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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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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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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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상한 북한 사진… 모자이크 처리가 늘고 있다[청계천 옆 사진관]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신문사진, 보도사진이라고 부르고 그 과정을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이라고 부른다. 북한 신문에도 당연히 사진이 실린다. 그런데 북한 신문에 실리는 사진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본다. 신문사진이라는 표현은 가능할 것 같다. 보도사진이라는 표현과 포토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가능할까?선전선동사진, 프로파간다 사진, 홍보사진이라고 치부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게 맞는 걸까? 신문사 사진기자는 북한에서 릴리즈하는 수많은 사진을 본다.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는 남북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이기 때문에 유심히 보게 되며 필요하면 신문이나 인터넷에 보도한다. 미국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AP통신이 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고 운영하고 있지만 중요한 뉴스 현장은 지켜볼 수 없다. 그래서 김정은이 미사일이나 위성 발사를 참관하는 사진은 북한 공무원들이 촬영한 사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미국 언론은 사진의 설명에 “이 사진은 독립적인 언론이 아닌 관영 언론이 촬영한 것입니다”라는 단서를 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북한이 제공하는 사진에서 최근 이상한 현상 하나가 반복되고 있다. ‘모자이크 사진’ 이다. 사진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이나 소재를 포토샵으로 뿌옇게 처리한 채 제공하는 방식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이 작년 2023년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쇼잉’을 즐기는 김정은과 그와 함께 사진에 등장하는 것이 영광으로 간주되는 북한 체제에서 이례적이다.▶ 우리나라의 기준에서 보면, 모자이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신문부터 꾸준히 북한 신문을 살펴본 기자의 눈에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다. 미국 AP통신의 입장에서도 북한의 모자이크 사진은 특수한 형식의 사진이 분명하다. 합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모자이크해서 제공한 사진을 AP통신은 전 세계로 전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AP 통신이 아닌 북한 노동신문의 PDF 파일에서 이미지를 잘라내서 제공하는 국내 언론을 통해서 제공 받을 뿐이다. ▶북한은 2월 1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신형 240mm 방사포탄을 개발하고 성능 점검을 위한 사격 시험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방사포는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한국 수도권 타격을 위한 무기 체계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중앙통신이 보여준 사진에는 포의 앞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 내부의 주민들과 간부들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 지면에는 신형 방사포의 사진을 바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연합뉴스 등을 통해 공개되는 조선중앙통신에만 사진을 공개했고, 그나마 포의 앞부분은 제대로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대외용 퍼포먼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국제 스포츠 대회 중계 화면에서 코카콜라 등의 상업 광고를 뿌옇게 처리하거나, 한국의 촛불시위 장면에서 광화문 높은 빌딩을 안보이도록 처리하는 것과 달리 2023년부터 1년째 발견되는 모자이크 사진의 공통점은 ‘군사·무기 분야’ 사진이다. 북한이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 체계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사진을 통해 보여주면서, 실무 개발자의 얼굴이나 실제 무기의 일부분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사진기자와 편집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시간이다. 사진은 위험한 도구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지만, 자칫 적들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미사일과 위성 개발에 역할을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줄 경우,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고, 무기의 디테일을 보여줄 경우 전력을 노출시킬 수도 있다. 미제국주의라는 구호판은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할 수도 있다. 한국과만 대립을 해도 북한 내부적으로는 충분하니 그 부분은 안 보이게 처리하자. ▶지난 10여 개월 동안 북한이 이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자이크 사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잘 보여야 하는 시대이긴 하다. 북한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최고지도자의 사진이 잘 나오도록 최대의 노력을 한다. 앞에서 언급한, 2024년 1월 10일 군수공장 방문 사진의 예를 들어보자. 사진기자가 볼 때 군수공장의 내부는 비현실적으로 정갈하고, 조명 상태는 일반적인 공장 현장 조명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트럭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김정은의 얼굴은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스팟 조명 형식이 비추고 있었다. 잘 보여주기 위한 장치가 고려된 것이다. 공장인지, 쇼룸인지 어떤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외부 세계가 관찰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릴 것은 확실하게 가리기 시작했다. 안 보여줌으로써 정치를 하는 북한 사진. 우리는 그 현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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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중·고졸 학력 검정고시 접수 시작

