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의 겨울 음식, 블랑케트 드 보[정기범의 본 아페티]

  • 동아일보


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정기범 작가·‘저스트고 파리’ 저자
파리에서 겨울을 보내며 따뜻한 스튜를 즐기는 것은 계절이 주는 작은 호사다. 그중 내가 유난히 자주 찾게 되는 요리가 바로 ‘블랑케트 드 보’다. 이상하게도 이 음식을 먹을 때면 곰탕이나 설렁탕이 떠오른다.

블랑케트 드 보는 버터와 크림이 들어간 송아지 고기 스튜다. 고기를 볶지 않고 조심스럽게 익혀 하얀 소스의 색을 유지한다. 강한 불이나 자극적인 양념 대신 오랜 시간 은근하게 익혀 육수의 맑음을 지켜낸다는 점에서 곰탕이나 설렁탕과 닮았다. 물론 프랑스 요리인 만큼 자작한 소스가 한국 음식의 국물처럼 넉넉히 담기지는 않는다. 하나는 소스로, 하나는 국물로 완성됐을 뿐 두 요리는 모두 시간과 절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닮은 음식이다.

블랑케트 드 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파리와 파리 근교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흰색’을 뜻하는 블랑(Blanc)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를 볶지 않고 은은하게 익혀 밝은 색을 유지하는 것이 이 요리의 핵심이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남은 송아지 고기나 질긴 부위를 활용해 먹던 실용적인 요리였다. 지금도 프랑스 전역의 가정식 레스토랑, 즉 비스트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민 음식이다. 복잡하고 장식적이던 19세기 프랑스 요리를 정리해 소스 체계와 레시피를 표준화하고 주방 조직을 확립한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는 1903년 저술한 ‘요리의 길잡이(Le Guide Culinaire)’를 통해 이 요리의 레시피를 일찌감치 정리해 놓았다.

조리법은 단순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송아지의 어깨, 가슴, 목 부위와 함께 당근, 양파, 대파, 샹피뇽 드 파리(양송이버섯)를 넣고 약한 불에서 오랜 시간 익혀 고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여기에 버터와 밀가루로 만든 루와 육수를 더해 조리한 뒤, 마지막에 신선한 생크림과 레몬즙을 넣어 소스를 완성한다.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이때 계란노른자를 함께 넣어 소스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불에서 완전히 내려 노른자를 섞어야 소스가 깨지지 않는데, 이 과정이 블랑케트 드 보 특유의 부드럽고 벨벳 같은 질감을 완성한다. 최근에는 보다 가볍게 즐기기 위해 노른자를 생략하고 생크림과 산미만으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많다.

이 전통적인 가정식을 미슐랭 스타 셰프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최고급 식탁에 올리기도 한다. 프랑스 유일의 미슐랭 3스타 여성 셰프 안소피 피크는 레몬 대신 산초와 베르가모트를 사용해 보다 미묘한 산미를 강조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받은 프랑스 셰프 중 한 명인 알랭 뒤카스는 밀가루 사용을 최소화해 육수의 순도를 극대화한다.

파리에서 이 요리를 즐길 수 있는 비스트로로는 현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Bistrot Paul Bert’, 오페라 지역의 가정식 레스토랑 ‘Le Mesturet’, 마레 지구의 아늑한 ‘Le P’tit Bistrot’,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는 ‘Bouillon Chartier’ 등이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음식. 블랑케트 드 보는 프랑스 겨울 식탁의 온기를 가장 조용하게 전해주는 요리다.



#정기범의 본 아페티#프랑스인#겨울 음식#블랑케트 드 보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