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외교보다 무력!…‘백마 탄 김 장군’ 일본군도 ‘벌벌’

정경준기자 입력 2020-08-15 10:30수정 2020-08-15 11:2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922년 1월 23일
플래시백
오늘은 제75주년 광복절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피땀을 흘렸지만,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력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던 김경천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920년대 초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무력 항일투쟁을 벌인 김경천 장군. 일본군과 마적에 맞서 함께 싸웠던 러시아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뒤인 1930년경 촬영한 사진이다. 국가보훈처 제공


1888년 무관의 집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 때 일본에 유학한 김경천은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 중위로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지만 조선인 장교들과 모임을 가지며 항상 조국의 앞날을 고민했습니다. 1919년 도쿄 유학생 2·8독립선언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병가를 내고 귀국한 뒤 3·1만세운동 직후 가족을 남겨두고 만주로 향합니다.

그는 무인답게 외교보다는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약한 국력 때문이었고, 국력의 시작은 곧 군사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합니다. 이때 일본육사 후배 지청천, 대한제국군 출신 신동천(신팔균)과 의기투합해 이름을 광서에서 하늘 천(天)자가 들어간 경천으로 바꾸죠. 어릴 적 이름은 현충이었고, 김응천으로도 불렸으니 신출귀몰한 그의 행적만큼이나 이름도 많았습니다. 그가 ‘진짜 김일성’이라 하는 사학자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경천 장군의 항일투쟁 공적을 인정해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사진은 김 장군의 자녀들로 왼쪽부터 지리, 기범, 지희, 지란 씨다. 당시 생존해 있던 외아들 기범 씨와 막내딸 지란 씨가 내한해 아버지의 훈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김경천은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1919년 말 러시아 땅을 밟은 뒤 삼림지대인 연해주 수찬(현 파르티잔스크)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조선인 촌락은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인 마적 떼의 노략질에 폐허가 되곤 했습니다. 김경천은 각 촌락에 격문을 보내 의용군을 모집한 뒤 밤낮으로 훈련시켜 불과 넉 달 만에 마적을 뿌리 뽑습니다.

이때부터 시베리아 일대에서는 ‘백마 탄 김 장군’의 명성이 드높았지만 그가 국내에 제대로 알려진 때는 1922년입니다. 당시 연해주에서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공민 나경석(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오빠)이 1월 19일자부터 1면에 6회 연재한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견문기’를 통해섭니다. 나경석은 격변기 러시아의 정정(政情), 러시아인의 특성, 그곳에 조선 동포들의 사정 등을 그려내다 1월 23, 24일자에 ‘경천 김 장군’을 다룹니다.

1월 23일자 노령 견문기는 마적의 습격을 받은 수찬 조선인들의 참상을 ‘처자는 굶어죽고, 부모는 얼어 죽어… 탈주해 정거장 화물차에서 자고 길거리에서 밥 빌어먹는 조선인이 부지기수’라고 묘사했습니다. 이어 ‘김 장군은 200~300명의 의용군으로 수천의 마적을 물리친 뒤 군정을 실시했는데, 중국인과 러시아인들까지도 복종했다’고 김경천의 활약을 전했습니다.

주요기사
김경천 장군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서울 종로구 집터에 세워진 표지석.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면서 백마 탄 장군, 진짜 김일성 등으로 불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아일보 DB


김경천은 이후 수찬의병대를 조직해 본격적인 무력 항일투쟁에 나섰습니다. 러시아 적군(赤軍·볼셰비키 혁명군)과 연합해 일본군 및 러시아 백군(白軍)에 맞선 그는 1921년 10월 백군의 반격을 받아 사망설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지만 불사신처럼 재기해 일본군과 백군에 여러 차례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1922년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뒤 믿었던 러시아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뒤에도 김경천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23년 동아일보는 ‘재차 활동을 개시해 군사 모집’(1월 11일자), ‘김좌진의 조선독립단에서 활동’(3월 6일자), ‘무관학교 설립 계획’(4월 26일자), ‘조선에 들어와 관공서 폭발 도모’(5월 10일자) 등 김경천의 움직임을 추적 보도했습니다.

