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임시정부 분열에 “나는 너무 몰랐구나” 곡기 끊고 순국

이진 기자 입력 2020-10-20 11:40수정 2020-10-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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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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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옛 한국군의 25세 청년장교가 독극물을 마셔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의병 계획이 실패하자 비관 끝에 저지른 일이었죠. 목숨은 건졌지만 시신경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는 상대를 흘겨보듯이 했죠. 스스로 호를 예관(睨觀)이라고 지은 이유였습니다. 예(睨)는 흘겨보다, 곁눈질하다는 뜻이죠. 2년 뒤 군대가 해산되자 부위(현재의 중위)였던 이 청년장교는 병사들을 이끌고 대한문까지 나아가 순국하려 했죠. 하지만 동지들이 만류해 뜻을 접고 군복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신규식입니다. 조선의 유명한 학자 신숙주의 17대 손이어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영특했답니다. 세 살 때 글을 읽었다고 하니까요. 본관은 고령이고 산동 신 씨라고도 했습니다. 총명했던 그는 ‘산동 3재’로 꼽혔죠. 나머지 두 인재는 신채호와 신백우로 모두 독립운동가로 유명했습니다. 한학을 배우던 신규식은 18세 때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했죠. 중국어 등을 익힌 뒤 20세 때는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것이죠.

①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령 신 씨 가문의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 왼쪽부터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이다. 신규식은 흘겨보는 시선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안경을 쓴 듯하다. 신석우는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낸 뒤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인수해 운영하면서 전 재산을 집어넣은 언론인이기도 하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신규식이 중국으로 망명하던 해 쓴 필적으로 반듯하면서도 절제된 힘이 엿보인다.

직업군인의 길은 무산됐지만 신규식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중동학교 3대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에 앞장섰고 대한협회에 가입해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광업회사를 차려 실업에도 한몫 했습니다. ‘공업계’란 월간잡지도 창간했죠. 하지만 1910년 국권 상실은 신규식에게 세 번째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시 목숨을 바치려 했지만 이 무렵 입교했던 대종교 교주 나철이 구해주었죠.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던졌던 우국지사였습니다.

이듬해 신규식은 중국에 망명해 상하이에서 청나라에 맞선 중국인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쑨원과 천치메이 등이었죠.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린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었죠. 2년 뒤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는 2차 혁명에도 가담했으나 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피살된 천치메이를 가장 먼저 조문하는 등 중국 혁명가들과 끈끈한 유대를 이어갔죠. 망명하면서 친척들의 앞길을 주선해 주었지만 가족과는 생이별했습니다. 아들은 아홉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를 찾아와 울면서 “아버지!”라고 불렀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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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처음 맞은 설날에 임정 요인 58명이 상하이에서 함께 모여 신년축하 기념촬영한 모습. 사진 속 16번이 법무총장 신규식이다. ②는 신규식의 독사진으로 카이젤 콧수염에 양복을 입고 단장을 짚은 채 카메라 앞에 섰다. ②는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그는 상하이 최초의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해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중국인들과 손잡고 신아동제사라는 비밀단체도 만들어 지원을 이끌어냈죠. 1915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추이를 지켜보며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망명정부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2년 뒤에는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해 주권은 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 3·1운동 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일이었죠. 이즈음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독립 촉구 전문을 보낼 만큼 세계정세를 활용하는 일에도 발 빨랐습니다.

신규식은 상하이 노령 한성정부가 통합한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법무총장이 되었죠. 워싱턴군축회의가 열릴 무렵에는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을 겸직하며 쑨원의 광둥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맺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전부터 다져놓은 중국인들과의 친분이 밑거름이 되었죠. 하지만 임시정부는 물밑에서 파벌갈등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크게 기대했던 워싱턴회의에서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자 임시정부의 분열은 가속도가 붙고 말았죠.

①은 신규식이 영면한 상하이 만국공묘의 묘비 앞에 모인 그의 가족이다. 아래쪽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위 민필호, 딸 신명호, 부인 조정완, 외손녀 민영주, 외손자 민영수. 사위 민필호는 상하이로 망명한 뒤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민영주는 훗날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내는 김준엽의 아내가 된다. ①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②는 1922년 10월 경성 계동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열린 추도회. ③은 신규식 등 임정선열 5위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봉환한 1년 뒤인 1994년 열린 참배식.

