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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경임 논설위원입니다.

woohaha@donga.com

취재분야

2024-06-23~2024-07-23
칼럼100%
  • ‘아침이슬’ 남기고 떠난 김민기[횡설수설/우경임]

    ‘이날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200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내 마음속의 별’ 시리즈에서 가수 조영남은 21일 세상을 떠난 고 김민기를 자신의 스타로 꼽았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돈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이라도 사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만큼 “어설픈 돈 자랑, 힘자랑을 싫어한다. 바른 결을 타고났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한 단어로 응축한다면 그의 말처럼 ‘좋은 사람’ 아닐까. ▷1970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만든 노래 ‘아침이슬’이 군사정권 시절 광장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고 고인은 정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른 건 생계를 위해 취업했던 피혁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노동자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다. 현실을 노래할수록 그는 시대의 한가운데로 소환돼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70, 80년대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정작 “제 노래를 싫어한다”며 부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한 젊은 날, 음악으로 시려웠던 젊은 날. 그 시절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1991년 ‘저항의 상징’이라는 틀을 깨고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연출가로 변신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는 29년 동안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성장했고, 현재 영화계 주역인 배우들이 배출됐다. 배우들과 투명하게 수익을 나누는 등 공연계의 악습도 바꿔 나갔다. “소극장은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더니 고인은 걸출한 농사꾼이었다. 그가 33년간 고집스레 지켜 온 학전은 지금 만개한 우리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라고 했지만 빈소에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며 흐느끼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 문을 닫은 학전 경영이 어려워진 건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수익이 되지 않는 어린이 공연을 꾸준히 올렸던 때문도 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학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를 가르칠 적부터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민중가요 가수와 어린이극 연출자, 평생 자신보다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고인이었기에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때론 가혹했을 세상에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저 고맙다”였다고 한다. 배우들을 향해 “나는 뒷것, 너네들은 앞것”이라며 빛나기를 거부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며 뒷것을 자처했고 가족과 지인에게는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민기. 향년 73세. 좋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고단했을 그의 평안을 기원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1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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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은 ‘불장’ 조짐, 지방은 ‘미분양’ 적체… 양극화 심화되나[횡설수설/우경임]

    서울 아파트 가격이 슬금슬금 오르며 ‘불장’ 조짐을 보이지만 지방 주택시장은 여전히 냉기가 돈다. 최근 전국 아파트 평균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서울 아파트 한 채(12억9967만 원) 가격이 지방 아파트 3.7채 값이다. 10년 전만 해도 지방 아파트 두 채면 서울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서울 입성’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서울과 지방 부동산의 ‘초양극화’ 현상은 분양 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른바 악성 미분양으로 분류되는 준공 후 미분양은 5월 말 기준 1만3230채로 최근 10년간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방이 80%를 차지한다. 공사가 끝난 뒤 사용 승인이 나고도 안 팔린 아파트를 떠안은 건설사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한 자금을 갚을 수 없다.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이라도 하면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 경제에 이런 악재가 없다. 올해 상반기 부도를 맞은 건설사는 20곳으로 이미 지난해 1년 치 수준과 맞먹는다. ▷도산 위기에 직면한 지방 중소 건설사들은 원금 보장, 할인 분양 등 ‘미분양 떨이’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전국 시도에서 미분양 물량이 가장 많은 대구의 경우 전체 분양가의 15%를 깎아주고 2500만 원을 환급해 준다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이 아파트는 입주 2년 후 시세가 떨어지면 원래 매입 가격에 다시 사 주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기존에 분양받은 입주민들과의 갈등도 심해지고 있다. 할인 가격에 분양받은 입주민의 이사를 막으려고 정문을 지키거나 아예 철조망을 두른 곳도 있다. 할인 분양받은 입주민에게는 관리비를 비싸게 물리기도 한다. ▷지방 미분양 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 현상은 고금리로 집 살 사람은 줄었는데 분양가는 높게 책정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치솟은 자재값, 임금 등이 분양가에 반영됐다. 건설사의 자구 노력도 부족했다. 정확한 수요 예측 없이 아파트부터 지었고 원가 절감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려 하지 않았다. 수요가 몰리는 서울은 그 격차가 덜하지만 지방 아파트 분양가는 매매가보다 ㎡당 평균 163만 원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의 똘똘한 1채로 투자 쏠림이 더욱 심해지면서 지방 건설업 생태계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지방 곳곳에 철근을 드러낸 채 공사가 멈추거나 입주가 지연되는 아파트가 늘고 있다. 자금력이 달리는 지방 중소 건설사와 그 협력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고 인근 상권들도 맥을 못추고 있다. 서울과 지방 주택 시장의 초양극화가 심화하면 지방의 박탈감이 커지고 지방 소멸은 가속화할 우려가 크다.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 정책을 달리 쓰는 세심함이 필요한 시기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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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악성 임대인 절반이 ‘임대사업자 혜택’ 누린다니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안심 전세 포털’을 통해 전세 보증금을 상습적으로 돌려주지 않은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달 기준으로 127명이다. 그런데 이 중 절반이 넘는 67명이 임대사업자 자격을 유지하며 취득세·재산세, 양도소득세 감면 같은 각종 세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UG가 악성 임대인의 전세 보증금을 대신 갚아주고, 정부는 세금까지 깎아주고 있으니 기막힌 일이다. ▷임대사업자 등록이 취소되지 않은 악성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반환한 금액이 무려 7124억 원에 이른다. 1인당 평균 106억 원씩이니 이들이 얻은 경제적 이득이 막대하다. 그 피해자만 3000명이 넘는다. 전세사기를 예방하겠다며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고도 국토교통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임대사업자 취소 같은 후속 조치를 제때 하지 않았다. 명단을 공개했으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일하는 척하는’ 행정이다. ▷지난 3년간 전세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임대사업자 자격이 취소된 건 7명에 불과하다. 악성 임대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려면 떼어먹은 전세 보증금이 3년간 2건 이상, 2억 원 이상이고 채무 상환 의지가 없음을 확인해야 한다. 이처럼 악성 임대인 지정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임대사업자 자격을 취소시키려면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임차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세입자가 승소했거나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이 성립했는데도 반환하지 않는 경우 등으로 한정돼 있다. 세입자 스스로 전세사기를 당했음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임대사업자 등록을 취소시킬 수 있는 구조다. 엄격한 규정이 피해자를 보호하기보다 재량과 책임을 줄여 공무원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HU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사고액은 2조6500억 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동기 대비 사고액이 43%나 폭증했다. 전세사기로 빌라 기피 현상이 뚜렷해진 데다 집값이 정점이던 때 계약한 빌라, 연립 등에서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 금액을 올리고 가입 대상을 늘리는 등 섣부르게 전세 시장에 개입했던 대가를 이제사 호되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나랏돈이 아니라 내 돈을 떼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뻔히 갚지 않을 돈을 빌려주거나, 버젓이 임대 사업을 계속하도록 하면서 세제 혜택까지 줄 수 있을까. 이러니 호텔 가서 밥 먹고, 차를 몇 대씩 굴리는 악성 임대인을 마주치고 사기를 당한 세입자들이 가슴을 친다. 악성 임대인의 임대사업자 자격이 유지되는 동안 어떤 세입자가 추가로 피해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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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36주 낙태’라며 영상 올린 유튜버… 진짜라면 ‘살인’

