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주말, 자전거를 타며

  • 입력 2005년 10월 15일 03시 04분


코멘트
토요일 오전에 운동 삼아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서울 잠실나루까지 자전거를 탄다. 탄천 산책로를 따라 왕복 45km 정도 되는데, 사철 풍경과 더불어 오가며 마주치는 이들의 이야기에 솔깃해질 때가 많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우리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에 따르면 공적(公的) 발언대보다 개인 간 사교적 담화가 더 자유롭고 솔직해 여론의 기초가 된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잠실나루에 도착한 뒤 인근 ‘버스 식당’에서 우동을 먹으려다 한 장년과 합석하게 됐다. 선글라스에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은 그는 휴대전화로 친구를 불렀다. 친구도 인근을 지나는 길이어서 10여 분 만에 옆자리에 앉았는데 여자 분이었다.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어제 인터넷에 올린 글 봤냐. 왜 댓글이 없냐?” “못 봤는데, 지난번에 올린 것은 시(詩) 같더라. 아직 늙지 않았더구먼.” “사진도 올리고 싶은데 마우스 오른쪽을 눌러 어떻게 하면 된다는데 도통 안 돼. 쉬운 방법 없냐.”

이런 이야기가 오가기에 직업의식이 발동해 “재미있게 사시네요” 하며 끼어들었다. 두 분은 45년생 동갑으로 8월에 KBS ‘광복 60주년 특집 해방둥이 도전 골든벨’에 나간 것을 계기로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모임을 갖는다고 했다.

두 분은 “인터넷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는데 젊은이보다 우리가 인터넷 사용 시간이 많을 것”이라며 “자식보다 우리 이야기를 더 하고 정치는 골치 아파서 아예 피한다”고 말했다.

탄천변을 오가는 ‘주말객’들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 다리 밑이다. 여러 개의 다리가 그늘을 제공하는데 달리기를 하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다 쉬어 가려는 이들이 늘 모여 있다.

50대로 보이는 세 분의 말을 듣게 됐다. 최근 삼성을 둘러싼 논란이 소재였다. “삼성이 본사를 옮기면 어떨까.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왜 여기서 혼나?” “이 사람아, 쉰이 넘었으면 극단적인 소리를 하는 게 아냐. 그 일을 처리해 가는 정권이 지혜가 모자라 그런 거지 (삼성의) 문제도 없진 않아.” “아냐, 요즘 시민단체들은 무슨 왕벼슬 같아.”

기자는 귀를 더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삼성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지난 학기에 대학에 수시 합격한 딸이 화제가 됐다.

다시 페달을 밟다가 두 명의 장년 여성이 앉은 벤치로 갔다. 두 분은 ‘노년 참살이(웰빙)’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건강이 안 좋아 의욕이 없어. 장가 안 간 아들 때문에 걱정도 많고. 서른세 살이나 됐는데. 빨리 치우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아야 하는데….” “아이고! 서른세 살은 선생님이네. 우리 아들은 서른일곱인데도 여태 혼자가 좋대. 모아 놓은 돈도 없는데….”

주말 자전거 타기에서 듣는 이야기들은 이처럼 삶과 닿아 있었다. 연정이나 과거사 청산 같은 거대 담론을 말하는 이는 보지 못했다. ‘다리 밑 대화’를 듣다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이념 등으로 ‘사납게’ 갈등을 일으키는 이들이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정치권에서 여론을 탓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는 주말에 자전거를 한번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민심의 울림이 머리를 흔든다. 10만 원이면 자전거 한 대 장만할 수 있다.

허엽 위크엔드 팀장 he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