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인터뷰]안성기-문성근 두 톱스타의 만남

  • 입력 2000년 5월 25일 10시 55분


매일 만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알고 보면 너무도 오랫만의 만남이 있다. 영화인생의 오랜 선후배이자 동료관계인 안성기씨와 문성근씨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영화속에서라도 자주 만나던 사이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베를린 리포트>와 <그섬에 가고 싶다>, 그리고 <생과부 위자료청구소송>에서 함께 출연한 적이 있지만 그나마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배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둘은 재작년과 작년, 거리에서 더 자주 만났다. 바로 스크린쿼터 투쟁 현장에서다.

두 사람 모두 최근 새작품을 한편씩 찍었다. 한 사람은 <킬리만자로>,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오! 수정>이다. 두 사람 다 이제 연기 인생에서 한풀 꺾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고 또 연기 스타일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도 받고 있었던 시기다. 그럴 때도 되지 않았냐는 지원 발언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배우로서는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이번 새작품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사람은 '양아치' 역할로 또 한사람은 다소 비굴한, 이 시대의 일그러진 지식인상으로. 두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렵게 모인 자리인 만큼 2시간 동안 배우로서의 인생에서부터 작금의 국내 영화계 현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시종일관 진지하게 그리고 편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안성기) <오! 수정> 좋던데. 그래, 넌 그런 게 잘 어울려. 그거 뭐지? <경마장 가는 길>같은 거, <세상밖으로>든가? 거기서도 그랬고.

(문성근) 영화봤어요? 언제 봤지?

(안성기) 전주영화제 개막식때지 언제겠어?

(문성근) 형은 이번에 어떤 역이더라. 건달이었던가?

(안성기) 양아치지 양아치.

(문성근) 그래, 형도 그게 좋아.

(안성기) 그래. 나도 좋아. 편하고. 그런 근성이 있나 봐, 나한테도. 근데, 영화에서 너무 세게 맞던데. 괜찮았어?(문성근씨는 <오! 수정>에서 차량 운전기사 역을 맡은 배우에게 세차게 따귀를 맞는 장면을 했다).

(문성근) 촬영을 하는 도중에 이미 뺨이 부어 올랐을 정도니까. 그게 무려 몇 테이크나 갔더라. 하여간 무지하게 맞았지. 그렇다고 그 장면을 가짜로 슬쩍 때리는 것으로 할 수는 없었거든.

죄송한 말씀일 수 있지만 두 분 모두 어깨에 힘을 뺐을 때 연기가 더 좋다는 얘기가 많다. 평소 국민배우라는 중압감이 스스로들의 이미지를 딱딱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안성기) 배우란 게 워낙 다면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어느 역만을 하고 싶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뭐, 사람이야 누구나 술먹는 거 좋아하고 속으로는 조금 망가지고 싶은 욕구가 있는 거 아닌가.

(문성근) <오! 수정>은 내게 매우 독특한 경험을 선사해 준 영화다. 홍상수감독의 주장은 늘 '있는 그대로'였다. 만들지 말고, 연기하지 말고, 평소 생활하는 그대로, 마음 속 느낌 그대로를 표현해 달라는 거였다. 사전에 연습도 많이 했지만 실제 촬영때는 내 자신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도 그런 점이 보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선 것이 아닌가 싶다.

한분은 다작이고, 또 한분은 과작이다. 특별히 1년에 몇편씩 하겠다는 식의 기준을 두는가.

(안성기) 작년에서 올해로 개봉이 넘어 온 영화가 두편이 있어서 그렇다. <구멍>하고 <진실게임>. 글쎄...꼭 그런 건 아니지만 1년에 두편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많으면 정신없고 또 적으면 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배우로서의 인기 유지나 경제적인 이유때문은 아닌가?) 아냐, 그건. 그렇지 않다. 다만 자기 스스로 연기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게 적당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문성근) 연기자의 입장에서 놓고 볼 때, 난 사실 그동안 짜증이 많이 나 있었다. <초록 물고기>같은 영화가 적자 나는 걸 보면서부터다. 야, 이러구 어떻게 여기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와중에 영화사 유니코리아를 차린다든지, 영화진흥위원회 일을 맡게 된다든지 하면서 연기와 좀 멀어졌다. 그것 때문인지 이제 문성근이는 연기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제작자나 감독분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당장에도 출연을 생각하는 작품들이 꽤 있다. 제작비 문제다 뭐다 해서 다소 골치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아서, 개런티 적게 받고 투자 개념으로 출연할 생각도 있다. 이건 아이디어인데, 연기와 디지털영화를 결합시키는 것도 생각중이다. 똑같은 버전으로 낮에는 무대에서 연극으로 상연을 하고 밤에는 극장에서 영화상영을 하는 식의. 어때? 괜찮지 않아 형?

작년인가, 스크린쿼터 문제로 광화문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을 때, 젊은 친구 한명이 전경차에 실려가는 것을 보고 동분서주 뛰어 다니던 안성기씨 모습이 기억난다. 살벌한 표정으로. 그래서, 아 저분한테도 저런 면이 있구나 하면서 새삼스러워 했다.

(안성기) 성격적으로 난 그렇게 과격하지 못하다. 심한 말도 잘 못하는 편이고. (그럼 살면서 한번도 욕도 하지 않는가?) 왜, 나도 하지. 차안에서 혼자 운전할 때. 사람들 앞에서 잘 못해서 그렇지, 나도 남들과 똑같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역할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그날 시위에서 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당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만 그랬을 뿐이고 스크린쿼터 일은 이 친구들이 다 했다. 이창동감독이 그렇게 논리적인지는 그때 알았고, 성근이 이 친구야, 워낙 잘 알았지만. 또 다른 친구들도 평소에 그렇게 모여라 모여라 해도 모이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가 다 자발적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걸 보고 느낀 게 많았다. 난, 그저 사람들한테 전화만 했다. 언제 어디로 오라고.

