니다. 영화 ‘1987’에서도 묘사된 고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아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군사독재에 항거해 시위하던 연세대학교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 말입니다. 이 사진을 제대로 찍은 사진기자는 정태원이라고 하는 로이터 통신 소속 사진기자였습니다.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를 눈앞에서 찍은 유일한 기자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수십 명의 한국 신문사 소속 사진기자들은 연세대 정문을 조망할 수 있는 철길 위에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한 앵글에 넣고 촬영하고 있었던 거죠. 위에서 찍으면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찍힐 수 있습니다. 사건의 전체를 보여주는 촬영방식입니다. ▶한국 사진기자들이 시위 현장을 멀리 위에서 본 것은 시위현장의 돌멩이나 경찰의 곤봉이 무서워서가 아닐 겁니다. 그게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밑에서 찍으면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경찰의 곤봉을 맞아 피를 흘리는 학생이거나 학생의 쇠파이프를 피하며 공포스러워 하는 경찰의 모습 둘 중 하나를 말입니다. 경찰의 배치 상태 그리고 학생들의 규모를 사진 한 장으로 다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진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물론 그런 보도 사진도 편향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 멀리서 찍는 전경 스타일의 사진이 정답이냐, 아니면 현장의 가장 다이내믹한 표정을 포착해 보여주는 사진이 정답이냐 하는 논쟁은 사진기자와 신문사 내부에서 수십 년째 이어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클로즈업을 한다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따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 디자인의 트렌드를 미니멀리즘, 단순화라고 볼 때 한국 사진이 세계 트렌드를 못 쫓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100년 전 신문에 실린 ‘질서 정연한 사진’에서 우리 신문 사진의 전통적인 형식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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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얼짱 각도는 오른 뺨일까, 왼 뺨일까?[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지난 세기의 낡은 이미지를 발굴해 보고자 시작했습니다. 가능한 1주일에 한번씩 토요일에 포스팅하려 하고 있습니다. ▶ 100년 전 이번 주, 동아일보 사진부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였었네요. 지면 PDF를 아무리 뒤져봐도 눈에 띄는 사진이 없습니다. 인물 사진 3장 이외에 스케치성 사진 2장이 1주일 치 신문에 실린 사진의 전부였습니다. 사진이 뉴스를 시각화해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시선을 끌기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인식이 별로 없었을테고, 또 인쇄 기술의 한계 때문에 지면에서는 아주 빈약한 위치였다는 걸 잘 보여주는 한 주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문에 게재되었던 3장의 인물 사진도 어쩌면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 촬영되거나 입수되어 인쇄되었을 거 같긴 합니다. 신문에 얼굴 사진이 실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뉴스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인물 사진 3장을 골랐습니다. 5월 23일자에 실린 사진을 보면 ‘새로 귀국한 허성씨’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체육을 연구하고 10년 만에 귀국했다는 기사내용이 있습니다. 좌측 얼굴 아래쪽에 카메라를 설치해 약간 우러러보는 느낌으로 촬영되었습니다. ▶5월 24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은 “영국의 새 수상으로 임명된 볼드원씨”라는 설명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923년 5월 23일부터 수상에 취임했고 이후에도, 두 번 또 총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멀리 영국에서 어제 발생한 뉴스의 인물 사진을 바로 다음 날 한국의 신문에 게재했다는 사실이 좀 놀랍습니다. 다만, 카메라가 피사체보다 높은 곳에서 ‘찍어 누르듯’ 촬영되어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왜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외국인이지만 중년의 남성이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은 아닙니다. ▶ 5월 24일자에 실린 ‘바이올린의 세계적 명수 크라이슬러’씨 사진은 앞의 두 사진과 달리 주인공의 직업을 보여주는 소품이 손에 들려 있습니다. 내한 공연을 한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를 소개하는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입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뉴스 인물을 표현할 때 악기를 비롯해 직업을 보여주는 소품이나 배경을 사진에 함께 넣고 찍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인물 사진을 ‘environmental portrait’라고 하고, 배경이나 소품없이 얼굴만 표현하는 인물 사진을 ‘mug shot‘이라고 합니다.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불이 나거나, 열차가 탈선하거나, 정치인들이 싸우거나, 천연기념물이 발견되는 등 굵직한 사건사고를 찍으러 다닌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를 하려고 입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막상 하루 일정을 보면, 가장 많이 찍는 사진이 인물 사진입니다. 아마 사진기자 일의 50% 이상이 인물 사진 찍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일정이 많다보니 한 사람을 찍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간단한 인사말과 소소한 이야기로 어색한 분위기를 아이스브레이킹하고 사진을 찍기 때문에, 사진기자를 만난 사람들이 사진기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으로 뉴스 인물과 그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지속해서 확인되기 때문에 사진기자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지고는 있습니다. ▶ 인물 사진 얘기를 한 김에, 제가 예전에 어디선가 갈무리해놨던 노하우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1.