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신기남과 영화 ‘뮤직박스’

  • 입력 2004년 8월 19일 19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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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탤버트는 미국 동부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아들과 친정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와 함께 유복하게 살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편지 한 장이 날아든다. 아버지가 2차대전 중 헝가리 비밀경찰이었으며, 양민 학살에 가담한 전범이므로 헝가리로 추방돼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법원의 통지서였다. 라즐로는 부인했고, 아버지의 결백을 확신한 앤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승리의 기쁨에 들떴던 앤은 우연히 아버지의 옛 친구 유품에서 뮤직박스 하나를 발견한다. 박스 속에서 비밀경찰 제복을 입고 학살에 가담했던 당시의 아버지 사진이 쏟아져 나온다.

19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의 사퇴 기자회견을 보면서 영화 ‘뮤직박스’(1990)를 떠올렸다. “제 몸에 붙은 흠결이야 밝혔겠지만, 아버지의 일이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에서 ‘아픈 가족사’에 남몰래 시달려온 그의 고뇌가 읽혔다.

하지만 비밀의 뮤직박스가 열린 뒤 영화 속의 앤과 신 전 의장의 행동은 판이했다. 정원에서 무죄판결 축하파티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 앤은 박스에서 나온 사진들을 검사 앞으로 보낸다.

반면 신 전 의장은 지난달 처음 부친의 친일의혹이 제기됐을 때 모친까지 들먹이며 ‘명예훼손’ 운운했다. 16일 오전에는 “친일했던 집안은 3대가 떵떵거린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신동아 보도로 ‘뮤직박스가 완전히 열린’ 16일 오후에도 그는 “(친일의혹을 부인한 것은) 경찰은 아닌데 경찰이라고 해서 부인했다”는 군색한 논리를 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가 19일 사퇴회견에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며 당원들에게 “저의 아픈 가족사를 딛고 역사적 과업을 이루어달라”고 당부한 대목이다.

앤이 결국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를 고발한 것은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신 전 의장의 사퇴회견에 기대한 것은 앤 같은 용기가 아니었다. 다만 거짓말을 시인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적인 모습이 아쉬웠다. 거짓말은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 전 의장 자신의 문제였다.

박제균 정치부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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