(문성근) 성기형이 오라고 하면 그만큼 무게가 있으니까. 그래도 그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데. 아마 고소영한테는 형이 아홉번인가 전화했었지, 아마. 아, 아니다 형이 다섯번, 내가 네번이다.

스크린쿼터는 언젠가 없어진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문성근) 무슨 그런 소리를! 절대 그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른 나라에는 우리같은 쿼터가 없다고 하는데 천만에, 프랑스는 방송쿼터를 적용하고 있고 일본은 자기네 나라 영화를 위한 전용관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우리가 만약 쿼터제를 없앤다면 먼저 개네들처럼 방송쿼터나 전용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다만 요즘 들어 일수를 조정해야 하지 않느냐 얘기가 있는데 그건 제도 폐지로 가기 위한 물꼬트기 작전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

(안성기) 쿼터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입장은 단 하나다. 쿼터는 반드시 현행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그것에 대해서는 일보 후퇴도 있을 수 없다.

<킬리만자로> 성적이 별로다. <오! 수정>도 영화 자체가 대박이 될 수 있는 작품도 아니고. 그래도 톱을 달리는 배우들이신데, 흥행이 대체로 저조하면 부담스럽지 않는가?

(문성근) 진정한 연기자란 돈이 되지 않든, 인기가 높지 않든 무언가 의미있는 작업이라면 거기에 매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재미는 없게 들린다.

(안성기) 그래, 하긴. 성근이 얘기가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좀 잘 풀려야지. 사람들도 많이 찾고, 그래서 흥행도 잘되고. 그래야만 만드는 사람들도 힘이 날테고. 근데 그게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특히 관객들 탓을 하거나 그래서는 절대 안된다.

안성기씨는 이제 오십이 가까운 것으로 안다. 위기감 같은 것은 없나?

(안성기) 나? 나 오십될려면 한 13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웃음). 아직 나이 먹었다고 스스로 자각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배우란 늘 자기 나이보다 한 다섯살쯤 아래로 사는 거니까. 너도 그렇지 그건? 언젠가 <아버지>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그때 거기서 아버지 역을 맡으라는 제의를 받았는데, 에고 난 그거 못합니다라고 발을 뺐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구멍>에선가, 상대역인 김민씨와 베드신 찍을 때 조금 히스테릭했다고 하시던데. 신체노출을 피할 나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나?

(안성기) 내 몸이 얼마나 좋은데. (문성근씨가 "끝내 주지"라고 한마디 거든다) 근데 난 그게 싫다. 살짝 보여주는 거 정도는 좋은데, 꼭 그렇게 엉덩이가 나오고 흔들어 대고 하는 모습이 비춰져야 하나. 나만큼이라도 그런 장면은 점프 컷으로 뛰어 넘었으면 한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그런 점은 확실히 하고 가는 편이다.

문성근씨는 <오! 수정>에서 '빤스는 벗겨야 하는데, 빤스는 벗긴 거다'란 대목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을 아시고 계신지 모르겠다. 진짜 그런 경험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성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연기를 잘한 거겠지. 감독이 정말 원하는 게 그런 거였으니까.

(안성기) 얜, 그런 거 정말 잘한다니까.

두분 모두 젊은 감독, 신인감독과 일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혹시 젊은 친구들과 일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뭘 알겠냐 식의 생각은 들지 않는가. 외국 예를 들어서 뭣하지만 <매그놀리아> 같은 인생의 바닥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 낸 영화도 갓 서른 살의 감독이 만들기도 한다.

(안성기)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예술이다. 다소 못마땅한 점이 있거나 요건 좀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난 현장에서 부딪히는 스타일이 아니다.

(문성근) 얘기를 올바로 푸는 사람들이라면 나이 차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어느새 나이 차가 있다는 생각조차 까먹게 된다. 홍상수 감독같은 친구가 바로 그 적절한 예다.

올해 들어 한국영화가 계속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지난 2년간의 성장세가 거품이 아니었느냐는 얘기가 흘러 나온다.

(안성기) 그런 얘기 자체가 거품 아냐? 어떻게 영화가 매번 잘되는가. 좀 지나서 몇년을 두고 평균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들 성급하다.

(문성근) 올들어 조금 성적이 안좋은 건 사실이다. 근데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정말 생각해야 할 것은 단기간의 성적이나 승부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뛰어난 시나리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창의력이 그만큼 안따라가고 있다는 것인데, 시나리오가 떨어지는 수준에서 좋은 영화, 흥행영화가 나올 수 없다. 창작 시나리오 개발에 정말 신경써야 할 때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갑자기 분위기가 분주해졌다. "어디 가요?"라고 문성근이 묻자 안성기는 <무사>를 찍기 위해 필요한 '잡기'를 배우러 검도장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문성근도 자신이 이사장으로 일하는 스크린 쿼터 문화연대의‘자유2000’공연(6월 3일과 4일, 연세대 노천극장) 준비를 위한 회의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바쁘다. 바쁜 것은 좀 피곤한 일이지만 밝은 표정이 부러웠다. 그들의 뒷모습에 느껴지는 건장한 장년의 무게 또한 부러웠다.

오동진(ohdjin@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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