    24세 만삭 임신부라고 주장하는 유튜버가 낙태 시술을 받은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36주가 된 태아를 지우려 병원을 찾아다니고, 그 과정을 정성스레 편집해 공개하는 발상이라니…. 비윤리적이라기보다 윤리적 감각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현재 이 영상은 삭제된 상태다. 경악스러운 내용에 논란이 확산하면서 유튜브 구독자는 2만4000명으로 20배 넘게 늘었다. ▷우리나라 산모의 평균 출산 주수가 37주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뿐이지 36주면 온전한 아기라고 볼 수 있다. 영상에서 유튜버의 수술을 거절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의사는 “심장이 잘 뛴다. 낳아야 한다”고 했다. 해당 유튜버는 병원 2곳에서 거절당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900만 원을 주고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유튜브 내용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있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만삭이 되도록 임신을 몰랐다는 점, 임신이나 수술로 인한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점, 수술 3일 만에 영상을 제작했다는 점 등을 들어 ‘조작설’에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보건복지부는 해당 유튜브 영상의 사실관계를 파악해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튜브 내용대로라면 살인죄 적용이 가능하다. 영상에서 유튜버는 개복 수술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만약 사실로 밝혀진다면 낙태가 아닌 신생아 살인이다. 이미 34주 된 태아를 낙태한 의사가 살인죄로 처벌받은 판례도 있다. 다만 해외에 서버가 있는 유튜브 특성상 해당 유튜버와 수술 의사를 아직 특정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자살을 시도하거나 칼부림 끝에 살인이 일어나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되더니 진위를 떠나 ‘36주 낙태’ 영상이 버젓이 노출됐다. 선정적인 막장 콘텐츠도 자극이 약한 것인지 이제는 폭력, 살인 등 반사회적인 콘텐츠가 유튜브에서 판을 친다. 상식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알고리즘을 타고 이런 자극적인 유해 콘텐츠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중독을 낳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조회 수, 구독자 수가 곧 수익으로 직결되는 구조 안에서 돈벌이 경쟁을 벌이는 유튜버들의 자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튜브는 국내 사용자 1위 앱이다. 1인당 월평균 사용 시간도 40시간을 넘어섰다. 어린이, 청소년도 별다른 제한 없이 접근 가능하다. TV 방송처럼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인 공간이 유해 콘텐츠로 도배가 됐는데도 정부는 해외 플랫폼이라는 이유로 규제에 손을 놓고 있다. 불법 콘텐츠에 대한 정보와 이를 삭제할 기술까지 독점한 플랫폼에 책임을 지우지 않고는 유해 콘텐츠의 범람을 막을 길이 없다. 정부가 더 이상 플랫폼 규제를 망설여서는 안 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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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물에 타서 쓰는 피? 인공 혈액 개발 각축전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개발 기관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실온에서 보관 가능한 분말 형태의 인공 혈액을 개발하는 데 지난해 4600만 달러(약 634억 원)를 지원했다. 군사용 신기술을 연구하는 DARPA가 인공 혈액에 투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대형 재난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를 대비해 혈액의 안정적인 보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2022년 코로나19가 한창일 당시 혈액 보유량이 급감해 국가 혈액 위기를 선포한 적이 있다. ▷DARPA가 투자한 프로젝트는 산소를 구석구석 나르는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 대체재를 만드는 것이다. ‘에리스로머(Erythromer)’라고 하는데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해 지질 막을 씌운 입자다. 혈액은 최장 42일간 냉장 보관이 가능하지만, 동결 건조된 분말인 에리스로머는 2년간 실온 보관이 가능하다. 냉장 시스템이 없어도 되고, 식염수와 섞어 쓰므로 보관과 배달이 용이하다. 혈액형과 상관없이 투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일본에서도 최근 에리스로머와 같은 원리의 인공 혈액이 개발됐다. 나라현립 의과대 교수팀은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진 혈액에서 헤모글로빈을 추출한 뒤 역시 지질 막으로 씌운 입자를 만들었다. 폐혈액을 활용하고 혈액 보관 기간이 15∼16배 늘어난다는 점에서 혈액 부족을 해결할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헤모글로빈을 대체한 인공 혈액은 산소 공급만 가능한 ‘반쪽’ 혈액이다. 몸속에서 진짜 혈액이 충분히 생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인공 장기보다 인공 혈액 개발이 뒤처진 것은 혈액의 구성이 그만큼 복잡해서다. 혈액의 절반은 액체인 혈장, 절반은 고체인 혈소판 적혈구 백혈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진짜 혈액을 모방한 인공 혈액은 추출한 줄기세포로 적혈구를 배양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2022년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이 방법으로 건강한 성인 2명에게 찻숟가락 정도의 수혈에 성공한 적이 있다. ▷선진국은 저출산 고령화로, 저개발국은 헌혈 인프라 부족으로 전 세계 국가의 60%가 만성적으로 혈액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인공 혈액 연구는 임상실험 전 단계로 10년 이내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헤모글로빈의 잠재적인 독성을 해결했는지가 상용화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해 범부처 ‘세포 기반 인공 혈액 제조 사업’이 출범하는 등 국내서도 인공 혈액 개발에 시동이 걸렸다. 인공 혈액 개발에 성공한다면 장기 이식용 혈액, 항암제용 혈액 등 맞춤형 혈액이나 희귀 혈액 생산까지도 가능해진다. 보건 안보로 접근해도, 인공 혈액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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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수백 채 빌라 굴리며 정부 보증금 떼먹는 악성 임대인들