김경천은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200자 원고지 20장이 넘는 장문의 글 ‘빙설이 둘러싼 시베리아에서 홍백 전쟁한 실제 경험담’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소개한 자작시 ‘시베리아벌’에서 ‘흑룡강 물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라며 독립에의 의지를 다졌지만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간첩으로 몰려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원문
露領(노령) 見聞記(견문기) (五·오)

公民(공민)


七(칠), 海蔘(해삼) 東洋大學(동양대학)의 朝鮮人(조선인)


海參(해삼) 港(항) 東洋大學(동양대학)에는 朝鮮(조선) 學生(학생)이 十餘(십여) 名(명)이 在學(재학) 中(중)인대 大槪(대개)는 生活難(생활난)으로 因(인)하야 工夫(공부)를 誠實(성실)히 하지 못함은 可惜(가석)한 일이외다. 그네들의 生活費(생활비)를 輕減(경감)하기 爲(위)하야 近者(근자)에 寄宿舍(기숙사)를 한 個(개) 만드러 共同生活(공동생활)을 하는 中(중)이나 그것도 亦是(역시) 至極(지극)히 艱難(간난)한 形便(형편)에 잇스니 實(실)로 可惜(가석)한 일이외다.

그 大學(대학) 朝鮮語科(조선어과)에 助敎授(조교수)로 잇는 金顯土(김현토) 씨는 多年(다년) 露人(노인)에서 朝鮮語(조선어) 敎授(교수)를 하얏는데 最近(최근) 十年(십년) 以來(이래)로 朝鮮語(조선어) 志願者(지원자)가 稀少(희소)하야 現在(현재) 四五(사오) 名(명)에 不過(불과)하고 朝鮮(조선) 學生(학생)으로 他(타) 科(과)에 在學(재학)하는 이들의 要求(요구)에 依(의)하야 時間(시간) 外(외)에 朝鮮(조선) 學生(학생)에게 朝鮮語(조선어)를 敎授(교수)하나이다.

己往(기왕)에는 露領(노령)에서 生長(생장)한 靑年(청년)들이 平常時(평상시)에라도 서로 露語(노어)를 通用(통용)하야 別(별)로 朝鮮語(조선어)에 留意(유의)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設或(설혹) 多少(다소) 朝鮮語(조선어)를 習得(습득)하니도 朝鮮(조선)말 使用(사용)하기를 忌避(기피)하얏나이다. 그러나 歐洲(구주) 戰爭(전쟁)과 露國(노국)의 國家的(국가적) 解體(해체)는 民族的(민족적) 團結(단결)을 刺戟(자극)하야 有識(유식) 靑年(청년)은 故國(고국)을 愛慕(애모)하게 되야 現今(현금) 朝鮮語(조선어)의 硏究(연구)를 하랴 함은 必然的(필연적) 自覺(자각)으로 된 것이고, 또 昨春(작춘)에 入京(입경)하얏든 海參(해삼) 學生音樂團(학생음악단) 一行(일행)은 故國(고국) 人士(인사)의 款待(관대)를 接(접)하야 無量(무량)한 感慨(감개)가 업지 아니하얏나이다.

只今(지금)은 오히려 朝鮮(조선) 사람으로 朝鮮(조선)말을 아지 못함을 羞辱(수욕)으로 알도록 되얏나이다.

八(팔), 驚天(경천) 金將軍(김장군)

西伯利亞(서백리아)에 가면 누구든지 우리 驚天(경천) 將軍(장군)의 名聲(명성)이 놀납함을 알 것이외다.

月前(월전) 日本(일본) 新聞(신문)에 屢次(누차) 揭載(게재)하얏슴에 依(의)한 즉 스창에서 反(반) 過激政府(과격정부) 멜크로푸 軍(군)의 夜襲(야습)을 當(당)하야 戰死(전사)하얏다 하는데 第一(제일) 그것이 事實(사실)이라 하면 露領(노령) 一帶(일대)의 朝鮮(조선) 사람에게는 一大(일대) 不幸(불행)이라 하나이다. 그를 보왓고 그를 아는 사람은 마음으로 追悼(추도)하야 偉大(위대)한 功績(공적)을 記憶(기억)케 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는 누구냐 하면 日韓合倂(일한합병) 當時(당시)에 日本(일본) 東京士官學校(동경사관학교)에 在學(재학)하든 唯一(유일) 官費(관비) 軍人(군인) 學生(학생)으로, 卒業(졸업)한 後(후) 東京(동경) 騎兵隊(기병대) 少尉(소위)가 되야 驍勇(효용)한 少年(소년) 士官(사관)의 雄姿(웅자)로 靑山(청산) 練兵場(연병장)에서 때때로 駿馬(준마)를 달니면서 部下(부하)를 指揮(지휘)하든 金光瑞(김광서) 君(군)을 東京(동경)에 多年(다년) 잇든 學生(학생) 諸氏(제씨)는 아마도 歷然(역연)히 記憶(기억)할 뜻하외다.