    올해 초·중·고졸 학력 검정고시에 응시하는 수험생과 대리인들이 원서 접수 첫날인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공업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접수처에서 서류를 제출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16일까지 온라인으로, 19일까지 현장에서 검정고시 원서를 접수한다. 시험은 4월 6일 치러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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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의대 도전!”… 의대 정원 확대에 관심 몰린 입시설명회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메가스터디학원 의약학전문관에서 열린 ‘의대 증원에 따른 입시 판도 분석 설명회’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2025학년도 의대 입시 전략을 듣고 있다. 이달 6일 정부의 의대 입학 정원 확대 발표 후 의대 진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설명회에 수험생과 학부모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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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발 산책’ 어때요?… 안양천에 황톳길 조성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안양천 일대에 있는 황톳길에서 시민들이 맨발로 산책하고 있다. 영등포구는 건강을 위해 맨발로 걷는 시민이 늘자 최근 길이 600m 규모의 황톳길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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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로봇 젖소

    도심 골목에 로봇 젖소가 등장했습니다. 이 일대가 조선시대 최대 목축지였다는 걸 로봇 소는 알까요?―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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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동의 시대, 얼굴이 기록 되지 않은 시대[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우선 지난주에 올렸던 백년사진 No. 46 ‘사진은 어디서 배우는 게 좋을까? 백년 전의 고민’의 포스팅에서 오프라인 수업 말고 ‘통신 수업’이라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강과산’이라는 아이디로 접속하신 분께서 그 당시 통신은 우편을 뜻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전화는 전기통신이라고 표현했을거라고 하시면서요. 맞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주에 고른 사진은 서울의 비, 서울의 봄 등 날씨 사진입니다. 100년 전 1주일 치 신문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진이 없었던 한 주였습니다. 2월 8일자 신문입니다.2월 10일자 신문입니다.얼음이 녹은 한강 나루터에서 봄을 맞아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표모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으신가요? 표모라는 표현을 옛날 신문 DB에서 찾아보니, 1964년 1월 5일자 동아일보에도 표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三冬에 봄철 같은 날씨가 연일 계속 三南지방에선 철아닌화신(花信)마저들려오고 漢江은 채 얼기도 전에 녹아내려 표모(漂母)들이 밀려 나왔다”.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지만 맥락으로 보면, 빨래하는 여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정말 뉴스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일제 치하라는 시대 상황 때문에 사진을 실을 수 없었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날씨 사진 때문에 자리를 잡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일제 강점기. 신문에서는 오늘날처럼 유명인의 얼굴이 별로 실리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관료 정치인들 얼굴이나 민족 지도자의 얼굴이나 어느 쪽도 활동 모습이 실리지 않았습니다. 신문이 유명인에 대해 다루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상상을 해봅니다. 우선 일제라고 하는 현실 권력을 실제로 운영하던 일본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나 내러티브가 있었을텐데 신문은 그들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이 문화정책이라는 회유책을 선택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신문사의 소극적 저항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고 우리 민족에게 의미 있는 인물들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역사가 기록하고 기억하는 민족지도자들이 1920년대에 분명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들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작년부터 제가 봤던 1923년도 신문에서 그나마 기억나는 얼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과 지방의 재산을 팔고 서울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남성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의 정치 지도자 등 국제적인 인물들의 얼굴 사진은 꽤 크게 실렸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권력이 싫어하는 것을 보여주기엔 신문사와 국민들의 힘이 약했을 테니까요. 권력이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같이 보여주지 않고 있는 신문.