    ‘빌라왕’ 60대 사모 씨가 전국에 보유한 주택은 718채, 전세보증금은 1874억 원이다. 채당 2억6000만 원꼴이다. 사 씨는 ‘동시 계약 진행’이란 악질적 전세사기 수법을 썼다.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전셋값을 부풀려 매매가와 똑같이 맞춘 뒤 같은 날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으로 그 집을 사는 방식이다. 집주인으로는 명의만 빌려온 가짜를 내세웠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가짜 집주인은 파산시키고, 돈은 다른 데 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올해 4월까지 약 7년간 사 씨를 대신해 세입자에게 돌려준 보증금이 546억 원인데, 경매를 통해 회수한 건 2억 원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 씨 보유 주택 중 전세 만기가 안 된 주택이 200채가 넘고, 보증금도 557억 원 남아 있다. 수사 중인 사 씨가 제때 보증금을 돌려줄 리 없으니 HUG가 변제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범죄 수익을 HUG와 피해자가 나눠서 부담하는 셈이다. ▷사 씨 같은 악성 임대인이 늘면서 HUG가 대신 변제한 금액은 3조 원에 가까워졌다. 회수된 금액은 10%에도 못 미친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보증금 반환 보증을 서는 HUG 모두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능력이 있는지 따지지 않는 게 전세자금 대출의 구조적 허점이다. 악성 임대인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유하며 수백 채씩 ‘갭 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사실상 전세사기를 방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회적 재난’이 된 전세사기에 대응해 정부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한다. HUG가 보증금을 대신 갚아준 주택이 3건 이상인 임대인 가운데 상환 의지 등을 고려해 지정한다. 문제는 심의를 거쳐 공개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그사이 애꿎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4월 기준으로 악성 임대인 664명이 공개됐는데 이 중 HUG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형사 고소·고발을 한 악성 임대인은 42명뿐이다. ▷‘주택도시기금’은 국민들이 집을 살 때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국민주택채권, 내 집 마련을 위해 붓는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된 자금이다. 원래 임대주택을 짓거나 낮은 금리로 서민들에게 주택 구입, 전월세 자금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할 돈인데 ‘빌라왕’ 같은 악성 임대인이 떼어먹은 돈을 갚는 데 뭉텅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절차가 까다롭고, 구제 방안도 대출 지원 중심이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쯤 되면 대체 누가 정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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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반부패 청렴 기관 권익위의 일탈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 수수와 관련해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한 이튿날인 11일부터 청탁금지법 질의응답 게시판에는 500여 개의 조롱성 질문과 항의성 글이 올라왔다.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는 결론에 대해선 “선생님인데 배우자는 명품 백을 받아도 되나”, 외국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통령기록물이라는 설명과 관련해선 “외국인 친구를 통해 선물을 전달하면 되냐”고 묻는 조롱성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꼬박꼬박 답변을 달아야 하는 권익위 직원은 울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명품 백-출산지원금 등 상식 밖 행보 권익위는 잘못된 행정이나 제도로 인한 국민 고충을 처리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정부 안 ‘내부 고발’ 조직이다. 당연히 공무원 입장에선 껄끄럽고 불편하다. 그렇다 보니 인력도, 예산도 넉넉한 적이 없었지만 2016년부터 시행된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 주무 부처로 접대 문화를 바꾸는 등 그 역할을 다해 왔다.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 구석구석 뿌리 내린 나쁜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는 상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법을 만든 권익위가 명품 백 수수 건 처리 과정을 통해 합법적인 청탁 통로를 온 나라에 공표했다. 이런 자기부정이 없다. 반부패 청렴 기관이라는 정체성을 헷갈리는 듯한 권익위의 행보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권익위는 출산지원금 1억 원을 주면 아이 낳을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응답자 63%가 긍정적이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저출산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작업이라고 설명했지만 ‘뜬금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의 1월 취임사를 보면 그 배경이 짐작된다. 유 위원장은 “노동·교육·연금의 3대 구조 개혁, 저출생 문제 등 국정 현안 등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져 달라”며 윤석열 정부 3년 차 성과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동기이고, 명품 백 수수 건으로 열린 전원위원회의 표결에 직접 참석했다. 최근에는 권익위가 전국 대학교 기숙사에 1인실을 확대하도록 권고할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민간 대학에 ‘감 놔라, 배 놔라’ 주문하는 것이라 행정기관을 상대하는 권익위 업무와는 거리가 있다. 대학생의 사생활 보호 차원이라면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해야 맞을 것이다. 2000원 생일 케이크도 금지했는데 명품 백 수수에 면죄부를 주는 논란의 결정이 있기 전 청탁금지법 질의응답 게시판을 훑어봤다. 드문드문 올라온 게시글 중에 고등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저희 반 친구들이 담임쌤 생일 때 2000원씩 모아서 생일 케이크를 사드리려고 한다. 김영란법에 걸릴 것 같아 케이크를 선생님과 학생들이 나눠 먹을 계획이다’라고 쓴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선생님이 이로 인해 많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요.’ 선생님을 걱정하는 기특한 질문에 권익위의 답변은 야박했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직무 관련성이 인정되므로 원칙적으로 청탁금지법상 허용되기 어렵다.’ 아마도 선생님의 생일 파티는 열리지 않았지 싶다. 당시 상심했을 학생들이 명품 백 수수 건에 대한 권익위의 답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체 우린 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건가. 권익위는 이번 명품 백 수수 건을 종결 처리로 손을 털 일이 아니다. 현재 배우자는 금품을 받을 수 없지만 이에 따른 처벌 조항이 없어 김 여사는 면죄부를 받았다. 이제라도 청탁금지법의 빈틈을 메우는 개정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2000원 생일 케이크조차 선생님께 누가 될까 봐 걱정하는 학생들이 지금 권익위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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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전세사기’ 반지하에 묶여 잠 못드는 피해 청년들

    “불안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버틸 수밖에요.” 동아일보가 장마철을 앞두고 전세사기 피해 건물을 돌아봤더니 임대인이 잠적해 방치된 탓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건물이 수두룩했다.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보증금을 떼이고 빚더미 수렁에 빠진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다. 피해자 대다수가 관리되지 않는 부실 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인천 계양구 하모 씨의 반지하 집은 문을 열면 복도에 물이 찰랑거린다. 하루 3번 펌프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 8000만 원을 떼이고 투잡, 스리잡을 하며 빚을 갚고 있다. 돈이 드는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부산 수영구 정모 씨는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고 산다. 지난해 장마 당시 배수시설이 미흡해 물이 넘쳤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그 역시 대출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갈 곳이 없어 버티고 있다. 전국 곳곳에 소방관로가 터졌거나 외벽 마감재가 떨어졌는데도 임대인이 잠적해 관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5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6606명이고,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층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그래서 집주인 빚을 떠안은 것도 억울한데 누수, 균열, 승강기 고장 등 건물 관리 부실의 피해까지 감내하고 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 절반 이상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번진 것은 제도적 맹점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다가구의 경우, 등기부 등본을 봐도 선순위 대출이나 다른 전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보증보험도 허술하게 관리돼 피해를 키웠다. 나태한 행정으로 전세사기를 방치한 정부가 장마철 홍수 피해가 걱정되는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17개 시도 중 피해자가 사는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가 일부라도 이뤄진 곳은 5개 시도뿐이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30 청년들이 저축을 깨고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은 이제 ‘전세 지옥’이라고 불린다. 반지하나 옥탑방을 벗어나 그저 조금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꿈꾼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다. 피해자들은 “승강기, 소방시설, 전기 설비 등의 안전 관리를 지자체가 지원해 주거나, 비용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혹시 무너질까, 물이 넘칠까 하는 걱정에 피해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도록 지자체가 최소한 시설 안전만큼은 지원에 나섰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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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SNS에도 술·담배처럼 경고문 붙여야