그가 歐洲(구주) 大戰(대전)이 終了(종료)한 後(후) 所感(소감)이 있서 稱病(칭병)하고 京城(경성)에 도라와서 半(반) 年(년) 以上(이상)을 鬱沸(울비)히 지내다가 三昨年(삼작년) 三月(삼월) 一日(일일) 獨立運動(독립운동) 以後(이후)에도 京城(경성)에 滯在(체재)하얏섯는데 同年(동년) 五月(오월)에 安東縣(안동현)을 經由(경유)하야 徒步(도보)로 西間島(서간도)에 入(입)하야 民情(민정)을 視察(시찰)하고 其後(기후) 다시 徒步(도보)로 北間島(북간도)에 單身(단신)으로 突入(돌입)하야 同志(동지)를 糾合(규합)하랴 하얏스나 朝鮮人(조선인)의 痼疾(고질)인 地方(지방) 派黨(파당) 싸흠에 멀미를 내고 露領(노령) 海蔘(해삼)에 入(입)하야 一年間(일년간)을 滯在(체재)하얏스나 亦是(역시) 如意(여의)치 못한 中(중) 日本(일본)이 出兵(출병)하야 日本軍(일본군)이 過激派(과격파)와 反(반) 過激派(과격파)의 軍器(군기)를 全部(전부) 沒收(몰수)하고 朝鮮人(조선인)을 捕捉(포착)할 때에 多幸(다행)히 逃亡(도망)하야 露領(노령) 沿海洲(연해주) 森林地帶(삼림지대)인 朝鮮人(조선인)의 通稱(통칭) 水淸(수청)이라는 山中(산중)에 潛居(잠거)하야 잇섯는데 그 때에 中國人(중국인) 馬賊(마적)은 露人(노인)의 武器(무기)를 日兵(일병)이 全部(전부) 押收(압수)하얏슴을 아는 故(고)로 無人境(무인경)에 드러오듯 하야 農村(농촌)에 絶對多數(절대다수)를 占(점)한 朝鮮人(조선인)의 被害(피해)가 莫大(막대)하얏섯나이다.

그러나 우리 農民(농민)은 馬賊(마적)을 防禦(방어)할 方略(방략)이 絶無(절무)하야 家産(가산)을 抛擲(포척)하고 安全地帶(안전지대)로 移轉(이전)하랴다가 妻子(처자)는 餓死(아사)하고 父母(부모)는 凍死(동사)하야 半狂半死(반광반사)한 村民(촌민)이 水淸(수청)에서 海參(해삼)에 脫走(탈주)하야 家屋(가옥)에 居接(거접)할 餘裕(여유)가 업는 故(고)로 停車場(정거장) 貨車(화차) 中(중)에서 生活(생활)하면서 市中(시중)에서 乞食(걸식)하는 朝鮮(조선) 사람이 不知其數(부지기수)이엿나이다.

그뿐 아니라 日本(일본) 軍隊(군대)는 朝鮮人(조선인)의 獨立團(독립단)과 共産黨(공산당)을 撲滅(박멸)키 爲(위)하야 馬賊(마적) 魁首(괴수)의 ¤山(고산)이란 놈을 니꼴리스크 市(시)(尼市·니시)에 불러다 놋코 格別(격별) 優待(우대)하야 가면서 馬賊(마적)에게 武器(무기)를 供給(공급)하야 朝鮮人(조선인) 村落(촌락)을 襲擊(습격)케 하야 多大(다대)한 損害(손해)를 주도록 한 것은 公然(공연)한 秘密(비밀)이라 露領(노령)에 잇는 朝鮮(조선) 사람은 누구든지 아지 못하는 사람이 업나이다.

形便(형편)이 이러함으로 朝鮮(조선) 靑年(청년)은 義勇軍(의용군)을 組織(조직)하야 馬賊(마적)을 討伐(토벌)하얏스나 每樣(매양) 不利(불리)한 때가 만히 잇섯나이다. 이때에 金(김) 將軍(장군)은 各(각) 村(촌)에 檄書(격서)를 致送(치송)하야 義勇軍(의용군)을 募集(모집)하야 急速(급속)히 晝夜(주야)로 練習(연습)을 하야 馬賊(마적) 討伐(토벌)을 始作(시작)하얏스나 츠음에는 義勇軍(의용군)에 不少(불소)한 死傷(사상)이 잇서 露領(노령)의 數千(수천)의 朝鮮人(조선인) 村落(촌락)이 噴火山(분화산) 上(상)에 잇는 것 갓하얏나이다.




