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 냉대 받은 이승만, 회의장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8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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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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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9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9회 임시의회가 열렸습니다. 임시의정원은 지금의 국회입니다. 이 회의에서 11월 11일 개막하는 화성돈(華盛頓)회의에 파견할 대한민국 대표단을 임명했죠. 화성돈회의는 열강 9개국이 참가한 워싱턴군축회의를 말합니다. 대표단은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프레드 돌프, 특별고문 찰스 토머스의 5명으로 구성됐죠. 이 5명은 한마디로 ‘독립외교운동’의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상하이임시정부 임시대통령이기도 했던 이승만은 미국 동부 명문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잇따라 딴 한국인 최초의 국제정치학자였습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 탓에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족 중 혼자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한 뒤 주경야독 끝에 의사가 된 전설적 인물이었죠. 정한경은 10대 때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박사가 됐습니다. 세 사람 모두 영어라면 미국인 뺨치게 잘 하고 미국 내 인맥도 상당하다는 평가를 받았죠.

1921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막한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대표단 단장 이승만(왼쪽)과 부단장 서재필이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미국식 정장 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모습이다. 이때 
이승만은 46세이고 서재필은 57세였다. 제공=국사편찬위원회
1921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막한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대표단 단장 이승만(왼쪽)과 부단장 서재필이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미국식 정장 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모습이다. 이때 이승만은 46세이고 서재필은 57세였다.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워싱턴회의를 유일하게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 김동성은 총 11회 연재한 ‘기자대회에서 화성돈회의에’에서 이들을 소개했습니다. 1922년 2월 11일자 1면에 실린 6회에서는 이 세 사람을 ‘동포사회의 3대 거두’라고 전했죠. 또 고문 돌프는 영향력 있는 변호사로 미국 법조계에 꽤 알려져 있는 인사였습니다. 특별고문 토머스는 콜로라도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1920년 미 상원에 ‘한국독립 승인안’을 낼 정도의 지한파였죠. ‘드림팀’이라는 표현이 과장은 아닙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8월에 포고문을 발표했죠.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반드시 상정될 테니 모든 한국인은 있는 힘을 다해 도와달라고 호소했죠. 덕분에 활동자금 7만5000달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현재 가치로 14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었죠. 이승만이 모금에 앞장섰습니다. 독립외교론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까지 1만 원을 냈죠. 지금 1억 원 정도입니다. 그만큼 워싱턴회의에 거는 기대가 컸다고 볼 수 있죠.

김동성은 이승만의 사택도 묘사합니다. 사택이 있는 16번가는 워싱턴에서도 제일 화려하고 깨끗한 상류사회 주택단지라고 했죠. 4층짜리 사택의 내부시설은 조선궁전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으리으리했고요. 일류 정객이나 각국 위원들이 고문 돌프와 미리 약속을 잡아 이 사택에서 이승만과 만난다고 했죠. 이승만 외교활동의 한 단면입니다. 김동성은 구미위원부의 활동도 취재했지만 부득이 보도하지 못한다고 했죠. 일제 검열 때문이었을 겁니다.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현지에 도착한 대표단 단장 이승만(오른쪽)과
 서기 정한경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건 채 사진기 앞에 섰다. 무거운 책임감 탓인지 두 사람 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승만은 
한국인 1호 미국 박사이고 30세 정한경은 한국인 2호 미국 박사이다.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현지에 도착한 대표단 단장 이승만(오른쪽)과 서기 정한경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건 채 사진기 앞에 섰다. 무거운 책임감 탓인지 두 사람 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이승만은 한국인 1호 미국 박사이고 30세 정한경은 한국인 2호 미국 박사이다. 제공=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뛰어난 인재와 든든한 자금으로 독립외교운동에 나섰는데도 성과는 없었습니다. 정작 대표단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죠. 냉대도 이만저만한 냉대가 아니었습니다. 한 미국 기자가 ‘한국대표단은 회의장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고 묘사할 정도였죠. 회의에서는 주요 열강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다시 확인했을 뿐입니다. 결국 주변부 교섭은 잘 했는지 몰라도 중심부 진입은 실패한 것이죠. 이미 파리강화회의에서 푸대접을 받았고 이어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도 무시당했습니다. 실패가 연속되는 외교운동의 흐름이 워싱턴회의에까지 이어진 것이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독립외교운동론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죠. 그 여파로 상하이임시정부 내각이 무너졌고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인데도 정부가 있는 상하이 대신 하와이로 돌아가 버립니다. 워싱턴회의가 폐막할 무렵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김규식 여운형 현순 등 56명이 참석하죠. 제국주의 국가들에 기대는 독립외교운동을 거부하는 몸짓이었을 겁니다. 그만큼 사회주의 물결에 올라타려는 움직임이 더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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