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이 잘 나오게 하려면 3가지를 명심하라고 말했다. 정면을 보지 말고 비스듬히 포즈를 취하며, 턱을 내리고, 미소를 짓는 것이다(맨즈 헬스 잡지의 전속 모델 앤디 스피어).2. 카메라를 바로 앞에 대고 찍으면 얼굴의 특징이 왜곡될 수 있다. 2m 거리에서 찍으면 얼굴이 평평하고, 20㎝ 안의 거리로 바짝 대고 찍으면 코가 너무 커보이므로 40㎝에서 85㎝ 거리에서 찍으면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준다(영국 요크대학 심리학 교수 대니얼 베이커 박사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3. 우리나라 사람들은 왼쪽 뺨이 오른쪽 뺨을 찍은 사진보다 자연스럽고 자기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초상화도 그렇다. 1천원, 5천원, 1만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이황 이이 세종대왕의 초상화는 왼쪽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보면 된다. 왜 왼쪽일까? 왼쪽 얼굴에 사람의 인상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우뇌와 좌뇌로 이뤄지는데 우뇌는 감정 표현을, 좌뇌는 논리적 표현을 담당한다. 우뇌가 발달한 사람은 음악이나 미술을, 좌뇌가 발달한 사람은 수학이나 과학을 잘한다. 우뇌는 사람의 신체 왼쪽을, 좌뇌는 사람의 신체 오른쪽을 관장하는데 감정 표현이 풍부한 우뇌를 담당하는 왼쪽 얼굴의 인상이 훨씬 좋다.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 위의 몇 가지 팁처럼 도식화해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심리학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해봤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3명의 인물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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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야구 경기 장면을 어떻게 사진 찍었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 백 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고 K-이미지(한국의 사진)의 원형을 찾아 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고등학교 야구 대회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지난주 광화문에 있는 신문박물관에서 신문편집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고 해서 오랜 만에 가봤는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시물과 안내문이 보였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나 봅니다. 하나는 지난 주 토요일 [백년 사진 No. 18]에서 소개했던, ‘1천 명 어린이 얼굴 콜라주’ 지면이 예전부터 전시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신문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진을 처리해 지면에 게재할 수 있는 ‘제판 기술’이 그 때부터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백 년 전 인 1923년 신문의 pdf 파일을 전체 다 둘러봐도 1주일 치 신문에 실리는 사진의 개수는 총 10장을 넘지 않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이번 주에 고른 신문 사진은 ‘야구 경기’ 모습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동아일보사에서 지금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서 고른 사진은 아닙니다. 요행히 겹쳤습니다. 100년 전에도 이 맘 때 고교 야구 토너먼트가 있었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목동야구장과 신월 야구장에서 이번 주 전국에서 모인 고등학교 야구팀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며 승부를 겨루고 있습니다. 저의 고교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는 1947년부터 동아일보사 주최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 전 고교 야구 경기 사진은 어떤 모습일까요? 카메라맨들은 선수들에게 얼마만큼 접근할 수 있었을까요? 기사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 (제가 읽기 쉽게 한자는 한글로, 옛날 말은 오늘 말로 최대한 고친 내용의 기사입니다)[제 4회 전(全) 조선 야구대회 제 2일오전 11시부터 두 시간 동안 배재와 휘문 간의 격렬한 싸움4대 0으로 휘문 대승]제 4회 전 조선 야구대회의 둘째 날인 작일 오전 11시부터 학생 예선전을 개시하였는데 벽두에 작년 우승단인 배재군(培材軍)과 강팀으로 이름이 있는 휘문군의 싸움이 열리게 되매, 두 학교에서는 각각 천여명의 학생을 전부 출장 응원케하여 기술의 정보다도 의기의 경정이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전의용씨 심판 하에 배재 선공으로 개전이나 양편 응원군의 함성은 장내를 흔드는 듯하였으며 이번 싸움이 비록 학생단의 제 1회 예선전이나 관중은 임의 결승전과 같이 긴장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일회에 배재는 소득이 없고 휘문은 한점을 얻으니 원래 휘문은 작년에 분패한 복수전이라 더욱 힘을 다하여 싸운 결과 7회 초에 넉 점 알파 대령점으로 휘문이 대승하니 복수전에 성공한 군사들은 물론이고, 천여명 응원군의 광희하는 양은 실로 장관이었다.▶ 휘문고등학교와 배재고등학교는 100년 전에도 야구부가 있었군요. 바로 전년도에 배재고가 이겼는데 이 해에는 휘문이 크게 이겼네요. 고등학교 야구부의 대결인데 군대라는 표현을 쓴 점이 눈에 띕니다. 배재군(軍) vs 휘문군. 응원단도 응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수전에 성공한 군사들은 물론이고 응원군의 환호하는 모습도 장관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동아일보는 지금은 황금사자기 전국 고교 야구를 합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도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입시를 앞둔 고 3 수험생이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전교생 전체와 함께 동대문야구장으로 응원을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평일 일과 시간인데 동문 선배들 10여 명이 외야석에서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었습니다. 학교의 이름과 깃발을 걸고 우승을 다투는 스포츠경기는 언제나 동문들에겐 가슴 떨리는 경험인 것 같습니다. 사진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응원 온 학생과 시민들이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백 년 전에 천여 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했다고 하니 엄청난 이벤트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총 3장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위의 두 장은 관중석 모습이고 아래 동그랗게 오려서 편집한 사진이 경기 모습입니다. 