현대문
월러시아 영토 견문기 (5)

공민

7. 블라디보스토크 동양대학의 조선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동양대학에는 조선 학생 10여 명이 재학 중인데 대개 생활난 때문에 공부를 성실하게 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의 생활비를 덜어주기 위해 최근에 기숙사를 1개 만들어 공동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그것 역시 지극히 힘든 형편이니 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그 대학 조선어과 조교수인 김현토 씨는 다년간 러시아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는데 최근 10년 이래로 조선어를 배우겠다는 지원자가 극히 적어 현재 4, 5명에 그치고 다른 과에 다니는 조선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이들에게 시간 외로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조선 청년들은 평소에도 서로 러시아어를 써 조선어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조선어를 다소 배운 이도 조선말 사용을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국가적 격변은 민족적 단결을 자극해 지식 있는 청년들은 고국을 사랑하고 사모하게 돼 오늘날 이들이 조선어를 연구하려 하는 것은 필연적인 자각에 기인한 것입니다. 또 지난 봄 경성에 왔던 블라디보스토크 학생음악단 일행은 고국 인사들의 정성스런 환대를 받아 한없는 감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금 조선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말을 알지 못하는 것을 수치, 치욕으로 알게 됐습니다.

8. 김경천 장군

시베리아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든 우리 김경천 장군의 명성이 놀라울 정도라는 걸 알 것입니다.

한 달 남짓 전 일본 신문에 여러 차례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김 장군은 연해주 수찬(현 파르티잔스크)에서 반(反) 과격파 정부 멜크로프 군의 야습을 당해 전사했다는데 무엇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영토 일대의 조선 사람에게는 크나큰 불행이라 할 것입니다. 그를 보았고, 그를 아는 사람은 마음으로 추도해 그의 위대한 공적을 기억하게 하길 바랍니다.

김경천이 누구냐 하면 일제가 우리를 강제 병합할 당시 일본 도쿄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던 유일한 관비(官費) 군인 학생으로, 졸업 후 도쿄 기병대 소위가 되어 용맹하고 날쌘 소년 사관의 늠름한 모습으로 아오야마 연병장에서 때때로 준마를 타고 달리며 부하를 지휘하던 김광서 군임을 도쿄에 여러 해 있었던 학생들은 아마도 또렷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느낀 바가 있어 병을 핑계로 경성에 돌아와 반 년 이상을 비분강개하며 지내다 3년 전 3월 1일 독립운동 후에도 경성에 머물렀는데, 그 해 5월 중국 단둥을 거쳐 걸어서 서간도에 들어가 민정을 살핀 뒤 다시 걸어 홀로 북간도에 돌입해 동지를 규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의 고질인 지방 당파싸움에 진저리를 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1년간 머물렀으나 역시 여의치 못한 가운데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과격파와 반과격파의 무기를 전부 몰수하고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을 때 다행히 도주해 조선인들이 통칭 ‘수청’(수찬)이라 하는 러시아 연해주 삼림지대 산중에 은둔해 있었죠. 그때 중국인 마적은 러시아인이 일본 병사들에게 무기를 모두 압수당한 걸 알고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노략질을 해 농촌의 절대다수인 조선인들의 피해가 막심했었습니다.

우리 농민들은 마적을 막을 방책이 전혀 없어 가산을 내던지고 안전지대로 피신하려다 처자는 굶어죽고, 부모는 얼어 죽어 반은 미치고 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촌락 주민들이 수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주했는데 집에서 살 만한 여유가 없어 정거장 화물차에서 생활하면서 길거리에서 밥을 빌어먹는 조선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본군이 조선 독립군과 공산당을 박멸하기 위해 마적 괴수인 고산이란 놈을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 불러 각별히 우대하고 마적에게 무기를 주어 조선인 촌락을 습격하게 해 큰 손해를 입힌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 러시아 땅에 있는 조선인은 누구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형편이 이러므로 조선 청년은 의용군을 조직해 마적을 토벌했지만 매번 불리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김 장군은 각 촌락에 격문을 보내 의용군을 모집한 뒤 신속히 밤낮으로 훈련해 마적 토벌을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의용군에 적잖은 사상이 있어 러시아 땅 수천 조선인 촌락이 활화산 위에 있는 것처럼 불안했습니다.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