    올해 1월 미국 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아동 성 착취물 확산에 대한 빅테크의 책임을 추궁하는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방청석을 향해서 “누구도 겪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날 방청석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우울증이 유발돼 자살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앳된 모습의 자녀 사진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는 ‘블랙아웃 챌린지’ 영상을 찍다 사망한 자녀를 둔 부모도 있었다. 울음을 삼킨 채 방청석을 지킨 부모들은 SNS가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침묵으로 증언했다. ▷2010년대 들어 미국에선 10대 청소년의 우울, 불안, 자해가 급증했다. SNS가 대중화된 시기와 일치한다. SNS의 위험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며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 공중보건 최고책임자인 비벡 머시 의무 총감은 17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술과 담배처럼 SNS에 청소년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경고를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의무 총감의 이 같은 발언은 빅테크에 아동 보호 책임을 부과하는 법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청소년 정신 건강도 응급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그 원인 중 하나로 SNS가 지목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 10명 중 7명이 SNS를 사용한다. 청소년기는 전두엽이 완성되지 않아 충동이나 감정 조절에 미숙하다 보니 SNS의 부정적인 영향이 극대화된다. 하루 3시간 이상 SNS를 사용하는 청소년은 우울증, 불안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두 배로 늘어난다. 또래 압력에 취약해 마른 몸을 동경하며 거식증을 앓거나, 자해나 자살 같은 유해 콘텐츠에도 쉽게 중독된다. ▷3년 전 메타가 10대 여학생들에게 인스타그램이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내부 연구 보고서를 은폐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실이 내부 고발로 폭로됐다. 청소년 정신 건강에 덜 해로운 알고리즘 모델을 적용하면 이용자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는 미국 42개 주가 메타를 대상으로 ‘청소년 중독을 유도하도록 설계했다’며 소송에 나선 배경이 됐다. ▷SNS를 끊을 수 없는 건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알고리즘 탓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빅테크들이 돈벌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알고리즘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머시 의무 총감은 “자동차 사망 사고가 늘자 안전벨트를 도입했던 것처럼, SNS에도 안전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SNS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방안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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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갈수록 ‘수포자’도 늘고 ‘국포자’도 늘어서야

    요즘 입학 대기 줄이 가장 긴 학원은 독서·논술 학원이다. 국어는 사교육비가 두 자릿수씩 증가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도 문해력이 떨어지는 ‘국포자’(국어를 포기한 자)가 늘고 있어서다. 상수나 함수 같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를 만들기도 한다. 17일 발표된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선 학생 10명 중 1명이 ‘국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실시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중3, 고2 학생을 대상으로 국어, 수학, 영어 과목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것이라 문제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국어라면 비유법에 해당하는 문장을 고른다거나, 수학이라면 기본적인 인수분해를 하는 정도다. 따라서 ‘기초학력 미달’에 해당한다면 교실에 앉아 있어도 아예 수업을 이해 못 한다고 보면 된다. 그 위 단계로는 기초→보통→우수 학력 순으로 나눈다. ▷특히 고2 학생의 기초학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 8.6%, 수학 16.6%를 기록했다. 표집 조사가 시작된 201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중3 학생은 국어, 수학, 영어 모두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약간 줄긴 했지만 덩달아 보통학력 이상인 중상위권 학생도 급감했다. 기초학력이 개선됐다기보다 하향 평준화에 가깝다. ▷교육 당국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늘어난 건 코로나19 유행 동안 학교가 문을 닫은 탓이 크다고 분석한다. 그 기간 사교육 참여 시간, 스마트폰 사용 시간, 학습 공간 확보 등 개인적인 환경에 따라 학력 격차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가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음에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되레 늘어났다는 점이다. 학교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교육 사다리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코로나 세대’의 학력 격차가 평생에 걸친 직업과 소득 격차로 이어질까 봐 우려스럽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이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행한다.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진단해야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처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를 하고 학교별, 과목별 점수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별, 부모의 소득에 따른 점수까지 공개한다. 이 점수가 낮은 학교일수록 예산을 더 지원해 코로나19 학력 격차 해소에 나서고 있다. 국내서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두고 ‘학교 줄 세우기’라는 교육계의 거부감이 큰 탓에 전국 학생의 3%만 표집 조사를 한다. 사실상 학교 간 비교는 불가능해 맞춤형 지원이 이뤄질 수 없다. 경쟁을 터부시하며 무기력증에 빠진 학교부터 바뀌어야 ‘국포자’ ‘수포자’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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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의대 증원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오늘과 내일/우경임]

    전국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 40곳이 내년도 모집 요강을 발표하면서 의대 증원 절차가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간 의료계가 ‘파업 카드’를 살짝 꺼내 들기만 해도 무산됐던 의대 증원이 27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정부는 정말 의대 증원에 성공한 것일까. “조속히 논의” “우선적 추진” 같은 타성에 젖은 관료적 언어만 들리는 걸 보면, “의료 파국은 정해진 미래”라는 의료계 예언이 실현될까 두려워진다. 2000년 의약 분업도 ‘반쪽 개혁’ 끝나 의대 증원처럼 의료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단행한 의료 개혁이라고 한다면 의약 분업이 있다. 2000년 7월 의약 분업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는 파업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의료 대란 와중에 의약 분업이 전격 도입됐고 환자들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없고, 약국에 가면 약이 없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제도 안착 과정에서 혼란이 커지자 정부는 의약계를 번갈아 달래야 했고, 결국 원안과는 다른 ‘반쪽 개혁’이 됐다. 24년 전 의약분업은 약품 오남용 예방, 약제비 절감, 의약품 유통 구조 정상화 등을 목표로 했다. 의약분업이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의료 행태를 정착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당초 목표 달성에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약 복용량이 많고, 의약품 유통 구조도 후진적이다. 병의원엔 진찰료를 올려주고, 약국엔 조제료를 신설해주다 보니 이듬해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폭증했다. 의대 증원은 의료 시스템 수술이 뒤따르지 않으면 ‘반쪽 개혁’ 정도가 아니라 퇴보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미 의대 교육의 부실, 전공의 공백으로 인한 의사 수급 체계의 고장 등 의료 체계의 대혼란이 예고됐다. 의약분업 이후처럼 의료비도 증가할 수 있다. 의료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늘어난 의사들이 필수-지역 의료로 가지 않고 지금처럼 서울에서 피부 시술이나 통증 치료를 한다면 결코 국민 의료비 부담이 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필수-지역 의료로 의사를 유인할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필수 의료에 대한 보상을 강화한다지만 무슨 예산으로, 어떻게 원가를 보상할 것인지 구체적인 밑그림이 없다. 지역 인재가 지역에 정주할 대책도 없다. 최근 경상국립대가 졸업 후 10년간 지역에서 일하도록 하는 지역 의사 전형을 신설하려다 보류했다. 현행법상 관련 규정이 없어서였다. 전투에서 이기고 의료 개혁 전쟁서 질라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중증-필수 의료에 대한 보상 강화, 의료전달체계의 정상화, 전공의 수련 국가 책임제,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모두 우리 의료 시스템의 오래된 숙제고, 이미 해법이 나와 있는 사안이다. 정부는 2, 3년마다 의료계와 협의체를 만들어 이를 논의했지만 과감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거나, 국민을 불편하게 만들어 표심을 등질 정책이라 여태껏 미뤄 왔을 뿐이다. 의사들은 의료개혁특위를 두고도 “병원 이용을 제한하면 다음 선거에 질지도 모르는데 의료 개혁이 되겠냐”며 시큰둥하다. 정부는 의료 공백 사태 동안 경증 환자가 응급실을 찾지 않고, 대학병원의 전공의 의존도가 줄어들자 ‘의료 정상화’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의료 시스템이 비정상이었고, 이를 방치해 왔음을 자인하는 셈 아닌가. 이번만큼은 요란스럽게 대책을 발표하고는 정권이 바뀌면,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 없던 일이 되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의사를 늘려 놓고 의료 개혁을 실기한다면 우리 의료 시스템은 정말 망가진다. 의대 증원 그 이후가 진짜 의료 개혁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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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우경임]‘연금 개혁’ 국회 아닌 대통령이 하면 된다