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사진이 날씨와 풍경 사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그러고 보니 신문 사진이라는 게 한 시대, 한 사회의 자화상이자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식민시대라는 정체성, 독재시대라는 정체성, 민주사회라는 정체성 같은 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보고 있는, 신문 속 얼굴들이 시간이 지나면 이 시대에만 통용되는 방법이고 빈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신문 지면에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사망한 시민들의 가족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이 실렸습니다. 민주화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해지면서 이제는 귀성열차를 타러 가는 시민의 얼굴을 지면에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정치인의 모습은 매일매일 신문 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0년 전에는 1주일 치 신문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었습니다. ▶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이 위험한 시대가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얼굴들은 우리 시대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설 명절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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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살얼음 낀 수면 아래 잉어들이 붉은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영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다시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요?―부산 영도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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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어디서 배우는 게 좋을까? 백 년 전의 고민 [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보도 사진이 아니고 광고지면입니다. 1924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2면 하단에 광고가 여러 개 실렸습니다. 왼쪽부터 염색원료 자재판매, 전기치료원 소개, 사진학원 광고, 금산인삼조합 홍보, 도모예 호모 총판 등의 광고입니다. 맨 오른쪽 도모예 호모총판은 고무신을 메인 이미지로 사용했네요. 검색해보니 호모(護謨)는 고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gomme’를 소리나는대로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에 호모라는 표현 대신에 고무라는 원어 발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명도 검색이 됩니다. 고무가 한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여러 광고 중 백년사진을 통해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광고는 사진학원 광고입니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어떻게 보급되고 있었는지, 사진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광고입니다. 삼각대 위에 설치되어 있을 대형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보기 위해 암막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카메라맨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함께 광고 문구가 길게 쓰여 있습니다. 사진술 속성 교수실지 통신 속성실지과 통신과 공히 1개월간 속성으로 양성하여 사진사 됨을 보증함. 신입 제 규칙서 송증함. 원산부본정 조선사진전문학원강습 중에는 사진기 무료대부하는 특전이 있어 실습의 편리를 줌. 본원 졸업생으로 각지에서 단독개업자 오십여명인 데 모두 상당한 수익을 득하며 방금 강습생도 십여 명이 있어 나날이 발전의 영역에 도달하오니 제위는 주저치 말고 지금 속히 신입하여 만시지탄이 없게 하심을 희망함.지금의 표현으로 하자면, “사진기술을 속성으로 알려드립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속성. 오프라인과정과 온라인 과정 모두 1개월간 양성하여 사진사가 되는 것을 보증합니다. 신입생에게는 매뉴얼북을 제공합니다. 조선사진 전문학원.강습 기간 중에는 카메라를 무상으로 빌려드리는 특전이 있으니 실습은 편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본 학원을 졸업해서 사진관을 개업한 사람이 이미 50명이 넘는데 모두 고수익을 얻고 있습니다. 현재 수강생이 10여 명 있으며 계속 발전할 블루오션 시장이니 여러분께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빨리 신청하셔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아, 100년 전 서울에는 조선사진전문학원이 있어서 사진관을 개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사진학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카메라와 익숙한 세대에게 단기속성 과정으로 카메라 기술을 가르친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사업 모델이긴 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 사진학원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군대 사진병으로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속성으로 사진을 가르친다는 학원이 서울 충정로에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 광고에서 제가 주목했던 점은 ‘통신과’라고 표현된 지금의 온라인 강의가 100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의실에 직접 오지 않고 사진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었는지, 게다가 전화로 수업을 했다면 통신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능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내친김에 1920년대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술’에 대한 기사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소개하고 싶습니다. 1928년 9월 26일 기사입니다. 