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산산조각…美기업 계약파기 비자발급 무산

  • 입력 2000년 3월 28일 19시 40분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 기업과 고용계약까지 체결하고 재산처분과 사직서제출 전학 등 이민준비를 마친 한국인 수백명이 미국기업의 일방적인 계약파기로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생활터전을 잃고 오갈데 없는 처지에 빠졌다.

“가정 파탄 일보 직전입니다.”

부부가 함께 20여년간 지방 공무원으로 일해 온 이모씨(47·여·경기 의정부시) 부부는 지난해 4월 고3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미국 이민을 가기로 하고 각각 6급과 7급인 공무원직을 퇴직, 이민수속을 밟아 왔다.

이들이 찾은 길은 미국 닭가공공장 취업이었다. 미국 정부는 미숙련공 확보계획에 따라 닭가공공장에서 일하는 대가로 이민노동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합법적 영주권을 부여해 왔다.

이씨 부부는 미국 브로커에게 수수료 2만달러를 송금하고, 미국의 대형 닭가공회사인 퍼듀 팜에 취업이민하는 수속을 지난 1년간 진행시켜 왔다. 미 노동국과 이민국의 허가를 받았고 최종 절차로 비자를 발급받아 떠나는 일만 남아 지난해말 이씨부부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주민등록증까지 반납했다.

그러나 3월중순 비자발급을 위해 주한미대사관에서 인터뷰하던 이씨에게 대사관 관계자는 “퍼듀 팜에서 외국인은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회사에 물어보라”며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이미 국외이주신고까지 마친 터라 이씨 가족은 현재 친척집에 기거하며 국내 취업은 물론 아들이 대학 진학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한 지경에 처해 있다.

서울 중랑구에서 국선도 수련원을 운영해온 김모씨(44) 가족도 마찬가지. 취업이민을 위한 모든 수속을 마친 뒤 체육관과 집을 팔고 살림살이도 모두 처분했으나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김씨 가족은 하소연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취재기자가 확인한 사례만 대기업 중견간부, 자영업자, 은행원을 합쳐 25가족에 달하며 미국내 브로커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신청한 이들까지 더하면 수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정부의 인력수입정책에 따라 80년대 중반부터 별탈 없이 계속되어온 닭가공공장 취업이민이 갑자기 중단된 것은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지난해 12월1일자에 ‘닭가공공장들이 한국인 이민 불러온다’는 제목의 고발성 기사를 게재한 데에서 촉발됐다.

당시 이 신문은 99년 한해동안 360명의 한국인이 닭가공공장 취업이민비자를 발급받는 등 최근 진행되고 있는 닭가공공장 이민러시를 소개하면서 ‘이민 브로커들의 사기행각’과 ‘닭가공공장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달 중순에는 문제가 된 닭가공회사 퍼듀 팜이 한국인 노동자 수입을 중단했다는 후속 보도가 나왔다.

이에 따라 올초부터 비자발급을 갑자기 중단한 주한 미대사관측은 “공식적인 답변을 할 수 없다”면서도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처럼 퍼듀 팜에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를 일절 채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오갈 데 없는 상황에 처한 한국인 이민수속자들은 “이미 대부분의 절차를 마친 마당에 갑자기 채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일방적인 약속 파기이자 소수민족 차별”이라며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가정생활이 풍비박산이 난 만큼 국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말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