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인간 실존의 위대함[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5-10 03:00수정 2021-05-1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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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시시포스 신화
그리스 신화에는 신에게 감히 도전한 이들이 나온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유혹한 익시온,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프로메테우스의 증손자답게 죽음의 신을 능멸한 시시포스, 아들 펠롭스를 삶아서 신에게 거짓 대접하려고 한 탄탈로스. 19세기에 출판된 호라티우스 작품집 속 삽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 불온한 삼인방은 각기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익시온은 불붙은 수레를 영원히 끌게 되었고, 탄탈로스는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영원히 먹고 마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시시포스는 지하세계에서 하염없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 삼인방 중에서 시시포스가 그림의 역사에서 누리는 생명력은 인상적이다. 먼저 기원전 510년경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 저장 용기, 암포라(amphora)를 보자. 맨 오른쪽에 가파른 언덕 위로 검은 돌을 굴려 올리고 있는 시시포스를 발견할 수 있다. 그로 인해서, 이 그림의 배경이 지하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지하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맨 오른쪽에 흰 턱수염을 한 이가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신 하데스라는 것도 간취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상의 신들은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희희낙락하며 날들을 보낸다. 반면, 하데스는 지하에서 고독하고 어두운 나날들을 보내야 한다. 그러던 하데스는 어느 날 수선화를 따러 나온 곡물의 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왕비로 삼는다. 화가 난 데메테르의 강력한 요구로, 페르세포네는 1년 중 3분의 2는 어머니와 함께 지상 생활을 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지하에서 하데스와 보내게 된다. 페르세포네가 지하로 돌아갈 때가 되면, 데메테르가 근심해서 추운 겨울이 오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가 되면 데메테르가 기뻐서 화창한 봄이 온다. 암포라 그림 한가운데서 곡물신의 딸답게 곡물을 들고 서 있는 이가 바로 페르세포네이다.

신화 세계의 주인공이던 시시포스는 어느덧 인간세계를 묘사하는 데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며 3000여 점의 판화를 제작한 판화가 얀 뤼켄의 1689년 작품을 보자. 여기서 시시포스 이미지는 인간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돌 굴리는 이가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보통 인간들이라는 사실은, 복수의 사람들이 돌을 굴리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게다가 그림 배경에 묘사된 햇볕은 이곳이 시시포스가 돌을 굴리던 지하세계가 아니라 인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상 세계임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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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햇볕은 뒤에서만 화창할 뿐 그림 전면부는 여전히 어둡다. 인간들이 고단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세계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에는 화창한 날씨 속에서 사냥을 즐기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인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이 인간세계를 한층 더 어두운 곳으로 만든다. 즉 고단한 노역이 인간을 괴롭힐 뿐 아니라, 노역을 면제받은 타인이 취하는 휴식이 한층 더 그 세계를 어둡게 만든다. 돌 굴리는 사람들은 자문할지 모른다. 왜 이 고통의 공동체에서 저들만 예외가 될 수 있는가, 모두 휴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면 차라리 모두 노역하는 세계를 다오. 이렇게 묻는 그들의 마음은 세계만큼이나 어둡다.

얀 뤼켄은 돌 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는 시시포스가 무거운 돌을 밀어 올릴 때 짓는 어두운 표정과 불거진 근육에 집중했다. 그러나 얀 뤼켄은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것은 얀 뤼켄이 노역의 고단함뿐 아니라, 노역의 덧없음에도 주목했음을 보여준다.

돌이 그렇게 덧없이 굴러 떨어진 뒤 터덜터덜 다시 걸어 내려와야 하는 과정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총아 알베르 카뮈다.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는 시시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탐구한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이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 걸어내려 올 수 있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함이 있다.

21세기가 되었어도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끝을 모르는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연장되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해방할지도 모른다. 늘어난 여가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창출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간은 마침내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돌을 산정에 올려다 놓고 시야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만 감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없어진 인간에게는 권태가 엄습하기 마련.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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