이에 신규식은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라며 미칠 듯이 절규했습니다. 급기야 심장병과 신경쇠약이 겹쳐 몸져누웠고 분열을 한탄하며 25일 동안 곡기를 끊은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죠. 향년 42세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정부, 정부”였다고 하죠. 동아일보는 1922년 9월 28일자 3면의 절반을 부고 기사로 채워 애도했습니다. 제목 ‘즐풍목우(櫛風沐雨)’는 바람으로 빗질하고 빗물로 목욕한다는 뜻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櫛風沐雨(즐풍목우) 四十年(40년)
상해에서 장서한 신규식씨

가슴에 맷치인 원한을 폴지 못하고 상해 려창에서 외로히 댱서한 신규식(申圭植) 씨는 엇더한 사람인가. 그는 리조(李朝)의 명유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周) 선생의 십칠대손으로 개국 사백삼십이년 긔묘 윤삼월 십오일에 충청남도 청주군(淸州郡) 가덕면(加德面) 인차리(仁次里)에 출생하니 실로 호서명문의 후예이라. 어려서부터 재덕이 출중하얏는대 십륙세 때까지는 가뎡에서 한문을 배호다가 십칠세 되든 해에 비로소 세상에 대한 포부를 품고 한성에 올나와서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서 사개년 동안 형설(螢雪)의 공을 닥고 이십일세에 일변 무관학교(武官學校)에 다닌 후 당시 한국 륙군(陸軍) 참위(參尉)가 되어 삼사년 동안 재직하엿는대 이 동안에 차々 승진되여 륙군 부위가 되엿다. 그러나 세상은 날로 변하야 대세가 점々 기우러지니 당년 이십사 세의 쳥년 장관의 흉중은 과연 엇더하엿슬가.

부절업시 손에는 칼자루를 붓들고 더운 눈물이 종횡할 뿐이엇다. 이리는 중 정미년(丁未年) 륙월에 저 유명한 해아(海牙)사건이 이러나매 당시 한국정부에서는 망지소조하야 여러 가지의 치욕을 참으며 형해만 남앗든 군대를 마자 해산하니 비분에 싸힌 군인들이 최후의 한 소래로 서소문 창안에 총소래가 요란하고 온 장안이 물끌틋 하얏다. 이때 그는 륙군부위의 몸으로 흉중에서 소사오르는 비분을 금치 못하야 단연히 뜻을 결단한 후 쇠잔한 목숨을 대한문 압헤 밧치려 하얏스나 여러 동지의 만류함으로 긋치고 비분한 회포는 더욱 심하야 혹은 대한협회(大韓協會)에 일비의 힘을 쓰고 혹은 인재교육에 뜻을 두어 중동학교(中東學校)에 교편을 잡다가 다시 여러 동지들과 함끠 광업회사(廣業會社)를 발긔하야 실업에 힘을 쓰고 공업전습(工業傳習)의 학생을 양성하야 분원자긔(分院磁器)를 부활식히는 등 잇는 동정을 다하야 보앗스나 하수가치 터저오는 대세를 적은 흙덩이로 엇지 막으리요.

드듸여 경술년의 불벼락이 내리고 흰옷 입은 사람의 운명이 눈물 속에 막을 닷치어 그는 그대로 광업회사에 다니며 울々한 심회를 금치 못하야 비애에 싸힌 팔년 성상을 눈물 속에서 지내다가 한양의 바람도 찬긔운을 띄인 신해년 십일월 엇던 날 표연히 중국을 향하야 출발하니 이국 향관에 풍토도 설려니와 한양의 산수―부절업시 몽매 간에 방황하도다. 이러구러 십여년 성상을 중국 각디로 방랑하야 혹은 북경성 중의 □□□□□□되고 양자강(楊子江) 언덕에 피눈물도 뿌리엇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와 교유하고 더욱 남방정객의 거두 손일선(孫逸仙) 진기미(陳其美) 등과 절친하게 되엿다.

