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촛불집회의 민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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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국가 아테네의 정치인 아리스테이데스에게 일자무식 시골뜨기가 도자기 조각을 건넸다. 상대가 누군지 몰랐던 시골뜨기는 그 조각에 아리스테이데스라고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그자한테 무슨 해코지를 당했기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시골뜨기는 “아무 사이도 아니오. 모두 정의롭다, 정의롭다 하니 지겨워서 그렇지”라고 대꾸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도편추방제 일화의 한 토막이다.

 ▷도편추방제는 독재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제적으로 가려내 쫓아내는 훌륭한 제도였다. 이름이 적힌 조각이 6000개를 넘으면 추방 대상자로 지목됐다. 별명이 ‘공정한 사람’이었던 아리스테이데스는 시골뜨기에게 자기 이름을 적어주고는 결국 쫓겨났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정치적 맞수인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고 한다. 도편추방제는 정적을 제거하고 중우(衆愚)정치가 판치게 하는 수단으로 점차 전락했다.

 ▷그제 촛불집회에는 유례없는 인파가 몰렸다. 5호선 광화문역 밖으로 나오는 데만 30분이 걸릴 정도였다. 인파에 떠밀려가다 “이재명 성남시장, 대통령 후보자입니다”라는 외침에 돌아보니 이 시장이 시민과 어울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1년 4개월이나 나라를 이끌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연설하고 있었다. 인디밴드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노래와 상여를 앞세운 농민들의 “근∼혜∼퇴∼진∼” 곡(哭)소리가 엇갈렸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구호는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1688년 명예혁명은 네덜란드 오라녀 공 빌럼이 영국 의회와 손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낸 무혈혁명이었다. 그 결과 제임스 2세의 딸은 메리 2세로, 사위인 빌럼은 윌리엄 3세로 공동 즉위했다. 왕 1명의 빈자리를 ‘1+1’ 여왕과 왕이 차지했다. 하지만 왕의 권력은 의회가 주도한 입헌군주제 안에 갇히게 됐다. 야 3당은 그제 사상 최대 촛불집회의 민심에 함께 올라탔다. 호랑이 같은 민심에 떠밀리지 않고 더 나은 정치로 이끌어갈 지도자가 그 속에 있는지 미덥지 않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도시국가 아테네#아리스테이데스#도편추방제#촛불집회#명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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