    국민연금 개혁안을 논의하던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문을 닫은 셈이 됐다.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21대 국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하게 하기보다 더 충실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언급했고 막판 여야 합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1년 10개월 동안 공전을 거듭한 국회 연금특위는 무용론이 나올 정도다. 보험료율(내는 돈)을 13%까지 올리는 데는 합의했으나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43%로 올릴지, 45%로 올릴지를 두고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단 2%포인트 차이. 그래도 여야 의견이 이렇게 근접한 적이 없었다. 극적 타결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지만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여야 협상이 중단됐다. 과거 연금 개혁 과정에선 정부가 엑셀을 밟고, 국회가 브레이크를 걸곤 했는데 이번엔 야당이 “재를 뿌렸다”고 반발했다.개혁 구호만 있고, 의지는 안 보여 이제 연금 개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진의가 헷갈린다. 2022년 2월 여야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대통령은 “정권 초기에 이걸(국민연금 개혁) 해야 한다”고 했고, 대선 공약으로는 “대통령 직속 공적연금개혁위원회를 설치해 연금 개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지금껏 어느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비판 탓인지 기자회견에선 “임기 내 국회가 고르면 될 정도의 충분한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약속드렸고 지난해 10월 말 공약을 이행했다”고 했다. 24개 시나리오를 담은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지칭한 것이라면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의 발언 그대로 “6000쪽에 가까운, 책자로 30권 정도의 방대한 자료”일 뿐이었다. 역대 정부마다 연금 개혁이 실패한 것은 고양이 방울이 아니라,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이 없어서였다. 국회 연금특위에 참가한 한 전문가는 “이번 연금개혁만큼 온 우주가 응원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2018년 8월 문재인 정부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이 각각 ‘11%-45%’, ‘13%-40%’인 두 개의 초안을 내놓았다. 여론이 들끓었고 연금 개혁은 없던 일이 됐다. 역대 정부마다 이처럼 연금 개혁 실패가 반복되자 연금기금 재정 고갈에 대한 국민적 학습이 이뤄졌다. ‘더 내는 안’에 대한 저항도 줄었다. 야당과 노동계가 보험료율 4%포인트 인상에 동의한 것은 상당한 진전이다.완벽한 개혁이냐, 신속한 개혁이냐 국회 연금특위안은 재정안정성 측면에서 분명 결함이 있다. 연금기금 소진 시점을 지금보다 8년 늦출 뿐이고, 재정 적자 감축 폭도 적다. 대통령이 우려한 대로 최소 70년을 끌고 갈 계획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국회에 사회적 합의를 의뢰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연금 개혁안을 제출하면 된다. 꺼져 가는 개혁의 불씨도 살릴 수 있다. 대통령 임기 내내 여소야대 정국일 텐데 다음 국회로 미룰 이유가 있나. 만약 정부안을 따로 낼 생각이 없다면, 남은 2주 동안 국회가 연금특위안을 합의해 처리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완벽한 개혁을 할 수 없다면 신속한 개혁이 차선이다. 이번에 보험료율을 13%로 올린다면 26년 만의 첫 인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전부 은퇴하기 전에 보험료율을 올려야 연금 기금 적립액을 늘릴 수 있다. 이번에도 실기하면 선거 일정을 감안할 때 최소 2, 3년은 그냥 흘러갈 것이다. 윤 대통령은 14일 “개혁은 적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정부로선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 개혁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는데 연금 개혁까지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개혁 과제 중 연금 개혁만큼 진척된 과제는 없다. 이조차 결단을 망설인다면 다른 개혁은 정말 수사(修辭)로 끝나고 만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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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4년 만에 재등장한 ‘디지털 교도소’

    주로 성범죄자 신상 공개로 응징에 나섰던 웹사이트 ‘디지털 교도소’는 2020년 n번방 사건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던 당시 개설됐다. 협박에 시달리다 성착취물을 찍게 된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고 숨어 지내며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성착취물을 제작, 유포 또는 구매한 범죄자들은 버젓이 거리를 활보했다. 도대체 법은 어디 있느냐는 여론이 들끓었고 이를 계기로 등장한 것이 디지털 교도소다. ▷디지털 교도소는 무고하게 신상이 공개된 대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나자 폐쇄됐다. 그런데 4년 만에 다시 문을 열어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부산 유튜버 살인사건 피의자, 여자 친구를 살해한 의대생 등의 정보를 공개하고 추가 제보를 받는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처벌인 신상 공개를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겠다고 주장하지만 댓글을 통해 피해자의 신상이 유포되는 등 이미 그 부작용이 크다. ▷요즘 온라인에선 사적 제재를 다룬 콘텐츠가 넘쳐난다. 피해자는 보호하지 못한 채 가해자에게만 관대하다는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을 양분 삼아 확산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의 개인 신상을 공개하는 등 언론에 보도된 범죄자의 신상을 낱낱이 공개한 일도 있었지만, 소액 사기범을 추적하거나 불륜 배우자와 그 상대를 찾아다니며 낙인을 찍기도 한다. 주차 악당이나 난폭 운전자 등도 쉽게 마녀재판에 오른다. ▷법이 주먹보다 멀고, 느린 건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범죄 사실을 돌다리 두드리듯 검증해야 억울한 누명을 쓰는 피해자를 줄일 수 있다. 대전 교사 사망 사건에서 악성 민원 학부모의 신상이 공개되자 상호만 같은 다른 가게가 망할 뻔했다. 즉각적인 심판과 응징은 속은 후련하겠지만 엉뚱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사적 제재가 돈벌이가 되면서 양산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마약 운전으로 행인을 친 롤스로이스 뺑소니 사건 가해자에게 신상 공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3억 원을 챙긴 유튜버가 구속됐다. 4년 전 디지털 교도소 운영자는 암호화폐로 후원을 받았다. 공익을 앞세웠던 그는 사실 성범죄에 연루된 마약 사범이었다. ▷교도소는 형량을 채우면 나올 수 있지만, 디지털 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되면 영원히 갇히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묻지 마 범죄로 인생이 무너진 피해자들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싶다. 국민 법 감정과 거리가 있는 낡은 양형 기준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사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자의적 기준에 따른 신상 공개는 의도와 달리 2차 피해를 부를 수 있는 범죄 행위다. 개인적인 단죄가 범람하면 우리 사회가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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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세 살 조기교육 아홉 살까지만 간다