이럼으로 년전에 진기미가 상해에서 자객의 칼날을 맛고 죽엇슬 때에 내외신문 잡지에 『진기미 씨의 시톄를 누구보다도 먼저 와서 붓들고 통곡한 사람이 잇는대 그는 성명을 무러도 대답지 아니하고 오즉 조선사람이라고만 대답하더라』 함은 분명히 신 씨를 가르침이로다. 이 동안에 세상은 한 번 변하야 랭々히 식엇든 시톄에 새로운 피가 돌고 눈물을 삼키든 민족이 새 소리를 치게 되니 각국에 허터저 잇든 조선혁명가들은 구름가치 상해에 모히어 다시 대사를 의론하게 되매 중국 정계에 정통한 씨는 림시정부의 중임을 마타 일편 정성이 오즉 민족을 구원함에 잇섯다.

그의 눈에는 집안도 업고 처자도 업섯다. 이럼으로 십여년 동안 안해를 대하지 아니하얏고 망명 당시의 유복자가 나서 아홉 살이 되도록 부자 상면을 못하다가 년전에 그 부인과 애자가 상해로 가서 어린아해가 부친을 부르고 울매 오즉 추열히 얼골에 미소를 띄엇다 한다. 그러나 약한 말에 짐이 너무도 중하매 렬사의 가슴도 몃 번이나 메여지도다. 드듸여 약한 몸이 부지하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리어 오래동안 신음하다가 가슴에 싸힌 원한을 그대로 품고 멀리 고국강산을 향하야 눈물을 뿌리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사십삼세이라. 아아 망명객의 최후여! □□□□□□□□□□□□□□□□□□□□□□□□ 상해 부도에 비발치고 황해 바다에 바람이 것칠 때 그의 령이나 영원히 평안할지어다!

齊家又善(제가우선)
씨의 족하되는
신필호 씨의 말

씨의 부음을 듯고 남대문밧 세부란스병원에 씨의 족하 신필호(申弼浩) 씨를 방문하니 숙부의 부음을 듯고 비애에 싸힌 씨는 말하되 『참 꿈결 가튼 일이올시다. 그 어른은 사십 평생을 오즉 세상을 위하야 일을 하셧슴니다. 평소에도 얼골에 희로를 별로 낫타내이지 아니하시고 누구에게든지 공평과 의리로 대하섯고 일호의 사심이 업셧지요. 세상에 대하야서만 그러실 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여러 형뎨와 족하들을 한결 가치 사랑하시고 모다 거두어 교육을 식히섯는대 우리 형님은 미국 가서 류학하시고 우리 삼촌이 독일 백림(伯林)에 가서 공부하시는 것도 모다 당신의 주선이지요.

부모에게도 효성이 극진하야 할아버지도 항상 아들 말슴을 하시고 이주일 전에 할머니가 상사나시엇는대 운명하시면서도 그 아들이 보고 십다고 이름을 부르면서 도라가섯답니다. 그러나 그 어른이 병중에 드르시면 병환이 더욱 더하실가 보아 할머님 상사나섯단 말을 알리지도 못하얏스닛가 어머님 상사를 당하신 줄도 모르실 것이올시다. 병은 과도한 로심으로 신경쇠약에 걸리어서 근일에는 혹 울기도 하시고 혹 노래도 부르시고 해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조선인들이 단합되지 안는 것이 텰텬의 한이 돼서々 도라가실 림시까지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하시고 밋친 사람 가치 날뛰섯답듸다. 병은 그 때문에 더하신 것이지요.

경성서 떠나시든 전날은 우리 몃종 형뎨를 불너 안치시고 여러 가지 장래 일을 훈계하신 후 형님은 미국으로 가라 하시고 나는 여긔서 그대로 의학을 배호라고 하셧지요. 또 종중으로 학교 둘을 설립하서々 집안 아해들을 가르치게 하섯지요. 도모지 모든 일이 꿈결 갓습니다. 가실 때에 당신 평생을 지내실 만콤은 가지고 가섯스나 원래 도모지 너나를 구별하시지 안는 성질이라 누구든지 조선사람이라면 한 집에 두시고 지내시엇슴으로 도라가실 림시에는 생활도 좀 곤난하섯지요』하며 눈물을 머금고 말하더라.