그때로부터 35년 전에 촬영된 서울 시내 전체 모습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한반도에 사진이 도입된 시기를 1888년경으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한성순보 1884년 3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은 김용원 씨가 개설한 촬영국이라는 상호의 사진관이 있었습니다. [最初로寫眞박힌 京城市街全圖 – 성곽이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 있고 초가와 양옥집은 별로 없다“조선에 사진술이 들어오기는 대개 사십년 전, 1888년 경인 듯 하다는데 수입되던 당시에는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편으로 무식한 사람들은 사진을 박히면 생면을 뺏어 간다하여, ‘렌즈’를 보면 도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하면 풍경사진도 마음대로 박지 못하였으므로 경성 시가의 사진도 부분적으로 박은 것은 있으나 전체 경성 시내의 사진을 볼 수 없었는데 경성부 부사편찬계에서는 최근에 모 일본인의 집으로부터 당시에 비밀리에 박아 두었던 경성 전경 사진을 구해 보관 중인데, 사진은 왜성대(倭城臺) 부근에서 박은 것인 듯하다하며 아직 성곽(城郭)이 튼튼히 남아 있고 지금과 같은 양옥도 보이지 않아 연대는 대략 35년 전으로 경성을 사진으로 박은 것은 이것이 최초인 듯하다 한다(사진은 35년 전의 대경성)▶ 여성을 대상으로 사진기술을 가르치는 강좌에 대한 기사도 있습니다. 1926년 4월 27일 기사입니다. 원문을 제가 현재의 표현으로 조금 바꾸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죠. 화학원 안에 여자 사진부 설립 – 이는 여자에게 적당한 직업시내 안국동(安國洞) 근화녀학교(槿花女學校)에서는 시대 요구에 의하여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여자사진과(女子寫眞科)를 동교 안에 특설하고 지명의 기술자를 초빙하여 보통 학교 6학년 졸업 정도의 학생 50명을 모집하여 3개월 동안 가르친 뒤에 특히 연구과를 두어 보통과로 하여금 더욱 충실히 가르치기로 되어 한창 준비 중이라는데 오는 5월 10일까지 일반의 입학원서를 받고 이튿날인 11일부터 개학하리라는 바 이는 적어도 현재의 조선 여자들이 부르짓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확장함에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필요한 이상 그 능력을 얻고자 함에는 무엇보다 실제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차츰 조선에서도 직업 부인들이 생기는 만큼, 직업 찾는 여성들도 많음으로 그에 응하여 무엇보다 여자에게는 합당한 사진술을 택하여 일반에게 주고자 그와 같이 설치하게 된 것이라더라.▶아래 기사도 흥미롭습니다. 서울시내 사진작가들의 모임에서 봄을 맞아 초보자들에게 사진 강습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1929년 2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寫眞師協會講習시내 경성사진사협회(京城寫眞師協會)에서는 신춘사업으로 견습생을 위하여 사진 강습원(講習院)을 설치하고 오는 이월말일부터 시내 관철동 조선사진관(朝鮮寫眞舘)에서 사진술을 가르친다는바 강사는 신락균(申樂均)리완근(李完根)씨 등 오씨라더라.여기서 등장하는 신낙균 씨는 나중에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되어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사진부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박주석 교수가 집필한 “한국사진사”(문학동네, 2021)에 정리된 신낙균의 일대기를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899년 무관 종2품이었던 부친 신택희 공의 차남으로 출생. 부친이 을사조약 체결로 관직을 그만두고 경기 안성으로 낙향.인천공립상업학교에서 상업 실무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낙향, 결혼 후 서울로 자리를 옮겨 ‘경성관립공업학교 염직과’를 1918년에 졸업. 이 과정에서 사진화학 즉, 현상과 인화를 정밀하게 습득.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안성에서 벌어진 3.29만세운동 사건에 가담해 수배 상태가 됨. 도피 도중 아마추어 사진가이던 매부 정욱진으로부터 사진술을 접함. 1922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정칙학교에서 1년간 영어 전공, 이후 동양대학교 문화학과에 재입학하여 2년간 문화사와 이론 공부. 1926년 동경사진전문학교 입학. 1927년 졸업 후 6년 만에 귀국. 그의 나이 28세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YMCA) 초빙 사진과 교수로 취임. 당시 YMCA는 영어과, 일어과, 목공과, 철공과, 기계과, 염직과, 사진과 등의 실무교육을 하고 있었음. 1926년 경성사진사협회 결성. 1934년 동아일보 입사. 1933년 신설한 동아일보 사진부(당시 사진과)에 1934년 입사. 초대 과장 최복순에 이어 2대 사진과장으로 취임.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주도로 일제에 체포. 사진기자 서영호에게 일장기 말소를 직접 지시하고, 사진 제판 과정에서 동판에 청산가리를 뿌려 일장기를 완전히 삭제하도록 함. 백운선, 서영호 등 사진부 후배 기자들과 함께 구속. 사진수정의 발안자로 알려진 운동부 기자 이길용, 화가 이상범, 사회부장 현진건, 기자 장용서, 잡지부장 최승만 등도 구속. 1937년 9월 동아일보 퇴사. 안성과 인천 등지에서 취직 및 사업. 1955년 수원북중학교 화학과 공민 교사로 근무 중 교정에서 뇌일혈로 사망▶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서 사진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려던 열정과 비즈니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사진기술에 관한 또 다른 역사가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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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명절 앞두고 여권 발급 급증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로구청에서 직원이 발급된 여권을 정리하고 있다. 겨울방학과 설 연휴 등으로 해외여행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최근 시민들의 여권 발급 신청이 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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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지워지지 않기를…

