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부터 구조한다는 원칙[오늘과 내일/허진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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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원의 통신비 지원, 불요불급한가
비상시 선별 지원 원칙 더 확고히 해야

허진석 산업2부장
허진석 산업2부장
긴 장맛비에 둑이 터져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 다행히 마을 이장을 비롯해 일부 사람들은 산기슭에 집을 지어 별탈이 없었다. 물에 빠진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을 사람 10명이 물살을 견디며 산기슭 가까이에서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10m가량의 밧줄이 보였다. 그때 누군가 10명을 차별할 수는 없으니 밧줄을 균등하게 10조각 내서 동시에 줄을 내리자고 한다.

13세 이상 국민 모두에게 2만 원의 통신비를 지원하는 문제로 시끄럽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지 왜 예산을 엉뚱하게 쓰냐는 지적이 나오면서다. 통신비 지원 예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는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과 인식에 관한 문제여서 중요하다.

통신비 보조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접촉이 많아지면서 통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통신비는 정액제여서 통화를 많이 한다고 해서 통화료가 더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더 부과가 된다고 하더라도 소득이나 자산으로 대상자를 선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보조해주는 건 옳은 방식인가. 이 논란은 보편 지급을 선호하는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잦아지는 양상이다.

학생들의 급식비 지원 때 선별 지급과 보편 지급이 크게 논란이 됐었다. 재벌 집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급식비를 지원하는 게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냐는 주장과 수혜자를 드러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도 크다는 주장이 맞섰다.

이념과 가치관이 크게 대립하는 지금의 정세로 볼 때 선별 지급과 보편 지급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비상 상황에서는 이런 논란 때문에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는 않아야 한다.

1차 긴급재난지원금은 선별 지급이 아닌 보편 지급 방식으로 지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때에는 많은 지원금에 선별 지급 방식이 적용됐다. 왜 그랬을까. 돈이 부족해서다. 이상의 실현은 현실에 기반한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비 지원이 보편 지급 방식에 가깝게 설계되면서 4차 추경을 심의하는 국회 회기 내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차 때는 모든 국민에게 줬는데 2차 때는 예산 형편이 그러지 못해서 정부와 여당이 ‘미안한 마음’에 ‘작은 정성’을 마련한 것으로 믿고 싶다. 설마 세간의 말처럼 대통령이 세금을 자기 돈처럼 인식해서 ‘작은 위로이자 정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지율이나 다음 선거를 위해서 보편 지급에 기대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코로나19가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자영업자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폐업이 속출하면서 중고물품 거래소에 중고 집기들이 늘고 있다. 그나마 영업을 하는 곳은 배달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달수수료와 포장용기, 1회용 수저 마련 비용 등 때문에 10원짜리 한 개까지 계산하며 버티고 있다.

1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장애인 활동지원 긴급 지원보다 통신비가 더 불요불급한 것인가”라고 물으며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 증가폭이 예년보다 줄었다고 지적했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어려움을 더 크게 겪는 계층은 비단 자영업자들과 장애인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잘 아는 국민들이니 통신비 2만 원 지급에 대해 반대하는 응답이 더 많은 것이다. 이제 공은 국회에 넘어가 있으니 바로잡기 바란다. 물에 빠진 마을 사람 중 약자부터 구하는 게 원칙임을 되새기라. 폭풍우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원칙을 제대로 세워둬야 한다.

허진석 산업2부장 jameshuh@donga.com
#약자#구조#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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