경기 모습 설명을 보면,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빼스(베이스)를 훔치는 광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자가 홈스틸 하는 것을 지금도 베이스를 훔친다고 표현하는데 거의 비슷하네요. 사진의 내용도 지금의 사진과 비슷합니다. 야구 경기를 신문에서 뉴스를 다룰 때 가장 많이 쓰는 장면이 ‘도루’ 장면입니다. 타자나 투수 등 그날의 MVP 선수의 경기 모습을 쓸 수도 있지만, 한 장의 사진만 쓰게 되는 신문 지면의 특성상 ‘외로워 보이거나’ ‘맥락이 없어 보이는’ 사진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도루 장면은 주자와 수비수 등 최소 2명이 부딪히는 장면이라 신문 편집자와 사진기자들이 선호하는 편입니다. 플레이트를 밟으려는 선수와 태그하는 선수의 경쟁이 보이는 순간이 뉴스 사진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걸 겁니다. 가끔 심판 모습 또는 타석의 선수까지 포함되면 경기 분위기를 훨씬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은 경기 중에 그라운드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덕 아웃 또는 심판 쪽 그물 뒤에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야구 사진을 찍습니다. 1920년대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홈스틸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요? 망원렌즈도 없었지만 사진기자도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사진기자들이 경기장 안에 들어가서 심판 옆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 관행은 1970년대 사진기자들이 현장을 뛰던 시절까지 이어졌다고 선배들에게 들었습니다. 백 년 전 먼지를 일으키며 홈으로 쇄도하는 학생 선수의 모습 역시 심판 바로 옆에 서 있었던 사진기자에 의해 포착되었을 겁니다. ▶백 년 전 야구장 사진을 함께 봤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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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오뚜기 가족요리 페스티벌

    가정의 달을 맞아 (주)오뚜기가 13일 과천 서울랜드 피크닉장에서  ‘스위트홈 제 26회 오뚜기 가족요리 페스티벌’을 열었다. 총 3천 여 가족, 약 1만2천여 명이 참가해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 경연을 펼쳤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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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사로 들어온 사진은 돌려 드리지 않습니다 - 어린이 1000명 얼굴 사진 모으기 프로젝트[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이미지의 원형 모습을 찾아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사진을 하나 골랐습니다. 소위 콤보(combo) 사진, 조(組)사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23년 5월 7일자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안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어린이 사진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기사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본지 1천호 기념호에 게재코자 – 아동 1천명의 사진을 모집돈 들지 않고… 재미있는 계획… 영구한 기념>오는 25일에 발행되는 동아일보는 제 일천호가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야 ‘일천호 기념호’를 발행하기로 방금 준비중인데 이 기념호를 장식하며 겸하여 독자여러분의 가정에 한 즐거움을 돕고자 우리 동아일보 독자의 가정에 길리우는 어린이의 사진을 일천명위한 하고 널리 모아서 당일 발행하는 신문지에 게재하는 것은 다만 일시에 자미가 있을 뿐 아니라 후일에 또한 영구히 좋은 기념이 될것이니 다수히 사진을 보내여서 흥미있는 이 계획을 원조하야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보내실 아이의 사진은 아무쪼록 12~13세 이내 되는 것이 좋으며1. 사진은 어떠한 종류이든지 무방하며, 여럿이 박힌 것이라도 관계치 않고, 1. 보내는 방법은 2전 짜리 우표를 붙이고 반드시 [경성 화동 동아일보사 사진부행]이라고 피봉에 해자로 기록하여야 하며1. 금월 십오일까지 도달하도록 보내시되 기한 전이라도 일천명이 되면 소용이 없을 터이니 아무쪼록 초생안으로 속히 보내시는 것이 좋으며1.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는 데는 한푼도 돈은 받지 아니하며 보내신 사진은 다시 보내 드리지 않습니다. ▶ 동아일보가 창간된 게 1920년 4월 1일이었고 1923년 5월 23일에 천 번째 신문을 만들게 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천 명의 어린이 얼굴 사진을 지면에 싣겠다는 안내 기사입니다. 단순한 재미를 뛰어넘어, 영원히 기록되는 프로젝트이니 많은 참여 바란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13세 미만의 어린이 얼굴이면 좋겠고, 독사진도 좋고 단체 사진도 좋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5월 15일까지 동아일보 사진부로 우편 발송하되 천 명이 확보되면 먼저 도착한 사진으로 작업을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신문사로 온 사진은 되돌려주지 않겠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천 명의 어린이 얼굴은 정말 신문 지면에 실릴 수 있었을까요? 말이 천 명이지, 당시의 기술로 그 많은 얼굴을 조합해서 지면에 프린트 할 수 있었을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안내 기사에서 약속했던 1923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확인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지면에 대략 천 명의 얼굴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각각 작지 않은 크기의 얼굴이어서 본인과 가족들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입니다. 1923년에 10대였던 이들은 30대 중반에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겠죠. ▶ 사진기자 하면서 마음에 걸렸던 숙제 2가지가 있었는데, 모두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담이 덜어졌습니다. 첫째, 필름을 사용하던 2000년 대 초반까지 화학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문제였습니다. 촬영한 필름을 사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상과 인화라는 화학 처리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폐수가 나왔습니다. 