民族的(민족적)으로
大損失(대손실)
엇기 어려운 인재라고
친우 윤치소 씨 회구담

신 씨와 십여년 동안 친교가 잇든 윤치소(尹致昭) 씨는 말하되 『참 이 세상에서 다시 어더볼 수 업는 갸륵한 사람이오. 내가 뎨일 그 사람에게 감복한 것은 그 사람이 원래 재조가 출중한 사람인대 다른 사람은 재조가 잇스면 곳 외면에 나타나지마는 이 사람은 도모지 그것이 나타나지 아니하얏소. 모든 일에 재간이 놀납하고 엄연히 군자의 태도가 잇서서 나하고 광업회사에 가치 잇슬 때에 여러 친고들이 욕설로 롱담을 하면 조곰도 댓구를 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우스며 『그 무슨 소리들이냐』고 하기 때문에 가튼 년배 친고들이 모다 존경하고 이래서 자연 몃십 세 더 먹은 로성한 사람과 교제를 하엿섯지요. 또 문필이 다 얌전하고 다만 그 사람의 눈이 흘기어 뜨는 눈이기 때문에 별호를 예관(觀觀)이라고 하엿지요. 조선사람 전톄로 보든지 나 개인으로 보든지 참으로 통석하오』하며 창연히 말하더라.

廣東政府(광동정부)와도 交涉(교섭)
즁국에 방랑 후의 씨의 행동

상해에 간 후 이때까지 씨의 하든 일에 대하야 최근까지 친교하든 모씨는 말하되 경성에서 광업회사의 지배인으로 잇다가 중국으로 간 후에는 남방혁명가들과 만히 사귀여 손일선과도 친하게 되고 더욱 진기미(陳其美)와는 단금지교가 되여 동제사(同濟社)라는 단톄를 조직하야 가지고 활동하다가 림시정부가 되매 사법총장의 중임에 잇섯고 광동정부(廣東政府)에 조선대표로 여러 가지 교섭을 하엿고 교육사업으로는 박달학원(博達學院)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야 여러 인재를 양성하고 근일까지 진단(震檀)이란 잡지를 발행하야 사상을 고취하얏고 종교로는 단군교를 위하야 힘썻다 말하더라.

北京(북경)에 在留(재류)하든
모 쳥년의 감상

북경에서 류학하다가 신 씨와 친교를 매즌 모 청년은 말하되 『내가 류학할 때에 북경에는 류학생 사십 명과 기타 조선인을 합하야 대략 삼백 명 가량이 잇섯스나 그때까지 조선사람끼리 아모 련락긔관이 업섯더니 신 씨가 와서 처음으로 삼백여명을 초대하고 회를 조직하얏스니 실로 북경에서 처음으로 조선인이 모힌 회는 신 씨로 인하야 열리엇고 그때도 일본 정부의 수색이 심하얏스나 심지어 중국 순경까지 씨에게 감복하야 늘― 톄포할 듯하면 미리 알녀주어 무사하얏소』 하더라.

金玉(금옥) 가튼 그 人格(인격)
흉보에 놀내이는
그의 장인의 감상

씨의 빙댱되는 조종만(趙鍾萬) 씨를 방문하니 씨는 아즉 신 씨의 부음도 듯지 못하고 잇다가 긔자의 전하는 말을 듯고 깜작 놀나며 『아― 그예― 불행하엿군. 세상 일이 모다 우습다!』 하고 침통한 말머리를 내이어 『평생을 통하야 일호의 결뎜이 업고 오즉 의리로써 평생을 마친 사람이지요. 성질이 단엄침중하며 처사에 자상하고 평시에 질기는 것은 녯글이나 고물 가튼 것을 조와하엿고 처음에는 나와 가치 야소교에 매우 뜻을 두더니 중간에 단군교(檀君敎)에 매우 힘을 쎳스며 자소시로 그와 가치 널니 친구를 교제하면서도 주색 가튼 것은 도모지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얏고 팔모로 보아도 무던한 사람이지요. 지금 유족은 안해(조 씨의 딸)와 남매의 자식이 잇는대 딸은 지금 스물한 살로 상해에서 민필호(閔弼鎬)에게 출가하고 아들은 지금 열한 살인대 장래 문뎨가 념려된다』고 추연히 말하며

