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春窮期

  • 입력 2000년 5월 2일 19시 19분


참으로 어려운 때가 있었다. 아직 殘雪(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들녘, 쌀쌀한 바람을 안은 채 달래, 냉이를 캐는 아낙네들이 많았다. 조금 지나 송홧가루라도 날리면 고이 받아 쑥과 함께 떡을 해 먹었다. 쌀겨와 버무려 놓으면 생긴 모습부터 정나미가 떨어졌다. 꼭 쇠똥 마냥 시커먼데다 맛도 없어 ‘개떡’이라고 했다.

당시 주식은 쌀 보리 밀이었지만 그래도 주종을 이룬 것은 앞의 둘이었다. 하지만 늦가을의 쌀은 타작과 함께 어디로 갔는지 통 보기가 힘들었다.

웬만한 부잣집 아니고서는 흰 쌀밥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골방에 아껴둔 보리나 고구마가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와서는 온통 밥그릇을 시커멓게 채우곤 했다.

보리도 넉넉하지는 않았다. 6월 초 芒種(망종)은 되어야 추수를 하게 되는데 봄은 왜 그리도 길었던지. 그래서 요 몇 달간은 春窮期 또는 麥嶺期(맥령기)라 하여 가장 궁핍한 때였다. 우리말로 ‘보릿고개’라고도 한다. ‘봄 떡은 들어앉은 샌님도 먹는다’ ‘봄 사돈은 꿈에 보아도 무섭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시인 韓何雲(한하운·1919∼1975)은 ‘春困(춘곤)’에서 그 서럽도록 배고픈 봄날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메슥메슥 생목만 올라….

노고지리는 포만증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

아예 배고픔을 내색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나.’

또 申東曄(신동엽·1930∼1969)은 ‘배가 고파서 연인없는 봄’에서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이라고 읊었다. 다 어려웠던 때의 表白(표백)이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478sw@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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