폐수에 포함된 은을 추출해서 수익을 발생시킨다는 폐기물 업체에서 걷어 갈 수 있도록 사무실에 드럼통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폐수가 하나도 안나온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직원들 호흡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하수도로 조금씩은 흘러가기도 해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과정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즈음 신문사에서 필름이 사라지고 디지털 카메라로 세대교체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마음에 걸렸던 문제가, 사진을 돌려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신문에 쓰기 위해 제보자 또는 뉴스인물로부터 사진을 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사진부 기자와 사회부 기자가 구해 온 사진은 편집기자에게, 이미지 리터치 팀원에게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팀원으로 연속해서 전달됩니다. 사진기자인 제 손으로 다시 돌아와 사진 주인에게 돌려주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어느 프로세스에서 사라졌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사진의 원본을 신문사가 가져다 지면을 만드는 부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100년 전, 천명의 어린이 사진을 구하면서 돌려줄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보며 제가 놓쳤던 몇 번의 숙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완벽하게 반환되지 않았을 자료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백년 후의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 명의 어린이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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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초상권은 어떻게 허락 받아야할까[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이미지의 원형 모습을 찾아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어린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22년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3년 5월 1일에 소파 방정환 선생과 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 해방 선언’을 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올해 2023년 5월 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어린이 해방 선언’ 100주년 행사가 열렸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도 행사를 촬영해 5월 2일자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어린이 해방 선언’이라는 역사가 수미쌍관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니 뭔가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5월1일’의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야 소년운동협회의 주최로 시내 3군데에서 열린 연설회와 연예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연설이나 연예나 모두 ‘우리의 가시밭에서 길리어 오든 어린이를 해방하라’하는 소년운동의 처음일임으로 그 주장이 정당하고 그 계획이 새로운 것만큼 일반의 환영을 받아서 예상이상의 성화를 이루었다더라. ▶사진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지면에 배치되어 있네요. 연단 아래 청중의 모습 사진과 함께 한 여성이 어린이 대표로부터 선언문을 받는 장면, 이렇게 두 장의 사진이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신문에 어린이의 얼굴을 게재하는 것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2009년 경험 이후 특히 어린이 사진에 대해 조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프랑스 마을’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 몇 년 동안 프랑스 국적의 어린이들과 마을주민 100여명이 어울려 한국 전통 추석 문화를 체험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복을 입은 프랑스 국적의 어린이들이 송편빚기, 윷놀이, 제기차기, 떡메치기 등을 직접 체험합니다. 당시 구청에서 보도자료를 언론사로 보냈고, ‘볼거리’이기도 하고 ‘사진거리’기도 해서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몇 년째 당연하게 사진 찍고 지면에 사진을 게재하던 행사였는데 그 해에는 어떤 프랑스인 부모가 문제 제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이 한국 문화 체험 행사를 하는 것과, 얼굴이 신문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취지였습니다. 그 때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내린 결론은, “어린이들의 초상권이 확보되지 않았고, 미성년자이므로 집에 있는 보호자들의 촬영 허락을 받아야 보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함부로 어린이들의 얼굴을 신문에 낼 수 없으며, 필요할 경우 미성년자인 어린이에게 허락 받는 게 아니라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 설령 부모가 허락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성인이 된 어린이 본인이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 잊혀질 권리 또는 초상 사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례는 아니지만 2021년 8월 미국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알몸 사진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록그룹 너바나(Nirvana)의 ‘네버마인드(Nevermind)’ 앨범 표지 사진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는 스펜서 엘든씨가 자신의 동의 없이 앨범 표지 사진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엘든씨 부모가 촬영 당시 촬영의 댓가로 돈을 받았다는 점과, 엘든씨 본인이 그동안 스스로 이 사진을 자랑삼아 이야기했었다는 점 때문에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부모가 아이의 초상권에 대해 권한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린이 사진이 많은 편입니다. 현실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상징하기 때문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 정답은 없습니다. 