    조기교육 나이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4세 고시’를 보면 알 수 있다. 4세 고시는 유명 영어유치원 입학을 위한 레벨 테스트. 의대 입학이라는 종점을 향한 달리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알파벳 읽고 쓰기, 간단한 영어 회화 등이 출제되다 보니 늦어도 3세부터 영유 입학을 위해 프렙(Prep·준비)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초1 자녀 학부모 1만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0∼4세에 영어 사교육을 시작했다는 응답이 15.9%나 됐다. 국어는 15.4%, 수학은 13.3%였다. ▷세 살에 배운 영어, 수학 평생 갈까. 그런 믿음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팀이 유치원 입학 전 조기교육을 연구한 기존 논문들을 리뷰했더니 단기적으론 학업 성과가 올라갔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다. 미 테네시 유치원 조기교육에 참여한 3∼5세 유아들은 초등 3학년(9세)까지만 읽기, 쓰기 등에서 대조군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미 정부 유아 교육 프로그램 헤드 스타트(Head Start)에 참여한 3, 4세 유아들 역시 초3부터는 더 나은 학습 성취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설명하는 용어가 ‘페이드 아웃(fade-out)’ 효과다. 알파벳, 구구단 외우기 같은 인지적인 학습은 반복 훈련으로 금세 효과가 나타난다. 일찍 사교육을 받은 아이가 천재 소리를 듣는 이유다. 그런데 누구나 알파벳, 구구단을 외우는 나이가 되면 선행 학습의 효과는 빠르게 사라진다. ▷조기교육이냐, 적기 교육이냐. 교육계의 오래된 논쟁은 뇌과학이 발달하며 적기 교육으로 기울고 있다. 유아기엔 인성과 사회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발달하고, 초등학생 시기엔 언어를 담당하는 측두엽과 수학 등 논리를 담당하는 두정엽이 발달한다. 그래서 4∼7세 시기에는 인지 능력보다 정서 능력을 자극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앞선 논문에서 다룬 미 테네시 유치원 유아들의 경우, 학습적인 측면에서 조기교육의 긍정적 효과는 자라면서 사라졌다. 반면 학교에서 징계를 받는 등 사회성 측면에서 부정적 효과가 관찰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전력 질주를 시켜봤자 소용없듯이 영유아기 과도한 학습은 오히려 뇌 발달에 해로울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 조기교육으로 단련돼 이른 나이에 재능을 꽃피우는 ‘천재 신화’를 동경한다. 하지만 마흔 넘어 첫 소설을 낸 고 박완서 작가나 시인을 꿈꾸며 고교 중퇴를 했다가 39세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 등을 보라.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아이의 인생을 일찍 완성하려는 부모의 조바심이 자칫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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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필수 의료’ 붕괴의 또 다른 주범, 실손보험

    “실비(실손의료비 보험) 있으세요?” 동네 병원에 가면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꼭 묻는 말이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자기부담금과 비급여 진료비를 보상해준다. 허리가 아플 때 받는 도수치료, 감기에 걸렸을 때 맞는 수액주사 등이 바로 비급여 진료다. 환자로선 실손보험이 없으면 치료의 질이 달라지는 건지, 돈이 안 돼서 반갑지 않단 건지 영 껄끄러운 질문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실손보험이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보고 개선을 논의한다고 한다. ▷건보가 가격을 정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는 병원이 부르는 게 값이다. 가격이 비싸면 수요가 줄기 마련이지만 의료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국민보험이 된 실손보험 때문이다.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2010년 2080만 명에서 2022년 3997만 명으로 늘었다. 그 사이 비급여 진료비는 32조 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건보가 부담하는 급여 진료비보다 환자 개인이 내는 비급여 진료비가 빠르게 늘어난 결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개인 의료비 부담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힌다. ▷실손보험이 창출한 고가의 비급여 시장은 필수 의료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소득과 워라밸 격차가 점점 벌어지면서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사명감으로 버티던 의사들 중 상당수가 자괴감을 느끼고 개원을 선택했다. 2020년 진료과목별 연간 평균 임금을 보면 안과 의사 4억5837만 원, 정형외과 4억284만 원, 재활의학과 3억7930만 원 순이었다. 모두 실손보험에 기대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하는 진료과목인데 의료비가 비싼 미국 의사보다 수입이 높다고 한다. ▷건보는 빈약한 재정에서 출발했다. 그렇다 보니 급여 보장 항목이 적고, 진료비는 원가에 못 미치도록 설계됐다. 병원은 ‘3분 진료’로 환자를 많이 보거나 비급여 진료를 늘려 이런 손해를 벌충해 왔다. 정부가 메스를 대려는 혼합진료가 대표적이다.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진찰받고, 급여 물리치료와 비급여 도수치료를 섞어 받는 것이 혼합진료이다. 이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데 개원가에선 의대 증원보다 더 반발 강도가 세다. ▷비급여 진료 시장은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가 만들어 낸 시장이다. 보험업계는 도수치료, 렌즈 삽입 백내장 수술 등을 보상하는 상품을 출시해 경쟁적으로 가입자를 늘려 왔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의사나, 의료 쇼핑을 하지 않는 환자는 바보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실손보험을 이대로 두면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이 얼마나 불어날지 알 수 없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필수 의료를 살리겠단 의대 증원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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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의료 공백 탓이 아닌가[오늘과 내일/우경임]

