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이 된 김장 조끼[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1월 25일 23시 18분


보통 5000∼1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시장표’ 김장 조끼의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이 화제가 되고 있다. 명품 브랜드에서 김장 조끼를 그대로 베낀 듯한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발렌티노는 알록달록한 꽃무늬에 털 장식을 단 조끼를 내놓았다. 가격이 무려 630만 원이다. 제품명 자체에 김장 조끼를 연상시키는 ‘겨울이 지난 후’(프랑스어로 Après l’Hiver) ‘작은 꽃들’(이탈리아어로 ‘Fiorellini’) 같은 단어가 들어 있다. 몽클레르도 큼직한 꽃무늬가 박힌 오리털 조끼를 233만 원에 판다. 지난해 아디다스도 진홍색 꽃무늬 재킷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

▷마당에 둘러앉아 고무 대야에 잔뜩 쌓인 김치를 종일 버무리려면 따뜻하면서도 팔, 다리가 움직이기 편해야 했다. 솜으로 누빈 김장 조끼와 몸뻬 바지는 실용성과 보온성을 갖춘 최고의 작업복이었다. 김장 조끼가 상징하는 ‘시골’ ‘김치’ ‘할머니’는 개발도상국 한국에서 자란 세대에겐 정겹지만 촌스러운 감성이었다. 그런데 선진국 한국에서 태어난 잘파(Z+알파) 세대는 달랐다. 거리낌 없이 할머니 옷장을 열고 ‘쿨(Cool)’하고 ‘힙(Hip)’한 패션으로 새롭게 해석했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신을 드러냈다.

▷김장 조끼 열풍은 전형적인 ‘K컬처’ 확산 공식을 따른다. 블랙핑크 제니, 에스파 카리나가 김장 조끼를 입은 사진이 SNS를 타고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이 입은 김장 조끼가 도대체 무엇인지 서사를 다룬 기사가 쏟아지고, SNS에선 인증 사진이 줄을 잇는다.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은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 목록에 오르면서 전통시장 매대를 점령했다. 외국 여행을 갔다가 김장 조끼를 입은 현지인을 봤다는 목격담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이베이(eBay), 엣시(Etsy) 등 온라인 쇼핑 플랫폼에서도 팔리고 있다.

▷한류는 K팝, K드라마를 넘어 직접 가서 입어 보고, 먹어 보는 한국의 일상을 체험하는 놀이로 진화했다. 이제 명소를 찍고 돌아가는 단체 관광이 아니라 ‘한 달 살기’처럼 한국 문화에 녹아드는 관광이 뜨고 있다. 김장 조끼와 몸뻬 바지를 걸치고 김치를 담가 보고, 광장시장 노점에서 식사하고, 구석구석 골목길을 걷는다. 우리의 일상이 ‘쿨’하게 소비된다는 건 한국이 경제 강국에서 문화 강국으로 거듭났다는 뜻일 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3년 전 ‘기생충’ ‘오징어 게임’으로 대표되는 한류를 다룬 기사에서 ‘20세기 내내 쿨이라는 개념을 서구가 독점했지만 이제는 대중문화가 다극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구 문화의 일극 체제가 무너진 건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문화가 융성하고, 온라인에서 누구나 미디어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그 드문 행운을 누리는 나라에 살고 있다.

#횡설수설#김장 조끼#K컬처#문화 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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