외국 정상이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 시내의 초등학생 수십 명이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꽃다발을 주는 장면을 우리는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신문에서도 어린이가 등장하는 사진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정치와 외교 현장에 어린이가 많이 출현하지는 않는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나마 시위 현장에서 구호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는 어린이 사진은 가능한 한 피하자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과 부모의 정치적 입장이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고 시위 현장에서 생길 수도 있는 안전문제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회 이슈 현장에 등장하는 어린이 모습 이외에 주의가 필요한 것이 SNS입니다. 올해 어린이날인 5일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은 온라인 콘텐츠 속 아동권리 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했습니다. 골자를 보면, 아동·청소년 출연자의 주체적 사고를 인정하고 의견을 존중한다, 제작자는 아동·청소년과 그 보호자에게 촬영과 출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초상권과 정서 문제 등 위험요소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하며 구체 내용과 범위, 기간 등을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 성적 유희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정도로 신체를 노출하는 행위는 안된다 등입니다. ▶어린이 사진에 대해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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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경궁 꽃 사진-신문 사진에 사람이 꼭 들어가는 이유 [청계천 옆 사진관]

    ▶ 나뭇가지 10여 개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그 아래 봄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1923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꽃의 모양은 벚꽃 같은데 설명에는 정확한 표현이 없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진의 원본을 확대해보면 좀 더 분명하게 꽃의 종류를 알 수 있을 텐데 사진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신문 지면만 존재하니 설명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백년 사진’을 연재하면서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100년 전 사진을 소개하면서 신문 지면에 실린 사진만 보여 드리고, 원본 사진을 못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원본 사진을 구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 전쟁 때문입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 때 서울에 있던 신문사 본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윤전기와 자료는 거의 서울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신문사는 북한군의 타겟이 되었고, 자료는 모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이 가정과 관청에 배달된 신문이 있어서 신문사 직원 또는 독자에 의해 모두 수집 정리되어 1920년 창간호부터 현재까지 모두 디지털 파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 소개할 사진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일본 도쿄 노동절 행사 기사 옆에 창경원 봄꽃 사진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의도를 가진 편집으로 보입니다. 빼앗긴 고궁에 봄소식이 왔다는 편집자의 애상(哀傷)이 느껴집니다. 이런 정치적인 해석 말고 오늘 생각해 본 얘기꺼리는 ‘왜 신문 사진에는 꼭 사람이 들어갈까?’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봄꽃 아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찍은 게 아니라 봄꽃 옆에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 찍었거나 사람이 있는 가지를 찾아서 찍었을 겁니다.  정답은 아니지만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는 거의 모든 경우, 사람이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지만, 기본은 그렇다는 뜻입니다. 작품 활동을 하는 사진작가의 경우 사람을 빼고 사진 찍는 경우가 흔하지만 신문에 사진을 게재하는 사진기자들은 유별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찍을 때도, 안내문을 소개할 때도, 기념주화가 출시되었다는 것을 알릴 때도 배경 또는 주변에 사람이라는 소재가 포함되게 찍습니다. ▶사진기자들은 자기가 찍어 온 사진을 마감했을 때 동료나 선배가 ‘작가냐?’라고 물으면  긴장합니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주로 달력에 나오는 사진처럼 풍경 그 자체만을 찍어 왔을 때 그런 반응이 많습니다. 제가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25년 전에는 분명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문 사진의 기본에는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고 도제식으로  배웠습니다. ‘왜 작가들은 그냥 꽃만 찍기도 하는데 사진기자들을 사람을 넣어야 하는 걸라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진가는 현장에 있기 때문에 사진의 소재인 건물이나 풍경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그 크기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사무실이나 집에서 보고 있는 독자들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 소재가 미니어쳐 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의 신체 크기와 대비해 피사체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진실성을 강화시켜주는 요소로 사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3D나 일러스트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그린 가상의 건물 투시도와 사진을 확실하게 구분시키는 요소가 사람이기도 합니다.