    전공의 집단 사직 당시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보건의료 재난위기경보 ‘심각’을 발령했고 대한의사협회는 “의료 대재앙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료 공백 사태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예상보다 조용하다. 그 사이 응급실을 표류하다 사망한 환자가 여럿이다. 11일에는 부산에 사는 50대 심혈관 질환자가 병원 10곳 이상에서 응급실 수용을 거절당한 끝에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충북 보은군에서 도랑에 빠진 3세 여야와 충북 충주시에서 전신주에 깔린 70대 여성이, 그보다 한 달 전에는 대전에서 80대 심정지 환자가 병원마다 이송을 거부당했다. 그리고 사망했다. 신문에 보도된 사례만 추렸는데 이렇다. 정부도, 의사도 “전공의 이탈 탓 아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전공의 이탈로 응급실 수용이 어려웠다며 울분을 토했다.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팽팽히 대치하던 정부와 의료계가 “전공의 이탈 탓이라 볼 수 없다”며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정부는 매번 전공의 이탈의 영향을 조사하겠다고 했지만, 공식적으로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없다. 의료계는 “이송이 됐더라도 살릴 수 없었던 환자”라고 주장한다. 정부와 의사가 ‘당연한 죽음’이라는데 환자가 이를 뒤집을 방법은 없다. 부산, 대전까지 의료 취약 지역이라 봐야 하나 싶지만, 지역일수록 응급 의료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수도권 대학병원보다 지역 중소병원이 전공의 비율이 낮아 이탈의 영향이 덜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에 정말 의료 공백의 영향은 없는 것일까. 응급실이야말로 싼 인건비로 야근시킬 전공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다. 가뜩이나 열악한 지역 의료 시스템에 전공의 이탈로 과부하가 걸렸을 수도, 응급 환자의 마지막 보루인 수도권 대학병원들이 응급실을 축소해 이송받을 여력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부나, 의료계나 이런 가능성은 배제한 채 어쩔 수 없던 일이라고 한다. 환자들의 증언은 정부나 의료계의 주장과는 다르다. 15일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에게 A중소병원에 입원 중인 만성 신부전증 환자의 전화가 걸려 왔다. 혈액 투석에 문제가 생겼다며 대학병원에 가라고 하는데 진료받던 B대학병원에선 전공의가 없다며 응급실서 받아주질 않는다고 했다. 이 병원에선 나가라고, 저 병원에선 오지 말라 한다며 울먹였다. 김 대표는 전공의가 없어 수술이 밀렸다는, 입원이 안 된다는 전화를 날마다 받고 있다. 통계도 환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소방청에 따르면 전공의 이탈 이후 119구급차가 응급실까지 갔다가 수용을 거부당한 재이송 사례가 평소의 2.5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의료 공백 사태의 책임을 피하고 싶은 정부는 의료 체계에 탈이 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의료계는 행여 의대 증원의 필요성이 부각될까 응급실은 무탈하다고 강변한다. 언제는 세계 최고 의료라더니 사실은 응급실을 표류하다 죽는 일이 일상이라고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고작 숫자를 두고 정부와 의사들이 힘겨루기 하는 사이 환자들은 “살려 달라”고 절규한다. 전공의는 복지부 차관을 고소했지만, 의사에게 생명을 맡긴 환자들은 치료에 차질이 생길까 의사를 고소할 수 없다. 아픈 몸을 이끌고 시위를 할 수도 없다. 치료 시기를 놓쳐 죽은 환자는 더욱이 말이 없다. 오늘의 환자 희생 강요하는 내일의 개혁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의료 개혁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의료계 반응은 싸늘하다. 극적인 해결을 고대했던 환자들은 또 절망했을 것이다.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정부도, 무조건 철회만 외치는 의료계도 “환자를 위해서”라고 한다. 내일의 환자를 위해 오늘의 환자는 희생당해도 되는가. 우리 사회 강자끼리 싸우는 동안 정작 약자인 환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다. 의료 공백은,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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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따로 자야 금슬 좋다” 수면이혼 유행

    “나는 내 방에서 잔다. 남편은 남편의 방에서 잔다. 그 사이에 둘이 같이 쓰는 침실이 있다.” 2015년 음악가 벤지 매든과 결혼한 할리우드 배우 캐머런 디아즈는 남편과 각방을 쓰는 사실을 고백해 화제가 됐다. 그는 부부가 각방에서 자는 이른바 ‘수면 이혼’이 “수면의 질을 높이고 부부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고 했다. 코를 골거나 잠버릇이 심한 배우자를 억지로 참고 자느니 침대나 침실을 분리해 따로 자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에서 수면 이혼이 유행한다고 5일 보도했다. 미국 수면의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성인 남녀 3명 중 1명은 수면 이혼 상태였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이 비율이 높아 밀레니얼 세대에선 43%에 달했다. 이어 X세대의 33%, 베이비붐 세대의 22%가 각방을 쓴다고 했다. 사실 부부가 한방을 쓰는 문화가 오래되진 않았다. 20세기 들어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생겨난 문화일 뿐, 이전에는 부부가 각방을 쓰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부부의 속사정도 비슷하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부부간 수면 환경을 조사했더니 3명 중 1명이 각방을 쓰거나, 한방에서 자더라도 침대를 따로 썼다. ‘수면 궁합’이 상극인 부부들이 있다. 남편 코골이가 너무 심하다며 여행 가서 호텔 방을 2개 잡는 사람도 있다. 늘 에어컨을 켜는 남편과 온수매트를 안고 자는 아내는 같이 자기 힘들다. 잠귀가 밝은데 밤새 뒤척이거나 화장실을 자주 가는 배우자랑 자다간 잠을 설친다. 수면 리듬이 현저히 다른 부부도 있다. ▷잠을 잘 자야 배우자에게도 너그러워진다. 수면이 부족하면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공감 능력이 떨어져 배우자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건강에도 해롭다. 매일 밤 7, 8시간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당뇨병, 뇌·심혈관 질환 및 치매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수면 이혼을 시작한 미국 부부의 52%가 수면의 질이 개선됐다고 보고했고, 매일 평균 37분을 더 잤다. 따로 자기를 추천하는 전문가들은 “수면 이혼이 아니라 부부끼리 수면 동맹을 맺는다고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부부 일심동체’라거나 ‘부부가 싸워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는 결혼 주례사를 듣는 우리나라에선 부부가 각방을 쓰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 것 아닌지 실눈을 뜨고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돌연사 위험이나 심리적 고립감이 커지므로 같이 자는 것이 낫다는 반박도 한다. 하지만 핵가족을 넘어 핵개인이 출현한 시대다. 서로 억지로 맞춰 살거나 이를 견디지 못해 관계를 단절하느니, 개인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맞는 부부 관계인 것 같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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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배달비 0원’ 출혈경쟁, 그 끝은?

