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천사, 그 공터에 또 두고 갔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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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10년째 ‘얼굴 없는 기부’

저금통-현금 8026만원, 전화건 뒤 박스 놓고 가
언론 피해 올핸 좀 늦춘듯… 市, 기념표지석 세우기로

28일 오전 11시 55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주민센터에 40대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사무실 부근 세탁소 옆 공터에 가 보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분’이 왔음을 직감한 직원들이 황급히 공터로 달려가 보니 인적은 없고 돼지저금통과 현금 뭉치, 쪽지가 들어 있는 종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에서 5만 원권 지폐까지 모두 8026만5920원. 2000년 이후 10년째 성탄절을 전후해 이곳에 돈을 남기고 사라지는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난 것이다. 횟수로는 열한 번째다. 2002년에는 어린이날에도 100만 원을 놓고 갔다. 올해는 지난 9년 동안 남긴 돈(8100만 원)과 맞먹는 거금을 놓고 갔다.

남긴 쪽지에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늘에 계신 어머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쪽지 내용으로 볼 때 성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렵게 모아 물려준 유산에 자신의 정성을 보태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누구인지 추측만 무성할 뿐 신원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여러 명이라는 추측도 있다. 초등학생이나 젊은 여성을 시켜 돈을 맡긴 적도 있고 전화 목소리가 30대에서 60대까지 바뀌기도 했다. 올해는 조금 늦었다. 성탄절을 전후해 일부 언론사에서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부산을 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선행을 따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전주에서는 언제부턴가 주민센터 등에 신원을 밝히지 않고 돈이나 쌀 등을 놓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 신드롬’이 일고 있다. 16일 전주시 팔복동과 서신동, 완산동 주민센터 등 3곳에 ‘익명의 천사’들이 317만 원을 맡기는 등 이달 들어 시내 주민센터에 돈과 쌀을 맡긴 사례만 10건을 넘었다.

전주시는 그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22일 노송동 주민센터 앞 도로 이름을 ‘얼굴 없는 천사의 길’로 정한 데 이어 조만간 그가 성금을 주로 놓고 갔던 주민센터 옆 화단에 기념표지석을 설치하기로 했다.

전주=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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