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권력자 홍보신문 기자가 개과천선하더니 그 결말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7일 11시 40분


코멘트

1922년 12월 19일



플래시백
1922년 11월 20일 새벽 경성 필운동 백대진의 집에 형사 2명이 들이닥칩니다. 백대진을 종로경찰서로 붙잡아 간 뒤 다시 장재흡을 체포합니다. 백대진은 1921년 7월 창간된 월간잡지 신천지의 주간이고 장재흡은 같은 잡지 영업부장이었죠. 종로경찰서는 두 사람을 연행한 이유를 공개하지 않고 취조를 계속했습니다. 두 사람을 잡아간 뒤 17일째인 12월 7일에야 백대진은 재판에 넘기고 장재흡은 기소유예로 풀어주었죠.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정치의 변혁을 선전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일제 총독통치가 시작된 뒤 첫 잡지 필화인 만큼 백대진은 저항정신이 투철한 언론인이었을 듯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죠.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 1919년 매일신보에 입사했습니다. 1919년은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해였지만 매일신보 지면에서는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죠. 3월 7일자에야 ‘각지 소요사건’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매일신보 기자들을 비난하고 물리적 위협까지 했습니다. 양식 있는 기자들은 갈등이 심해 줄줄이 퇴사했죠. 편집부장이던 이상협이 그만두고 다음해 창간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새 출발한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백대진은 이런 사정으로 빈자리가 생긴 권력기관 홍보매체 매일신보에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던 것이죠. 이 때만해도 그에게 민족이니 독립이니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1920년 미국 상하원 의원단의 조선 방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가려는 의원단을 조선에 들르도록 교섭해 우리의 독립의지를 보여주려고 했죠. 동아일보는 김동성과 장덕준을 특파해 이들을 설득했습니다(동아플래시100 2020년 4월 21일자 참조). 총독부 기관지인 일어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도 기자를 보냈죠. 기관지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이때 파견된 매일신보 기자가 백대진이었죠. 의원단의 특별열차에 동아일보 기자는 가로막히고 기관지 기자만 탔습니다. 동아일보는 ‘배일에 반대 선전…매일신보 기자 백대진 씨 활동’ 제목으로 폭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1920년 8월 25일자였죠.

①의 위는 1920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매일신보 기자 백대진이 배일에 반대하는 선전 활동을 했다고 폭로했다. 아래는 동아일보 기자는 미국 의원단의 특별열차를 타지 못하게 차단당했다는 기사의 제목. ②는 백대진이 1920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미 의원단과 면담한 과정과 내용을 소개한 기사 제목. ③은 백대진이 8월 28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을 오해하지 말고 감정에서 벗어나라고 호소한 기사의 제목.
①의 위는 1920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매일신보 기자 백대진이 배일에 반대하는 선전 활동을 했다고 폭로했다. 아래는 동아일보 기자는 미국 의원단의 특별열차를 타지 못하게 차단당했다는 기사의 제목. ②는 백대진이 1920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미 의원단과 면담한 과정과 내용을 소개한 기사 제목. ③은 백대진이 8월 28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을 오해하지 말고 감정에서 벗어나라고 호소한 기사의 제목.

백대진의 이름이 기사화되자 비난의 눈총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매일신보 8월 27일자에 ‘당신이 정말 조선사람인가?’라고 따져 묻는 미 의원에게 조선의 실정을 솔직하게 전했노라고 소개했죠. 그래도 성난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다음날에는 ‘금수강산 반도의 형제자매여, 나 역시 반도의 비와 이슬을 받고 태어나 자란 조선인인데 어떻게 양심을 속이고 조상을 잊겠느냐’는 제목으로 또 기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우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참아야 하겠도다. 이것이 곧 우리가 꽃다운 장래와 힘 있는 미래를 얻는 방법이 되겠다’는 의견을 의원단에 전달했다고 나오죠. 한 번 떠난 민심이 돌아올 리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표를 던지고 신천지 주간으로 다시 태어나 총독통치를 맹렬하게 공격했죠. 그가 신천지 창간호에 쓴 ‘신천지임을 선언하노라’는 검열로 모두 삭제당했습니다. 급기야 그가 11월호에 쓴 ‘일본 위정자에게 고함’이 보복의 빌미가 됐죠. 참정권이나 내정독립은 조선인의 성에 차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매일신보 기자 때 미 의원단에 전한 의견과 정반대의 주장이었죠. 1922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가 전한 재판기사에서 그가 ‘이전에 일본인에게 많은 모욕을 받고 분하던 중에’ 글을 썼다고 한 말은 매일신보 시절 겪었던 마음고생을 고백한 것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는 총독부를 표나게 편들었다가 뚜렷하게 맞서기도 해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죠. 6개월 복역 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기자로는 불우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