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중국 것이 내 것보다 그리 소중한가?” 한 청년의 외침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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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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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이라는 것이올시다. 이는 조선 제4대 세종대왕께서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조력하게 하시고 1443년,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에 지으셔서 3년 뒤 내외에 반포하신 것이외다. 이 글을 오늘 우리가 언문 또는 반절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다 후세 사람들이 스스로를 모멸하고 비하하는 명칭이외다.”

28세 청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 청년은 일본 교토(京都) 유학생학우회가 1922년 7월 18일부터 시작한 여름철 순회강좌의 강사 중 한 명이었죠. 이름은 최현배. 손꼽히는 한글학자로 업적을 남긴 외솔 최현배입니다. 청년 최현배는 주변의 권유로 강연 내용을 동아일보에 기고했죠. 같은 해 8월 29일부터 9월 23일까지 23회 연재된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입니다. 최현배의 생각이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었죠.

최현배는 우리글이 이두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해 훈민정음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막강한 적이 쳐들어왔다고 했죠. 삼국시대부터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한자였습니다. 한자가 성행하자 우리말은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됐죠. 급기야 우리 고유의 성(姓)까지 한자식 성에 밀려났다고 했습니다. 어릴 땐 우리말로 이름을 부르다 커서는 한자를 써야 어른답게 여길 정도가 됐다는 것이죠. 민족의 본체를 잃어버린 꼴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위는 최현배가 1922년 8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여름철 순회강좌의 강연을 그대로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아래 ①은 최현배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모습이고 ②와 ③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시절의 모습으로 
보인다. ①과 ③은 손자 최홍식 외솔회 명예이사장 제공 ②는 외솔기념관 제공
위는 최현배가 1922년 8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우리말과 글에 대하여'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다. 여름철 순회강좌의 강연을 그대로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아래 ①은 최현배의 경성고등보통학교 때 모습이고 ②와 ③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시절의 모습으로 보인다. ①과 ③은 손자 최홍식 외솔회 명예이사장 제공 ②는 외솔기념관 제공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함께 한자를 극단적으로 떠받들어 우리말이 심하게 멸시를 당했다고 했죠. 같은 뜻의 말이라도 한자로 하면 존경심이 배어 있고 우리말로 하면 경멸감이 스며있다고 여길 지경이었다는 겁니다. 이러니 반만년이나 써온 우리말을 연구하지도 않고 500년 가까이 써내려온 우리글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죠. 그 사이 단어는 줄어들고 통일성도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하늘’ 단어가 무려 30가지로 달리 표기되는 실정이라고 했죠.

프랑스 외교관 카미유 앵보위아르가 한불사전과 문법책을 펴낸 때가 1873년. 주시경이 국어문전음학을 발간한 때는 1908년이었습니다. 35년 뒤였죠. 우리가 집안일을 잊어버리고 얼마나 늦잠을 잤는지 거론한 사례였습니다. 파묻힌 보석, 녹슨 보검 같은 우리말과 글을 파내서 닦아야 할 때라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말로 가르쳐야 하고 청년이 앞장서라고 호소했죠. 모화사상과 제 것 경시 풍조를 비판하면서 우리말과 글을 없애고 창씨개명까지 강제하려는 일제의 속성도 드러냈습니다.

왼쪽 위는 최현배가 제시한 한글 흘림글씨(인쇄체) 35자로 작은 글자와 큰 글자로 각각 나누었다. 왼쪽 아래는 흘림글씨로 쓴 문장
 시안이다. 연재가 끝난 지 20일쯤 뒤인 10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었다. 지금 보면 낯설기도 한데다 인쇄상태도 좋지 
않아 해독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ㄱ) (ㄴ) (ㄷ) 각 문장의 뜻은 오른쪽과 같다.
왼쪽 위는 최현배가 제시한 한글 흘림글씨(인쇄체) 35자로 작은 글자와 큰 글자로 각각 나누었다. 왼쪽 아래는 흘림글씨로 쓴 문장 시안이다. 연재가 끝난 지 20일쯤 뒤인 10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었다. 지금 보면 낯설기도 한데다 인쇄상태도 좋지 않아 해독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ㄱ) (ㄴ) (ㄷ) 각 문장의 뜻은 오른쪽과 같다.


최현배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913년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 고등과를 졸업했습니다. 주시경과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였죠. 다섯 살 위로 강습원 동기생이자 주시경의 공동 수제자로 꼽혔던 김두봉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뒤 북한을 선택해 길이 갈리고 말았죠. 최현배는 그동안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부터 동래보통학교 교사로 일합니다. 2년 뒤 교토제국대학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대학원까지 다닌 뒤 34세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죠. 그가 교수 첫 해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무려 65회 동아일보에 연재해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은 유명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한글학자를 뛰어넘는 민족사상가인 근거입니다.

특히 청년 최현배의 동아일보 기고를 보면 놀랍게도 이미 이후 연구의 틀이 거의 잡힌 상태였죠. 스승 주시경처럼 한글전용을 주창한 그는 ‘좋은 글씨’의 핵심요소를 ‘가로쓰기’ ‘풀어쓰기’라고 했죠. 풀어쓰기는 ‘국’을 ‘ㄱㅜㄱ’처럼 쓰는 겁니다. 풀어쓰기를 ‘가로씨기’로 표현했죠. 그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진행되던 ‘국자(國字)개량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한글 자음과 모음 35자를 새로 개발했습니다. 이를 박음글씨(인쇄체)와 흘림글씨(필기체)로 각각 나눴고 흘림글씨로 쓴 문장은 직접 시안을 제시하기도 했죠. 그의 구상이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변용되어 가는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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