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인 직장인 A 씨가 ‘탈팡(쿠팡 탈퇴)’을 실행에 옮긴 것은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사태 초기 그는 ‘개인정보가 한두 번 털린 것도 아니고, 쿠팡은 큰 기업이니 잘 대응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사안으로 쿠팡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A 씨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 같다.
잘 참고 있던 A 씨를 한순간 돌변하게 만든 건 쿠팡의 ‘공지문’이었다.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사고에 관해 재안내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띄웠다. 통상 이 정도 사태라면 제목이 ‘개인정보 유출사고에 대해 사과드립니다’가 돼야 할 텐데 그게 아니었다.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이 공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경찰청의 요청에 따른 조치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A 씨는 폭발했다. 중요 표시(※)까지 해 둔 마지막 문장을 ‘쿠팡은 여전히 사과할 의사가 없으며 정부 기관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공지문을 올렸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쿠팡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크다고 했다. 화가 난 A 씨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감내하고 결국 탈팡족이 됐다. 위중한 사태에 가벼운 꼼수 대응 반복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일으킨 기업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것이 탈팡의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늘어나고 있는 많은 탈팡족들은 그런 대의(大義)를 앞세우기보다는 쿠팡의 꼼수에 분노했다고 얘기한다. 이번 사태를 대하는 쿠팡의 대응 방식이나 태도가 오히려 화를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 게 한두 건이 아니다.
쿠팡은 사태 초기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유출’이 아닌 ‘노출’이라고 표현했다. 잘못이나 실수로 개인정보가 밖으로 흘러나간 게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드러나면서 보여지게 됐다는 뜻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전형적인 꼼수다.
사과문을 앱과 홈페이지에 게시했다가 사흘 만에 내리고 그 자리에 크리스마스 세일 광고를 넣은 것도 그렇다. 사태를 바라보는 쿠팡의 본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며칠 지나면 끝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국회에서 열린 긴급 현안질의에서 박대준 쿠팡 대표가 쿠팡 창업주이자 실질적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 올해 한국에서 만난 적이 없다”고 답변한 것도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한국 대표가 사과하면 된다는 것이 쿠팡의 논리지만 국민 정서와는 너무 동떨어졌다. 고객들의 탈팡 이유 거창하지 않아
쿠팡 탈퇴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 것도 꼼수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쿠팡에 월회비 7890원을 내고 와우 멤버십을 이용하는 고객은 즉시 탈퇴도 불가능하다. 잔여기간이 지난 뒤에야 탈퇴 신청이 가능하다. 유선 전화로 상담사에게 멤버십 해지와 탈퇴를 요청하면 되는데 이후 쿠팡 내부 심사까지 거쳐야 한다.
대기업 쿠팡의 대응이 이처럼 미숙한 것은 쿠팡이 가진 여러 이중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에서 돈을 벌고 있지만 미국에 상장된 미국 회사라는 점, 모든 권한은 김범석 의장이 가지고 있지만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또 몸집은 초거대 기업으로 커졌는데 회사 운영 마인드는 스타트업 수준이라는 것도 이중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쿠팡은 단순한 온라인 쇼핑 플랫폼을 넘어섰다. 한국인의 일상을 바꿔놓은 새로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김범석 의장의 목표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이런 위상에 맞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미국 회사, 미국인, 스타트업이라는 이중적 요인들을 배제하고 한국 고객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 시작은 김범석 의장의 진심이 담긴 사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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