▶그 다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면 환경과 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들어간 풍경사진과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은 풍경 사진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잘 설명하는 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오정호 교수가 기획해 펴낸 [대중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입니다. 2015년 7월 일본 나가사키 앞 하시마(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이 이뤄진 공간이어서 우리 정부는 하시마의 등재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 근대화 산업기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지하탄광에서 강제노역으로 죽은 일본과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 역사에서 빠진 것이죠.  “많은 억울한 영혼이 떠도는 공간이지만 인터넷상에서 존재하는 하시마의 이미지들은 폐허의 공간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공포의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군함도 사진에는 사람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사람이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이런 숭고미가 가미된 이미지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도 빨리 전달된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가’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이곳에 관광 오고 싶다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하시마가 강제노력의 지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뒤로 밀린다. ”(오정호, [대중유혹의 기술] 179쪽)▶ 만약 창경원 봄꽃 사진에서 사진 아래 흰 한복을 입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없다면 그냥 아름다운 꽃 사진으로 100년 후의 독자인 저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지만 예닐곱의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함께 보임으로써, 당시의 일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들이 겪었을 봄의 환희와 함께,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강요받고 불안해했던 식민시대의 아픔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신문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는 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편안한 주말되세요.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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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에 딸린 기자의 이름 그리고 보상[청계천 옆 사진관]

    ▶ 요즘 신문에 실리는 기사나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바이라인(by-line) 또는 크레디트(credit)라고 합니다. 김규회·이재근의 책 《신문과 저작권》(서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 위원회)에 따르면 “‘OOO 기자’라고 표시한 것은 기자가 업무상 작성한 것으로서, 그 자료의 출처와 신빙성 그리고 작성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업무분담 표시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는 기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기사가 나열되고 사진이 실릴 뿐, 누가 기사를 썼는지 누가 찍은 사진인지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기사와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경상북도 포항에서 배 한 척이 전복되어 어부 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파도에 찢겨진 배가 강가에 뒤집힌 채로 서 있습니다. 1923년 4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포항에 우 복천선-19일 오전 풍랑으로 인하야 한 명이 빠져 죽고 다섯명 구원.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발전>19일 오전 10시20분경에 포항면 학산동에 있는 대전조의 어부 5명과 그 동리 38번지 신상룡이가 종선을 타고 학산동으로부터 향도로 향하여 형산강의 어구를 건너갈 때에 풍랑이 심하여 배가 엎어져서 대전조의 5명은 구조되고 신상룡은 헤엄을 칠 줄 모름으로 마침내 빠져죽었는데 이 급보를 접한 경찰대는 수 척의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여 시체를 수색 중이나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고 신상룡의 부모형제는 강변에 모여서 미칠 듯이 야단을 치는 광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으며 강물은 비로인하여 사오척이나 늘었고 폭풍으로 인하여 물살은 보통 때보다 석자나 높은데 형산강은 깊이가 삼십척 넓이가 삼십간 가량의 적은 강 이더라(19일 오후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특전) ▶ 기사의 제목에서 특파원이 기사를 보냈다며 이름을 언급했는데 기사 끝 부분에서도 또 특파원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점입니다. ‘발전’ 또는 ‘특전’ 모두 기사 또는 사진을 멀리서 서울로 보냈다는 표현입니다. 6명의 어부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전복했는데 5명은 경찰에 의해 구조되고 1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인데, 당시로서는 아주 큰 뉴스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너무 크게 다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옆의 기사를 읽어보니 사진이 찍힌 19일 이전인 4월 15일에 포항에는 폭풍우로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해변가에 즐비한 시체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기자가 급히 내려간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대참사 현장 사진이 아닌 다른 사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스 밸류는 며칠 전 일어난 대참사가 크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포항에서 일어난 재난이라 기자들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현장이 육지에서 떨어진 바다 한 복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다른 배가 육지 가까이서 난파되어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신문에 실린 것으로 이해됩니다. 