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소수, 그리고 소주

  • 입력 2005년 6월 2일 03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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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소수 인종이 미국의 선거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 미국인은 미국인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4월 28일 미국 뉴저지 주 남부 라디오 방송인 ‘101.5 FM’의 생방송에서 나온 발언이다. 인기 프로그램인 ‘저지 가이스(Jersey Guys)’의 백인 진행자가 이 말을 했다.

이 발언은 뉴저지 주 에디슨(Edison) 시의 민주당 시장 후보 경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로 떠오른 한국계 ‘준 초이(Jun Choi)’를 겨냥한 것이었다.

‘준 초이’는 재미교포 1.5세인 최준희(34) 씨. 서울에서 태어나 3세 때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백인이 60% 이상을 차지하는 인구 10만 명의 에디슨 시 시장 선거에 도전했다. 7일 치러지는 민주당 경선은 11월 본선에 나설 당 후보를 뽑는 선거. 에디슨 시는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민주당 성향이어서 민주당 후보가 거의 자동적으로 시장에 선출된다.

미 연방 공무원과 경제학 교수 출신인 최 씨는 3선의 조지 스파도로(George Spadoro) 현 시장과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맞붙는다.

이 방송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시아계 소수민족의 항의가 이어지고 시민단체도 가세해 방송사의 사과와 진행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방송사 측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거절하면서 내세운 이유가 특이하다. “사과와 징계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것이다.

방송사의 이런 태도는 ‘미국 법의 정신’에 비춰보면 당연하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의 천국’으로 불리지만 그 자유의 이면에는 소수 인종의 설움이 있다. 백인들의 인종차별 발언이나 행위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보호된다.

19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R.A.V.사건’ 판결은 그 자유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이 사건은 미네소타 주의 백인 마을 청소년들이 책상을 부수어 십자가를 만든 뒤 마을에 들어와 사는 흑인 집 마당에 쌓아 놓고 불태운 사건이다. 경찰은 청소년들을 ‘증오언론방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는데, 연방대법원은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완강하던 101.5 FM은 지난달 25일 사과방송을 했다.

방송사가 태도를 바꾼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광고였다. 현대자동차는 이 라디오 방송사의 메이저 광고주였다. 인종차별 방송 이후 현대차는 광고를 중단했고 이어 휴대전화 업체인 ‘싱귤러(Cingular)’도 광고 중단을 선언했다. 자유를 외치던 언론이 자본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의 자유와 자본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과방송에는 ‘준 초이’도 초대됐다. ‘초이’는 문제의 인종비하 발언을 한 진행자에게 한국 소주를 갖다 줬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 구별하지 않고 모여서 소주 마시는 것이 한국의 풍습이란 걸 알려주고 싶었다.”

‘초이’의 선전을 기원한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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