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조경란 두번째 창작집 '나의 자줏빛 소파'

  • 입력 2000년 5월 5일 20시 04분


▼'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지음/문학과지성 펴냄▼

조경란(31)의 두 번째 창작집 ‘나의 자줏빛 소파’(문학과지성)가 내주 나온다. 98년 봄부터 올해 봄까지 계간지를 통해 발표된 9편의 단편을 묶은 것이다. 이상문학상 후보작이었던 ‘나의 자줏빛 소파’, 동인문학상 후보작이었던 ‘녹색광선’ 등이 실렸다.

데뷔때부터 작가는 홍상수의 영화처럼 사회와 절연된 인간이 보여주는 세밀한 행태에 주목해왔다. 이번에도 단자화된 인간을 통해서 소통단절 시대의 비의를 드러내려는 의지가 읽힌다. 마치 미소 원자를 통해서 무한 우주의 비밀을 밝히려는 과학자처럼.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타인과 교통하지 못한채 고립을 견디는 인물들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다음날 단수 때문에 집안에서 온몸을 웅크리고 있거나(‘녹색광선’), 수 차례 연애를 실패한 뒤에 주위사람 대부분을 속절없이 떠나보낸다(‘식물들’). 모든 관계가 차단된 가운데 그나마 말벗이 되어줬던 애완견마저 죽어가자 고통에 젖어든다(‘아주 뜨거운 차 한 잔’).

만남이 있지만 서로 차가운 손을 덥썩 잡아주지 못한 채 어긋날 운명이다. 이로인해 상처입은 여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운명과 운명이 만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서로를 지나치기도 합니다’(‘나의 자줏빛 소파’). 얼핏보면 통유리 뒤에서 자폐감을 견디던 ‘불란서 안경원’(96년 데뷔작) 여주인공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근작들로 올수록 주인공들에겐 희망의 기미가 엿보인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암시로 머물지만 힘겨운 소통의 몸짓을 보여준다. 가상의 교통을 통해 위안을 주고받는 익명의 편지속에 자신의 본명을 밝히거나(‘나의 자줏빛 소파’), 몇 해전 떠난 애인을 떠올리는 전화안내원을 무턱대고 찾아가는 행위(‘녹색광선’) 등에서 절망의 살거죽에 감춰진 미세한 희망의 맥박이 감지된다. 특히 최근작 ‘망원경’ 의미심장한 단서가 발견된다. 어둠속에 타인의 생활을 정찰했던 여주인공이 망원경을 통해 당당하게 태양을 응시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다.

이번 작품집에는 초창기부터 주목받아온 작가의 장기가 한껏 무르익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속의 사소한 기미를 언어의 그물로 포획해내는 예민함, 압축과 상징으로 농밀해진 문장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 감정 과잉 없는 건조한 언어속에 따뜻한 속살을 감춘 빼어난 문장 같은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서사의 빈약, 일상너머의 무관심, 탐미적 문체주의 같은 약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집을 “문학적으로 한 시기를 정리하는 매듭”이라고 자평했다. 초기작이 극단과 탐미로 치달았다면 이젠 성숙과 포용의 너른 품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앞으로 소통하고 싶은 데 소통할 수 없는 것들, 다가가고 싶은데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서로 맺어주고 싶다”.

한영애의 노래처럼, 그래도 희망은 너와 내가 손잡은 사람에게 걸 수 밖에.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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