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수탈에 신음하던 1920년대의 동아일보를 보면 ‘제2국민’이란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비록 기성세대는 꿈도 희망도 가물가물해졌지만 장차 나라를 이어받을 제2국민, 즉 우리 아이들만큼은 건장한 신체와 강건한 정신을 겸비한 재목으로 길러내자는 염원을 담은 표현이었죠. 3·1운동 이후 기독교와 천도교 단체에 소년부가 설치되고 조선 각지에 소년단체가 속속 생겨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움직임은 1922년 일대 전기를 맞습니다. 10월 5일 계동 중앙고보 뒤뜰에서 발대식을 갖고 ‘조선소년척후군’이 탄생한 겁니다. 이들은 매주 모여 등산, 수영, 노 젓기, 야영과 같은 자체활동을 하는 외에 수해 때 이재민 구제에 나서는 등 사회봉사도 활발히 했습니다. 적의 형편이나 지형을 정찰·탐색한다는 뜻의 척후(斥候)는 영어로는 스카우트(scout)이니 짐작할 수 있으시겠죠? 바로 한국스카우트의 원조였던 거죠.
이즈음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도 ‘소년척후단’을 창설해 조선소년척후군은 자연스럽게 ‘조선소년군’으로 불렸습니다. 소년척후단이 종교적 색채가 짙고 순수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지향했다면 조선소년군은 규율이 더 엄격했고 무엇이든 ‘조선식’을 앞세우는 민족적 성향이 특징이었죠. 이들은 3·1운동 5주년인 1924년 3월 1일을 기해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으로 통합했지만 이 같은 노선 차이 때문에 얼마 못가 갈라서게 됩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0월 7일자 3면 ‘조선 초유의 소년군’ 기사에서 8명의 대원이 단복을 차려입고 척후기를 든 사진을 곁들여 조선소년군 창설 소식을 전하며 ‘용감한 기운을 기르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고상한 인격을 갖추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다음날에는 1면 사설 ‘조선소년군의 조직’을 통해 ‘용기와 의로움을 갖춘 제2국민의 양성은 민족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소년군은 작은 시험이지만, 그것이 미칠 영향은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고 큰 기대를 나타냈죠.
조선소년군이 민족을 강조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설립자인 관산 조철호의 영향이 큽니다. 구한말 열강의 틈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다니던 관산은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자 일본 육사로 옮겨 군인의 꿈을 완성합니다. 귀국 후 용산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군사기밀을 빼내 만주로 망명하다 체포됐지만 간신히 악형을 면하고 평북 정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죠. 여기서 3·1만세시위를 주도해 다시 옥고를 치른 관산은 중앙고보 체육교사로 부임해 본격적인 소년운동에 투신합니다.
그가 조선소년군을 창설하고 일반 학생들에게도 군대식 체조를 시키자 “군국주의 산물이니 폐지하는 게 옳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관산은 “느른한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일축했죠. 1924년 동아일보 신년호 인터뷰에서는 “심하다고 할지 몰라도 겁 많고 용기 없는 조선에는 군국주의 정신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우리 것 빼앗아가는 놈에게 큰소리라도 해보는 용기를 기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맞받아치기도 했습니다.
관산은 1926년 6·10만세운동 때 학생들을 배후 지원하다 또 체포돼 일제의 압력으로 중앙학교를 사직했지만 북간도에 망명해 소년 독립군을 길러냈고, 그 후 돌아와 동아일보에 적을 두고는 조선소년군 재건을 본격화했습니다.
조선소년군의 구호는 ‘의여차(義如此)’였습니다. 1933년부터 발간된 조선소년군 기관지도 의여차였죠. 한자로는 의로움이 이와 같다, 이 같이 의로운 사람이 되자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예부터 여럿이 함께 힘든 일을 할 때 일제히 소리 내는 “어기여차”, “어여차”와도 비슷합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조선소년군에 딱 들어맞는 구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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