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치매 머니’ 노리는 사냥꾼들… 기억 잃고 믿음 뺏긴 노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14일 23시 30분


65세 이상 치매 환자 약 100만 명의 재산인 이른바 ‘치매 머니’가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8월부터 재산을 강탈당한 치매 노인과 그 가족 36명을 인터뷰했다. 모두 판단력이 흐릿한 노인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뒤 재산을 빼돌리는 수법에 당했다. 강대용 씨(73)는 30년 만에 나타난 친구의 ‘고향으로 가자’는 말에 속아 땅 800평을 팔았고 그 돈을 빼앗겼다. 서향분 씨(86) 부부는 옆집에 살며 딸같이 굴던 이웃을 믿고 39차례에 걸쳐 약 6억 원을 빌려줬지만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문영식(가명·76) 씨는 아빠라고 부르며 휴대전화 개통을 도와준다는 여성에게 신분증을 맡겼다가 대포폰이 개설돼 통장이 털렸다.

외롭게 지내던 치매 노인들은 자주 찾아와 살갑게 구는 친구, 이웃을 쉽게 믿었다가 삶의 마지막 시기를 고통 속에 보내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도 믿음을 배반당한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강 씨는 친구의 배신을 알고 극심한 분노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서 씨는 치매를 앓던 남편이 충격을 받고 갑자기 숨진 데 이어 자신도 치매를 진단받았다. 문 씨는 통장에서 돈이 줄줄 빠져나가더니 휴대전화 요금이 밀려 빚이 쌓였다.

정부는 ‘치매 머니’를 154조 원으로 추산한다. 20년 뒤면 414조 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막대한 ‘치매 머니’를 보호할 안전장치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치매 발병 전 건강할 때 후견인을 정해두는 임의 후견제도는 절차가 복잡하고, 후견인과 후견 감독인을 따로 선임해야 하는 등 비용이 많이 든다. 2023년 임의 후견인이 32명에 머문 까닭이다. 같은 해 일본은 후견인 2만 명이 활동을 시작했다. 동네마다 후견지원센터를 만들고 공공 서비스로 후견인 매칭을 도왔기 때문이다.

금융권 신탁 상품은 최소 가입 금액이 많고, 정작 치매 노인에게 필요한 세입자 관리 등은 대행하지 않는다. 공공후견제도가 있지만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만 이용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재산을 일군 중산층 치매 노인은 마땅히 이용할 만한 제도가 없는 실정이다.

일부의 불운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치매 노인이 10년마다 50만 명씩 증가한다. ‘치매 머니’ 사기는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재산을 뺏고, 치매 노인의 노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범죄다. 약자 중의 약자인 치매 노인을 사기꾼의 먹잇감으로 내어주는 ‘제도의 공백’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치매#치매 머니#노인 사기#재산 강탈#임의 후견제도#후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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