비록 대참사 현장을 기록한 사진은 아니지만, 이틀 전 발생한 사건을 48시간이 되지 않은 시간에 취재하고 사진촬영까지 해 지면에 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의 기준 말고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로서는 대단히 많은 역량을 투입해 뉴스를 수집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교통편이 좋지도 않았던 시절, 서울에서 포항까지 기자들이 내려가 사진까지 서울로 올려 보냈다는 점에 주목해 볼 만합니다. 지금이야 사진을 찍는 순간 서울 본사에 있는 편집자들이 사진을 받아볼 수 있고, 바로 인터넷에 띄울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아주 힘든 과정이었을 겁니다. 사진 전송기가 있었을 리는 없으니 인편 또는 차편으로 서울로 필름을 올려보내 현상하고, 인화한 후에야 신문에 프린트할 수 있었을 겁니다. 19일에 일어난 일을 21일자 신문에 사진으로 실었다는 건 굉장히 빠르게 보도한 것이고 그만큼 현장에 대한 신문사 내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는 뜻일 겁니다. ▶100년 전 포항 사고 현장을 맡았던 기자는 누구일까요? 현장 취재를 맡은 기자의 이름은 설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아일보 사사를 살펴보니 설의식 기자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편집주간을 지낸 소오 설의식은 1922년 동아일보에 입사, 일장기 말소사건과 1940년 강제폐간 시기를 제외하고 1947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청·장년기를 동아에 몸바친 ‘동아맨’이었다.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설의식은 2년7개월 만에 사회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동경특파원, 편집국장대리를 거쳐 1935년 편집국장에 오른다…(중략)이처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한 그였지만 일장기말소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편집국장 취임 1년 남짓만인 1936년 8월이었다. 언론계를 떠난 소오는 광산일에 종사하면서 단파라디오를 통해 얻은 일제의 전황과 시국변천 정보를 몰래 송진우에게 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동아일보가 해방후 복간되자 설의식은 다시 주간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9년만이었다. 1945년 12월1일자에 실린 중간사(重刊辭) ‘主旨를 宣明함’의 집필자는 막 복직한 ‘평생 동아맨’ 설의식이었다.”▶ 1922년에 기자가 되었으니 포항 사고 현장에 간 것은 2년차 때의 일이네요. 설의식 기자가 1900년생이라는 기록도 있고 1901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20대 초반의 신참 기자가 수천 명이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현장에 파견되어 취재를 했습니다. 재난 현장을 직접 보고 기록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합니다. 100년 전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신문사에서는 그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큰’ 지면으로 다뤄 독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사랑하고 기자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았던 젊은 기자는 지면으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누군가 인생을 걸었던 신문 지면을 또 다른 누군가 100년이 지난 후에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쇄매체의 장점과 함께 무거운 책임도 느낍니다. 영원히 남을 지면이기에 그 당시 그 분도 엄청 애를 쓰셨을 겁니다. ▶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설의식 기자였을까요? 사진기자인 제가 볼 때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사진기자라는 명칭도 없었고 사진을 기술의 영역으로 봤기 때문에 신문에 사진 찍은 사람의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글을 쓰다보니 자꾸 가능성만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는 죄송합니다만 아직 정확한 고증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확실한 사실이 정리되면 꼭 공유드리겠습니다). 사진의 깔끔한 구도와 정확한 노출값 계산 등을 고려할 때 저 사진은 전문가가 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20대 초반의 취재기자가 저 정도의 사진 기술을 구사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취재기자의 바이라인은 명확하게 들어갔지만, 재난 현장을 촬영한 사진가의 이름은 지면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혹시 설의식 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 그는 글과 사진 모두 완벽한, 천재 기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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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 신세계면세점, ‘폐지 수집 노인도 돕고, 장애 예술인도 돕고’

    신세계면세점이 지구의 날과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을 맞아 임직원들이 직접 만든 ‘친환경 페이퍼 캔버스’를 장애예술단체에 기증한다. 이번 활동은 폐지수집 어르신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러블리페이퍼’와 함께했다. 임직원들은 재활용 폐지 키트(KIT)를 활용해 장애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캔버스를 만들었다.신세계면세점은 이 친환경 페이퍼 캔버스 총 500개를 밝은방, 세계예술치료협회(WATA), 밀알복지재단 등 3개 장애예술단체에 기부한다.특히 밝은방은 발달장애 및 정신장애 창작자들로 구성된 아티스트 그룹으로, 작년 12월 신세계면세점이 방송인 전현무와 함께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기부금을 전달한 바 있다. 이외 세계예술치료협회는 장애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으며, 밀알복지재단은 발달장애인 예술단 ‘브릿지온 아르떼’를 운영하고 있다.신세계면세점 관계자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과, 22일 지구의날을 기념하며 임직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더욱 뜻깊은 캔버스 제작을 진행했다.” 라며, “앞으로도 신세계면세점은 작은 노력이지만 소외계층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들을 계속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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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따라한 앵글일까? 