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경민/국제위기기구의 역사인식 위기

  • 입력 2005년 12월 17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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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과 유대인의 전후세대 간에는 나치 만행에 대한 말을 더는 꺼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그만큼 성실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종전 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면서 “나치의 만행 사실을 훗날 집어넣자”는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역사로 기술되었다. 이 조치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이 조상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발판을 마련해 주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북아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인해 종전 60년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도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피해국 국민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한술 더 떠 최근에는 국제분쟁을 연구하는 국제위기기구(ICG)가 자체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국교 정상화 협약에 따라 일본이 제공한 경제 지원에 감사하라”는 무지한 주장을 해 멍든 가슴을 또 한 번 무너져 내리게 했다. 국교 정상화에 따른 경제협력자금 6억 달러는 36년간의 불법적 식민 지배에 대한 최소한의 배상이었다. 그런데 감사하라니 말이나 되는 주장인가?

이 밖에도 “현존하는 모든 국경 관련 협약을 준수하고 그 기반 위에서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을 천명하라”,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위한 기금을 한국 정부가 설치하라”는 등의 황당한 권고들이 포함돼 있는데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지지하는 듯한 성격으로 무심코 넘어갈 일이 아니다.

한일 관계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중재한 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 원내총무, 발칸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한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등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정재계 인사 50여 명이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ICG의 주장이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국제분쟁을 연구하는 저명한 국제기구 ICG가 이 모양인데 여타 국제기구나 단체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런 현실이니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더욱 당당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외교 노력을 재점검할 시점이다. 외교통상부는 ICG의 잘못된 사실 인식이 시정되도록 외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차제에 우리 정부는 일본에 양보할 수 없는 세 가지 사안인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대외 홍보를 적극적으로 펼쳐 한일 관계에 대한 국제사회의 역사 인식이 올바로 정립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하겠다. 반미 데모 등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 국민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미국 내 영향력 있는 민간 홍보 네트워크를 활용하려는 외교부의 홍보 계획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60년이나 질질 끌고 있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사안이기에 중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내년 9월로 임기가 끝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되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이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은 고이즈미 총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과거사 반성에 인색한 인물들이다. 걱정스러운 일은 일본 지도자들의 이러한 외교 행보에 일본 국민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치렀던 세대가 사라지면서 전후 세대들은 가능하면 역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은 날이 갈수록 절박해진다. 한일 관계뿐 아니라 중일 관계를 봐도 그렇지만 ‘역사 인식의 문제’는 ‘평화의 문제’이다.

김경민 한양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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