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고무신 장사 이명근은 2일 하오 11시부터 3일 새벽 사이에 문을 열고 자다가 고무신 80켤레, 시가 70원어치를 잃어버렸다더라.’
‘김병도는 지난달 그믐 대전 축출 상점에서 주인의 심부름이라고 속이고 고무신 2원짜리 한 켤레와 각종 물건 수십 원어치를 사취했던 바…’
1920년대 초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들입니다. 신문엔 이밖에도 고무신 절도사건이 종종 등장했죠. ‘고무경제화’, ‘호모화’로도 불렸던 고무신이 얼마나 인기 있는 ‘잇템’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910년대 후반인데, 처음부터 잘 팔리진 않았습니다. 바닥창만 고무고 나머지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구두 모양이라 낯설었던 것이었을까요? 그때 이병두라는 걸출한 실업가가 나타납니다. 평양의 일본인 잡화상 사환이었던 그는 고무신이 되겠다 싶어 독립해 일본에서 물건을 떼어 팔다 투자자를 구해 아예 공장을 세우죠. 그리고 1920년 봄 남자 고무신은 짚신과 비슷하게, 여자 고무신은 앞이 뾰족한 코신 모양으로 만든 조선식 고무신을 개발해 대박을 터뜨립니다.
이후 고무신 시장은 불편하고 내구성도 형편없는 짚신과 미투리를 대체하며 급속히 팽창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고무신 공장을 세웠죠. 대표주자는 중추원 고문 이하영의 대륙고무였습니다. 일본인과 친일파들을 대거 끌어들여 1922년 자본금 규모 50만 원(현재가치 약 50억 원)의 주식회사로 커진 대륙고무는 9월부터 광고공세를 펴죠. ‘이왕 전하(순종)께서 어용하심에 황공 감격함을 비롯해 각 궁가의 사용하심을 받들며, 여관 각위의 애용을 받으며…’라면서 왕가에서 신는 고무신임을 내세웠습니다. 그러자 만월표 고무신은 ‘이강 전하(의친왕)가 손수 고르셔서 신고 계시는’ 신발이라고 맞불을 놓았습니다. 고종의 둘째 왕자이자 순종의 아우로, 반일 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을 모델 삼아 민족감정에 호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발업체인 경성직뉴는 품질을 강조하며 차별화했습니다. 훗날 삼양그룹을 창업한 이 회사 전무 김연수는 공장 숙직실에서 먹고 자며 공정과 원료를 혁신한 끝에 1923년 별표 고무신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해 4월 ‘반 개년 보증’이라는 회심의 무기를 내놓았죠. ‘값싼 물품은 우리에게 손해’라는 문구로 고가(高價) 전략도 병행했습니다. 2년 뒤에는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 고무는 찢어지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광고카피와 보급용 세컨드 브랜드, 부채표 고무신를 선보이는 현대적 마케팅으로 선두주자들을 단숨에 추월했습니다.
하지만 고무신 열풍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짙었습니다. 우선 실업입니다. 동아일보는 1922년 8월 11일자 ‘조선 신발상인을 위협하는 근래 유행하는 고무경제화’라는 기사에서 경성시내에서만 조선 신 제조직공 500여 명이 실직해 생활의 방도가 없고, 전 조선으로 보면 일을 잃은 사람이 몇 만일지 헤아리기 어렵다고 우려했죠. 더운 여름 맨발에 고무신만 신어 종기가 생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충남 보은과 천안, 전남 무안 등지에선 고무신 살 돈을 아껴 농촌생활 개량과 학교 건설에 쓰자는 민족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고무신 공장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여러 차례 사회문제가 됐습니다. 무한경쟁으로 수익성이 악화된 업체들이 임금을 삭감하자 1923년 7월 경성 여자 고무직공들은 아사(餓死)파업을 벌였고, 1931년 평양에선 평원고무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사측이 전원해고 강수를 둬 한 여공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해 화제가 됐죠. 2년 뒤 부산에서는 동맹파업에 나선 고무 노동자들이 조업을 강행한 업체로 몰려가 동조파업을 호소하다 경찰과 충돌한 일도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무신은 1920년 4000원이던 생산액이 1935년에는 2460배인 984만5000원으로 폭증하며 조선 신발시장을 장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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