엽헤 잇든 조 씨의 부인은 저런 변이 잇나 그예 불행하엿구면―아모튼지 졀문 사람으로 그러케 얌전한 사람은 업지오. 오즉해야 우리 집안에서 딸보다 사위를 더 사랑하얏지요. 자긔 빙장이 아들이 업슴으로 령감이 병환이 나시면 흔히 나와 밤을 새이엇는대 몃칠밤을 새이어도 조금도 불안한 사색이 업셧지요. 내가 하도 딱하야 좀 누으라고 하면 『저는 관계치 안슴니다. 좀 누으시지요』 하고 인정 잇고 싹々한 품이 나 보기에는 그런 사람이 다시 업섯소. 식성이 짤바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얏는대 만리타국에 가서 얼마나 고생이 되엿겟지요. 평시에는 편육을 매우 질기엇지요』 하며 슬품에 싸인 얼골로 말하더라

현대문

거친 바람과 낯선 비 맞기 40년
상하이에서 타계한 신규식 씨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고 상하이 숙소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신규식 씨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17대 손으로 개국 432년 기묘 윤 3월 15일에 충청남도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나니 참으로 호서 명문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덕성이 뛰어났는데 16세까지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7세 되던 해에 비로소 세상에 대한 포부를 품고 한성에 올라와서 관립중국어학교에서 4년 동안 형설의 공을 닦고 21세에 한편으로 무관학교에 다닌 뒤 당시 한국 육군 참위가 되어 3, 4년 동안 재직하였는데 이 동안에 차차 승진되어 육군 부위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나날이 변하여 대세가 점점 기울어지니 당년 24세의 청년 장관의 마음속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부질없이 손에는 칼자루를 붙들고 더운 눈물이 넘쳐흐를 뿐이었다. 이러는 중 1907년 6월에 저 유명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어쩔 줄을 모르고 갖가지 치욕을 참으며 뼈만 남았던 군대를 마저 해산하니 비분에 싸인 군인들이 최후의 소리를 지르고 서소문 안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고 온 장안이 물 끓듯 하였다. 이때 그는 육군 부위의 몸으로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비분을 참지 못하여 단호하게 뜻을 결단한 뒤 쇠잔한 목숨을 대한문 앞에 바치려 하였지만 여러 동지가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비분한 생각한 더욱 심해져 혹은 대한협회를 돕고 혹은 인재교육에 뜻을 두어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여러 동지들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여 실업에 힘쓰고 공업전습의 학생을 양성하여 분원자기를 부활시키는 등 있는 힘을 다해 보았으나 강물처럼 터져오는 대세를 적은 흙덩이로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드디어 1910년의 불벼락이 내리고 흰옷 입은 사람의 운명이 눈물 속에 막을 내려 그는 그대로 광업회사에 다니며 울울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비애에 싸인 8년 세월을 눈물 속에서 지내다가 한양의 바람도 차가워진 1911년 11월 어느 날 훌쩍 중국을 향해 떠났다. 이국 숙소에 풍토도 낯설거니와 한양의 산수는 부질없이 꿈속에 오가는구나. 이러구러 10여년 세월을 중국 각지로 방랑하여 혹은 베이징 성중의 □□□□□□ 되고 양쯔강 언덕에 피눈물도 뿌렸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와 사귀고 더욱 남방 정객의 거두 쑨원, 천치메이 등과 절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몇 년 전 천치메이가 상하이에서 자객의 칼을 맞고 죽었을 때 내외 신문 잡지에 『천치메이 씨의 시체를 누구보다도 먼저 와서 붙들고 통곡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오직 조선사람이라고만 대답하더라』 한 것은 분명히 신 씨를 가리킨다. 이 동안에 세상은 한 번 변하여 냉랭하게 식은 시체에 새로운 피가 돌고 눈물을 삼키던 민족이 새로운 소리를 치게 되니 각국에 흩어져 있던 조석 혁명가들은 구름같이 상하이에 모여 다시 대사를 의논하게 되었고 중국 정계에 정통한 신 씨는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아 한조각 정성이 오직 민족을 구원함에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집안도 없고 처자식도 없었다. 이러므로 10여 년 동안 아내를 만나지 아니하였고 망명 당시의 유복자가 태어나서 아홉 살이 되도록 부자간에 만나지 못하다가 몇 년 전에 그 부인과 사랑하는 아들이 상하이로 가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고 우니 다만 처량하게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약한 말에 짐이 너무도 무거워 열사의 가슴도 몇 번이나 미어졌다. 드디어 약한 몸이 견디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오랫동안 신음하다가 가슴에 쌓인 원한을 그대로 품고 멀리 고국강산을 향하여 눈물을 뿌리며 세상을 떠나니 향년 43세이다. 아아, 망명객의 최후여! □□□□□□□□□□□□□□□□□□□□□□□□ 상하이 부두에 빗발치고 황해바다에 바람이 거칠 때 그의 영혼이나 영원히 평안할지어다!

