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임규진/안데스와 코넬대의 규칙

  • 입력 2003년 12월 21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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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안데스산맥에는 수많은 산길이 있다. 어떤 지역의 산길은 폭이 너무 좁아서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갈 수 없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이 마주쳤다고 치자. 누가 지나갈까. 총을 먼저 쏜 사람이란다. 살아남은 한 사람만 산길을 지나는 게 안데스 산길의 규칙이다.

미국 코넬대 부근에는 자동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 이곳에선 2, 3대의 자동차가 그룹을 이뤄 교대로 다리를 건넌다. 한쪽 편에선 기다려주는 것이다. 공생공영(共生共榮)의 규칙이 작동되는 것이다.

만일 코넬대 부근에서 사는 로버트가 다음날 안데스 산길을 걷다가 현지주민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살기 위해선 로버트씨도 총을 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사살당하는 게 그 동네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미국 코넬대 코쉭 바수 교수의 ‘정치경제학’(옥스퍼드출판부, 2000년)에 소개된 사례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안데스식 규칙은 모두를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한번 정해진 게임의 규칙은 개별 경제주체가 좀처럼 바꾸기 어렵다는 점도 깨닫게 한다. 안데스식을 코넬식으로 바꾸려면 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게 바수 교수의 주장이다.

지난 10개월간 노무현 정권하에서 벌어진 게임의 규칙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를 지배한 규칙은 안데스식에 가까웠다는 판단이다.

화물연대 파업만 해도 그렇다. 그야말로 안데스 산길 여행자처럼 벼랑 끝 대결을 벌였다. 화물노동자들은 잘못된 물류업 구조를 고발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산항은 상처를 입었다. 세계적 무역항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 부산항에 기대 사는 화물노동자도 결국에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신용불량자 문제에 적용한 규칙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인기’를 얻기 위해 과감한 빚 탕감에 나섰다가 시장경제의 기본 틀을 뒤흔들었다.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는 반시장의 규칙으로 신용불량자는 오히려 급증하고 수많은 금융기관들은 부실위험에 빠져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우리의 지도자 노 대통령은 무슨 리더십을 보여주었나.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없다. 오히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약자에 대한 배려’를 내세워 안데스 산길의 한쪽 편에 서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대부분의 문제는 산길 반대편 탓이라고 불평하면서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지금까지 총을 쏘아대고 있다. 19일 노사모 모임에서 비쳐진 노 대통령의 모습은 많은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리더십 부재와 안데스식 규칙의 횡행은 투자의욕 상실, 산업공동화, 청년실업 급증, 금융 불안, 부동산 투기, 이민열풍, 자살증가 등 국가적 파탄을 낳고 있다.

노 대통령이 새해에도 올해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선진국 문턱에 온 한국은 뒷걸음질을 치게 될 것이다. 1960년대, 50년대로 되돌아가 지금의 북한 수준으로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의 2세와 3세가 영양실조에 걸리고 일부는 굶어 죽는다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북한 어린이들처럼 말이다.

지금이라도 노 대통령은 중립적 위치에서 좋은 게임 규칙을 만들고 관리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정 못하겠으면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낙향하시라. 우리의 2세와 3세에게 북한 같은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는가.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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