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조련사 모란트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3시 38분


▼<조련사 모란트>(Breaker Morant, 1980)▼

감독: Bruce Beresford

출연: Edward Woodward (Harry Morant역)

역사가 길지 않은 호주에도 전설적인 영웅이 많다. 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을 장식한 화려한 기마대의 사열은 정복과 개척시대의 영웅들을 기리는 의식이었다. 이들 영웅은 사리를 버리고 대의에 몸을 던진 '진짜 사나이'였다. 영화 『조련사 모란트』(Breaker Morant)는 정치재판의 재물이 된 한 사나이의 비운을 그린 작품이다. 그의 죽음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호주의 비극이기도 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1899-1902)은 대영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야만적인 전쟁으로 평가된다. 영국은 최후의 승리를 얻었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본국과 식민지 여러 나라에서 징집된 50만의 자랑스런 대영제국의 정규군이 불과 4만 5천명의 보어 군을 상대로 3년여에 걸쳐 소모적인 전쟁을 치러내야만 했다. 보어군의 탁월한 게릴라전 앞에 영국군은 전쟁의 국제법과 영국 자신의 군대의 법을 위반했다. 전쟁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을 집단수용하고 이들의 살림터전을 초토화했다. 그 결과 2만 여명의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이들의 대부분은 부녀자와 아동이었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비난은 물론 영국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다.

전쟁의 원인은 복잡하다. 오늘날의 인종갈등도 그 시절에 이미 배태된 것이다. 1795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가 선점한 희망봉을 1815년에 영국이 인수했다. 1830년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네덜란드와 독일계 이주민의 후손인 "Afrikaner"(보어인) 들이 세력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인종적 편견을 고집했고 영국은 물론 그들의 원조인 네덜란드나 독일 등 유럽 국가의 개입을 원치 않는 폐쇄적인 정치제도를 원했다. 원주민과 영국, 그리고 보어인 사이의 다면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1867년 금광의 발견으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요하네스버거 금광 주변에 정착한 영국인은 보어들이 보기에 이방인(uitlanders, 외국인)이었다. 1877년 디즈레일리 정부는 보어인의 점령지를 영연방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원주민의 진압을 위해 영국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줄루족을 전멸시킨 후에 영국이 약속한 완전자치가 이행되지 않자 전면적인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1899년 트란스바알, 오렌지자유국, 두 나라와 영국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화 『조련사 모란트』는 보어전쟁에 동원된 변방, 호주 군인의 비극적인 죽음의 이야기다. 호주와 뉴질랜드 곳곳에 참전용사를 위한 위령비가 서 있다. 1, 2차 대전과 함께 비문에 단골로 새겨지는 전쟁이 보어전쟁이다. 대영제국 군대의 일원으로 호주 식민지는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호주출신 모란트 중위는 호주 제일의 야생마 조련사(Breaker)이다. 워즈워스를 즐겨 외는 그는 섬세한 감성의 시인으로 자신도 모르게 지적인 여인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heartbreaker) 사내이다. (에드워드 우드워드의 지적이고도 시원한 모습이 시인과 군인이 외모로도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호주 출신으로 구성된 대영제국의 부대 Bushveldt Carabineers에 배속되어 트란스발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매복한 보어군에 의해 유인 당한 중대는 지휘관 헌트를 잃는 치욕을 당한다.

헌트의 여동생과 약혼한 사이인 모란트는 피의 복수를 맹세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도주하는 적군의 추적에 나선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헌트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성을 잃는다. 헌트의 군복재킷을 입고 있는 병사를 체포하자 즉시 총살을 명한다. 뿐만 아니라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즉결처분한다. 모란트의 동료, 핸콕 중위는 독일인 목사를 총살한다. 모란트의 명령을 어기고 포로들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보어군의 스파이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보어군의 매복 공격도 그가 제공한 정보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신참 장교 위튼은 자신을 공격한 포로를 살해한다.

프리토리아에 주둔한 사령관 키치너경은 전쟁을 종결할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본국정부와 소통하여 적군에게 유화의 제스쳐를 보이기로 한다. 또한 전쟁에 개입할 명분을 찾고 있는 독일에 대해서 위무정책이 필요하다. 정치가에게는 군인이 가장 적절한 희생양이다. 그리하여 세 사람의 식민지출신 장교를 살인죄로 야전 군사법정에 세운다.

