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하이라이트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결정되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달리기 마니아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육상 종목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린다. ‘육상의 꽃’은 단연 남자 100m다. 지구에서 가장 빠른 인간을 가리는 남자 육상 100m는 짧지만 화려하다. 출발 총성과 함께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종목이다.
누군가에겐 그렇게 화려할지 몰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였던 김국영(35)에게는 허탈한 꿈 이상도 아하도 아니었다.
김국영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육상 남자 100m에 출전해 10초37을 기록했다. 한국 선수로는 20년 만에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김국영은 “분명히 총소리는 들었는데 이후 어떻게 뛰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눈을 뜨니까 이미 레이스가 끝나 있었다”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선수였나 하는 허탈감과 함께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던 김국영의 달리기 모습. 김국영 제공지구 정반대 편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 선수단은 3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야 했다. 김국영을 비롯한 육상 대표팀은 경기가 열리기 나흘 전에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이틀 정도 한 뒤 레이스를 했으니 정상 컨디션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달렸으나 레이스는 10초 만에 끝났다. 김국영은 “올림픽의 중압감은 이전에 뛰어본 대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다른 선수들을 따라가다가 끝난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일반적으로 경기 이튿날 곧바로 귀국한다. 김국영 역시 바로 다음 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갈 때와 똑같이 올 때도 30시간이 넘게 걸렸다. 불과 10초 경기를 위해 비행기만 60시간 넘게 탄 것이다.
김국영은 2024년 파리 올림픽 때는 해설위원으로 프랑스 파리 현지를 찾았다. 김국영 제공하지만 리우에서의 허탈한 기억은 그에겐 엄청난 자극과 동기부여가 됐다. 김국영은 “여기서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리우 올림픽 이듬해인 2017년은 김국영 육상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6월 25일 열린 전국육상경기대회 남자 100m 준결선에서 그는 10초13을 뛰며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2전 전 자신이 세웠던 한국기록을 0.03초 단축했다.
그리고 이틀 뒤 열린 코리아오픈 국제 육상대회 결선에서 10초07로 골인하며 재차 한국신기록을 경신했다. 한국인 사상 첫 9초대 진입도 기대되는 페이스였다.
0.08초. 김국영은 바로 그 찰나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끝내 10초의 벽은 넘지 못했다. 김국영은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100m 9초대 진입은 한국 육상의 미완의 숙제로 남고 말았다.
10초 벽을 넘기 위해 그는 갖은 노력을 다했다. 트랙 위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9초대 진입에 맞췄다. 사우나 등에 갈 때면 그는 숫자 9가 들어간 9번이나 99번 로커를 사용했다. 자동차 번호판을 고를 때로 숫자 9가 많이 들어가는 걸 골랐다. 현재 그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숫자 9가 3개나 포함돼 있다. 김국영은 “심지어 아파트로 이사할 때도 9층 집을 먼저 알아봤다. 그런데 9층 집 물건이 없어 뜻을 이루진 못했다”며 웃었다.
2019년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김국영(가운데)의 모습. 뉴시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지만 하늘은 끝내 그에게 9초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국영은 “돌이켜 보면 평생 목표가 9초대 진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나마 10초07을 뛸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며 “만약 내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더 큰 꿈을 꿨다면 9초대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후배들에게도 ‘항상 꿈을 더 크게 가지라’고 조언한다”라고 했다.
김국영은 은퇴에 대해 “미련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9초대 선수가 나오기 위해선 무엇보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여기에 선수의 노력, 지도자의 열정, 당일 날씨와 컨디션 등이 더해져야 나올 수 있다”라고 했다.
2019년 전국육상선수권은 어쩌면 그에게 다시 못 올 기회였다. 준결선에서 맞바람을 뚫고 10초12를 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하루 뒤 열린 결선에서 10초18에 그쳤다. 그는 “뒷바람이 조금만 불어줬으면 9초대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짹짹거리는 새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고 했다.
‘한국 1등’ 김국영 육상 선수와의 인터뷰. 동아일보 DB 작년 10월 초 은퇴한 김국영은 짧은 휴식 후 국가대표 지도자가 돼 다시 진천선수촌으로 돌아왔다. 여자 단거리 국가대표팀 코치가 그의 새 직함이다.
김국영은 “약 두 달여 동안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서 행복하게 지냈다”며 “이렇게 1, 2년 쉬어보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 몸에 여전히 스프린터의 기운과 경험이 남아 있을 때 후배들을 지도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복귀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데 왜 남자 대표팀이 아니라 여자 대표팀일까. 김국영은 “최근 남자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지만 여자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여자 대표팀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영숙(61)이 1994년 세운 여자 100m 한국기록 11초49는 올해로 3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19살이던 2010년 전국육상선수권 남자 육상 100m 예선에서 10초31을 뛰며 고(故) 서말구가 1979년 세웠던 종전 한국기록 10초34를 31년 만에 경신했는데 이보다 더 오랜 기간 깨지지 않고 있다. 김국영은 “가을에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400m 릴레이에서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도록 돕고 싶다”라고 했다.
김국영과 멀리뛰기 국가대표 출신 김규나 부부는 올해 쌍둥이 아들의 부모가 된다. 김국영 제공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9초대의 벽을 후배 선수들이 깨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한국 육상은 주변국들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중국과 일본에선 이미 10년쯤 전에 10초대 벽을 허문 선수가 나왔다. 중국의 쑤빙톈(37)은 2015년, 일본의 기류 요시히데(31)는 2017년에 각각 처음 10초 벽을 깨뜨렸다. 육상 불모지로 통하는 동남아에서도 100m를 9초대에 달리는 선수가 나왔다. 태국의 푸리폴 분손(20)은 작년 12월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9초94를 기록했다. 이 종목 세계 기록은 ‘번개 우사인 볼트(자메이카)가 2009년 세운 9초58이다.
올해부터 지도자로 새출발하는 김국영은 올해 아빠로도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2023년 국가대표 멀리뛰기 선수 출신 김규나(36·은퇴)와 결혼한 그는 조만간 쌍둥이 아들의 아빠가 된다. 엄마, 아빠의 육상 DNA를 물려받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주변에서 더 크다. 김국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서 만약 운동을 못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라며 “무조건 운동을 시킬 생각은 없다. 아이들이 운동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이왕이면 한 명은 나처럼 단거리 선수, 또 한 명은 아내처럼 멀리뛰기 선수로 키워보고 싶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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