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우승을 부른다.’ 미국 대학 미식축구의 전설적인 감독 폴 브라이언트가 했던 말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공격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수비가 강한 팀은 좀처럼 지지 않는다. 장기 레이스에서 승리 확률이 더 높은 쪽은 후자다. 경기에서도 기울어진 승부를 되돌릴 수 있는 시작은 언제나 수비다. 일단 추가 실점을 막아야 따라갈 기회를 얻는다. 기껏 힘들게 따라가놓고 바로 실점하는 것만큼 맥 빠지는 일도 없다.
2025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에 뽑힌 투수 폰세(한화)가 “한국시리즈 우승이 목표였는데 (LG 중견수) 박해민이 우리 팀을 저지했다”고 말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박해민은 시즌 내내 결정적인 순간 한화 선수들의 안타와 홈런을 훔쳤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1회초 ‘슈퍼캐치’로 한화의 선취점 기회를 무산시켰다. 상대의 적시타를 아웃으로 둔갑시키는 수비는 팀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박해민은 자신이 올해 수비로 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4번 타자에게는 ‘30홈런-100타점’같이 딱 떨어지는 ‘S급’ 수치가 있지만 수비는 여전히 ‘인상평가’에 머물러 있어서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23시즌부터 구단 관계자 투표(75%)와 수비지표 점수(25%)를 반영해 수비상을 주고 있다. 박해민은 2023시즌과 올해 이 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수비지표 점수로도 선수의 수비가치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박해민의 최근 3년간 수비점수는 18.06점→9.72점→20.83점으로 널을 뛰었다. 숫자로 보면 박해민은 수비 기복이 심한 선수다. 올해 2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LG 신민재도 올해 수비지표 점수(8.93점)가 지난해(19.64점)의 반 토막이 나는 바람에 관계자 투표 1위를 하고도 이 상을 못 받았다. 박해민은 “(신)민재 수비 실력이 갑자기 확 떨어진 것도 아닌데 지표가 그렇게 나왔다. 수비에서도 더 공신력 있는 지표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웬만한 공격 관련 통계는 세분화된 2차 지표까지 KBO 홈페이지나 앱에서 클릭 한 번이면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비는 실책 수나 수비율을 제외하면 시상식 때 발표되는 이 수비점수 지표가 사실상 전부다.
이 수비지표를 만든 이유도 수비 실력을 ‘정량화’해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려는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여전히 중견수 박해민의 수비지표를 곧이곧대로 수비가치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좌지우지할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모두가 입을 모으지만 정작 이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숫자는 없는 것이다. 이런 지표가 없으면 연봉 협상이나 자유계약선수(FA) 계약 때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수비력에 대한 가치 반영이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에서 수비가 받는 취급은 집안일이 받는 취급과 비슷하다. 잘해야 기본이고, 못할 때는 욕을 먹는다. 2023년 통계개발원이 2019년 기준으로 계산한 한국의 무급 가사노동 가치는 약 490조9000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25.5%였다.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의 무급노동 덕에 산다. 하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숫자’도 ‘사람’도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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