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와 尹대통령의 연설 [장관석의 용: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일 1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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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을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처럼 만들어 달라.”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3·1절 기념사를 준비하면서 연설문을 담당하는 참모에게 이같이 주문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는 대규모 공동주택(현대식 아파트) 개념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대표적 건축 양식인 ‘필로티’는 1층을 비우고 벽면 없이 기둥으로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덩어리의 하중을 지지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글에 불필요한 장식물을 떼어내고 논리적 구성을 더 하라는 뜻”이라며 “윤 대통령은 누군가의 말이 중언부언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연설의 목적에 따른 큰 구조를 먼저 생각하고 여기에 메시지를 더해나가면, 연설을 하는 사람도 편안하고 이를 듣는 사람도 연설의 핵심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3·1절 기념사는 당초 참모가 준비해 간 초안보다도 훨씬 더 줄어들었다고 한다. 글자수 1006자(字·공백 제외)에 낭독 시간 5분 25초. 역대 대통령들의 취임 첫 3·1절 기념사들과 비교해도 가장 짧다.
● ‘미래’- ‘협력’ 기둥 세우고 첨가물은 최소화
르코르뷔지에는 윤 대통령 부부에겐 익숙한 인물이다.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전’을 열기도 했다. 윤 대통령 역시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르코르뷔지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문제와 사회적 균형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건축에 있다.”

이 기준에 비춰보면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한일 관계에 대해 ‘미래’와 ‘협력’이라는 큰 기둥을 먼저 세운 다음 메시지를 더했다. 다른 첨가물은 최소화했다. 일제 강점기를 두고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 은유했고, 현안에 대한 구체적 언급도 피했다.

윤 대통령의 취임 후 연설문은 일관된 흐름이 파악된다. 바로 ‘자유’와 ‘연대’다. 기자들조차도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와 연대하고 국제사회에 책임 있게 기여한다”는 연설의 흐름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정도다.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서도 일관되게 펼쳐지는 장면이다.
● 르코르뷔지에 스타일, 어떻게 진화할까
대통령 연설이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간결하다보니 예기치 못한 일들도 빚어진다. 누군가는 “대통령의 연설에 철학이 안 보인다”고도 하고, “자유만 강조하고 다른 가치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5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통합’이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은 점이 대표적이다. 총 2624자의 연설문에서 ‘자유’는 총 35차례 언급되며 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가 된 반면 ‘통합’은 언급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튿날 도어스테핑에서 “취임사에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라고 답한 적도 있다.

이번 3·1절 연설문을 두고도 여러 얘기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세계사의 변화에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는 기념사 발언을 두고 “매국노 이완용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비판한다. 이에 대통령실은 3·1절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우당 이회영(1867∼1932) 아내이자 동지인 독립운동가 이은숙 선생(1889∼1979)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 흐르는 정서를 깊이 참고했다고 반박한다. 이은숙 선생은 남편과 함께 가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흔히들 대통령의 연설은 대통령이 하는 통치와 정치 그 자체라고 한다. 대통령의 말 중에서도 가장 정제되고 가장 응축된 말이 바로 대통령의 연설이다. 여의도 문법에 따른 정치적 화법을 구사하지 않고 ‘르코르뷔지 스타일’ 을 지향하는 윤 대통령의 연설문이 어떻게 진화해나갈지도 대통령실과 여권의 관심거리다. 실제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은 공동 주택, 공장, 미술관, 종교 건축 등 다양하다.  

장관석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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