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성학 선봉 조한혜정 교수 1화

  • 입력 2001년 1월 27일 14시 51분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53)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하는 지식인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조한교수는 한국 여성학 계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는 그동안 여성 문제 외에도 ‘반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등의 저술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꾸준히 파헤쳐 왔다.

조한교수의 실천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하나의 문화’라는 모임이다. 그녀가 이끄는 이 모임은 지난 10여 년 동안 정력적인 저술활동을 펼쳐 왔다.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여성 해방의 문학’ ‘지배 문화 남성 문화’ ‘새로 쓰는 성 이야기’ ‘주부, 그 막힘과 트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등 여성 관련 책 외에도 ‘누르는 교육 자라는 아이들’ ‘새로 쓰는 청소년 이야기’ 등의 책을 통해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탐구해 왔다.

▼소프트웨어의 빈곤▼

조한교수는 인터뷰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자신이 페미니즘운동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나서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세 차례 요청 끝에 성사된 인터뷰는 1월11일 오후 8시 서울 홍은동 조한교수의 집에서 진행됐다.

―한국 사회의 여권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하지만 지난해 UNDP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권한척도 순위가 세계 70개국 중 63위입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 여성운동의 현주소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어느 사회나 근대화가 진행되면 그에 걸맞은 지표가 나타나죠. 여자들이 사회에 얼마나 진출했는가도 그중 하나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근대화 수준은 아주 낮아요. 일상 삶에서 남녀 간 상호소통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외형은 발전했지만 내공을 쌓지 못한 결과예요. 하드웨어는 만들었는데 그 속을 채울 소프트웨어가 부족한 겁니다. 자생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된 서양은 그에 걸맞은 소프트웨어와 조직문화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조직문화만 만들었던 거죠. 남자들이 일하다가 필요할 때만 여자들을 차출했어요. 여자와 더불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 거죠. 또 같이 일을 해도 동료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보니 성희롱을 하게 돼요. 게다가 여자가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무지…. 여성운동의 핵심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성폭력 문제입니다. 강간에서부터 언어 폭력까지.”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여성들이 사회에 많이 진출했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습니까.

“진출하기는 했는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동원됐어요. 즉 서로 소통하는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동원되니까 부작용이 일어났죠. 남자들이 기대하는 여자 상에 맞춰야 하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죠. 이성 관계를 맺고 싶으면 다른 형태로 만나든가 해야 하는데 남자들은 그걸 구분을 못해요. 그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들을 맞은 거예요. 요즘 보면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이 왜 가해자인지도 모르잖아요.

서로 소통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전쟁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거죠. 그러다 보니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 여자가 지배하는 가정, 이렇게 두 군데서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직장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복수라는 말이 우습지만, 가정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을 못살게 구니까 여자한테 질린다는 얘기가 나오고요.”

―복수의 뜻을 좀 더 설명하신다면?

“예를 들어 가정에서 소외된 남자는 직장에서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어요. 반대로 가정에서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은 밖에서도 소통이 잘 되죠. 그게 안 되면 욕구불만이 쌓여 밖에 나가 성적 욕구를 풀기도 하고….”

조한교수는 소통의 부조화를 여성 문제의 중요한 원인으로 설명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 들어보셨죠? 남자들은 항상 도구적 합리적으로 소통하려 해요. 고민을 얘기하면 남자는 ‘말해봐. 들어줄게’ 하면서 해결사가 되려고 해요. 반면 여자는 상담하는 사람의 동료가 돼 ‘나도 그런 문제가 있었어’ 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서로 감정으로 통한 후 문제를 풀어 가죠. 이건 굉장히 다른 소통법이에요. 우리 사회에서는 부부도 굉장히 도구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요. 같이 놀고 같이 풀 수 있는 영역이 없어요. 하드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가 없는 사회, 관계가 없는 사회, 배려가 없는 사회예요. 이런 극도의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이 점이 페미니스트의 과제죠.”

