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전' 역사-역대국수] 東亞日報와 함께한 國手戰 43년

  • 입력 2000년 2월 23일 00시 30분


우리 선조들은 면(面)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이를 면기(面棋)라고 불렀다. 또 군(郡)의 1인자를 행기(行棋), 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도기(道棋), 나라의 으뜸을 국수(國手)라 칭했다.

그러나 ‘국수’ 칭호는 바둑의 실력만 갖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이름에는 격조 높은 명인예(名人藝)와 장인 의식,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이 숨쉬고 있었다. 그래서 국수의 계보는 곧바로 한국 바둑의 계보로 인정됐다.

동아일보 주최로 1956년 출발한 국수전은 올해 43기를 마치고 곧 44기로 돌입한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50년대 중반은 모든 분야에서 먹고 살기에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바둑이야. 바로 그런 때에 국수전이 탄생한 것이다. 국수전의 탄생은 동시에 우리 바둑계 첫 프로기전의 출범이기도 했다. 20세기 바둑의 선진국임을 자처하던 일본 바둑이 80년대까지 세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1938년 창설된 프로기전인 혼인보(本因坊)전이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의 오랜 역사를 지닌 국내 바둑계는 20세기 들어 현대 바둑이 유행하면서 일본 바둑계에 비해 열세에 있었다. 동아일보는 국내 바둑계의 첫 프로기전인 국수전을 탄생시킴으로써 바둑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으며, 기사들 사이에 경쟁을 유도해 국내 바둑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국수전 개최에 앞장서 국내 바둑 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 이후 국내에는 각종 기전이 활발하게 창설됐다. 특히 제2기 국수전은 라디오로 중계되어 기사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바둑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제 고작 50년의 프로 바둑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바둑이 사실상 국가에서 ‘녹(祿)’을 받으며 500년간 유지돼온 일본의 프로바둑을 제치고 단숨에 세계 최강으로 발돋움한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43년 전통의 국수전이 밑거름이 됐다.

전통은 권위를 잉태하고, 권위와 전통은 명예를 낳는다. 그러기에 국수란 칭호는 모든 기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초대 국수에 올라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조남철 9단은 한국 바둑의 태두인 동시에 씨앗을 뿌린 개척자였다. 조 9단은 일본에 바둑유학을 다녀온 뒤 1945년 ‘한성기원’을 설립하고 바둑보급에 힘을 쏟았다. 뒤를 이어 1965년 조남철 9단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70년까지 6연패한 김인 9단은 한국 바둑의 줄기를 세운 국수였다.

3대 윤기현 9단과 4대 하찬석 국수에 이어 70년대 중반 국수위에 오른 5대 조훈현 9단은 우리 바둑의 중흥을 이끄는 한편 한국 바둑을 일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등으로 이어지는 국수들은 한국 바둑을 질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토종바둑’을 대표하는 6대 서봉수 9단에 이어 현재 세계 1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창호 9단이 90년 7대 국수로 등극하면서 화려한 이창호 시대를 열었다.

이방인인 루이나이웨이 9단이 국수에 오른 것은 이제 국수전이 한국 바둑에 국한된 기전이 아닌 세계 바둑의 메이저로 우뚝 섰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첫 여성 국수의 등장은 21세기에 불어닥치고 있는 ‘반상의 성(性)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조훈현 이창호9단은 국수위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자신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루이 9단도 국수위 타이틀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전성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하다.

정동식<한국기원기사·본지 바둑해설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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