    누군가 눈 위에 그려놓은 마음. 반려견도 그 따뜻한 ‘반려’의 마음을 느꼈는지 밟지 않고 피해 가려나 봅니다.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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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도장을 사용했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서울역사박물관장(최병구)은 29일 2023년 서울미래유산 기록 사업의 결과를 묶은 조사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미래유산기록 사업은 2020년부터 근현대 시민들의 생활사를 주제별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번에 발간된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작업이며 그 전에 발간된 보고서는 ▴낙원떡집 ▴서울의 대장간 ▴서울의 이용원이었다. 서울역사발물관에서 작성한 보도자료와 참고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되,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을 추가해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도장 가게’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인장포는 말 그대로 인장을 제작하는 가게이다. 지금은 ‘컴퓨터 도장’이라고 불리는 기계 조각 인장이 등장했지만 그 전에는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깍아서 도장을 만들었었는데 그 작업을 했던 가게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한국의 인장은 크게 새보(璽寶), 관인(官印), 사인(私印)으로 구분된다. 개인이 사용하던 인장인 사인(私印)은 서화(書畫)의 낙관(落款)이나 서적의 장서인(藏書印) 정도에 그쳤다.인장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일본인의 경제활동을 합법적으로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경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4년에 「인간증명규칙」을 반포하며 강제 도입됐다. 국가차원에서 인감 사용을 강제하면서 인감 도장을 만드는 가게도 성업하게 된 것이다. ▶ 1974년에는 「국가기술자격법」의 시행으로 인장공예기능사(1급· 급·기능사보)자격시험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응시 수요 감소로 인해 2004년에 폐지됐다. 2000년대 들어 컴퓨터 인장 제작과 서명 거래가 일반화되고, 공인인증서 도입 등을 거치며 인장업은 줄곧 사양산업의 길을 걷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인장은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탯줄 도장’이나 ‘수제 도장’이라 불리는 캘리그래피 디자인 한글 인장이 대표적이다.▶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의 조사 결과, 서울에서 1950년대부터 활동해 온 오래된 인장포 5곳과 인장 명장들이 새삼 조명을 받았다. 박인당(博印堂), 거인당(巨印堂), 옥새당(玉璽堂),여원전인방(如原篆印房), 인예랑(印藝廊) 등 5곳이다. ▶보고서는 서울 인장포의 특성으로 첫째, 도시화 과정에서 손재주 있는 지방 사람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택한 업종 중에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생계 수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였는데 이 중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사장님’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업종이 인장업이었던 것이다. 책상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사한 서울의 인상포 5곳 모두 1950년대 이후 상경한 지망민이 운영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자를 공부했고 손재주를 무기로 서울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인장포 하는 사람들은 5·16 이후에 다 지방에서 온 거예요. 그때부터 서울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일이 많았으니까요. 반도호텔 근방이 다 회사였어요. 옛날에는 관공서에서 문서를 처리하는 데 사용하는 인장이 300~400종에 달했어요. 그래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죠. 인장을 다 손으로 새길 때니까 인쇄 기술자보다 인장 기술자가 훨씬 벌이가 좋았어요.” 유태흥(남, 1941년생, 거인당)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두 번째 특성으로는 유사 업종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서울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며 내 점포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장포는 다른 업종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인장 작업에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는 데 인장업에서는 이를 ‘겹살이’라 부른다. 특히 유사 업종인 인쇄소, 문구점 등의 한쪽 공간을 이용해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심에 있는 대형 문구점이나 창신동과 인현동의 인쇄소에는 ‘인장부’가 있었다.“1964년에 을지로5가에 있는 인쇄 가게 문 앞에 책상 하나 빌려서 독립을 했어요.”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가게에 책상 하나씩 빌려주고 자릿세를 받았어요. 우리 집에 많을 때는 조각사가한 5~6명 있었어요. 그래서 1970년대부터는 도장은 안 새기고 그냥 세 받으면서재료만 취급했죠.“ 박순옥(남, 1930년생, 영광인재사) 인터뷰▶서울 인장포의 세 번째 특징은 도시 발전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는 점이다. 서울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압축성장을 했다. 1970년대 강남개발이 본격화하기 이전 서울의 주요 시설과 기업체는 사대문 안쪽 지역에 밀집했다.당연히 그 시기 서울의 인장포는 대표적인 상점가인 종로와 충무로 일대에 자리했다. 이후구로공단, 여의도 개발 등 굵직한 도시 개발을 쫓아 인장포도 이동해 영업을 이어갔다.“내가 인장 배우면서 처음 했던 곳은 다동 58번지였어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다가 그 옆으로 옮기고, 또 옮기고 그랬죠. 또 구로공단 한일은행 바로 옆에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1977년에 대일사를 개업했어요. 거기서 2년 있다가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이 있는 중앙빌딩으로 옮겼죠. 1980년에 여의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풀밭이었어요.” 