사령관은 심복을 볼튼 소령을 검찰관으로 뽑아 '호주촌놈'들을 처리하는 사건을 맡긴다. 미리 결론을 정해둔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된다. 5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부의 장은 데니 중령 - 그는 이미 결론과 방침을 세우고 재판을 진행한다. 군대의 주둔지인 작은 마을 피터스버그에 간이 군사 법정이 열린다. 변방 호주 중에서도 변두리 마을 출신인 토마스 소령이 변호인으로 차출된다. 토마스는 한 번도 법정에서 변론해 본 경험이 없었으며, 이 사건을 위해 단 몇 시간 준비할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부대원들은 모두 이미 인도로 전출되고 난 후이다.

변호사는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훌륭한 변론을 한다. 먼저 이들 피고인이 독립주권국인(independent commonwealth) 호주 국적임을 주장하여 군사법정의 관할권을 다투나, 비록 호주가 독립국의 지위를 얻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왕폐하의 군대로 참전했으므로 관할권을 다툴 수 없다고 일축한다. 사실인즉 1900년, 호주는 독립국이 되었다. 기이하게도 영국의회가 법률로 이를 주선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가 제정한 이 법률(Commonwealth of Australia Act 1900)에 의해 호주는 자치령(dominion)의 지위에서 독립주권국으로 지위가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head of state)로 인정하고 충성을 약조하는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의 일원이 된 것이다.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기소가 당치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포로를 남기지 말라는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재판 없는 즉결처분이 일반수칙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중에 상관의 명령을 수행한 하급자에게 어느 정도 형사책임을 지울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된다. 미리 입장을 정한 군 검찰과 재판부로서는 가능한 한 쟁점이 이렇게 부각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첫 번째 검찰측 증인으로 영국인 로빈슨 대위가 소환된다. 그는 죽은 중대장 헌트의 전임 지휘관이었다. 호주 촌뜨기를 경멸하는 태도가 역력한 그는 이 부대가 통솔 불능의 허접 쓰레기들의 집합체였다고 증언한다. 한 예로 핸콕 중위는 지휘관인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어군 포로를 무개(無蓋) 화물차에 실어 게릴라의 폭탄에 죽도록 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반대심문에서 이러한 작전이 게릴라의 공격을 막는 데 효용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토마스는 그에게 포로를 직접 쏜 적이 있느냐고 물었으나 재판장은 검찰 측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이를 금한다. 답변의 결과로 증인 자신의 범죄행위를 암시하는 내용의 발언은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현지 출신의 통역은 위증한다. 그는 모란트가 한마디로 "미친 사람 같았다"고 증언한다. 반대심문에서 포로의 총살조에 자원한 사실을 지적하자 결코 그런 일이 없었으며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모란트의 강압적인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우긴다. 그는 증언을 한 후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제3의 증인 테일러 대위는 키치너가 부대에 파견한 정보장교이다. 그는 여러 가지 작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보아 모란트는 유능한 장교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키치너가 영국군 카키(전투복)를 착용한 보어군은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한다. 이 재판의 결정적인 이슈는 과연 사령관이 정식 재판 없이 포로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가 여부이다. 모란트를 비롯한 장교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헌트로부터 되풀이하여 들었기에 "공지의 사실" (understanding)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부대에서도 수많은 포로가 재판 없이 즉결처분되었다. 그러나 키치너는 이러한 내용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정치가 군인이 그런 실수를 범할 리 없다. 법원은 이러한 명령이 있었느냐 여부는 이 사안과 직접 연관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군법은 재판 없는 포로의 처형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참여한 다른 장교들이 포로를 재판 없이 즉결처분한 사실이 있느냐 여부도 피고인의 책임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정을 내린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는 사령관 키치너를 증인으로 소환할 것을 신청한다. 재판장은 노골적으로 충격과 경악을 표한다. 그러나 군사법정에 선 피고인은 자신의 변론을 위해 그 누구라도 증인으로 소환할 수 있다는 법규정을 들이대는 변호인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키치너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대신 부관 해밀턴 대령을 보낸다. 난감해하는 해밀턴에 대고 키치너는 짤막하게 정치적인 지시를 내린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당신이 잘 알지 않소."