집안 잘 거느리고 아끼셨다
신 씨의 조카 되는
신필호 씨의 말

신 씨의 부음을 듣고 남대문밖 세브란스병원에 신 씨의 조카 되는 신필호 씨를 찾아가니 숙부의 부음을 듣고 비애에 싸인 그는 말하기를 『참 꿈결 같은 일입니다. 그 어른은 40 평생을 오직 세상을 위하여 일을 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얼굴에 기쁘거나 성내는 일을 별로 나타내지 않으셨고 누구에게든지 공평과 의리로 대하셨고 한 터럭의 사심이 없었지요. 세상에 대해서만 그러실 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여러 형제와 조카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모두 거두어 교육을 시키셨는데 우리 형님은 미국 가서 유학하시고 우리 삼촌이 독일 베를린에 가서 공부하시는 것도 모두 당신의 주선이지요.

부모에게도 효성이 극진하여 할아버지도 항상 아들 말씀을 하시고 이주일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운명하시면서도 그 아들이 보고 싶다고 이름을 부르면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러나 그 어른이 병중에 들으면 병환이 더욱 심해질까 봐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알리지도 못했으니까 어머님이 돌아가신 줄도 모르실 겁니다. 병은 마음을 너무 써 신경쇠약에 걸려서 최근에는 혹은 울기도 하시고 혹은 노래도 부르시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조선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이 철천의 한이 되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나는 이 사회를 모른다」 하시고 미친 사람 같이 날뛰셨답니다. 병은 그 때문에 심해진 것이지요.

경성에서 떠나시던 전날은 우리 여러 형제를 불러 앉히시고 여러 가지 장래 일을 훈계하신 뒤 형님은 미국으로 가라 하시고 나는 여기서 그대로 의학을 배우라고 하셨지요. 또 문중에서 학교 두 곳을 설립하셔서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셨지요. 도무지 모든 일이 꿈결 같습니다. 가실 때에 당신 평생을 지내실 만큼은 가지고 가셨으나 원래 도무지 너와 나를 구별하시지 않는 성격이라 누구든지 조선사람이라면 한 집에 두시고 지내셨으므로 돌아가실 즈음에는 생활도 좀 곤란하셨지요』 하며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민족적으로
대손실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친구 윤치소 씨 회고담