조규호(남, 1957년생, 한국인장협회 회장) 인터뷰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현대식 고층 건물과 넓은 도로를 건설하고,주차장과 공원을 만들어 도심을 현대화·고도화하는 ‘도심재개발’ 사업이 전개됐다.이에 따라 도심의 저층 고밀 건물의 상가를 임차한 인장포들은 도심재개발과 함께잦은 이전을 하며 부침을 겪었다.“지금 영풍문고 짓기 전에 그 앞에 가게들이 쭉 있었어요. 그중 하나를 보증금 50만 원에 얻었어요. 공간은 한 평도 안 됐어요. 손님 하나 들어오면 꽉 차는 가게였어요. 그렇게 1년 반쯤 했는데 빌딩 짓는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50만 원에 위로비 150만 원을 받아서 구몬빌딩에 480만 원짜리 가게를 얻었어요. 거기서 한 10년 했죠. 그런데 또 빌딩 짓는다고 비워달라는 거예요.” 박호영(남, 1938년생, 박인당) 인터뷰▶ 서울역사박물관 최병구 관장은 “인장은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일부 국가의 특수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조각(手彫刻) 인장의 전승 단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인장 세공 기술과 도구를 현장 조사 방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해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 서 울 의 인 장 포 』 조 사 보 고 서 는 서 울 역 사 박 물 관 누 리 집(http://museum.seoul.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구입은 서울책방(https://store.seoul.go.kr) 또는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가능하다. (가격 14,000원, 문의 02-739-7033).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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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종이팩 다오, 새 화장지 줄게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5동 주민센터에서 폐종이팩을 반납한 주민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받아 가고 있다. 영등포구는 재활용 활성화를 위해 폐건전지 20개를 모아 오면 새 건전지 2개로, 우유팩 등을 헹궈서 건조해 가져오면 3kg당 두루마리 화장지 1개로 교환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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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유는 나를 봤으면 좋겠고, 그는 다른 곳을 보았으면…권력이 나를 본다는 것[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두 장의 인물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여성 두 명이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입니다. 제목은 ‘사회봉사하는 두 여자’입니다.기사를 읽어보니 유아사망율이 높은 조선의 상황을 걱정해 미국 감리교가 파견한 미국인 여의사 ‘로선복’(왼쪽)씨와 조선인 산파 ‘한신광’씨가 무료 진료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는 스토리입니다.다음 사진을 보겠습니다. 콧수염의 백인 남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제목을 보니 ‘영국 내각 조직의 대명을 수락한 노동당 수령 맥도날드씨’입니다. 영국 런던 발 기사인데, 로동당 총재 람제 맥도날드씨가 차기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되었다는 뉴스입니다. ▶우선, 사진 속 모델들이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장은 봉사의 따뜻한 온도가 전달되는 반면, 남성의 사진은 지난주 한반도를 강타했던 한파만큼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당시 카메라 기술로도 충분히 웃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었네요. 저 남성이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좀 따뜻했을까요?▶100년이 지난 요즈음 출근하는 지하철역에는 4월에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예비후보들이 명함을 들고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빠듯한 출근 시간이라 일단 명함을 건성으로 받은 후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들여다보게 됩니다. 후보자들 시선의 방향이 어떤가요? 여러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아니면 허공이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나요?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은 강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웃음도 차가운 표정도 모두 정면일 경우 강하게 뇌리에 남습니다. 몇 년 전 시리아 폭격으로 상처를 입었던 어린아이가 앰블란스 의자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이 지구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프리카 구호 단체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도 우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국회의원에 나오려는 후보들은 거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인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감정을 건드리는 정면 샷은 때로는 보는 사람을 거북하게 하기도 합니다. 특히 광고에서 시선을 끌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는 ‘3B’(Beauty, Baby, Beast – 미인, 아기, 애완동물)가 아닐 경우 보는 사람이 불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문에 실리는 인물 사진 중에서 정면을 바로 보는 사진은 할 얘기가 분명한 인터뷰 대상자이거나 본인이 만든 제품을 광고하거나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정면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 인사를 하러 세상에 나왔거나 아니면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낯설고 나이 많은 남성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때로는 위협을 느끼기도 할 겁니다. 