몰래카메라였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지난 주였던 4월 7일 토요일에 올렸던 포스팅 “첫 눈, 첫사랑, 첫 꽃, 첫 낙엽… 멋있어도 먼저 나와야 찍혀서 보도된다. [백년사진 No. 13]”에 달린 댓글 중에서 흥미로운 분석이 있어서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kore**** 아이디로 접속하신 분이 남기셨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진을 찍히면/영혼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서 사진 찍히는걸 결사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초상권 정도가 아니라 영혼권 이었던 것이죠/요즘 초상귄세태에 대해서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그런지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얼마전만해도 신문이나 잡지에 본인사진이 실리면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는 분위기였는데/얼굴로 돈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삭막한세상 만드는데 일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네요/살다보니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분간이 어렵네요/스마트해질수록 피곤해지는 세상입니다▶요즘 제가 제일 관심이 많고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해결하고 싶은 숙제처럼 생각하는 게 사실 초상권입니다. 검찰에 출두하는 피의자에 대한 인권보호차원에서 시작된 논의가 어느새 일반 시민 및 거리의 대중들에까지 확대되다보니 많은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서 이제 시민들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얼굴만이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모르지만 한국의 신문 사진과 방송화면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갈라파고스 섬’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신 사진기자를 비롯해 외국 사진기자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모자이크를 할 수 있으며, 모자이크를 해야 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하고 세상에 사진을 보여줍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모자이크 사진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 기록과 인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황금비율을 만들고 싶습니다. ▶1923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사진설명이 따로 없이 한 줄짜리 제목과 부제목만이 사진에 붙어 있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빨래터가 있었나 봅니다. 봄비에 미뤄놨던 빨래감을 들고 나와 함께 빨래를 하는 모습을 찍을 사진입니다. 도시 풍경이라고 할 만한 내용입니다. 서울 장충동에 살지 않던 100년 전 시민들이나 시간이 지난 오늘날 독자들이 보면 재미있는 풍경입니다. 그러니 많지도 않은 신문 지면에 크게 자리 잡고 뉴스 대접을 받았겠지요.▶이 사진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어쩌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주인공이 없는, 아니면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주인공인 사진이 한국에는 꽤 많습니다. 단체사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이 줄을 맞춰 서 있는 사진에서, 맨 앞줄 맨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옆과 그 뒤, 그리고 화면의 맨 끝에 위치한 사람도 같은 크기와 같은 포즈로 서 있습니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아무도 아주 드러나지 않는 평등한 사진입니다. 저는 ‘봄비 개인 후의 장충단공원 빨래터’ 사진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가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빨래터에 모인 7~8명의 아낙네 중에는 가장 포토제닉하거나 표정이 살아 있는 인물이 있었을 겁니다. 그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나머지 인물들을 부수적인 배경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촬영법도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어, 미국 신문이라면 아마 그렇게 촬영했을 겁니다. ▶한국의 사진이 서양의 사진과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앵글에서 보면 이런 측면 있습니다. 강약중강약이 덜 한, 평평한 원근법. 설명적이고 맥락이 잘 드러나는 구성 말입니다. 저는 이런 한국과 서양의 앵글 차이가 회화에서 존재하는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신문 사진도 한국 회화의 영향을 받아왔고,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도록 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문화란 아이디어, 가치, 신념, 관습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의존하게 됩니다.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은 그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며”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주인공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고, 맥락을 잘 보여줘야 하다보니 선택한 앵글이 ‘부감(俯瞰)’입니다. 사람도 잘 보이고,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환경도 한 장의 사진에 잘 보이도록 카메라가 피사체 위에 위치하는 앵글이죠. 이런 앵글은 한국의 그림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박수근의 유명한 작품 ‘빨래터’에서도 저는 이 사진과 같은 앵글을 보았습니다. 카메라맨이나 화가가 이미지 속 인물과 같은 눈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또는 언덕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앵글 말입니다. ▶ 궁금한 점은, 사진 속 아낙네들은 카메라맨이 저 위 어딘가에서 촬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을까요? 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 것이었을까요, 그러면 몰래카메라인가요? 아니면 연출 사진이었을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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