신 씨와 10여 년 동안 친교가 있던 윤치소 씨는 말하기를 『참 이 세상에서 다시 얻어 볼 수 없는 갸륵한 사람이오. 내가 제일 그 사람에게 감복한 것은 그 사람이 원래 재주가 출중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재주가 있으면 곧 겉으로 나타나지만 이 사람은 도무지 그것이 나타나지 아니하였소. 모든 일에 재간이 놀랍고 엄연히 군자의 태도가 있어서 나하고 광업회사에 같이 있을 때에 여러 친구들이 욕설로 농담을 하면 조금도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웃으며 『그 무슨 소리들이냐』고 하기 때문에 같은 연배 친구들이 모두 존경하고 이래서 자연히 열 몇 살 더 먹은 노숙한 사람과 교제를 하였지요. 또 문필이 다 얌전하고 다만 그 사람이 눈을 흘겨 뜨기 때문에 별호를 예관(睨觀)이라고 하였지요. 조선사람 전체로 보든지 나 개인으로 보든지 참으로 애석하오』 하며 아주 슬프게 말하였다.

광둥정부와도 교섭
중국 방랑 후의 그의 행동

상하이에 간 후 이때까지 그가 하던 일에 대하여 최근까지 사귀던 모 씨는 말하기를 경성에서 광업회사의 지배인으로 있다가 중국으로 간 후에는 남방 혁명가들과 많이 사귀어 쑨원과도 친하게 되고 더욱이 천치메이와는 너무나 친해져 동제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사법총장이라는 중임을 맡았고 광둥정부에 조선대표로 여러 가지 교섭을 하였고 교육사업으로는 박달학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여러 인재를 양성하고 최근까지 진단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사상을 고취하였고 종교로는 단군교를 위하여 힘썼다고 말하였다.

베이징에 머물던
어느 청년의 감상

베이징에서 유학하다가 신 씨와 사귀었던 모 청년은 말하기를 『내가 유학할 때에 베이징에는 유학생 40명과 기타 조선인을 합하여 대략 300명 가량이 있었으나 그때까지 조선사람끼리 아무 연락기관이 없었더니 신 씨와 와서 처음으로 300여 명을 초대하고 회를 조직하였으니 실로 베이징에서 조선인의 모임은 신 씨로 인하여 처음으로 열리었고 그때도 일본 정부의 수색이 심하였지만 심지어 중국 순경까지 그에게 감복하여 늘 체포할 기미가 보이면 미리 알려주어 무사하였소』 말하였다.

금옥 같은 그 인격
사망소식에 놀라는
그의 장인의 감상

그의 장인 되는 조종만 씨를 방문하니 조 씨는 아직 그의 부음도 듣지 못하고 있다가 기자가 전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아― 기어이― 불행하였군. 세상 일이 모두 우습다!』 하고 침통하게 말을 꺼내며 『평생을 통해 터럭 하나만큼의 결점이 없고 오직 의리로 평생을 마친 사람이지요. 성격이 엄숙 침착하며 일처리에 자상하고 평소에 즐거움으로 삼기를 옛글이나 고물 같은 것을 좋아하였고 처음에는 나와 같이 기독교에 아주 뜻을 두었다가 도중에 단군교에 매우 힘을 썼으며 어릴 때부터 그처럼 널리 친구를 사귀면서도 주색 같은 것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여러 모로 보아도 무던한 사람이지요. 지금 유족은 아내와 남매의 자식이 있는데 딸은 현재 스물한 살로 상하이에서 민필호에게 출가하고 아들은 지금 열한 살인데 장래 문제가 염려된다』고 슬프게 말하였다.

옆에 있던 조 씨의 부인은 저런 변이 있나 기어이 불행하였구먼―아무튼지 젊은 사람으로 그렇게 얌전한 사람은 없지요. 오죽해야 우리 집안에서 딸보다 사위를 더 사랑하였지요. 자기 장인이 아들이 없어서 영감이 병환이 나시면 흔히 나와 밤을 새우는데 며칠 밤을 새워도 조금도 불안한 사색이 없었지요. 내가 하도 딱해 보여서 좀 누우라고 하면 『저는 괜찮습니다. 좀 누우시지요』 하고 인정 있고 싹싹한 성품이 내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이 다시 없었소. 입이 짧아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였는데 만리타국에 가서 얼마나 고생이 되었겠소. 평시에는 편육을 아주 즐겨 먹었지요』 하며 슬픔에 싸인 얼굴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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