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임시정부 분열에 “나는 너무 몰랐구나” 곡기 끊고 순국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0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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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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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옛 한국군의 25세 청년장교가 독극물을 마셔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의병 계획이 실패하자 비관 끝에 저지른 일이었죠. 목숨은 건졌지만 시신경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는 상대를 흘겨보듯이 했죠. 스스로 호를 예관(睨觀)이라고 지은 이유였습니다. 예(睨)는 흘겨보다, 곁눈질하다는 뜻이죠. 2년 뒤 군대가 해산되자 부위(현재의 중위)였던 이 청년장교는 병사들을 이끌고 대한문까지 나아가 순국하려 했죠. 하지만 동지들이 만류해 뜻을 접고 군복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규식입니다. 조선의 유명한 학자 신숙주의 17대 손이어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영특했답니다. 세 살 때 글을 읽었다고 하니까요. 본관은 고령이고 산동 신 씨라고도 했습니다. 총명했던 그는 ‘산동 3재’로 꼽혔죠. 나머지 두 인재는 신채호와 신백우로 모두 독립운동가로 유명했습니다. 한학을 배우던 신규식은 18세 때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했죠. 중국어 등을 익힌 뒤 20세 때는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것이죠.

①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령 신 씨 가문의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왼쪽부터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이다. 신규식은 
흘겨보는 시선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안경을 쓴 듯하다. 신석우는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낸 뒤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전 재산을 집어넣은 언론인이기도 하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신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하던 해 쓴 필적으로 
반듯하면서도 절제된 힘이 엿보인다.
①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령 신 씨 가문의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왼쪽부터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이다. 신규식은 흘겨보는 시선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안경을 쓴 듯하다. 신석우는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낸 뒤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전 재산을 집어넣은 언론인이기도 하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신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하던 해 쓴 필적으로 반듯하면서도 절제된 힘이 엿보인다.

직업군인의 길은 무산됐지만 신규식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중동학교 3대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 앞장섰고 대한협회에 가입해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광업회사를 차려 실업에도 한몫 했습니다. ‘공업계’란 월간잡지도 창간했죠. 하지만 1910년 국권 상실은 신규식에게 세 번째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시 목숨을 바치려 했지만 이 무렵 입교했던 대종교 교주 나철이 구해주었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던졌던 우국지사였습니다.

이듬해 신규식은 중국에 망명해 상하이에서 청나라에 맞선 중국인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쑨원과 천치메이 등이었죠.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린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었죠. 2년 뒤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는 2차 혁명에도 가담했으나 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피살된 천치메이를 가장 먼저 조문하는 등 중국 혁명가들과 끈끈한 유대를 이어갔죠. 망명하면서 친척들의 앞길을 주선해 주었지만 가족과는 생이별했습니다. 아들은 아홉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를 찾아와 울면서 “아버지!”라고 불렀다죠.

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처음 맞은 설날에 임정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함께 모여 신년축하 기념촬영한 모습. 사진 속
 16번이 법무총장 신규식이다. ②는 신규식의 독사진으로 카이젤 콧수염에 양복을 입고 단장을 짚은 채 카메라 앞에 섰다.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처음 맞은 설날에 임정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함께 모여 신년축하 기념촬영한 모습. 사진 속 16번이 법무총장 신규식이다. ②는 신규식의 독사진으로 카이젤 콧수염에 양복을 입고 단장을 짚은 채 카메라 앞에 섰다.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그는 상하이 최초의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해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중국인들과 손잡고 신아동제사라는 비밀단체도 만들어 지원을 이끌어냈죠. 1915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추이를 지켜보며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망명정부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2년 뒤에는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해 주권은 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 3·1운동 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일이었죠. 이즈음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독립 촉구 전문을 보낼 만큼 세계정세를 활용하는 일에도 발 빨랐습니다.

신규식은 상하이 노령 한성정부가 통합한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법무총장이 되었죠. 워싱턴군축회의가 열릴 무렵에는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을 겸직하며 쑨원의 광둥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맺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전부터 다져놓은 중국인들과의 친분이 밑거름이 되었죠. 하지만 임시정부는 물밑에서 파벌갈등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크게 기대했던 워싱턴회의에서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자 임시정부의 분열은 가속도가 붙고 말았죠.

①은 신규식이 영면한 상하이 만국공묘의 묘비 앞에 모인 그의 가족이다. 아래쪽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위 민필호, 딸 신명호, 
부인 조정완, 외손녀 민영주, 외손자 민영수. 사위 민필호는 상하이로 망명한 뒤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민영주는 훗날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내는 김준엽의 아내가 된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1922년 10월 경성 계동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열린 추도회. ③은 신규식 등 임정선열 5위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봉환한 1년
 뒤인 1994년 열린 참배식.
①은 신규식이 영면한 상하이 만국공묘의 묘비 앞에 모인 그의 가족이다. 아래쪽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위 민필호, 딸 신명호, 부인 조정완, 외손녀 민영주, 외손자 민영수. 사위 민필호는 상하이로 망명한 뒤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민영주는 훗날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내는 김준엽의 아내가 된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1922년 10월 경성 계동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열린 추도회. ③은 신규식 등 임정선열 5위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봉환한 1년 뒤인 1994년 열린 참배식.

이에 신규식은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라며 미칠 듯이 절규했습니다. 급기야 심장병과 신경쇠약이 겹쳐 몸져누웠고 분열을 한탄하며 25일 동안 곡기를 끊은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죠. 향년 42세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정부, 정부”였다고 하죠. 동아일보는 1922년 9월 28일자 3면의 절반을 부고 기사로 채워 애도했습니다. 제목 ‘즐풍목우(櫛風沐雨)’는 바람으로 빗질하고 빗물로 목욕한다는 뜻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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