그녀는 “소통이란 끊임없이 무엇을 만들어 가는 행위다. 소통이 없는 사람 관계라는 것은 끊임없는 소외의 재생산”이라며 소통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페미니즘의 배경은 산업화▼

―페미니즘 이론의 출발점이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것 아닙니까.

“보통 젠더는 ‘사회적 성’으로, 섹스는 ‘생물학적 성’으로 부르는데, 여성운동 초기 슬로건은 ‘남녀는 같다’는 것이었어요. 조선시대부터 남녀유별 교육을 받았던 우리는,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히 비교할 생각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산업사회가 되자 남녀가 같은 일을 하고 교육도 같이 받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여자들도 다 잘하거든요. 페미니즘 이론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거예요. 여자들이 ‘이젠 차별하지 마라’ ‘남녀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르게 길러졌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기 시작한 거죠. 기회를 균등하게 달라. 그것이 바로 1기 페미니즘의 핵심이에요.

2단계 페미니즘은 여자들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데서 출발해요. 여자가 의사가 된다? 그러면 어느새 의사의 사회적 가치가 떨어져요. 교사가 너무 좋아 열심히 공부해 교사가 돼보니 교사 가치가 떨어지고. 어느 직업이든 여자가 60∼70%를 차지하면 사회적 가치가 떨어져요. 이게 뭐냐. 이게 호락호락한 게임이 아니구나. 여성운동이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여자가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라고 주장하게 됐죠. 예컨대 가사는 사회적으로 워낙 중요한 일이니 개인 노동이 아니라는 거죠.”

―게임을 통해 여자들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뜻인가요.

“게임 자체만 바라보고 남자들과 똑같이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재생산하고 보살피고 소통하는 여자들의 기술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자는 거예요. 생물학적으로 평등해지자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소통을 알고, 보살필 줄 아는 남자를 만들 거냐, 그런 문제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남자를 개조하겠다고요?

“선택의 문제이긴 한데… 여성이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남자들 중에서도 그 일이 좋아 선택하는 사람이 생길 테죠.”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물질적인 요구인가요?

“이탈리아에서는 정부에서 가정주부에게 돈을 지불하라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어요. 남편으로부터 받으면 노예화되니까.”

―2단계 페미니즘이 여성운동의 주류입니까?

“서로 보완을 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나라도 지금 여성 할당제를 시행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의식의 전환이 중요하죠. 여자들이 그 게임 룰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피해를 입는 거예요. 장관 하다가 금방 옷을 벗게 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여자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남자 공무원이 자신의 상관인 여자 장관을 ‘아키꼬’라고 부르질 않나. 그런 말도 안 되는 룰이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한국 사회를 보면 남자들 마음 한 구석에 견고한 성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 남성우월주의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런 의식이 바뀌기는 쉽지 않을 듯싶어요.

“한참 논리적으로 얘기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그래도 다르다’고 하거든요. 논리의 문제예요. 다른 점도 있겠죠, 물론. 그런데 그 차이가 여성 차별 관행을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인지 따져 봐야죠.”

▼남성집단의 게임의 룰▼

―페미니즘이 이혼 조장, 가정 붕괴 등 공동체 가치를 파괴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주장이에요. 그런 현상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사회가 빠르게 재편되면서 육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문제지 페미니즘 탓이 아니에요. 페미니즘은 그 문제를 푸는 하나의 방안을 내놓았을 뿐이에요. 그 안을 합리적으로 따지면서 다른 양육 방식도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그 모색 과정에 남자들도 적극 참여하면서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가정도 살려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점입니다.

그 전까지는 잘 살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다들 ‘아파트 평수나 늘리자’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르잖아요. 열심히 산다고 아파트 평수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서울대 보내겠다고 해서 다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삶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게 됐죠. 결론적으로 말해 파탄은 페미니스트 탓이 아닙니다.”

조한교수는 페미니즘에 대한 일부 비판론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에 따르면 ‘파탄’의 원인은 하드웨어 중심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그것이 낳은 불균형, 거대 권력 국가주도적인 경제발전의 후유증이다. 그녀는 “파탄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이 사회의 문제를 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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