그래서 다선 의원이나 인지도가 높은 인물들의 경우, 명함이나 포스터 속에서 이상향을 바라보듯이 시선 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카메라 밖을 바라봅니다. ▶꼭 정면을 보는 사진을 명함이나 포스터에 사용해야 할 경우 혹은, 그리고 본인이 3B의 요소가 주는 매력과 멀다고 느낄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요? 최소한 2024년 대한민국에서는 웃어야 할 것 같습니다. 100년 전 영국 노동당 당수 같은 무표정한 표정은 선거 필패의 요소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아무래도 지금은 유권자 우세 시장 아니겠습니까?▶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신문에 실리는 사진이 찍힐 때도 시선 처리를 잘합니다. 얼굴은 정면이지만 묘하게 눈은 독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잘 보면,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이 아닙니다. 어쩌다 카메라를 본다고 하더라도 정면에 있는 사회자를 보거나 누군가와 소통하는 시선이지 카메라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는 시선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나는 숨기는 게 없다, 정직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60년도 미국 대통령 토론회에서 케네디는 닉슨에 비해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응시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젊은 외모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줌으로써 승리했다는 고전적 증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대도 다르고 문화 배경이 다르다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김경율 비대위원 사진을 보면서 저는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당시 사진에 붙은 설명은 이랬습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케이터틀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시당 신년인사회에서 김경율 비대위원과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팔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성들. 두 사람의 시선은 뭔가를 강하게 말하고 있을 때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한 두 팔은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되었을 때처럼 승리의 순간에 어울립니다. 일반적인 행사 사진과는 거리가 있어 좀 더 로우키(low key)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서 독자를 바라보던 세 사람의 시선을 주제로 지금의 정치 사진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댓글로 의견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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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눈고양이

    요 며칠 한파 덕에 ‘눈고양이’가 장수하고 있네요. 오늘부터 추위가 누그러진다는데, 내일 또 볼 수 있을까요? ―서울 성동구 한양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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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삼 드시고 힘내세요”

    22일 오전 서울 중구의 전통문화 복합공간인 ‘한국의 집’에서 KGC인삼공사 정관장 모델들이 ‘힘내라는 말 대신 정관장’ 행사를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정관장은 28일까지 구매 금액대별로 ‘에브리타임 필름’ ‘청과세트’ ‘장수율지’ ‘한우세트’ 등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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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주인)님은 먼 곳에

    횡단보도 옆 전봇대에 주인 잃은 동전 지갑이 걸려 있습니다. 신호등이 여러 번 바뀌는데도 주인은 오질 않네요.―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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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내린 탑골 공원, 풍경인가 저항인가[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4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을 소개합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이 크게 서 있고 그 뒤로 누각이 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입니다. 서울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입니다. ▶ 100년 전 서울에 눈이 내리자 사진기자가 탑골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온 모양입니다. 관련된 기사는 별도로 없습니다. 가볍게 찍은 스케치 사진인가 봅니다. 설명은 아주 간결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 어제 탑골공원에서▶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진기자들은 눈이 내리면 주변 풍경 좋은 곳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어차피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을 텐데 굳이 사진을 찍어 지면에 게재합니다. 혹시 못 본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시간을 기록하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요? 사진기자들이 눈 스케치를 가는 장소는 다양합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대체로 회사 근처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주 잠깐 내리다 말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강원도에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으면 미리 자작나무 숲이나 대관령을 찾아가 기다립니다. 봄을 앞두고 눈이 내린다면 동백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보기도 합니다.▶저도 얼마 전 눈이 내린 다음 날 서울 남산에 다녀왔습니다. 