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대통령 담화/청와대 표정]『죄송… 송구』11번 사과

  • 입력 1997년 2월 25일 20시 13분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25일 대국민담화를 17분동안 낭독하면서 한보사태 및 차남 賢哲(현철)씨 문제와 관련, 11차례에 걸쳐 국민에게 사죄했다. 사죄의 표현도 「괴롭고 송구스러운 마음」 「처절하고 참담한 심정」 「고개를 들 수 없다」 「부덕의 결과」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 「통탄스런 일」 「괴롭고 민망」 「크게 부끄러운 일」 「제 자신의 불찰」 「다시 한번 죄송」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등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취임 4주년이라는 「기뻐야 할 날」에 김대통령이 이처럼 사죄하게 된데 대해 자괴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민주계출신 비서진은 눈물까지 비치며 자책하기도 했다. ○…오전 9시30분 청와대 본관 세종실에 들어선 김대통령은 TV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여 국민에게 인사한뒤 대국민담화를 처연한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로 낭독,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비쳤던 지난 1월7일의 연두기자회견과 크게 대조. 이날 세종실에는 4개 TV방송사의 카메라맨과 조명요원 1명을 제외하고는 단 한사람의 배석자도 없었으며 金光一(김광일)비서실장 金光石(김광석)경호실장 尹汝雋(윤여준)공보수석 李海淳(이해순)의전수석 등 4명이 옆방에서 대기. 김대통령은 특히 현철씨 관련대목을 말할 때는 눈에 물기가 약간 번지면서 가끔씩 말이 떨리기도. 김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국민앞에 머리숙여 사과한 것은 지난 94년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포함해 이날이 두번째. ○…김대통령의 대국민담화는 2주일간의 세심한 준비 끝에 최종문안을 확정. 김대통령은 청와대수석비서관들과 신한국당 당직자 및 각료는 물론 사회 각계 인사들을 직접 만나거나 간접적으로 뜻을 전해 듣는 형식으로 여론을 청취하며 담화를 준비. 또 김대통령은 하루 두세차례씩 윤공보수석을 불러 담화의 전반적 기조와 골격을 그때 그때 구술했고 윤수석은 이를 토대로 초안을 작성. 김대통령은 초안을 자구(字句)하나하나까지 검토, 24일 오후 4시경 최종문안을 확정했다는 것. 이 과정에서 윤수석은 현철씨 대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로 고심했으나 김대통령이 지난 주초 자신의 구술대로 하라고 지시, 현철씨 관련 대목은 김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문안화했다고 윤수석은 설명. 특히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는 대목에 대해 윤수석은 「속된 표현」이라며 「아들」을 「자식」으로, 「아비」를 「부모」로 바꿀 것을 건의했으나 김대통령은 『꾸미지 말라』며 구술 그대로 표현토록 했다는 것. 김대통령은 또 『죄를 진 게 있다면 내 아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며 특히 『응분의 사법적 책임』이라는 대목에서는 일부 비서진이 「일의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으나 김대통령은 이를 일축, 담화에 그대로 넣었다는 것. ○…김대통령은 담화를 끝낸 뒤 수석비서관들과 오찬.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오늘 담화는 내 심경과 각오를 있는 그대로 밝힌 것』이라며 『앞으로 같은 생각으로 국정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 김대통령은 또 『취임 4주년인데 무거운 마음을 갖게 해 안됐다』고 수석들을 위로한뒤 『오늘을 새로운 출발의 날로 삼아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 이에 앞서 김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비서관 전원은 회의를 열어 대통령을 잘못 보필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의를 표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김비서실장이 이런 뜻을 오찬에서 김대통령에게 표명. ○…노동법 파문때부터 갈등관계가 심화됐던 김실장과 李源宗(이원종)정무수석은 김대통령의 담화에 대해서도 상이한 반응. 기자들을 먼저 만난 이수석은 『나는 죄인이다. 여러분이 대통령의 충정을 국민들에게 잘 전달해달라』며 눈물을 글썽. 반면 김실장은 다소 밝은 표정으로 『참모들이 대통령께 드릴 말씀은 다 드렸다』며 국민의 평가를 기다리겠다고 언급.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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