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77)

  • 입력 1999년 7월 25일 19시 31분


나는 모이를 준비해야만 했는데 매점에서 파는 땅콩을 여러 봉지 샀다. 땅콩의 껍질을 일일이 벗기고 나무토막으로 두드려서 잘게 부수어 땅콩 한 알을 네댓개의 알갱이로 만들었다. 보리밥을 화장실 창가에 펼쳐 놓으면 하루 이틀 사이에 딱딱하게 마르는데 이것들도 낟알처럼 으깨어 땅콩 알갱이들과 섞는다. 물론 비둘기들은 콩을 더 좋아하지만 땅콩만으로는 너무 비싼 사료이기 때문이었다. 비둘기들은 처음 며칠 동안은 나의 규칙적인 일정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중 영리한 놈들은 곧 나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곧 알게 되었고 모이 주는 시간 직전에 나타나서 기다리게 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서 운동 나가기 전 삼십분이 첫 번째 시간이었고 두 번째는 저녁 식사 뒤에 음악방송이 나오는 어스름녘이었다. 그러나 내가 비들기들 몇 마리에게 애착을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그놈들은 내 일정을 바꾸었다. 즉 아침에 기상 하고나서 식사가 도착하기 전과 역시 저녁 밥이 오기 전 늦은 오후였다. 비둘기들은 공장의 운동장 구석에 조류 사육장이며 비단 잉어를 양식하는 작은 연못 부근에 지어 놓은 비둘기 장에서 우리들처럼 집단으로 살았는데 그곳에는 이들을 전담해서 돌보는 장기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이 이른 아침에 기상해서 비둘기장을 열어 주고 저녁이면 사료를 주고나서 비둘기들을 거두는 것이었다. 비둘기들도 자신들의 일과가 있었던 셈이다.

비둘기들은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뜯어보면 생김새도 모두 달랐다. 회색에 알룩달룩한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놈들이 흔히 보는 비둘기의 색인데 모양은 그대로 알룩달룩하면서도 바탕의 털빛이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회색 바탕, 갈색 바탕, 보라색 바탕, 검은색 바탕, 등등이고 아예 단색인 경우에도 회색, 검은색, 검정과 흰색의 얼룩 무늬, 갈색과 흰색의 얼룩 무늬, 그리고 순백색이 있었다. 비둘기들은 나와 사귀기 전에는 사동 앞 마당에 내려앉아 아래층의 미결수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나 식빵 조각을 쪼아 먹었다. 그러다가 내 땅콩 맛을 보면서부터는 아예 내 모습이 잘 보이는 맞은편의 영치품 창고 지붕 위로 몰려들었다. 그놈들은 창고의 양철 지붕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창가로 나서기만 하면 일제히 창문 턱으로 날아 올라 앉았다. 나는 창문 턱에 모이를 쏟아 놓았고 비둘기들은 경계하지 않고 내 손바닥 위에까지 올라 앉았다.

내가 좋아했던 비둘기가 몇 마리 있었다. 나는 그놈들의 이름을 지었다. 제일 처음의 것이 ‘대장’이었는데 순백색의 수놈이었다. 수컷과 암컷의 구별은 몸집의 생김새와 크기와 행동거지로 금방 알게 된다. 수컷은 어깨가 벌어지고 아래쪽이 날씬한데 목을 움츠렸다 빼었다 하면서 뽐을 낼 때에는 마치 역도 선수가 덩치 자랑을 하는 듯하다. 수컷은 경쟁자인 다른 수컷과는 서로 쪼아대고 밀어내고 날개로 후려치면서 항상 좋은 자리 싸움을 한다. 그리고 암컷 앞에서는 빙빙 돌면서 윗몸을 부풀리고 꾹꾸거린다. 두번째의 비둘기는 역시 순백색으로 내가 ‘순이’라고 부르던 암놈이었다. 순이는 대장보다는 몸집이 작고 날씬했다. 순이는 처음에는 여러마리 가운데서 눈에 띄지 않았다. 순이는 창턱에 왔다가도 곧 밀려나고는 했다. 순이가 창을 향해서 앉아있는 모양을 언젠가 자세히 살펴 보다가 절름발이라는 걸 확인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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