정작 눈이 내리는 시간에는 사진이 별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큰 눈이 서울에 내리더라도 풍경 사진은 눈이 완전히 그친 후에 제대로 찍을 수 있습니다. 남산 순환로와 서울 타워를 오르내리며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왜 남산을 택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의 상징 같은 곳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우거진 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어 설경을 즐기는 시민들도 같이 사진에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풍경은 쓸쓸해 보이고 리얼리티도 떨어지기 때문에 인적이 있을 만한 곳을 선택합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도 설경 스케치에 잘 어울리는데 그런 곳들 역시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기도 하고 관람객도 사진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눈풍경에 어울리는 곳이 고궁이나 공원이라면, 폭설로 서울 시민들에게 불편이 초래된다면 강변북로 출근길이나 강남대로 퇴근길이 사진의 소재가 됩니다. 엉금엉금 눈을 뚫고 출퇴근해야 하는 하루가 그날의 뉴스 포인트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사진의 촬영 장소는 유행이 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신문과 방송 카메라가 자주 비추는 곳이 예전에는 그다지 자주 다뤄지지 않던 장소일 수도 있고, 반대로 예전에는 자주 등장했던 장소가 지금은 뜸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사진기자를 처음 시작했던 1990년대 말. 추운 날씨에 출근하는 시민들의 표정을 스케치하기 위해서 사진기자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에서 여의도로 넘어가는 다리였습니다. 그 촬영 포인트가 지금은 서울 광화문 사거리로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의교를 걸어서 출근하는 시민이 급격히 줄어 ‘그림이 안되는’ 풍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이 새로운 로케이션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100년 전 탑골 공원 설경 사진은 여러분이 보시기에 너무나 평범한 사진일 겁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선 시간적인 촉박함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문 편집을 총괄하는 부장이, 너무 답답하고 속 터지는 뉴스만 가득한 사회면에, 가슴이 시원한 사진이라도 한 장 넣자고 갑자기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요? 갑자기 취재 지시를 받은 사진기자가 마감시간에 임박해 촬영했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째 이유로 상상할 만한 점은, 지금이야 탑골 공원이 노인들의 휴식처 또는 노인 문제의 상징처럼 인식되지만 100년 전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특별한 장소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탑골 공원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조선왕조 때에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가 있던 곳을 1897년에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공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많은 문화공연행사와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 근대화의 가능성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사진이 찍히기 5년 남짓 전인 1919년 3월 1일. 이곳 탑골 공원에서 한 남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5천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독립을 외쳤었다고 합니다. 3.1만세운동의 발상지인 것입니다. 단순한 설경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의 정체성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서울에 갑자기 눈이 내린 17일 오후에 100년 전 저 사진 속 탑골 공원에 가봤습니다. 귀부 위의 비석과 누각이 그대로 보입니다. 신기했습니다. 다만 비석 주변에 누각이 하나 더 생겨 사진으로는 같은 모양은 아니었습니다. ▶문득, 한국 전쟁의 포화를 잘 견뎌내 준 문화재와 그 옆 아름드리나무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탑골 공원은 하늘에서 쏟아졌던 전쟁의 포탄에서 벗어났었나 봅니다.탑골 공원이라는 이름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원래 파고다 공원을 1990년대에 탑골 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상식과는 좀 다른 자료입니다.오늘은 100년 전 서울의 상징 중 한 곳이었던 탑골 공원의 설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댓글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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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 맞으며… 무료 급식 기다리는 노인들

    17일 오후 서울 지역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무료 급식을 받으려는 노인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이날 경기 포천시와 강원 철원군, 화천군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기상청은 강원 영동 지역에 18일 오후부터 19일까지 최고 15cm 이상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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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지만 강한 소화기로 전기차 화재 예방해요”

    15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공원 공영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소 앞에서 영등포구 관계자가 이곳에 비치된 소화기를 들어 보였다. 영등포구는 전기차 충전시설 26곳에 소화기 48대를 배치해 신속하게 차량 화재에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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