    배달앱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배달플랫폼 간 점유율 전쟁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쿠팡이츠는 지난달 ‘배달비 0원’을 선언했다. 업계 막내의 도전에 배달의민족은 “이달부터 우리도 0원”이라며 응수했다. 쿠팡이츠는 와우 멤버십(월 4990원) 고객을 대상으로 무료 배달을 하고, 배민은 동선이 겹치는 곳을 묶어 배달하는 알뜰배달에 무료 혜택을 준다. 지난달 업계 2위 자리를 뺏긴 요기요 역시 배달비 무료 혜택을 받는 멤버십인 ‘요기패스X’의 월 구독료를 2900원으로 2000원 내렸다. ▷지난해 배달 음식 온라인 거래액은 26조4326억 원. 2017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코로나19 특수가 끝난 데다 음식값 못지않은 배달비에 배달앱을 지워버린 사람이 늘었다. 한껏 콧대가 높아졌던 배달플랫폼들이 시장이 정체되자 ‘배달비 0원’을 선언하고 고객을 사수하는 생존 게임을 시작했다. 원래 배달비는 소비자와 음식점주가 절반씩 부담한다. 배달플랫폼에서 소비자 몫을 부담해 떠나는 소비자를 붙잡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출혈 경쟁의 원조는 미국 기업 아마존이다.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가격을 낮추는 ‘제로(0) 수익’ 전략으로 소비자와 판매자를 빠르게 흡수했다. 일단 사람이 모이도록 해 시장을 독점한 다음 비용을 회수하는 전략이다. 그 결과가 ‘빅테크’로 성장한 아마존이다. 지난해 10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아마존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하며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남용해 경쟁자를 퇴출시키고, 소비자와 판매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부담시켰다”고 했다. ▷배달앱 시장의 90% 이상을 배민, 요기요, 쿠팡이츠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 지배력이 커지면서 음식점주들은 “팔면 팔수록 손해”라고 호소한다. 지난해 음식점주가 부담하는 건당 배달비는 평균 3473원이었다. 2015년 중개수수료 0원을 내세웠던 배민은 현재 음식값의 6.8%를 수수료로 받고 있고, 2019년 중개수수료 1000원으로 시작했던 쿠팡이츠는 음식값의 9.8%를 떼는 요금제를 내놓았다. 부가가치세를 포함하면 음식점주는 각각 7.48%, 10.78%를 부담해야 한다. ▷소비자도 ‘배달비 0원’ 경쟁 초기에는 참았던 야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달앱 삼국지가 소비자의 편익으로 결론 날지는 의문이다. 배달비는 슬금슬금 올라 기본이 3000원이고 2km가 넘어가면 7000∼9000원까지 뛴다. 음식점주들이 배달앱의 높은 수수료를 전가하기 시작하면서 외식 물가도 무섭게 올랐다. 앞으로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배달앱이 출현하면 더한 횡포를 부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경쟁이 사라지는 시장에서 소비자는 ‘호갱’이 되기 마련이다. 그간의 혜택까지 곱절로 얹어서.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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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사과, 대파 이어 양배추… 두더지 잡기 된 먹거리 물가

    쌈직한 가격에 풍성한 밥상을 차리기엔 양배추만 한 채소가 없다. 크기도 큼직하고 절여 먹어도, 삶아 먹어도, 볶아 먹어도 맛있는 ‘만능 채소’다. 덕분에 흙대파가 금(金)대파가 되고 상추 낱장을 세면서 먹는 수상한 시절에도 듬직하게 밥상을 지켜 왔다. 그랬던 양배추마저 귀해질 모양이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양배추(특급) 8㎏당 가격은 1만6570원으로 일주일 전인 23일(8696원)에 비해 거의 두 배가 올랐다. 양배추 한 통당 소매 가격은 전국 평균 5300원. 양배추 한 통 값이 지난해 시간당 최저임금(9860원)의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2월 사과, 배 등 과일 물가가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차례상 차리느라 가계가 휘청했다. 정부가 할인쿠폰을 뿌리며 과일값이 겨우 진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엔 채소값이 뛴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흙대파, 애호박, 적상추가 이달 초에 비해 11∼52%가량 올랐다. 작황이 부진해 올봄 출하량이 급감한 채소들이다. 덩달아 밀가루, 과자, 설탕, 소금 등 가공식품 가격도 오르고 있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듯하다. ▷인플레이션은 실질 임금을 감소시킨다. 그 고통은 서민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주부들은 장보기가 겁나고, 식당 주인들 사이에선 곡소리가 난다. 문제는 ‘비싼 채소’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장기적인 추세라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채소값이 오르는 원인으로 기상 이변, 재배 면적 감소, 국제 유가 등 비용 상승을 꼽았다. 기상 이변으로 작황이 부진한 가운데 인건비며, 유가는 오르기만 한다.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재배 면적 감소는 이미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전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인한 ‘푸드플레이션’(음식+인플레이션)으로 떨고 있긴 하다. 코코아, 올리브유, 감자, 오렌지 등이 자고 나면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OECD 식품 물가상승률은 10.5%였다. 한국은 농업 생산 기반이 약해진 상태에서 기상 이변까지 덮쳐 밥상 물가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민심이 술렁이자 정부는 부랴부랴 세금을 투입해 할인 품목을 늘리고, 납품 단가를 지원하는 등 물가 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일회성 대책은 시장 가격만 왜곡시킬 뿐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속적인 농업 인구와 재배 면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생산기반 구축엔 별 관심도 없던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대형마트를 찾아다니는 ‘보여주기 행정’에 여념이 없다. 평소에 장을 볼까 싶은 정치인들이 ‘대파값 875원 논쟁’을 벌이더니 물가 안정에 역행하는 돈풀기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쯤이면 누가 물가를 올리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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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우경임]부모에게 자녀란 ‘돈 많이 드는 인생의 기쁨’

    한국인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그 이유야 차고도 넘치겠지만 한국인의 가치관 측면에서 이를 분석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가임기(20∼44세) 미혼과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출산과 자녀에 대한 가치관을 나열하고 동의하는 정도를 물은 것이다. ‘성장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한 비율(96%)이 가장 높았다. 이어 ‘자녀를 키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자녀의 성장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다’라는 데 각각 92%, 83%가 동의했다. 부모에게 자녀란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인생의 기쁨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자녀 양육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은 혼인 여부나 성별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의 성장이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는 기혼 남녀가 높은 비율로 동의했다. 반면 미혼 남성은 82%, 미혼 여성은 77%만 동의했다. ‘자녀=기쁨’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출산을 기피한다는 해석도, 자식을 낳아 봐야만 그 기쁨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선후 관계는 알 수 없으나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저출산의 변수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자녀가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집단일수록 높았다. 미혼 여성의 21%가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었고, 이어 미혼 남성(13.7%), 기혼 여성(6.5%), 기혼 남성(5.1%) 순이었다. 이는 희망 자녀 수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혼 남성은 1.79명을 낳고 싶어 했고 미혼 여성은 1.43명을 낳고 싶어 했다. ▷한국에서 자녀가 주는 정서적 가치를 마음껏 누리기에는 출산과 양육에 드는 비용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돈 먹는 하마’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자녀를 만 19세까지 키우는 데 2억5200만 원이 들 것으로 예상한 최근 조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경제적인 부담이 해소되더라도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이 반등하진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을 물었더니 13개국에서 ‘가족’을 1위로 꼽았다. 한국만 ‘물질적 안녕’이라고 답한 것과 비교된다. ▷흔히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식은 부모의 지위나 배움에 상관없이 절대적인 사랑을 주고, 아무 조건 없이 미숙함을 용서한다.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나면 자녀가 인생의 기쁨이라는 데 동의하기 마련이다. 전례 없는 한국의 저출산은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환경을 개선해 나가되 자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도 다시 찾아야만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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