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세이]김종우/남성 火病 ‘가족애’로 다스려야

  • 입력 2003년 12월 1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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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병원을 찾은 김모씨(47). 다니던 중소기업이 부도가 난 뒤 실직상태가 길어지면서 가슴에서 열불이 나는 증상을 자주 느낀다고 호소했다.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본가에 들어가 살게 되자 부인은 남편의 무능력을 탓했고, 김씨는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가슴이 답답했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급기야 술 담배가 늘고 가슴 통증까지 느껴졌다. 성격이 조급해지면서 사소한 일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됐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화병클리닉은 주부들의 전유물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후 잠시 남성 환자들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는 감소 상태였다. 그런데 약 1년 전부터 남성 환자들이 부쩍 늘어 이제는 30% 수준에 이르렀다.

남성 환자가 증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의 경제 상황도 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직장에서의 반복적인 업무, 실직에 대한 두려움, 퇴직 후의 공허함이 모두 화병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들이 집에 돌아가 겪게 되는 스트레스도 심각한 화병으로 발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아닌가 싶다.

남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부당함이나 억울함, 경쟁에서의 도태는 병의 양상에서 여성들과 명확하게 다른 패턴으로 나타난다. 여성 환자들은 분노를 참는 상태에서 머물러 가슴이 답답하거나 열이 치밀어 오르는 등의 신체적 전환 증상에만 국한되는 편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덜 미친다는 얘기다. 그러나 남성 환자들의 경우는 분노를 표출하는 편이다. 이들은 화를 분출해 폭력적 성향을 띠거나 분을 술로 풀어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일부는 가정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가정폭력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 직장 내에서 풀 수 없기 때문에 대리형성의 기제로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별 이유 없이 당하는 가족은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느껴 2차적인 여성의 화병 또는 자녀들의 정신장애 등을 양산하게 되고, 역으로 남성의 화병을 더욱 늘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알코올 중독 역시 대개 가정 문제로 직결되므로 이와 비슷한 악순환을 낳는다.

근본적인 대안은 발병 이전의 돈독한 가족애일 것이다. 남성 화병 환자의 잦은 짜증을 가족이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질 수도 있다. 물론 남성도 사랑하는 가족을 대리형성의 피해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화가 만들어지는 중심부인 직장 내의 환경 변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곳은 애정과 보살핌이 있는 곳이기보다는 생존의 각축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취미나 운동도 화병을 예방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마음 놓고 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견실한 가정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 언급했듯 남성 화병은 여성의 화병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인자가 되기도 한다. 화를 가정으로 담고 들어오고 이것을 가정 내에서 분출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면, 이를 또 주워 담아야 하는 주부로서는 화병을 피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한 가정은 남성 화병 환자의 증가라는 사회적 현상을 잠재울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가정은 바로 직장에서 갖고 온 남성의 화를 새로운 에너지로 바꾸는 여과장치의 구실을 해야 하는 곳이다.

김종우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교수·화병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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