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괄식으로 말하고 쓰라고 배웠건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지막에 꺼내게 되는 건 좀처럼 고쳐지질 않는군요. 처음 중고거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묻고 싶었던 건, 중고거래에 내놓은 건 나 자신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었던 듯합니다. 호기심이기도 했지요.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던가 봅니다. 우연히 한 남성 작가가 쓴 에세이집을 발견했어요. 중고거래, 당근마켓을 소재로 한 에세이집이었어요. 지극히, 때로는 극단적으로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MZ들과의 대면, 윤리적인 쇼핑이 겉멋이 아니라 자부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증거들, 당근거래에서 지인을 만났을 때의 처신과 사기꾼을 만났을 때의 대처 등, 조금씩 비슷하고 조금씩 다른 거래의 경험들. 하지만 그의 글은 어딘지 우울하면서도 순간순간 비장함과 결연함의 연주 기호를 따른 마단조의 폴로네이즈 같았어요.
작가는 중고시장이라는 새로운 유니버스에서 가격이 매겨지는 물건에 자신을 투사하고 시장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강박을 갖고 있음을 털어놓습니다. 중고로 나온 물건들을 안쓰럽게 여기기도 하고 나는 세상에 또는 누군가에게 유용한가 질문합니다. 작가는 나름 인기 프리랜서로 끊임없이 시장의 평가를 받는 입장이니까, 당근마켓에 나온 유행 지난 가방에 공감하고 그들의 성실함을 치하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군, 역시 예술가는 다르네,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그런데 중고거래를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할 때마다 그의 우울한 폴로네이즈가 귓가에 맴돌곤 했습니다. 내가 하려던 얘기가 결국 그것이었나. 저는 예술가도, 프리랜서도 아니고 그저 퇴근 후 집에서 중고거래하는 재미를 찾은 직장인일 뿐인데 말이죠.
중고거래는 별일 없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 결과였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별일 없어, 잘 지내”라고 안부를 말할 수 있도록 내 일과와 시간을 단순하게 하고 싶었어요. 잃어버리거나 잊을 것들은 미리 없애고,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적 여유를 얻고 싶었답니다. 그리고 첫번째 중고 거래를 하자마자 이것이 단순히 ‘물건 비우기’가 아니라 어떤 전환점, 좀 과장하면 특이점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도로의 유턴처럼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길로의 진입이 가능한 출구가 될 것이라는 것을요.
중고거래 에세이 작가가 스스로를 중고거래 물품과 동일시한 이유는 물건을 거래할 때마다 나의 취향, 나의 추억, 나 자신의 가격을 시장 가격으로 평가해야 하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나의 결혼을 기념한 아름다운 반지라도 중고거래에서는 오늘의 글로벌 금시세로 가격이 정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10년 동안 아껴서 잘 사용한 의자라면 판매보다는 ‘나눔’이 적당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거든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보는 이에 따라 감상평이 아주 다른데, 극강의 성실함에 상위 5% 정도의 행운이 더해진 사람이 직장 생활을 종료하면 빚도 없지만 가진 것도 없는 상태로 ‘리셋’된다는 것이 내가 본 드라마의 결론입니다. 이 드라마가 비극 혹은 블랙코미디의 빛을 띠는 것은 중고 시장에서의 ‘나’와 드라마에서 ‘비대한 자아’라고 불리는 나 사이의 엄청난 괴리 때문일 겁니다. 마라톤 완주 이력을 내세우면서 7년 신은 운동화에 프리미엄을 얹어 당근마켓에 내놓은 상황이랄까요. 하지만 운동화는 운동화일뿐이에요.
중고거래의 경험은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내가 경청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기소개서에도, SNS에도 쓰지 않았던 솔직함으로 물건을 구입할 때의 경제적 심리적 상황, 내가 사랑한 색과 패턴과 질감, 그것이 절실했던 이유와 그 사이의 변화, 그것으로 인해 반짝거린 기억, 심지어 나와 가족에게 미친 영향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의 물건을 떠나보냅니다. 물건에 쌓인 추억을 거둬들이고, 물건으로 이어졌던 사람들과 헤어집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루이즈 부르주아가 조소했던 세계와 이별을 고합니다. 대신 자유로운 공간을 얻고 길고양이를 힘써 돌보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납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도 좋겠습니다. 유턴을 하려면 언제나 결단과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길로 들어선 내가, 이제야 마음에 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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