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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31일 23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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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제3차 이산가족방문단 북측후보자 명단 200명 가운데 형 성하(成河·74)씨가 포함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민하(金玟河·67)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연방 눈물을 닦아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김 부의장이 성하씨와 생이별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50년. “6·25전쟁 당시 고려대 상과에 재학 중이던 성하 형님이 실종된 데 이어 경북 상주로 시집갔던 누님(옥희·玉姬·73)과 김천중학교를 다니던 형(창하·昌河·69)과도 헤어졌다”고 김 부의장은 소개했다.
그는 “제가 어려서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 성하 형님께서 산골을 헤매며 약초를 구해주시고 한약방을 돌아다닐 정도로 형제애가 돈독했다”며 “60년대 형님께서 북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고 회고했다.
특히 김 부의장은 61년 5·16 직후 동향(경북 상주시)이자 성하씨와 잘 알고 지내던 ‘북한인사 황태성’을 숨겨줬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돼 반공법 위반 혐의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 부의장은 “당시 대구 경북 출신 중에 황태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데다 그가 어찌어찌 수소문해 내 서울집에 찾아와 다락방에 머물게 했던 것”이라며 “그때만 해도 나는 황태성이 월북했다 내려온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김 부의장은 성하씨 이야기와 ‘황태성사건’ 등 4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다가 “옥고를 치른 뒤 한번도 공식적으로는 성하 형님 얘기를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끝내 고개를 떨궜다.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대통령 특별수행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김 부의장은 “당시에는 일이 먼저라 형님 소식이 궁금해도 일절 물을 수 없었다”며 “이제야 속 시원히 형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 부의장은 이날 저녁 서울 중구 장충동 타워호텔에서 열린 평통자문회의 해외지역 회장단 초청만찬에 참석해 만취된 뒤 밤에 어머니를 찾아 통곡했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