해밀턴은 키치너의 뜻을 살펴서 법정에서 위증한다. 자신이 아는 한 문서로든 구두이든 키치너가 그런 명령은 내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피고인으로서는 그의 거짓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할 방법이 없다. 설령 이러한 키치너의 명령이 없었다하더라도 모란트로서는 자신의 지휘관인 헌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통상적인 법논리에 추호의 관심도 없다.

핸콕 중위는 자신이 헤스 목사를 쏜 사실을 부인하며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목사가 살해된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은 두 사람의 보어인 여인과 차례차례 그녀들의 집에서 탈선행위를 벌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모란트에게는 이 여인들의 집에 들리기 전에 이미 헤스를 살해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변호사에게는 이 사실을 감춤으로써 정당하게 무죄의 변론을 펼 수 있도록 한다.

최종 변론에서 변호사는 전쟁의 특수한 성격을 강조한다. 유니폼일 입지 않는 전투병력,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성직자까지 동원된 전면전이었고 아군과 적군, 피아(彼我)를 구분하기 힘든 정황에서 보어군의 양식을 벗어난 전투방법에 대해 영국군도 적절한 대응을 할 필요가 절실했다. 따라서 장교들도 적군을 다룸에 있어 넓은 재량권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이 전쟁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종래의 엄격한 전쟁의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보어군이 공격해 와서 수감중인 피고인들도 함께 총을 잡아 격퇴한 사건도 변호사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모란트 또한 당당하게 자신이 아는 "'군인의 길"을 밝힌다. 전쟁에서는 가능한 많은 적군을 죽이는 것이 권리이자 군인의 의무라고.

선고를 앞 둔 밤에 동료 장교 테일러가 감옥 막사로 찾아와서 모란트에게 도주를 권한다. 그러나 모란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만취 상태에서 그는 홍소(哄笑)한다. "난 이제 인간세상의 법과 정의도, 그리고 신마저도 믿지 않는 속인이 되었어. 내가 꿈꾸는 건 호주 야생마의 자유(freedom of Australian horse)야. 이제 영국과는 끝장이야.(Nothing is in England any more) 호주로 돌아가 말이나 실컷 타지. 타기 전에 브랜디나 듬뿍 마시고 말이야."

결과는 세 사람의 장교 모두의 유죄판결이다. 모란트와 핸콕에게는 총살형이, 위튼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된다. 한 사람씩 차례차례 재판장과 독대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전해 듣는 군인들의 표정은 결코 속내를 읽어낼 수 없을 정도로 위엄과 서기(瑞氣)가 서려있다. 여린 막내 위튼만이 사람의 표정을 짓는다.

변호사는 최후의 탄원을 위해 키치너를 방문한다. 그러나 중요한 일로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해밀턴의 전갈만 접했을 뿐이다. 해밀턴은 이미 런던본국정부(Whitehall)와 호주정부도 이들의 처형에 동의했다는 절망적인 소식에다 "반가운 소식"을 덧붙인다. "이제 곧 평화회담이 시작될 것이네. 이에 머지않아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네."

마지막 밤에 모란트는 약혼녀에게 남기는 유언을 대신하여 시를 쓴다. 낮을 볼 수 있다면 새벽이슬을 사랑할 수 있을까. 바람둥이 핸콕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두 사람은 장엄한 새벽의 총탄에 산화한다. 집행 직전에 군목을 돌아보며 "마태복음 10장 36절"이라고 외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And a man's foes will be those of his own household.) 도열해 선 총살조가 머뭇거릴때 모란트 중위는 평소처럼 악 에 받힌 명령을 내린다. "제대로 쏘아, 이 멍청이들아" (Shoot straight, bastard, dont' make a mess!) 영화의 전편을 통해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조급하게 작은 피라미드형 야전막사, 야산의 지평선 너머로 흩어지던 브라스밴드 가락이 갑자기 급해진다. 사막의 태양이 천천히 솟아오른다. 살아 남은 위튼은 반세기 후에 모란트의 전설을 역사로 기록한다. 그가 붙인 제목은 문자 그대로 『제국의 희생양』(Scapegoat of the Empire, 1949) 이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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