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과외선생님과 펀드매니저

  • 입력 2000년 5월 2일 19시 50분


“과외교습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법률 조항은 자녀교육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침해하기 때문에 헌법에 어긋난다.”(4월 27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헤지펀드의 대형투기 시대는 끝났다. 이제 고위험 고수익의 단기투자 전략을 포기한다.”(4월 28일 소로스 펀드의 조지 소로스 회장)

하루 시차를 두고 나온 이 두 가지 결정을 보면서 나는 어느 후배를 떠올렸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느라 20대를 ‘허송’한 뒤 고등학생 수학 과외교습을 해서 민생고를 해결하며 살던 그는 물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을 하면서 밥 먹고 살아도 되는 것이냐고. 나는 대답했다. 기죽지 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펀드 매니저가 하는 일보다는 네가 하는 일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니까.

심오한 법리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과외교습을 금지하는 법률이 우스꽝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질렀던 진시황의 시대 이후 남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행위를 범죄로 만든 나라가 달리 또 있었던가. 그것도 조지 소로스와 같은 전문 투기꾼들에게는 현대의 영웅 대접을 하면서 말이다.

소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펀드 매니저들 역시 단 한 톨의 쌀도 한 켤레의 신발도 사회적으로 유용한 단 한 가지의 서비스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손실을 입힘으로써 꼭 그만큼의 수익을 자기 것으로 만들 뿐이다. 금융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보고 싶은 대학생들이 수업을 빼먹고 대학촌의 PC방에서 주식투자에 몰두할 때 우리 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지적 자본(intelligence capital)’의 상실을 감수해야 한다. 샐러리맨들이 업무를 버려둔 채 인터넷을 통한 주식 ‘데이 트레이딩’에 매달릴 때 우리 기업의 생산성은 그만큼 하락한다.

온 국민이 증권거래소에서 종이 쪽지를 사고 팔거나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함으로써 나라의 부가 늘어날 수 있다면 가난을 물리치지 못하는 정부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개별 회사의 주식이나 채권이 아니라 하나의 국민경제 전체를 대상으로 한 ‘거시경제적 금융투기’를 일삼는 사람들은 세계를 손톱만큼도 더 유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앞으로는 수익률이 낮아도 비교적 안전한 자산에 투자하겠다”는 소로스의 항복 선언을 보고 우리 국민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국제금융투기가 줄면 외환위기의 재발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대하는 국민의 시선은 도무지 곱지가 않다. 헌법재판소의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무작정 위헌 판결만 내리면 그만이냐고 힐난하는 글이 넘쳐난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무작정 위헌 여부만 판단하면 된다. 그걸 이유로 헌재를 비난하는 건 온당치 않다. 대책 수립은 어디까지나 정부와 국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헌재를 비난하는 첫번째 논리는 과외를 허용하면 계층간의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다. 호화 주택에 살면서 호화 자동차를 타고 비싼 음식을 먹는 건 놔두면서 어째서 비싼 과외만은 안된다는 것일까. 둘째는 공교육을 무너뜨린다는 걱정이다. 실력 있는 교사들이 다 학원으로 빠져나가 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학교교육이 더욱 큰 타격을 받는다는 지적이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이걸 과외금지로 막아야 할까? 실력 있는 교사에게 좋은 대접을 해서 학교교육의 수준을 높여야 할 일 아닌가. 그렇게 하려면 과외금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세금을 더 내고 교사 인사와 급여제도를 고쳐야 한다.

세번째는 교육기회의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정말로 심각한 지적이다. 1000만원짜리 ‘족집게 과외’를 받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를 같은 조건에서 경쟁시키는 건 분명 부당하다. 하지만 현행 수능시험은 자주적인 사고능력을 요구한다. 아무리 비싼 ‘족집게 강사’도 이것을 심어줄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 공부할 줄 아는 아이라면 그런 도움은 필요치 않다. 어떻게 하면 그런 능력을 키워줄 것인가. 지금은 이걸 고민해야 할 때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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