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대원/헌혈, 호소만으론 안된다

  • 입력 2004년 8월 19일 19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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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대한적십자사의 부적격 혈액 유통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보낸 것이었다. ‘수사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며’, ‘직원의 교육 감독을 대폭 강화하고’, ‘혈액관리의 전 과정에 철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와 함께 ‘혈액사업 현황과 발전 방향’이라는 입장 표명과 국민에 대한 요망 사항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보면 대한적십자사는 당당하다. ‘피의자’ 신분이면서도 검찰 수사결과를 수용하겠다니, 그럼 거부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더 큰 문제는 ‘혈액사업 현황과 발전 방향’에 담긴 개선 의지다. 대한적십자사는 혈액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전사적 노력을 ‘앞으로’ 하겠다고 했으며 원활한 혈액 공급을 위한 헌혈 참여는 ‘지금도’ 변함없이 해 달라고 했다.

부적격 혈액 유통 건이 검찰에 고발된 것은 지난해 12월 9일이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은 올해 2월 초라고 한다. 6개월간 수사를 받았으면, 초보자라도 문제점과 개선 대책을 파악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런데 혈액사업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대한적십자사는 뒤늦게야 ‘이제부터’ 개선하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헌혈은 ‘지금도’ 계속하라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이렇게 개선했으니 안심하고 헌혈해 달라’고 말해야 옳은 게 아닌가.

4월부터 5개월째 헌혈 건수가 감소하고 있다. 전년 동기 대비 10%가 감소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모자라는 혈액을 확보하기 위해 캠페인도 하고 헌혈을 강조하는 언론보도도 쏟아지고 있지만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일시적 혈액 부족 현상은 있었지만 곧바로 헌혈이 늘었다. 그런데 지금은 병원에서 혈액이 없어 수술을 연기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병원 직원들이 급히 헌혈해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에는 혈액 공급에 관한 한 대한적십자사를 대신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는 혈액사업의 전문성을 상실한 채 사업을 책임질 본부장도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혈액사업본부장이 혈액문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게 4월이지만 지금까지도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 헌혈을 계속해 달라는 말만 하고 있는데, 과오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이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하겠는가.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헌혈을 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고, 대한적십자사에서 받은 헌혈 유공 표창을 반납하겠다는 사람까지 생겨 나고 있다. 이러다 국가적 혈액사업이 붕괴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의 긍정적 이미지에 힘입어 구축됐던 국가적 헌혈혈액사업이 대한적십자사의 이미지 추락과 함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누가 이런 사태를 되돌릴 수 있는가. 현재로선 정부도, 전문가도, 시민단체도 능력이 없다. 대한적십자사의 체질 개선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런데도 대한적십자사는 개선을 위한 내부조직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대한적십자사’라는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우선 혈액 전문 인력부터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국민이 준 혈액을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또 단체헌혈 중심으로 돼 있는 현재의 헌혈 체계를 개인헌혈로 전환해야 한다. 기부문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대한적십자사가 하기에 따라서는 앞으로 개인들의 ‘헌혈 기부’ 분위기도 충분히 확산될 수 있다고 본다.

대한적십자사가 스스로를 바꾸고, 혈액사업에 관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할 때 국민도 기꺼이 헌혈 대열에 동참할 것이다. 대한적십자사는 고귀한 피를 내놓는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한다.

김대원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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