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드리나 강의 다리’… 보스니아 ‘피의 역사’

  • 입력 2005년 3월 11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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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앞에 서 있는 작가 이보 안드리치. 13일은 그가 사망한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드리나 강의 다리 앞에 서 있는 작가 이보 안드리치. 13일은 그가 사망한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드리나 강의 다리/이보 안드리치 지음·김지향 옮김/488쪽·1만5000원·문학과지성사

이보 안드리치(1892∼1975)는 196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작가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보다 한 해 빨리 수상했다. 그의 수상작인 ‘드리나 강의 다리’는 한국에서 영역본이 두 차례 번역된 적이 있다. 이번 책은 그가 원래 썼던 세르비아어 판을 처음 번역한 것이다.

안드리치는 외교관으로 오래 일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일하다가 1941년 4월 베오그라드로 돌아왔는데 몇 시간 뒤 독일의 공습이 시작됐다. 그는 베오그라드를 장악한 독일군에 의해 가택 연금된 채 ‘보스니아 3부작’을 써서 4년 후 한꺼번에 발표했다. 바로 ‘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다.

그는 트라브니크에서 태어나 비셰그라드와 사라예보에서 자랐다. 이들이 있는 보스니아에는 이슬람교도들, 가톨릭 신자들(크로아티아인), 정교도들(세르비아인), 유대인들이 섞여 산다. 종교 인종 문화의 갈등이 늘 있다. 오스만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침략을 대대로 받아온 역사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스니아가 자리한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고 있다.

이런 얼룩진 역사를 지켜본 것이 비셰그라드를 지나는 드리나 강의 다리다. 안드리치는 비셰그라드에서 자라던 무렵 매일같이 이 다리를 가로질러 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들었던 전설과 사연들, 보았던 풍정(風情)과 사건들을 상상력의 다리(橋)로 연결해 만든 소설이 이 작품이다. 어떤 주인공도 내세우지 않은 채 드리나 강의 다리에 얽힌 400여 년의 세월을,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은 24개 장에 펼쳐 놓았다.

오스만튀르크의 대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가 드리나 강의 다리를 지으라고 지시한다. 그는 보스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열 살 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오스만튀르크에 노예처럼 끌려갔다가 ‘출세’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 든 뒤에도 까닭 모를 고통이 사라지지 않자 이 강의 다리로 보스니아와 오스만튀르크를 지리적으로 이어보려 한 것이다. 다리를 세우면서 어린 쌍둥이 남매를 교각에 산 채로 파묻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리 이쪽과 저쪽에 사는, 종교가 다른 청년과 처녀가 사랑하지만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과 처녀가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리를 건너면 부모들도 승복해야 한다는 관습에 운명을 맡기지만 비극이 발생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인들이 이 다리의 교각을 파고 폭약을 묻는다. 과연 다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시원시원하면서도 움직임과 여운이 많은 이야기들이 큰 작품임을 실감하게 한다.

책을 번역한 한국외국어대 외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인 김지향(35) 씨는 베오그라드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작가인 다닐로 키쉬의 ‘안디의 벨벳 앨범’이라는 작품을 1999년 번역했다. 세르비아어로 쓰인 작품이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그 책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번 책 옮긴이의 말에서 “안드리치가 시대성을 살리기 위해 오스만튀르크 지배 시절 쓰였던 이슬람 말들을 그대로 쓰고 있어 애먹었다”고 밝혔다. 한국 번역문학의 세계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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